김종경 대기자 | |
조선에 들어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33)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와 같은 학자들이 경관을 즐기며 시를 남기면서 많은 선비들이 찾는 곳이 됐다. 숙종 38년(1712년)에는 반고서원(槃皐書院)이 세워지면서 언양 일대의 선비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더욱이 경주 출신 운암(雲岩) 최신기(崔信基, 1673-1737)가 집청정(集淸亭)이란 정자를 만들자 시인묵객들이 그곳에 머물면서 많은 시문(詩文)을 남겼다. 1600년대 중반에서 1800년대 말까지 300년간에 걸쳐 집청정을 거처간 280여명의 선비들이 지은 390여편의 시를 모아 '집청정시집'이란 이름으로 묶었다. 반구대 주위의 풍광을 읊은 대표적인 시 가운데 하나가 제암(霽巖) 최종겸(崔宗謙,1719-1792)의 '반구십영(盤龜十詠)'이다. 반구대 주위에 있는 집청정과 비래봉(飛來峯), 향로봉(香爐峯), 옥천동(玉泉洞), 포은대(圃隱臺), 선유대(仙遊臺), 관어석(觀魚石), 망선대(望仙臺), 완화계(浣花溪), 청몽루(淸夢樓) 등 열 곳을 오언절구로 읊은 작품이다. '포은대'를 <한 줄기 바람은 그치지 않고/강가에는 낚시터가 남아 있네./돈대 아래에는 물이 넘실거리는데/그 때에 나라를 위하여 근심하였네.>라고 노래했다. <복사꽃이 뜬 시냇물이 흘러가니/어부가 골짜기로 들어 오네./신선은 자취를 감추기 어려워서/무릉(武陵)으로 가는 길을 절로 열어 두네.>라고 반구대 암벽 아래의 '완화계'의 비경을 읊었다. 반구대 뒤편의 '비래봉'에 대해서는 <크고 신통하게 서 있는데/높은 바위라서 반은 구름 속에 들어 있네./봉황(鳳凰)이 너울너울 춤추는 듯하니/개골산에서 날아 왔다고 말하네.>라고 예찬했다. | ||
2010.07.15 0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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