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1  다산.양동마을

 

 

-다산리-

 

 

 

 

 

단계서당. 

 

 

 

 

 

-양동마을- 

 

 

동호정.

 

 

 

  

 

 

 

 

서백당 뒤안.

 

 

낙선당.

 

 

창은정사

 

 

상춘헌고택.

 

...............

 

양동마을<인터넷 자료 참고>

 

양동마을은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위치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마을이다. 양동마을은 씨족마을로서, 사돈 관계에 있는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대 가문이 거주하여 왔다. 양동마을에는 큰 규모의 양반주택들이 잘 보전되어 내려오고 있는데, 그러한 집들은 대개 ㅁ자형의 공간구성을 하고 있다. 이러한 양반주택들 중 많은 수가 보물 또는 중요민속자료 등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서 양동마을은 하나의 살아있는 건축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양동마을에서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들은 다음과 같다.

 

1. 손동만씨가옥(孫東滿氏家屋)(서백당(書百堂) 또는 송첨, 중요민속자료 제23호)
2. 낙선당(樂善堂)(손영호씨가옥(孫濚鎬氏家屋), 중요민속자료 제73호)
3. 무첨당(無첨堂)(여강이씨 대종가(驪江李氏 大宗家), 이인식(李仁植), 보물 제411호)
4. 관가정(觀稼亭)(손씨대종중(孫氏大宗中), 보물 제442호)     5. 향단(香壇)(향단파종가(香壇派宗家), 보물 제412호)
6. 심수정(心水亭)(향단파(香壇派), 중요민속자료 제81호)     7. 수운정(水雲亭)(손승익(孫承翼), 중요민속자료 제80호)
8. 수졸당(守拙堂)(이종환(李宗煥), 중요민속자료 제78호)     9. 이향정(二香亭)(이석천(李錫千), 중요민속자료 제79호)
10. 이원용가옥(李源鏞家屋)(중요민속자료 제75호)     11. 이희태가옥(李熙太家屋)(중요민속자료 제77호)
12. 안락정(安樂亭)(손씨종중서당(孫氏宗中書堂), 중요민속자료 제82호)     13. 이동기가옥(李東琦家屋)(중요민속자료 제76호)
14. 이원봉가옥(李源鳳家屋)(중요민속자료 제74호)     15. 강학당(講學堂)(이씨종중서당(李氏宗中書堂), 중요민속자료 제83호)

 

월성 양동 마을은 경상북도 경주군,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지정민속마을이며, 하회마을과 더불어 양반들의 생활상과 주거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민속마을이다.

그러나 하회마을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대조적이다. 하회마을은 강물이 마을을 휘돌아가는 마을이라면, 양동마을은 산을 의지하는 마을이다. 그리고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의 단일 동성부락이지만, 양동마을은 여주 이씨와 월성 손씨의 두 씨족이 있는 집성촌이다. 하회에는 동제의 일부로 별신굿이 전해지지만, 양동에는 이렇다할 동제가 없고 2∼3년에 한 번씩 정월 보름이나 추석 전후에 줄다리기하는 세시행사 정도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양동마을은 두 씨족의 집성촌인데,  조선시대 초기에 입향(入鄕)하여 지금까지 세거(世居)하여온 여주 이씨와 월성 손씨 양대 문벌을 이루며 그들의 동족집단 마을로 계승하여왔다. 두 집안에서는 각각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는데, 이씨 집안에서는 동국 18현의 한 분이시고 좌찬성(종1품)까지 오른 회재 이언적 선생를 배출했고, 손씨 집안에서는 벼슬이 정 2품 우참찬에 까지 이른 우재 손중돈 선생이다. 손씨 집안에서는 이언적이 10세 때 손중돈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하여, "우재의 학문이 회재에게 전수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씨 집안에서는 이를 부정하면서 두 가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고 한다.

 

양동마을의 형태를 보면 '勿'자형의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설창산에서 내려오는 능선과 골짜기의 형태가 한자의 물(勿)자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마을의 안쪽 골에는 손씨와 이씨의 대종가인 서백당과 무첨당이 위치하고 있으며, 바깥쪽 골에는 손씨와 이씨의 파종가인 관가정과 향단이 위치한다.  이 마을의 가옥들의 형태는 'ㅁ'자 형태이고 가옥의 위치를 보면 골짜기를 따라 가옥이 위에서 아래로 위치하는데 가장 위쪽에는 대종가 또는 파종가가 자리잡고 있으며 아래로 그 자손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가옥의 규모는 내려올수록 작으며, 맨 아래에는 외거노비가 살던 '가랍집'이라고 하는 집이 있다. 이것은 당시 문중내의 위계를 반영한 것이며 유교적인 신분질서가 공간적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양동마을도 현대로 접어들면서 600∼700채가 되었던 마을이 151가구 295채로 줄어들었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100여 가구가 한꺼번에 줄어들었으며 공업화와 근대화로 그 수가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하회마을과 더불어 규모와 질에 있어서 이처럼 우리의 전통가옥이 많이 밀집되어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무첨당]


무첨당은 물봉골의 남향 언덕에 위치한 이씨 대종가의 별당채인데, 이언적 선생의 손자인 이의유가 지었다고 하는데 그의 호가 '무첨이었다고 한다. 보통 별당은 외부인의 눈에 잘 안 띄고 접근이 어려운 곳에 두기 마련인데 무첨당은 살림채 입구에 있고 규모도 커서 별당이라기 보다는 큰 사랑채 격이다.'ㄱ'형의 건물로 몸채는 가운데가 6칸 대청이며, 좌우로 방이 하나씩 있고 앞으로 나온 부분은 누마루로 구성된 간단한 구조이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은 아주 작은 합각지붕인 반면 몸채 오른쪽은 박공면에 부섭지붕을 덧붙여 마감했다. 옛날 이곳에 대원군이 잠시 머물렀다고 하는데, 그 때 그가 쓴 '左海琴書'라는 글이 있는데, 여기에 '左海'는 왼쪽에 바다가 있다는 것으로 영남지방을 뜻하며, '琴書'는 거문고와 책을 뜻하는데, '무릇 선비란 풍류와 알고 책을 읽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향단(香壇)]

 
향단은 회재가 경상감사로 재직할 때 지은 것으로 중종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그가 전임하면서 그의 동생인 이언괄에게 물려주어 그의 손자인 이언관의 호를 따서 향단이라고 이름짓고, 그의 후손들이 살게 됨에 따라 여주 이씨의 파종가가 되었다. 향단은 일반 가옥과는 상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몸채를 '月'자로 하고 여기에 'ㅡ'자형 행랑채와 칸막이를 둠으로써 전체 평면은 '用'자를 이룬다. 이것은 '用'자가 '日'자와 '月'자가 합쳐진 모양이므로 하늘의 해와 달을 지상에 있게 함으로써 생기를 북돋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부귀공명을 누리게 된다는 풍수사상 때문이었다.  행랑채는 정면 9칸 측면 1칸의 기다란 맞배집으로 동쪽 두 번째 칸을 문으로 사용한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로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사랑채 정면을 나란한 두 개의 맞배지붕으로 마감하고 풍판을 달았는데 그 외관이 멀리서 보면 아주 멋있다. 안채는 두 개의 방이 안대청과 한 면을 접하면서 모서리끼리 만나고 있으며 각 방의 서쪽에는 부엌이 딸려있다. 그리고 특이하게 안대청이 안마당을 향하지 않게 하고 행랑채 지붕을 보도록 하였다. 아마도 안마당과의 기능적인관계보다 전망을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집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사대부의 검소함과는 거리가 멀다.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입지에 있으며 특이한 외관, 일반적인 격식을 과감히 벗어난 대담성 등은 그런 느낌을 만들어 준다.
 

[관가정(觀稼亭)]

 

 관가정은 우재가 살았던 집으로 손씨 집안의 파종가이다. 마을 입구의 첫번째 산등성이에 위치했으면서도 옆의 향단보다 눈에 띄지 않지만, 사랑채에서 마을 앞의 안강평야가 보이는 넓은 조망을 가지고 있다. 평면은 'ㅁ'자형에 앞쪽 좌우로 날개가 있는 형태로 중문을 가운데 두고 서쪽에 사랑채가 있고, 동쪽과 북쪽에 안채가 위치한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안에는 사람이 살지 않아서 많이 낡은 느낌이 들고 관리도 허술하다.
 

[서백당(書百堂)]
 
서백당은 안골의 산중턱에 위치한 손씨 집안의 대종가이다. 이것은 마을의 입향조인 손소가 25세 때 지은 것으로 사랑채의 이름을 따서 '서백당' 또는 '송첨' 이라고 하였다. 행랑채,몸채,사당의 3영역으로 나누어지며, 그 평면은 행랑채가 'ㅡ'자형, 몸채가 'ㅁ'자형, 그리고 사당채가 'ㅡ'자형이다. 몸채는 행랑채와 전후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몸채는 오른쪽 안쪽의 한 단 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마당의 오른쪽에 사랑채 쪽에 작은 담을 쌓았는데, 이것은 여성들이 거주하던 곳과 구별하기 위해서 쌓아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당시의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조선시대의 양반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한 마당의 맨 오른쪽엔 손소가 집을 지을 때 심었다는 500년 된 향나무가 있는데, 오래되어서 그런지 군데군데 시멘트로 쓰러지는 것을 방지한 흔적이 있지만 아직까지 죽지 않고 여전히 잎이 푸르며 큰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서백당의 안채에 들어가 보면 맨 오른쪽에 작은 문이 있는데, 여기에 '삼현선생지지'(三賢先生之地)라고 이곳에 세 사람의 현인이 태어날 것이라는 것으로 풍수적으로 전해오는 말이 있다. 이곳에서 우재가 태어났고 이언적 또한 여기에서 태어났다. 이제 두 명의 현인이 태어났으니 손씨 집안의 사람들은 남은 한 사람의 현인이 손씨 집안에서 태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다만 회재 이후로 외손이 큰 인물이 된다면 다른 문중에 현인을 뺏기는 것으로 생각하여 시집간 딸이 몸을 풀러 친정에 와도 산만은 다른 집에서 시킨다고 하며, 외부인이 들어와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고 한다.
 

'나들이 > - 가까운 나들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미곶  (0) 2014.02.16
호미곶  (0) 2014.02.15
영천호국원  (0) 2014.01.31
보경사  (0) 2014.01.25
연산폭포  (0) 2014.01.1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