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책이나 글을 읽었을 때 무슨 소린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경우, 나는 나의 무지나 이해력 부족, 또는 공부의 미진함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 글을 쓴 사람이 글을 쓸 줄 모르거나, 국어 공부가 안 된 사람이거나, 또는 자기가 말하려고 하는 대상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단정을 합니다. 글을 읽고 이해를 못하는 것은 내 탓이 아니라 글을 쓴 사람 탓입니다.
글이나 말을 할 때는 읽고
듣는 사람이 알아듣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은 언어생활을 영위할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교육에 있어서 서양과
동양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서양의 경우 전문지식의 수준과 언어구사의 능력이 대개 비례합니다. 그런데 동양의 경우 전문분야에 대한 깊이와
언어능력의 불균형이 극심한 인간들이 양산된다는 점입니다.
한의학이건, 점술이건, 풍수건 한경지에 간 것 같기는 한데, 언어능력은
전혀 구비되어 있지 않아서 자기가 깨달은 바를 제대로 표현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불교의 조사들도 물론이요, 음양오행론의 교과서라는
"우주변화의 원리"를 저술한 한동석이라는 사람도 언어구사능력은 유치원생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마도 천하의 한동석을
유치원생이라고 폄하하여 말하면 구름을 보고 너무 건방지다고 야단칠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동석씨의 문장력과 표현력은 유치원생보다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얼라들이 옹아리를 해도 엄마는 뭘 원하는 소린지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한동석씨는 그 두까운 책 한권 속에서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를 한마디도 못한 사람입니다.
그 나열해 놓은 단어들의 절반 이상은 국어대백과 사전에도 없는 단어들입니다.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단어를 그야말로 현란하게 늘어놓으면서 그 단어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한마디 설명도 해놓지 않았습니다. 한동석씨는 자기 혼자
알고 자기만 사용하는 단어들을 엄청나게 동원해서 지 멋대로 늘어놓는 짓을 한 것인데, 이것은 언어의 구사가 아닙니다. 장난질입니다. 국어를
제대로 못 배운 사람이 음양오행론에 한경지 갔다 소린데 저는 일고의 가치도 두지 않습니다.
국어도 제대로 못하는 인간이 무엇을
깨쳤겠습니까?
서양의 과학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저작을 읽어보면 그야말로 난해하고 복잡한 현상이나 대상에 대한 심오한 연구의
결과를 전문지식이 없는 보통의 독자들이 읽어도 다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해 놓습니다. 이것이 저술인 것입니다. 한동석의 "우주변화의 원리"는
저술이 아닙니다. 저건 책이 아닌 것입니다, 얼라들 황칠이나 다를게 없습니다.
제가 그 책의 원문들을 올려드릴
겁니다.
어떤 사람은 그 책을 백번 천번 읽지 않아서 이해를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책은 한번 읽으나 만번 읽으나
이해불가는 똑 같습니다. 언어 아닌 것이 만번 읽는다고 언어가 되는 게 아닙니다.
서양의 철학서들을 보면 한번 읽어서는 그 진미를
알기 어려운 책이 많습니다. 읽으면 읽을 수록 그 뜻이 분명해지는 책이 있고, 한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 오랜 사색을 해야 하는 글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동양의 씨나락류는 그런 범주에 넣어줄 수 없습니다.
일만독을 해도 씨나락은 씨나락입니다.
이 책을 백독을 하고 천독을 해야 문리가 터져서 깨칠 수 있는 것이 음양오행이라면 음양오행은 과학도 아니고, 학문도 아니고 일종의 주술입니다.
그런 짓에 인생을 허비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우주변화의 원리"를 소개하는 이유는 동양학이나 한의학을 공부하려는
후배들에게 이런 씨나락에 빠져들지 말라는 조언을 하기 위함입니다. 가치를 둘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씨나락을 이해한 듯이 위선을 떠는 짓을
물려받지 말라는 소립니다. 이해 안되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마치 알아들은 듯이 연극하고 쑈하는
짓은 이제 때려치워야 합니다. 그런 동양학은 사깁니다. 그런 의술은 돌팔이짓입니다.
내일부터 제가 원문을 소개해 드릴테니 같이
보세요. 이게 과연 학문인지. 이게 과연 배운 자가 할 짓인지.
1. 이제 “우주변화의 원리”에 대한 단체관람을 해 보자. 이 책의 첫 순서는 “총론(總論)인데, 제일 먼저
서양철학의 세계관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플로티누스와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로부터 스피노자에 이르기까지 단원론적 우주관을 소개하고 이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엠페도클레스, 데모크리토스 등의 다원론자들도 소개를
하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쿠지누스, 라이프니쯔, 브루노 등이 주장한 단자론에 대한 비판이 있고, 또한 플라톤, 버클리, 피히테, 헤겔
등 유심론도 소개를 하고, 스토아학파에서 홉즈에 이르는 유물론도 등장한다.
저자의 서양철학의 본체론에 대한 소개와 비판은 그다지
독창적이거나 탁월하다고 봐줄만한 구석은 없다. 서양철학사나, 서양철학개론서 정도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서양철학의 우주론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비판이다. 주제는 인과율과 목적율인데 아낙사고라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베르그송, 칸트, 빈델반트, 등이 소개된다. 역시 상식적인
선에서의 언급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게 동양철학의 우주관이 나온다. 앞에서 저자는 서양철학의 논리적
모순과 사고의 불비점을 비판하였기 때문에 이어지는 동양철학의 우주론은 그에 비해 진일보하고 더욱 치밀한 것으로서 소개되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게 한다. 그러나 후속타인 동양의 우주론은 곧바로 씨나락으로 직행한다.
저자는 송대성리학의 우주론에서
적막무짐(寂寞無朕)이라는 표현을 차용하고, 그것을 우주의 본체인 무극(無極)의 형용사로 소개하고 있다. 천지창조의 본체를 무극으로 상정하는 것은
동양적 우주론의 일반적 기조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무극이라는 상(象)에서 우주라는 형(形)이 창조되는 과정과 법칙에
대한 설명에 들어가면서 바로 논리의 비약과 근거없는 단정이 속출함을 보게 된다.
... 이와 같이 무극은
중이며 또한 공의 모체로서 중용지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극이 태극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동질적인 분파작용을 일으키면서
음도(陰道)의 세력권을 이루게 되는 것이 바로 土(未)작용의 결과이다. 이와 같은 세력권의 형성은 중립성을 변화시켜 소위 후천적인
통일과정으로서의 소투쟁(小鬪爭)을 일으키게 되고 투쟁의 결과로서 土가 지녔던 바의 陽氣는 포위당하게 되고 陰氣는 이것을 포위하게 마련인 바
이것이 바로 상화(相火)의 과정인 것이다. 그리하여 청기(淸氣)가 완전히 포위당하게 되면 무극은 율려운동을 완성하면서 태극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변성(變成)한 태극은 다시 투쟁의욕을 내포하게 된다. 거기에서 태극은 자기자체의 본성을 발휘하여 현실계의 모순대립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니 이 작용을 음양작용(陰陽作用)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음양작용이란 것은 비단 태극이 이루어진 다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극이 태극으로 변할 때에 중탁지기(重濁之氣)로써 경청지기(輕淸之氣)를 포위하던 때부터 이미 음양작용의 발판을 쌓았던 것이다.
그런데 태극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는 그 성질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변하거니와 그 형태적 변화는 말하지 않았다.
...
위의 본문을 찬찬히 읽으면서 감상을 해 보라. 무슨 소린지 이해가 되는지... 무극은 본시 중이고 공의
모체인데 이것이 분파작용을 일으켜 음도의 세력을 형성한다 하는데 그 원인이 토(土)의 작용이란다. 아직 음양도 생기기 전인데 왠 토가 있어서
무극에서 음도의 세력권을 이룬다 말인가? 이 토는 어디서 떨어진 물건일까? 그리고 음도의 세력을 이룬 것이 토작용인데, 토의 양기가 음기에
포위된다는 것은 무슨 소릴까? 저자의 말을 글 쓴 대로 이해를 하면 토기가 음도의 세력권을 이루고 나서 자기의 양기가 음기에 포위되는 것이
상화(相火)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상화의 과정에 대한 저자의 정의를 밑줄을 그어놓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토달지 말고 묻지도 말자. 상화가
뭔지는 혹시 뒤에 가서 설명해줄지도 모르니까.
다음을 보자. “청기(淸氣)가 완전히 포위당하게 되면 무극은 율려운동을
완성하면서 태극으로 변하게 된다”고 한다. 저자의 문맥으로 살펴보면 토가 지녔던 양기가 바로 청기(淸氣)인 모양이다. 토의 양기=청기. 왜냐하면
앞에서 포위당한 것은 토의 양기였으니까. 청기가 포위당하면 율려운동이 완성되고 태극으로 변한다? 점입가경이다. 그렇게 변하면 태극은 다시
투쟁의욕을 내포한다? 이게 음양작용이다? 그리고 중탁지기가 경청지기를 포위한다? 경청지기=청기=토의 양기. 그러면 중탁지기는?
잠깐 살펴보다시피 그다지 길지도 않은 문단속에서 앞뒤 말들이 하나도 연결되지 않는다. 초등생의 글짓기도
이렇게 하면 야단을 맞는다. 글을 이렇게 쓰는 사람이 460쪽이나 되는 책을 완성했다는 사실이 나는 놀랍다. 이런 글을 그만큼 쓰고 나면 뇌가
꼬이고 골의 위치가 바뀌어야 정상이다.
이 글은 한마디로 지 씨부리고 싶은 대로 뱉어논 소리들이다. 이어지는 글을
계속보면 진짜 골 때린다. 도올의 씨나락은 갖다대지도 못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독자가 알고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단어들로 문장을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단어의 의미들은 언어로서 약속된 것이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독자들이 모를 것이라고 짐작되는 새로운 용어나 단어를 사용할 때는 먼저
그런 용어에 대한 이해부터 시켜주어야 한다. 그리고 저자와 독자 사이에 그 용어의 의미에 대한 약속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이
단어는 이런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 하고 독자에게 미리 설명을 해야 한다. 약속되거나 정의되지 않은 단어, 지 혼자만 뜻을 아는 용어를 아무런
설명이나 합의없이 지 맘대로 글 속에 집어넣는 것은 글짓기의 기본을 모르는 작태이다. 이런 사람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국어교육을 받는 것이 더
급하다. 음양오행을 떠들 때가 아닌 것이다.
위와 같은 글을 처음 접하게 되면 대부분의 독자들은 뒤에 가면
지금은 설명없이 튀어나온 이런 말이나 개념에 대한 설명이 나오겠지 하고 기대한다. 당연히 나와야 하고 나와야만이 책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에는 이런 친절함이나 성의가 없다. 독자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소리들을 지혼자 던져놓고는 그 뿐이다. 책을 끝까지
다 읽어도 그에 대한 설명이 안 나온다. 윗글에서의 중탁지기와 청탁지기가 뭔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윗글의 토가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도
독자가 알아낼 문제이다.
도올의 노자나 논어보다 씨나락의 차원에서는 훨씬 윗길이다. 씨나락의 극치를 우리는
여기서 볼 수 있다.
아까 소개했던 원문의 다음부분이다. 함께 보자.
1) ...
무극은 形이 아니고 象이었다. 그 象이란 것은 청탁(淸濁)이 화합(和合)한 비청비탁(非淸非濁)의 중성적 존재였다. 그것이 바로 “시간적인
계(繼)”의 작용에서 “승(承)”의 작용으로 옮겨지는 것이니, 즉, “일반적 작용”이 그의 필연성에 의하여 형체를 이룰 수 있는 소질(素質)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위에서 말한 바의 인과관계란 시간적 계승의 일반적 필연성“이라고 한 것이다.
2) 이와 같이하여
象에서 有가 창조되는 것이므로 易은 이것을 감위수(坎爲水 坎卦)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감(坎)”자의 개념은 “土”의 작용이 결핍(缺乏)되어서
“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3) 그러므로 水는 有의 기본이며 형상계의 母體인
것이다.
위 원문에서 1), 2), 3)의 구분은 내가 편의상 임의로 붙인 것이다. 글의 구조를 살펴보자.
2)는 “이와 같이하여..”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1)의 내용 중에 2)에서 말하는 “이와 같이”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 3)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되므로 2)에는 3)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위의
글들이 이런 문장 구조에 걸맞는 선후관계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자. 전혀 그렇지 않다.
저자는 “무극은 形이 아니고
象이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이런 결론을 내리려면 글을 읽는 사람에게 “形”과 “象”이 무슨 말인지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 뜬금없이
“形이 아니고 象이다”라고 말하면 우리는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저자와 독자 사이에 단어에 대한 의미의 약속이 없다. 이것은 영어를 모르는
구르미가 영어책을 보는 것과 같다. 워리즈 형? 워리즈 상? 한동석씨는 자기 책을 形과 象이라는 글자의 의미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만 볼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렇다면 구르미는 저자가 결코 원치 않았던 주제넘은 독자인 셈이다. 시비는 이쯤하고 다음을 보자. 그래놓고 저자는 “象이란
것은 청탁(淸濁)이 화합(和合)한 비청비탁(非淸非濁)의 중성적 존재였다”고 말한다. 대단히 인텔리한 책이다. 구르미처럼 가방끈 짧은 아지메는
도시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무극은 상이고, 상은 비청비탁이다. 그렇다면 무극은 비청비탁한 중성적인 어떤
물건이라는 소리다. 비청비탁이 어디서 나오는 소린고 하면 공자가 지으신 십익(十翼)의 총론에 해당하는 계사전에 보면 “역에는 태극이 있으니,
이것은 양의를 생하고, 양의가 4상을 생하고, 4상이 팔괘를 생하였다”라는 원문이 있다. 그대로 옮기면 “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이다. 이 계사전에 나오는 태극과 양의와 사상, 팔괘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주를 달았는데, 그 중에서 유목이 말하기를
“태극의 원기는 청탁(淸濁)이라는 두 개의 기로 나누어지니 이것을 양의라 하고, 그 중 맑은 기운(淸氣)이 하늘이 되고 탁한 기운(濁氣)이 땅이
된다”고 한 것에서 인용한 소리다. 한동석은 이 유목의 설에서 역추하여 무극을 청탁이 나누어지기 전의 상태, 즉 비청비탁의 단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극이 비청비탁인 중성인 것과 그 뒤에 나오는 저자의 “시간적 계승의 일반적 필연성”과는 별 문맥상 연결이 안 되는
소리다.
2)를 보면 더 골 때린다. “이와 같이하여...”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와 같이 하여는 없다. 뭘 어떻게
하여란 말인가? 비청비탁한 것이 “시간적인 계(繼)”의 작용에서 “승(承)”의 작용으로 옮겨지고 어쩌고 저쩌고 횡설수설하여...라는
뜻인가?
아무튼 그렇다 치고 다음을 보자. “易은 이것을 감위수(坎爲水 坎卦)라고 한다”고 했단다. 도대체 역의 어느
부분에 이런 소리가 있다는 것인지, 그리고 역의 이 말과 저자가 앞서 말한 것이 어떻게 연결이 된다는 소릴까? 위에서 말한 “이것을”이
무엇일까? 뭐를 감위수라고 말한다는 것인가? 겐또 치기 좋게 객관식으로 문제를 내자. 다음 중에서 저자 한동석씨가 말한 “이것을”에 해당하는
것은?
1) “청탁(淸濁)이 화합(和合)한 비청비탁(非淸非濁)의 중성적 존재”를 역에서 감위수라
했다.
2) “시간적인 계(繼)”의 작용에서 “승(承)”의 작용으로 옮겨지는 것을 역에서 감위수라
했다.
3) “일반적 작용”이 그의 필연성에 의하여 형체를 이룰 수 있는 소질(素質)을 만드는 것을 역에서 감위수라
했다.
4) “인과관계란 시간적 계승의 일반적 필연성“을 역에서 감위수라
했다.
어느 것이 저자의 본의일까? 각자가 찍어보도록 하고 감위수(坎爲水)라는 말을 한번 알아보자. 이거 정말
가방끈 짧은 아지메는 서러워서 음양오행 공부하겠나? 요새는 오행을 말할 때 서로 생하는 순서를 쫓아서 목화토금수라고 흔히 말한다. 하지만 고대의
역에서는 오행이 세상에 출현한 순서를 쫓아서 수화목금토라고 나열하는 게 일반적이다. 역에서는 수(水)를 제일 먼저 나온 물건으로 치고 이것을
하늘에 대입한다. 즉 水는 숫자로는 1이고, 하늘이며 방위는 북이다. 제일 첫 숫자인 “1”을 의미하는 괘의 이름을 감(坎)이라고 한다. 그래서
“감위수(坎爲水)”라는 계사전의 말은 감괘(坎卦)라는 괘이름은 숫자 1을 의미하며 하늘을 가리키고, 五行으로는 水를 말한다“는 소리다. "웅덩이
감(坎)"자는 흙토(土)와 부족할흠(欠)이 결합된 글자이다. 흙이 부족하면 뭘까? 바로 웅덩이다. 흙이 파내져서 부족한 빈 공간인 웅덩이에는 흙
대신 뭐가 고일까? 바로 물이 고인다. 즉 흙구덩인즉슨 저수지인 것이다. 그래서 水를 감(坎)이라는 글자로 표현한
것이다.
역에 나오는 이 말은 象인 무극에서 形인 有가 나오는 변화의 원리나 과정과는 별상관없는 소리다. 감위수가
나올 계제가 아닌 것이다. 뜬금없는 소리가 나왔을 뿐 아니라 더 문제는 역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한다는 데
있다. 역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독자는 전혀 모를 소리고, 공부를 한 사람에게는 황당무계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이 고이는 웅덩이로서 물의 의미를 차용하여 괘의 이름을 붙인 것을 가지고, 흙이 결핍되면 물이 된다는
포복이 절도할 소리를 하고 계신다. 흙이 결핍되는데 어찌 물이 생기나? 이런 식으로 음양오행을 설명하니까 동양학이 왼통 미신이나 비과학적인
귀신씨나락으로 취급되고 마는 것이다.
저자의 결론을 보자. “그러므로 水는 有의 기본이며 형상계의 母體인 것이다”
놀고 자빠졌다. 지 멋대로 씨부린다. 유목은 계사전의 양의를 청탁(淸濁)이라고 보고 청기가 하늘이 되고 탁기가 땅이 된다고 설명했다. 반면에
주돈이는 양의를 음양이라고 보고, 양이 하늘이요, 음이 땅이라고 설했다.
성리학의 문파마다 태극과 양의와 사상과
오행의 설명이 다 다르다. 그런데 한동석씨는 어느 유파의 학설을 지지하는지, 어느 문파의 주장인지 밝히지도 않고, 지 편한대로 마구잡이로
갖다붙이고 있다. 水를 有의 기본이며 형상계의 母體라고 주장한 성리학의 종파를 구르미는 알지 못하고 역의 어디에 저런 소리가 있는지도 본 적이
없다.
지 쪼대로 학문이냐 동양학이.
2.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을 가지고 지금 공부하고 있는 중인데, 아무래도 우리가 선택한 텍스트의
저자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본서의 어디에도 저자인 한동석에 대한 프로필이나 그 생애에 대한 이야기가 없고 책의 후반부에 가면
자서전적인 저자 본인의 방랑기가 있긴 하나 저자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생을 살았던 사람인가에 대한 정보로는 많이
미흡하다.
한의학을 공부한 탓에 본서를 이미 애독한 바 있는 구름타운의 가족들도 한동석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잘 모를 것도 같아서 내가 차제에 저자에 대한 소개를 해 드릴까 한다.
韓東錫은 호가 두암(斗庵)으로,
1911년생이다. 태어난 곳은 함경남도 함주군이라고 한다. “우주변화의 원리”는 그가 55세이던 66년에 발행하였다. 책을 발간한 후 2년 뒤인
68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직업은 한의사였고, 그의 의원은 인사동 12번지에 있었는데, 그의 사후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어 이 한의원은 곧 문을 닫고 말았다.
두암이 한의사가 된 연유는 아마도 집안이 4상의학을 창시한
동무 이제마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물론 이제마는 그의 조부뻘이다. 이제마가 살았던 곳도 함경남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선친
때부터 두 집안에 왕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암이 정말 의술에 몸을 던진 것은 첫 번째 부인을
병으로 잃은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두암의 첫 부인은 폐병으로 죽었는데 그녀를 치료한 의사가 이제마의 제자였던 김흥제였다. 김흥제가 자기 부인을
치료하는 것을 지켜보던 두암은 부인 사후에 김흥제 밑에서 의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동석의 의술은 이제마의 4상의학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
역시 이제마의 제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주변화의 원리” 속에 4상의학의 이론이 자주 엿보이는 것이 그래서이다. 훗날 한동석은 이제마가
저술한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주석하기도 했다.
해방 후 전쟁통에 월남한 한동석은 스승과 동무를 찾아
전국을 누볐으며 이때 사상적 뿌리를 두게 된 곳이 계룡산 국사봉 밑에 자리잡은 향적산방(香積山房)이었다. 이 곳에서 그는 선생도 만났고 도반들도
만났다. 이 계룡산 향적산방에서 죽치던 인물들을 우리나라의 강호무림에서는 “계룡산파”라고 한다. 계룡산파는 한의학을 연구하던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사주명리학과 풍수학 등 역에 중점을 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한동석은 한의사보다는 예언가로 더 이름을 남겼다. 강증산이 주장한 정역의 영향을
받은 것도 이 곳에서였을 것이다. 지구가 기울어진 축의 변화에서 개벽을 따지는 것이 정역인데, 음양오행을 설명하는 책인 “우주변화의 원리”에
지축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동석의 음양오행론은 한의학과 사주명리학과 풍수학과 개벽사상과 4상의학이 혼재되어
있다. 이 각각은 모두 음양오행의 해석과 이해에 약간씩의 차이점을 갖고 있는데 한동석은 이것들을 모두
뒤섞어버렸다.
한동석은 공부하는 방법과 집념에 있어서도 전설을 남겼는데, 그의 공부방법은 무지막지한 암기였다.
황제내경(黃帝內經) 운기편(運氣篇)을 일만번 읽었다고 한다. 인사동에서 한의원을 할 때도 한동석은 골목길을 오가며 미친 사람처럼 운기편을
웅얼거리며 다녔다고 한다. 스님들이 독경하고 염불하듯이 그는 의술서인 황제내경을 그야말로 달달달 외워 삼켰다는 것이다. 주변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황제내경 운기편을 9,000독 했을 때 눈이 조금 뜨였고 1만독을 채웠을 때 활연대오하더라고 고백했다
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도 1만독을 해야 뜻이 눈에 보일 책을 써서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동양학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아주 좋지 못한 선례를 자신이 직접 모범으로 보였다. 그 본을 보고 따라하는 못난 후생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가 공부를 한 방식을 보면 그의 저술이 왜 그렇게 악문이 많고, 문장이 조악하며, 표현이 난해한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문리가 터질 때까지 오로지 일념으로 독경염불을 했기 때문에 글짓기 연습이 안된 탓이다. 여기서도 교육의 중요성을 볼 수
있다.
하여간에 한동석은 황제내경 1만독의 공력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주변화의 원리”를
1만독 해서 강호에 명성을 날린 인물은 나오지 않은 것 같다.
두암은 68년에 죽기 전에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이 둘 다 총맞아 죽을 거라는 예언을 했다고 하는데 입증은 곤란하다. 당시에 이런 예언을 하고 다녔으면 남영동에 끌려가 죽도록 맞았을테니까
그 예언을 들은 사람은 극소수 지인들 뿐일밖에다. 한동석을 따라다니는 여러 신비담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후의 시대에 대한 그의 예언은 별로
맞는 것 같지 않다.
첫부인과 사별한 후 여러 차례의 재혼을 했고, 한국한의사협회의 초대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4중간에 건너뜀이 없이 원문을 계속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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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무극이 태극을 이루어놓으면 그 속에 내포되었던 陽은 표면을 포위하였던 陰(形)을 확장부연(擴張敷衍)하면서 세계는 陽의 주도권하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때에 온갖 모순과 대립이 나타나서 이 세계는 선악과 희비의 결전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이 때문에 발전하는
것이므로 이 과정에서 인물이 생장하고 인식이 성립되며 또한 이성을 창조하는 중대한 기반을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죄악의 과정이 도리어
상여(賞與)의 덕(德)이 되는 세계를 음양세계(陰陽世界)라고도 하며 또는 율려세계(律呂世界)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말하면
陽이 주도하는 세계를 동적세계(動的世界)라고 하고 陰이 主하는 세계를 정적세계(靜的世界)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세계의 운동을
음양동정이라고 한 것이니 이것이 소위 ‘음양설’이다. 또한 공자(孔子)가 “역계사(易繫辭)”에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한 것도
바로 이 길(道)을 말한 것이며,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라고 한 兩儀도 역시 “一陰一陽之謂道”인 바의 음양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陽의 운동이 시간적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서 만물이 세분화되는데 그 세분화 작용이 極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황극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극에 이르는 준비과정의 끝이 바로 황극인 것이다. 즉 甲의 끝(先)이 황극이고 己의 시작이 무극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황극에서 통일을 준비하고 태극에서 화생(化生)을 시작하는 바 무극이란 바로 그들의 주재자인
것이다.
註 : 앞에서 필자가 무극에서 태극에 이르는 변(變)의 과정을 설명할 때에 단순히 氣의 통일작용에
관해서만 논했다. 그러나 이것은 우주운동이 어떻게 변에서 화(化)로 옮겨지는가 하는 형이상학적인 변만을 말했던 것이다. 왜 그렇게 말하였는가
하면 무극 이후는 氣로서 통일하는 성국의 길이요, 태극은 形을 분열시키는 생장의 길이다. 그러므로 陰作用을 主로 하는 무극에서는 그 목적이 氣의
종합이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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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저자의 우주론이다. 이 글을 1만 번 읽으면 어떤 우주창조의 모습이 연상될른지 모르겠다. 글을 이렇게 쓰기는 참 어렵다. 모든 문장들이 의미나
문맥상 서로 연결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매 줄마다 제각각 논다. 앞의 줄과 다음 줄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본문과 註의 내용을 종합해서 어떻게 논리를 엮어보면 저자는 무극을 음이 주도하는 상태로 보고 태극을
양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상태로 보는 듯 하다. 음에게 포위된 양이 자신의 세력을 떨치게 되면서 무극은 태극으로 넘어간다는 설명인 것 같다.
그러나 이것도 나의 억지 유추이지 이렇게라도 엮을만한 논리성이 당췌 보이지 않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무극에서 태극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 선악과 희비의 결전이 나오고, 죄악의 과정이란 소리가 나오고
상여의 덕이 나온다. 이게 우주 창조의 이론이 아니라 나라를 세우거나 기업을 창업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라면 수긍을 할 수도 있겠다. 우주론에서
선악희비, 죄악과 상여 등의 개념이 나온다는 것은 동양의 우주론에 대한 비하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이 이런 글을 읽고 동양의 우주론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가질까? “역시 씨나락이군...”하는 생각 외에 기대할 것이 없다.
공자가 말씀하신
“一陰一陽之謂道”라는 말의 뜻은 “무극은 음이었는데 태극이 생기고 나면 양이 주도권을 갖게 되고...”와 같은 음양의 시간적 교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세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모든 것은 항상 변화한다는 세계의 가변성을 저 일곱글자로 표현한 것이다. 즉 道(우주의 근본법칙)의
요체는 상변(常變-늘 변함)에 있다는 것이다. 세상만물은 그 자체로 성주괴공함은 물론, 동정, 강약, 완급, 성쇠, 대소, 전후, 상하, 좌우가
늘 변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음양론의 요체이다. 이 상변은 어느 것도 예외를 두지 않기 때문에 무극이라는 것조차도 변하지 않고 고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태극으로의 변화는 필연이며, 태극이 또 변하여 양의를 낳는 것도 필연이 된다.
그런데 저자는
“이와 같이 陽의 운동이 시간적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서 만물이 세분화되는데 그 세분화 작용이 極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황극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일음일양이 음양론의 본질이다. 만물이 세분화되는 것은 이 음양상변의 결과이다. 陽이 혼자서 시간적 발전을 거듭해서
만물이 세분화되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음양론의 기본을 도외시하고 멋대로 떠드는 소리다.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의 내용은 거의가
다 이와 같이 막 뱉어논 소리들이며 깊이 사색하고 추론한 철학자의 사유의 궤적이 보이지 않는다. 궤적이 아니라 사고의 파편들만 어지럽게
널려있다.
이 부분에 이르면 논리는 고사하고 주어와 서술부조차 연결이 안 된다.
“무극에 이르는 준비과정의 끝이 바로 황극인 것이다. 즉 甲의 끝(先)이 황극이고 己의 시작이 무극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황극에서 통일을 준비하고 태극에서 화생(化生)을 시작하는 바 무극이란 바로 그들의 주재자인
것이다.”
이 구절을 만 번 읽으면 문맥이 통할까? 도대체 한동석이라는 사람은 이 글을 쓸 때에 甲이라는 것을
뭐라고 생각했을까? 己는 무엇이라고 상정했을까? 이 글에 등장하는 무극과 황극과 태극이라는 삼자의 관계가 논리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앞에서는
만물의 세분화작용이 극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황극이라고 했다가, 뒤에 가서는 무극에 이르는 준비과정의 끝이 황극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등치시켜
보면 이렇게 된다.
"만물의 세분화작용이 극에까지 이르는 과정은 = 무극에 이르는 준비과정의
끝이다.“
만물이 세분화작용을 극한까지 하게 되면 무극에 이르게 된다는 소리 같다. 달리 해석할 방법이 있나?
글을 이렇게 이해할 수 없게 쓰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나는 초등생 작문도 이런 악문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甲의 끝(先)이 황극이고 己의 시작이 무극인 것이다."에 이르면 할 말이 없다. 튀어 나오는 대로 씨부리는
소리다. 다음에 이어지는 뒷부분을 연결하면 더 골 때린다. 이건 다음 회에 감상을 하자.
어떤 분이 천하의
한동석과 불후의 역작 “우주변화의 원리”를 비판하는데 대해 몹시도 언짢은 듯한 메일을 보내오시는데, 그런 메일을 쓸 시간에 내가 가족들에게
소개하는 원문에 대해 해설이나 해주시면 돈수백배 감사드리겠다. 정말 그토록 가치로운 책이고 가르침인데 구르미가 우둔하고 눈이 어두워 제대로 못
보는 것이라면 질책을 하지 말고 가르침을 달라. 이 책을 엄청난 진리가 담긴 책이라고 무조건 우기지 말고 그 진리를 설명해 달라. 구름은 도저히
발견하지 못한 가치로운 가르침을 당신은 보았다면 함께 공유하자. 지식과 사랑을 공유할 생각이 없는 사람은 구름타운에 올 필요없다.
자기가 안 것을 설명하지 못하거든 그런 메일은 보내지 말기 바란다. 시간과 노력을 생산적인데
쓰자.
3. 우리가 학술적인
저술이나 논문과 같은 글을 쓸 때에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문장의 형식이 있다. 그것이 바로 “A는 B이다”라는 형식의
문장이다.
논문에 이런 형식의 문장이 있으면 그냥 자격미달로 빠꾸다. 반드시 “그러므로 A는 B이다.”라는
형식의 문장만이 허용된다. 이게 연역이다. 아니라면 “A는 B이다. 그 이유는 이와 같다.”가 되어야 한다. 이게 귀납이다. “그러므로...”가
앞에 나오던가, “그 이유는...”이 뒤따르지 않는 “A는 B이다.”라는 문장을 우리는 “주관”이라고 말한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마카 지
생각”인 것이다. “A는 B이다”가 허용되는 경우는 이 문장이 결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사용되는 정의일 때 한해서이다. 이미 이 명제가 참인
것이 증명되어있어서 새삼 정의를 하거나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는 명제를 증명을 위한 근거로 사용할 때 인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글의 결론을
“A는 B이다"로 마구잡이로 내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국어교육의 기본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도 없고 ”그 이유는...“도 없는
마카 지 생각을 결론으로 독자들에게 던지는 사람들이 논객이라 말하는 사람들 중에도 쌔고 쌨다.
그런데 불후의
역작이라 말해지는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은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A는 B이다”라는 형식의 문장이다. 반드시 있어야 할 “그러므로...”와
“그 이유는...”이 없다. 더 고약한 것은 이때의 A와 B가 보통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단어라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앞에 나왔던 “甲의 끝(先)이 황극이고 己의 시작이 무극인 것이다."와 같은 문장이다.
여기서 독자들은 ”甲“과 ”己“가 뭔지 모른다. 그런데도 이 단어들에 대한 설명이나 주해도 없다. 그리고 황극이 甲의 시작인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이유도 없다. ”己의 시작이 무극이다“라는 결론에 대한 설명도 물론 없다.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甲의 끝은 황극이요, 己의 시작은
무극이나니...“하고 다라니 외우듯 염불하는 것뿐이다. 황동석 본인이 황제내경을 공부할 때 그런 식으로 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구절을 만
번은커녕 열 번도 외우고 싶지 않다. 설사 만 번을 독송을 한다 해도 ”甲의 끝은 황극이요, 己의 시작은 무극이나니...“라는 말의 의미를 깨칠
것 같지 않다.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A는 B이다”라는 형식의 문장들로 점철되어
있다. 내가 만약 레포트를 심사하는 교수라면 이런 레포트 제출자는 볼 것 없이 올 F다. 레포트 밑에 써 줄 소리는 이런 정도다. “이건 전부
마카 니 생각이자나.”
다음 내용을 보도록 하자. 이번 여름의 납량특집이다.
6책이라는 것의 가치는 무엇일까? 정보와 즐거움과 가치관의 세 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책은 독자에게
정보(지식)를 주거나,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단 그 정보와 지식이 바람직한 가치관에 기반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과학서적이나 철학서는 지식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 쓰여진다. 어떤 사람들은 괴롭지만 직업상
읽어야 하고, 어떤 이는 그런 지식의 습득에서 쾌감을 얻기 때문에 읽기도 한다. 한동석의 "우주변화의 원리“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일종의
과학서적이다. 더 세분하면 과학적 철학서이다. 저자가 설명하려고 하는 대상이 분명한 책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음양오행“에 대하여 설명하려는
책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으로 말미암아 ”음양오행“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된 독자들이 나와야만이 이 책은 그 가치가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음양오행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사람은 아마도 없을 거라고 나는 본다. 있다고? 누고? 한번 손들고 나와 봐. 한번 데리고
와바. 얼굴 함 보게.
왜 없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가 하면 이 책이 나온지 어언 40년이 되어가고,
음양오행의 교과서로 불릴만큼 독보적인 권위를 누리고 있는 데 비해서 이 책을 이론적 토대로 한 후속 연구의 성과물이 한국의 동양학계에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우주변화의 원리”를 읽었다는 사람은 많은데, 읽고 나서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더 진일보한 이론과 원리를 밝힌 책이 한 권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하거나 이 책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음양오행론은 찾아볼 수 없다. 지금 한동석의 제자라 자부하는 이가 누가 있나?
한동석파라는 동양학의 학파가 존재하나?
책이 누리는 권위와 명성에 비해서 그에 걸맞게 따라주어야 할 실질적인
학문적 성과와 후속작업이 전무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은 단 한 넘도 읽고 이해한 넘이 없다는
소리다.
너무나도 난해하고 어려운 탓에 그저 신성불가침한 바이블로 모셔진 책이다. 누가 이 책을 이용하나?
강단에서? 천만에... 일부 자생종교단체들이 자기네 이론서로 써먹고 있다. 그것도 내용이나 이해를 하고 써먹냐 하면 전혀 아니올시다다. 그네들이
종교이론으로 팔아먹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일단 이 책은 정보(지식)의 제공이나 전달이라는 가장 중요한
과학서로서의 기능을 조금도 갖지 못한 책이다. 달리 말하면 책의 기능과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완전히 무가치한 책이라는 것이다. 즐거움을 준다는
또다른 측면에서도 이 책은 사회일반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다. “우주변화의 원리”를 읽게 되면 독자가 느끼는 감정은 둘 중 하나이다.
“띠바, 디기 어렵네, 나 같은 돌빡은 동양학 못 하겠군. 내 주제파악을 못하고 책을 잘못 산거야. 아이고 돈 아까비.”
이게 다수이고, 또 다른 주요한 반응은 “동양학은 역시 씨나락이야, 서양철학이나 과학에 비하면 얼라들 작난질 같애. 유치찬란, 구상유취,
졸렬무비, 아무런 가치 없는 말장난일 뿐인데 공연히 또 사고 말았군. 동양학 하는 넘들은 미친 넘들이야.” 이게 둘이다. 즐거움은 커녕
스트레스와 짜증만 안겨준다.
내 말이 틀리나? “우주변화의 원리”가 동양학계에, 일반학계에, 사회전반에 순기능적으로 기여한 바가
무엇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누가 알면 말씀 좀 해 주시지.
아무래도 이 글의 논점을 좀 더 명확히
맑히는 것이 필요할 듯해서 좀 더 부연을 해 드렸다. 다음 회부터 본격적으로 원문의 감상을 계속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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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태극은 형(形)의 분산을 목적으로 하므로 각각 그 목적하는 바에 따라서 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은 분산을 중심으로 하고 논하겠다. 이것은
본래 동양철학을 논하는 관례였기 때문인 것뿐만 아니라 또한 일면만을 열거함으로써 타면까지 이해하게 하려는 생략법의 이용방법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음양세계의 동정은 태극에 이르러서 氣의 통일을 완수하게 되면 그 태극은 다시 황극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무극이 氣를 통일한 것과는 반대로 태극은 形을 분산하면서 황극으로 향발(向發)하는
것이다. 무극은 氣만을 통일하는 것이 아니고 物도 성숙(成熟)했듯이 태극도 形만을 분산하는 것이 아니고 物을 생장(生長)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극의 외화작용(外化作用)은 무극은 내변작용(內變作用)과는 반대로 형체(形體)와 氣를 확정(擴張)하면서
분산(分散)하는 것이며 양도(陽道)의 작용이다. 다시 말하면 통일하던 때의 주정세력(主淨勢力)이던 음기(陰氣)가 여기에 오면 그 세력을 잃고
도리어 분산되어야 할 운명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음양의 승부작용이라고도 하고 또는 相剋作用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陽의 압박으로 인하여 분열되는 음기(淫氣)는 전진(前進)함으로써 분열의 극(極)에 이른즉 그 성질은 도리어 순화(純化)되어서
음양을 구별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기토(己土)라고 하는 것이다. 반면에 분열지기(分裂之氣)가 아직 상존(尙存)하는
곳을 황극이라고 하는 것인즉, 황극과 무극은 실로 호리간발(毫釐間髮)의 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가 두 개의 극(極)을 필요로 하는 것은
황극은 무극과 동일가치(同一價値)의 “中”이 아니므로 “易 건괘(乾卦)”에 말한 바와 같은 항룡유희(亢龍有悔)의 경계(警戒)를 요하는 위험한
位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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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시니
어떠신가? 뇌에서 엔돌핀이 마구마구 솟아 오르시는지. 압력이 올라서 두껑이 열릴 지경이라고요?
지금 저자가 설명하고
있는 것은 세 가지다. 무극과 태극과 황극이다. 그런데 이 정도 설명을 듣고나면 독자의 머리 속에서 이 세 가지의 관계가 정리가 되고 그림이
그려져야 된다. 그래야만이 지적희열에 의한 엔돌핀이 솟고 사람은 독서의 쾌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 정도 읽었는데도 이 세 가지에 대한
정리는커녕 골이 복잡하게 꼬이게 되면 쾌감 대신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간다. 책 읽는 재미가 조또 없게 되분다. 글을 억수로 못 쓰는 사람이
이렇게 글을 쓴다.
억지로 저자의 글을 문맥을 찾고, 잇고, 보충하고, 메워서 그야말로 생노가다를 해가지고 한번
정리를 해보자(독자한테 이런 노가다를 시키는 저자는 저작자로서는 자격미달이다. 책을 쓰면 안 되는
사람이다).
저자는 태극은 형(形)의 분산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했는데, 바로 다음 줄에 가서는 “음양세계의 동정은 태극에 이르러서 氣의 통일을 완수하게 된다고 한다. 形의 분산과 氣의 통일이 양립할 수
있는 개념일까? 형이 분산되는 것이 기가 통일되는 것일까? 도대체 단 두 문장조차가 앞문장과 뒷문장이 따로 논다. 이건 악문 정도가 아니라
개문이다.
하지만 억지로 정리를 하기로 했으니 하는 데까지 해보자. “태극은 형(形)의 분산을 목적으로
하는데, 음양세계의 동정은 태극에 이르러서 氣의 통일을 완수하게 된다”라고 정리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기의 통일을 완수한 태극은 얼레 다시
황극의 길로 접어들게 된단다.
정말 죽겠다. 헥헥. 구르미가 글을 읽고 이렇게 고전해보기는 첨이다. 암만
골때리게 난해한 종교경전, 과학서적, 철학사상서도 한 눈에 척하면 삼천포까지 한걸음이던 구르미가 “우주변화의 원리”를 만나서는 한 줄을 못
나가고 오리야기리야 갈지자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구르미 탓이냐? 천만의 말씀이고 만만의 콩떡이고 천천의
파전이다. 한번 봐바. 그 다음에 뭐라 하는지.
“무극이 氣를 통일한 것과는 반대로 태극은 形을 분산하면서
황극으로 향발(向發)하는 것이다.”라고 해 놨어. 분명히 조금 전에는 “음양세계의 동정은 태극에 이르러 기의 통일을 완수하게 된다”고 해놓고서
여기서는 또 무극이 기를 통일한다고 하는 거야. 어느 게 맞는 거야? 기를 통일하는 것이 무극이야 태극이야?
이걸 글이라고 말할 수 있나? 있다고? 있다고 쳐주께. 억지로 정리를
계속해보자.
무극은 아마도 기를 통일하고 물을 성숙시키고, 태극은 형을 분산시키고 물을 생장시키는 것인 모양이다.
그런데 이 태극의 작용은 무극과 달리 외변작용이며 양도(陽道)의 작용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태극 이전의 무극은 내변작용이며 음도(陰道)의
작용이란 소리가 된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되나? 이런 음양론은 동양의 고금에 없었다. 공자님 말씀에
무극이 변하여 태극이 되니 태극에서 양의가 나왔다고 하셨다. 이 양의가 음양이다. 때문에 양의가 생하기 전의 단계인 무극에서는 음양의 개념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한동석은 무극은 내변으로 음도작용이요, 태극은 외변으로 양도의 작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태극에 도달하면 다시
황극으로 가게 된다는 소리다. 황극은 무엇일까? 워리즈 황극?
“陽의 압박으로 인하여 분열되는 음기(淫氣)는
전진(前進)함으로써 분열의 극(極)에 이른즉 그 성질은 도리어 순화(純化)되어서 음양을 구별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기토(己土)라고 하는 것이다. 반면에 분열지기(分裂之氣)가 아직 상존(尙存)하는 곳을 황극이라고 하는 것인즉, 황극과 무극은 실로
호리간발(毫釐間髮)의 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가 두 개의 극(極)을 필요로 하는 것은 황극은 무극과 동일가치(同一價値)의 “中”이
아니므로 “易 건괘(乾卦)”에 말한 바와 같은 항룡유희(亢龍有悔)의 경계(警戒)를 요하는 위험한 位인
것이다.“
짜자잔~~~ 어떻노? 황홀하제? 실로 황하고 홀한 씨나락의 최고경지다. 무극에서 태극으로 왔다가
다시 황극으로 가는데, 황극하고 무극은 호리간발의 차이란다. 호리간발? 가는 붓의 털과 털 사이의 틈이다. 항룡유회? 아이고 골이야... 임금의
자리에 오를 때 한 가닥 후회하게 된다는 소리다. 노무현의 심정이 지금 항룡유회다. “내가 뭐 하러 대통령이 됐을꼬?” 이무기로 연못에서 놀
때가 봄날인 거다. 괜히 승천해봐야 조오또 별 볼일 없다 소리다.
그런데 여기서 항룡유회가 왜 나오나? 누가 설명 좀
해조바.
4. 나는 국어를 제대로
못하는 대가들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한 얘기에서 횡설수설 괴발개발하는 것은 둘 중의 하나다. 자기가
알고 있는데도 설명을 못하거나, 자기가 모르는 것을 설명하고 있거나. 둘 중의 어느 쪽이라도 골 때리기는 마찬가지다. 한동석씨는 어느
쪽일까.
휘황찬란한 씨나락 우주론의 감상을 해보다 보면 우리는 알게 된다. 어느 쪽인지. 계속되는 씨나락의
원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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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무극의 보좌역(補佐役 )인즉 우주에 만일 황극이 없다고 하면 무극을 창조할 수 없고 무극이 창조되지 못하면 세계는 조화와 통일을 이룰
수가 없게 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황극은 무극으로 변하게 되는데 이것을 우주라는 형이상학적 입장에서 보면
氣의 종합과 분열의 象이지만 인물(人物)이라는 형이하학 입장에서 보면 형체의 生長老死인 것이다. 세계의 모든 생명체를 소우주라고 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는 우주의 음양작용이 변화하는 대로 자기를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위에서 목적세계인 인물계를
“시간적 계승의 이율적(二律的) 우연성(偶然性)”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세계에 대한 형질적 존재의 활동규범을 정의한 것이다.
註 : 승(承)이라는 것은 통일의 방향으로 연결하는 것이요, 계(繼)라는 것은 분산의 방향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율(二律)이라는 것은 形 가운데서 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우연(偶然)이라는 것은 필연(必然)의 반대인즉 반드시 인과율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즉 인과율에서 탈선(脫線)할 수도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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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까지
우선 보자. 저자가 말하는 황극이란 무극을 보좌하는 것으로 이것이 없다면 무극이 창조될 수 없는 어떤 물건인
모양이다.
그런데 무극이 창조되고 안 되고 하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은 동양적 우주론의 기본의 기본이다.
동양에서 말하는 우주는 무극이라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무극이 어디서 시작된 것인가는 묻지 않는다. 그것을 묻게 되면 어떤 우주론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창조주가 어디서 왔는가, 창조주를 창조한 사람은 누구인가 묻는 것은 기독교 신학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다. 빅뱅 이전의
우주알이 언제부터 있었고,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는 우주물리학이 답해주지 않는다. 道가 언제부터 존재한 것인가 물으면 노자는 웃고
만다.
동양적 우주론에서 말하는 무극이란 그 기원과 유래를 묻지않는 우주의 모체이다. 만들어지지도 않으며
파괴되지도 않고, 생성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생불멸, 부증불감, 불구부정하는 태초의 이전을 말한다.
그런데 한동석씨는 이런 우주론의 전제를 과감하게 혁파하고 있다. 무극은 창조되어지는 것이며, 무극의 창조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황극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시간의 선후관계를 따지면 먼저 황극이 있고, 그 다음에 창조된 무극이 있다는 소리다. 더욱
황당한 소리는 그 다음이다.
“무극이 창조되지 못하면 세계는 조화와 통일을 이룰 수가 없게 된다.”
이 문장에 의하면 세계는 무극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 다만 조화와 통일을 이룰 수가 없을
뿐이다. 씨부리는 소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술처먹고 주정하는 횡설수설이다. 이게 어찌 우주론일 수 있겠으며, 이게 어떻게 동양학일 수 있나.
짜증나지만 한 줄만 더 보자.
“황극은 무극으로 변하게 되는데 이것을 우주라는 형이상학적 입장에서 보면 氣의
종합과 분열의 象이지만 인물(人物)이라는 형이하학 입장에서 보면 형체의 生長老死인 것이다.”
차말로 골
때리제. 氣의 종합이면 종합이고, 분열이면 분열이지 종합과 분열의 상은 뭔 소리고? 종합하면서 분열하고 분열함과 동시에 종합되는 어떤 움직임이
상상속에서 그려지나? 우주가 원래 골 때린다고? 지랄을 해라.
황극에서 무극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인물의
생장노사라? 그렇다면 "황극--->무극"의 순환 과정이 우주의 일대기라는 소리다. 우주는 황극에 출발해서 무극으로 끝난다는 소리가 된다.
동양적 우주론의 출발점이 무극이다. 무극에서 출발해서 무극으로 돌아오는 순환적 우주론이다. 한동석씨는 동양적 우주론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적 우주론을 가지고 헤작질을 하고 있다. 시간적 선후관계가 왼통 뒤죽박죽이다. 무극과 태극과 황극의 선후관계를 정리할 수가 없다. 말할
때마다 이 노무 세 가지가 먼저 나왔다 뒤로 갔다가 지랄육갑을 하기 때문이다.
우주는 원래 지랄육갑이어서
그럴 수밖에 없다 소린가? 그렇다면 이건 지랄육갑 우주론이라고 이름부터 붙여놓고 시작해야지. 동양적 우주론이라고 간판을 걸면 사람들이
오해하자나.
註를 보면 또 웃긴다. "승(承)이라는 것은 통일의 방향으로 연결하는 것이요, 계(繼)라는 것은
분산의 방향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한자까지 지 멋대로 지어내고 앉았다. 승(承)과 계(繼)는 둘 다 "잇는다"는 의미를 가진 한자이지만 承은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 있다. 즉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것이다. 반면에 繼는 수평적인 연결이다. 통일의 방향으로 이어? 분산하는 방향으로
연결한다고? 차말로 유키가 다꾸앙 먹고 트림하는 소리를 하고 자빠진다.
이게 말이지 씨나락이라도 좋아, 그저
자기의 우주론이라고 소개를 하면 긍가보다 할 텐데, 다 보다시피 책의 서두에 고금의 서양의 우주론을 전부 소개를 해놨고, 그것에 대해 비판과
지적을 살뜰하게 하고서 넘어온 계제란 말이지. 그렇다면 나란히 놓고 비교했을 때 자신있다는 소리다. 서양의 우주론들보다 훨씬 정치하고, 더
논리적이고, 보다 치밀한 학문적 틀과 이론적 구조를 가진 우주론이 여기 있으니 보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막상 떠드는 소리는 뭔가? 밑도 끝도
없고, 앞도 뒤도 없는 횡설수설을 늘어놓고 있지 않냐 이 말이다. 동양학의 개망신을 시키고 있다. 아이고 늠사야. 계속 보기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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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우주운동은 무극에서 태극으로 반복하면서 일률일려(一律一呂)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형극(荊棘)의 길(道)이므로
陰(惡)陽(善)之道라고 하거니와 이것은 만물이 생장수장(生長收藏)하는 부모(父母)요, 사리사욕(私利私慾)이 공리공욕(公利公慾)을 멸시(蔑視)하는
횡포의 바탕이요, 청명지원(淸明之源)이 혼암(昏暗)의 유동 속에서 방황하게 하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속세(俗世) 혹은
진세(塵世)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우주가 변성화생(變性化生)하기 위한 시점적인 필연인 것뿐이요 결코 우주의 죄악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주의 사리사욕의 소치가 아니고 다만 공리공욕이 행하는 도정(道程)에서 생겨난 일종의 부작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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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석류의
우주론이 황당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이유가 이 대목에서 엿보인다. 동양적 우주론은 이 세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본다. 하나는
실체가 없는 상(象)으로서의 체(體)요, 다른 하나는 실체가 드러난 형(形)으로서의 용(用)이다. 전자를 노자는 도(道)라고 했고 후자를
덕(德)이라 했다. 도자(道者)들은 전자를 허(虛)라 하고 후자를 실(實)이라 한다. 불교는 전자를 공(空)이라 하고 후자를 색(色)이라 한다.
유자(孺子)들은 전자를 무극(無極)이라 하고 후자를 태극(太極)이라 한다.
무극에서
태극으로 반복하는 것은 한 우주의 사이클을 말한다. 즉 하나의 우주가 생성되고 소멸하는 거대한 주기를 무극에서 태극으로, 태극이 다시 무극으로
순환한다는 개념으로 헤아린다. 이런 우주의 주기가 반복되는 것은 워낙 무한대의 시간과 무량한 공간의 차원이기 때문에 인간의 사유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며 우주론의 관점 밖인 것이다. 우주가 수도 없이 만들어지고 소멸되는 과정이란 철학이나 과학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떠들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공자의 “일음일양위지도”라는 말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속에서의
음양의 변화와 우주운동의 법칙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주 자체의 사이클에 적용시킬 얘기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한동석씨는 무극과 태극의 반복을
율려의 과정으로 말하고 있다. 씨가 이런 수작을 부리는 이유는 둘 중의 하나이다. 하나는 음양론과 성리학에 대해 쥐뿔도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정역사상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기 위한 음험한 수작이다.
증산 계통의 종교단체들이 내미는 교리서들을 보면 반드시
우주의 주기라는 골 때리는 개념이 나온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희한한 계산법을 동원한 끝에 한 우주가 시작되고 끝나는 주기를 몇 십만
년이라느니, 몇 백만 년이라느니 주섬거리면서 지금이 우주의 주기로 치면 가을이니, 겨울이니 하고 헛소리를 해댄다. 그래야만이 선천시대와
후천시대로 나눌 수가 있게 되고, 그래야만이 세상의 종말과 개벽이라는 개념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우주의 주기를 계산하는데 그 기준으로
등장하는 것이 지구가 자전하는 축의 기울기이다. 이 지축을 가지고 지구의 종말시기를 계산한다.
이런 삿된
종교적 관념과 개벽론에 필요한 것이 거시적인 우주의 순환주기이다. 그래서 무극과 태극이 반복되는 일률일려 따위의 망상이 나온다는 소리다.
"우주변화 원리"가 일부 자생종교의 이론서로 이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결코 순수한 동양학적 관점의 철학서도 아니고 한의학적 관점의
음양오행론도 아니다. 정역사상으로 혹세무민하는 날조된 우주론의 음습한 아지트이다.
그래서 한동석의 우주론에는
도덕적인 관념이 결부되어 있다. “형극(荊棘)의 길(道)”이나 “陰(惡)陽(善)之道”, 또는 “사리사욕(私利私慾)”이나 “공리공욕(公利公慾)”
같은 도덕적 용어들이 나열되는 것이 그래서이다. 우주의 순환에 왠 형극의 길이 등장하냐? 우주가 가시밭길을 걷는다는 소리다. 그리고 陰을 惡에
陽을 善에 대입하고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우주론에 대해 아예 개념자체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념도 없는 사람이 그냥 나오는 대로
횡설수설하고 있는 거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삿된 요소들이 이 책을 종교의 이론서로 기능하게 하는
것이다.
일음일양을 일률일여로 둔갑시킨 후에 한 우주 내에서의 변화의 법칙을 우주 바깥에서의 사이클로 대치해
놓은 것이다. 그 이유는? 종말론과 개벽론을 떠드는 정역사상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씨는 일종의 미신적 동양학에 빠진 사람이다. 사주철학자,
운명철학자에 가깝다.
그리고, 길지도 않은 글 중에 사용된 말들을 보자.
일률일려(一律一呂), 형극(荊棘), 陰(惡)陽(善)之道, 생장수장(生長收藏), 사리사욕(私利私慾),
공리공욕(公利公慾), 청명지원(淸明之源), 혼암(昏暗), 진세(塵世), 변성화생(變性化生)...
공자가
기죽어서 숨도 못 쉬겠다. 책 전체가 이 모양이다. 잘 쓰는 글은 가장 평이하고 쉬운 말로 가장 어려운 개념을 가장 알기 쉽게 설명하는 글이다.
동서고금의 양서는 모두 그렇다. 어렵고 희귀하고 전문적이고 고차원적인 단어로 도배하는 넘치고 제대로 아는 넘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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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주의 본체가 어떠하기에 그와 같은 천지재변(天地災變)과 인물의 화복(禍福)이 쉴 새 없이 일어나며, 모순과 투쟁이 판쳐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 본고의 본체론과 우주론의 사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서두에서 이와 같은 개요를
논하는 것은 첫째 상수학(象數學)의 일반적 상식을 공급하려는 것이요, 둘째로는 동양철학의 우주관이 목표로 하는 바를 제시하여 두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연구하는 데는 위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명(明)”과 법칙을 필요로 하는 외에 또한 정명사상(正名思想 즉, 槪念)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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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이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의 도입부인 총론의 마지막 글이다. 여기서도 저자는 자기의 목적이 우주의 본체를 밝히는 것이라고 명토박고 있다.
그리고 이런 총론을 서두에서 늘어놓은 이유로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지금까지 소개한 내용들을 아무리 되돌아봐도 상수학의 기본 상식에 해당하는
내용은 안 보인다. 그리고 동양철학의 우주관이 목표로 하는 바도 전혀 제시한 적이 없다. 저자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보다시피 밑도 끝도 없는
소리들이었을 뿐 상수학의 상식이나 우주관의 목표로 하는 바와 비슷한 내용은 나온 적이 없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정명사상의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단다. 정명사상이 뭔가? 이름으로 본질을 구속하려는 사상이다. 다시 말하면 유교가 추구하는 사회질서의 확립을 위한
방법론이다. 즉, 이름이 사물을 정의한다는 사상이다. 왕이 왜 왕인가? 발가벗겨 보면 똑같은 사람이다. 왕이라고 태어날 때 이마에 왕자가
찍혀있는 것도 아니고, 등에 용의 비늘이 돋은 것도 아니다. 눈이 세 개인 것도 아니고, 힘이 천하장사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만백성들은
왕을 섬기고 충성을 다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유교의 답변은 간단하다. “그 사람의 이름이 왕이기 때문이다”가
유교의 답이다. 이 답 앞에는 백구가 무언이다. 이름이 왕이라는데야 뭐라고 할 것인가? 앵겨들 도리가 없는 답이다. 신하는 왜 신하인가? 그
이름이 신하이기 때문이다. 그 이름이 신하인 사람은 신하된 자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 왜 남편은 하늘처럼 떠받들어야 하는가? 그 이름이 남편이기
때문이다. 정명사상을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 없다. 모든 사물에는 알맞은 이름을 지어 붙이고 사물은 그 이름이 정해주는 역할과 도리를 다하면
되는 것이다. 왕질을 할 넘한테는 왕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신하질 할 넘은 신하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지아비질 할 넘은 지아비라고 붙여주고,
마누라 할 욘은 마누라라는 이름을 떠억하니 붙여주면 만사 땡이다. 세상은 그것만으로 질서가 잡히고 탈없이 잘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내시한테는
내시라는 이름을 노비한테는 노비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자기 이름에 만족하지 않는 넘이나 욘은 지구밖으로 추방한다. 이게 유교다.
이 무시무시한 사상을 처음 창안하신 분은 공자다. 제양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가라사대 “오직 정명을 행할 뿐”이라고 답했다. 제양공이 "워리즈 정명?"하고 되묻자 공자 가라사대 "정명이즈 군군신신부부자자데스요"라고
대답했다. "君君臣臣父父子子" <----이게 正名이다.
그런데 노자는 이런 공자를 대단히 속물로 취급해서
눈알로 내려다 봤다. 우주자연의 도를 이름 따위로 구속하려 드는 것이 가소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이름이 무엇이던 이름은 신경쓰지 마라.
도를 도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굳이 도(道) 아니라도 상관없다. 대(大)면 어떻고, 이(夷)면 어떠냐. 이름이 어떠하던 도가 도 아닌 다른 것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게 무위자연이다. 공자가 주창한 것은 입신양명이다.
이름 하나에 목숨을 건다.
이게 유자다. 이런 정명사상이 과연 우주변화의 원리와 상통하는 점이 있을까? 우주론에 정명사상을 갖다붙이는 저 용감성에는 탄복치 않을 도리가
없다. 가장 반자연적이고, 비우주적인 인위적 사상이 정명사상이다. 우주론을 연구하는 데 정명사상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실로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 뒤를 이어 정명사상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잠깐 나오는데 우주론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소리로 끝난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한번 보자. 아이고 불쌍한 구르미 손구락아.
그리고 또 한 가지 상수학은 진짜로 골 때리는
물건인께네 이건 차차로 살펴보자.
우변님 땜시 표현을 억수로 순화시키려고 애를 썼는디, 이 정도면 통과시켜
주실래나.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은 그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문장이 산만하고
문맥의 단절이 심하고 논리가 혼란하기 때문에 읽는 사람의 머리속에서 저자의 주장이 좀체로 정리가 되지 않는다. 나는 글을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읽게 되면 그 글이 말하고 있는 바가 읽는 사람의 머리 속에서 그림으로 그려져야 된다고 본다. 나부터가 가급적 그림이 쉽게 그려지도록 글을
쓸 때 유념하고 있다. 그런데 “우주변화의 원리”는 그림이 안 그려진다. 개념이 형성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완독하기가 무척 힘든
책이다. 끝까지 읽어도 머리속에 뭔가 남는 게 없을 것 같다는 본전생각이 계속 나게 만들어서 “다음에 읽자”라는 결정을 곧 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한번 덮어버리고 나면 두 번 다시 열어볼 생각이 안 나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은 많은 문제점이 있지만 동시에
한의학과 음양오행, 그리고 상수학을 공부하려고 하면 안 볼 수도 없는 일면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정답은 없어도 문제는 풍부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정답지가 들어있지 않은 문제집이나 같다. 어떤 문제는 정답이라고 들어있기는 하지만 오답이 많다. 그래서 이 문제집의 정답지는 믿을
게 못 된다. 답은 각자가 풀어내던가 다른 선생한테서 얻어야 한다. 그러나 다양한 유형의 문제를 접해보는 데는 이 책만큼 풍성한 문제집은 달리
없다.
“우주변화의 원리”는 그런 점에서 한의학이나 음양오행, 상수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에게는 피할 수 없는
난관이다. 그러나 독파하는 것이 전혀 무가치하거나 의미없는 일은 아니다. 벽운공도 혼자서 수련한다고 되는 건 아니다. 함께 모여서 해보는 것이
훨씬 빠르다.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은 혼자서는 완독하기 힘든 책이다. 에지간한 인내심과 끈기 그리고 이해력과 사전지식을 준비하지 않고서는
마지막 페이지를 구경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가 이 책을 같이 보는 것은 좋은 기회이다. 책이 워낙 두껍고 다루는
문제가 방대하기 때문에 하루에 한 페이지를 읽는다 해도 1년 반은 걸릴 것 같다. 책 1페이지에 설명과 주석이 5페이지는 필요하다. 그러나
서두를 이유는 없어 보인다. 꾸준히 매일 한 페이지씩 이 책을 정독해 나가기로 하자.
내년 연말쯤이면 구름타운
가족들은 누구라도 “우주변화의 원리”를 완독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벽운공 강좌”와 병행해서 짚어나가 보면 상당한 진전을 기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가족들에게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런 공부를 할 기회가 그리 흔치 않다는 것이다. 매일
신문의 연재소설을 읽는다고 치고 “우주변화의 원리” 감상을 꾸준하게 해주십사 하는 것이다. 발췌가 아니라 책의 원문은 전체를 빠짐없이 올려드릴
것이기 때문에 책을 사서 통독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구르미가 해석과 참고설명을 달아드리기 때문에 큰 부담없이 읽으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느낀 바나 생각을 댓글로 올려 대화하는 재미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5. 지금부터 총론의 제3절이다. 앞에서 말한 정명(正名)사상에 대한 설명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논지를 구분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말하는 내용이 앞으로의 사변의 전개에 두 번 다시 나오지가 않는다. 즉 이 책의 주제와는 동떨어진
파편이어서 이런 소리를 여기서 왜 하는지가 궁금한 대목이다. 뭘 말하려고 하는지는 오리무중이나 나름대로 뭔가 구체화시키려고 애를 쓴 것이
느껴지기는 한다. 그리 중요하게 소용되는 내용들은 아니니까 그냥 한번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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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사물(事物)과 개념(槪念)
개념(Concept)이라는 것은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양다색(多樣多色)하므로
인간이 이것을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하여 지각(知覺)이나 기억(記憶)이나 사상에 나타나는 개체적인 표상(表象)에서 그 공통된 속성을
추상(抽象) 결합하여서 혹은 문장화하고 혹은 언어화된 사상의 통일체를 표식(標識)하기 위한 정명(正名)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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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린가 알려면 한참 생각을 좀 해야 된다. “개체적인 표상”, “공통된 속성의 추상, 결합”, “사상의 통일체를 표식“ 이런 소리들은 한참
디다봐도 무슨 소린지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구르미만 가방끈이 짧아서 모를 수도 있지만... 신향미는 무슨 소린지 다
알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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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려고 하는 바는 그와 같은 논리학적인 연구를 대상으로 하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개념의 가치와 필요성을 논함으로써 개념연구가
철학연구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두려는 것이다.
개념(槪念)이라는 말은 동양철학적으로 말하면
“정명(正名)”이라고 하는 바 이것을 연구하는 학문을 정명학이라고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성과 감정에 나타나는 개체적 표상에서 공통된
속성을 추출하여서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서양철학의 경우와 일반이지만 그 개념이 바르지 못하면 사물의 전체관념이 어긋나므로 특별히 여기에 유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의 발전과 지식의 통일을 위하여서는 불가무(不可無)의 방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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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정명(正名)의 의미를 개념, 즉 컨셉이라고 보고 있다. 사물의 컨셉이 바로 정명이라는 말이다. 컨셉... 공자님이 동의하실지 모르겠다. 공자가
말씀하신 정명은 사물의 컨셉보다는 포지셔닝에 가깝다. 우리가 만찬장에 들어갈 때 주최측에서 나누어주는 명찰을 목에 걸고 들어가면 테이블 위에
명패가 있어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게 된다. 이때 나누어주는 명찰은 나라는 사람의 컨셉이 아니라 포지션을 결정해주는 것이다. 주최측의 판단에
따라서 귀빈은 로얄석에 자리를 준비했을 것이고, 각자의 지위와 계급에 따라 자리를 배정했을 것이다. 각자에 가장 알맞은 자리를 배정하는 이름표가
공자가 말씀하신 정명이다. 물론 이렇게 가장 적합한 자리를 배정하기 위해서는 게스트의 신분과 주최측과의 관계, 사회적 비중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컨셉이 정확해야 한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정명을 컨셉이라고 등치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정명은 포지션이며, 컨셉은 포지션을
정하기 위한 전제가 된다. 정명사상이 요구하는 것은 정확한 컨셉이 아니라 “다운 것”이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것이 정명사상의 핵심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위계질서라고
한다.
올바른 이름은 올바른 위치이다. 때문에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그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정명은 신분제 사회를 옹호한 공자사상의 근간을 이룬다.
가족들이 한동석씨의 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원문의 사이사이에 부연을 해드리거나 필요한 보충설명을 해드리고 있다.
“사물과 개념”
편을 이어서 계속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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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개념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한마디로 대답한다면 사물(事物)의 명분(名分)과 이름(名)을 바르게 하는 데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사물의
명사를 정(定)하려면 우선 개념이 명확해야 할 것이고 개념이 명확해야만 사물의 내용과 의미가 통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사물 자체의
의미나 내용이 충실하게 될 것인즉 그것을 명분의 정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물의 개념인 명사나 명분은 절대로 정확하게 그 사물의
내용을 반영하여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양철학은 이것을 정명(正名)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사물에 각각
이름과 명분(名分)을 붙이는 일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인구의 밀도가 희박하고 생활양식이 간단했던 고대에 있어서는 그만큼
개념설정의 필요도 적었으니 그것은 변화형태가 단조로웠던 것과 정비레로 생겨난 무관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탐구의
향상은 정명사상(正名思想)을 유발하기에 이르기는 하였지만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시대적인 제 요건이 여기에 영합(迎合)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명사상은 다시 타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이 도리어 모순을 유발함으로써 오히려 사회악을 조장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정명사상은
진실로 사물의 이름을 바르게 하고 명분을 옳게 세우려는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라도 미숙한 횡설수설(橫說竪說)이 개입되게 되면 명분은
군도(君道)를 위한 궤변이 될 것이고 인식은 타락의 구렁에서 헤매게 될 것이므로 도리어 도의(道義)와 사물의 발전에 막대한 폐해를 끼치게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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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장들이 다 악문에 들어간다. 한번 보자.
첫 문장을 바르게 고치면 “개념을 정립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한마디로 대답한다면 사물(事物)의 명분(名分)과 이름(名)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가 되거나
“개념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한마디로 대답한다면 사물(事物)의 명분(名分)과 이름(名)이라고 대답할 것이다.”가 된다.
한동석씨는 문장에서 주어와 술어의 관계에 대한 개념이 없다. 이런 개념이 없이 쓰는 글을 악문이라고 한다.
씨의 글이 읽기 힘든 이유는 그 내용이 심오하거나 난해한 탓이 아니라 악문이 많고 글의 접속관계가 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머리를 맑게
하고 상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꼬이게 만든다.
그리고 문맥상 이 문장의 다음에
와야 하는 이야기는 명분과 명에 대한 설명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사물이라는 주어와 관계를 갖는 네 개의 단어는 개념과 내용과 의미와 명분이다.
이 4자간의 관계를 저자의 논리를 따라 정리를 해보자.
(사물에 대한)명확한 개념--->(사물의)내용과
의미가 통일됨
(사물 자체의)의미나 내용이 충실해 짐--->명분의 정확
(사물의
개념인)명사나 명분--->(사물의)내용을 반영
보다시피 “A로서 B한다”가 “B로서 A한다”라는 말과
교대로 나온다. 주어와 형용사가 문장마다 자리를 바꾼다. 이런 문장은 읽고서 문맥을 잡을 수가 없다. 내용이 맞고 틀리고는 다음 문제인 것이다.
이게 가끔씩 발견되는 현상이면 그럴 수도 있겠으나 씨의 문장은 거의 대부분이 이렇다. 사실 문장과 표현이라는 측면에서는 수준이하라고 평가되어도
할 말이 없는 책이다. 문제는 내용이 그것을 보상해주고도 남을 만한가이다. 그것은 두고 보기로 하자.
그리고
명분(名分)이라는 것은 명사에 붙이는 말이 아니다. “왕의 명분”이라고 쓰면 문법적으로 안 맞는 소리다. “왕이 왕일 수 있는 명분” 또는
“왕이 왕노릇을 하는 명분”이 맞는 용례이다. 명분은 어떤 행위에 따르는 정당성이지 사물의 컨셉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자는 “개념=사물의 내용과 의미”라고 했다가 “개념=명분과 명”이라고 했다가 “의미나
내용=명분”이라고 했다가 “명사나 명분=내용”이라고 개념 없이 “A=B"를 갖다 붙이니까 뭔 소리를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무극과
태극과 황극이 그랬던 것처럼 한동석씨가 설명하려고 하는 대상들은 관계설정이 비논리적이고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마치
“동양학은 원래 이런 것이여.”하고 말하는 듯 하다.
위 글의 장황한 얘기들은 이렇게 정리되어야 맞는 소리가
된다. “명사는 사물의 컨셉을 반영하여야 하고 명분은 사물의 행위(존재 또는 위치, 자리)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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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여기서 동양에 있어서의 정명사(正名史)를 일별(一瞥)하여 보면 그것은 孔子에게서 시작되었는데 공자는 춘추말의 부패와 타락이 전혀 정명(正名)되지
못한 데 있다고 보았던 고로 제자가 “선생이 만일 위국(衛國)의 재상이 된다고 하면 무엇부터 먼저 하겠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필야정명(必也正名)”이라 대답하였던 것이다. 그 때와 같은 난세에 정명부터 하겠다는 말을 들은 제자는 아연실색하였지만 공자의 뜻을 움직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사회상이나 발전적 요건이 공자로서 볼 때에 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묵자(墨子), 공손룡자(公孫龍子), 순자(荀子) 등이 나와서 정명을 철학의 기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말미암아 선성(先聖)들의 정명학에 대한 유지(遺志)는 차차 매몰되기 시작했고 철학의 심오성(深奧性 )도 점점 감추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송대에 이르러서 성리학이 발전되므로 인하여 숙취갱성(宿醉更醒)하는 듯한 분위기가 조성되기는 하였지만 정명사상이 타락한 지
어언 천년이라 그의 진리를 해득하는 자가 극소한데다가 그 시대는 또한 오늘날과 같이 문화가 대중화 되지 못한 때였으므로 그 명맥을 유지하기도
오히려 바쁠 정도였던 것이다. 그후 19세기말에 심부(河心夫)가 나와서 “정역주의(正易主義)”를 저술함으로써 정명정신은 갱생의 계기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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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저자가 우주론을 말하는 자리에서 “정명사상”을 들고나오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즉 목적과 의도는 “정역주의”에 있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가 “필여정명” 소리를 듣고 아연실색하였다는 것은 과장이겠고, 납득이 안되어 의아한 표정이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공자의 대답은 의아해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공자의 “정명”은 세상 만물의 개념을 살피고 그 내용을 헤아려서 올바른 명과 명분을
부여하는 철학적 혹은 학문적인 노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공자가 노나라의 재상이 된 후에 한 정명은 그런 학구적인 탐구생활이 아니었고
현실정치에서의 개혁과 실천적 방법론의 제시였다. 공자의 “정명”은 “위계질서의 확립”이요, “신분사회의 정착”이요 “계급의 세분화”와
“봉건사회의 안정”이었다. 정명으로서 공자는 천하의 안정을 꾀했다. 결코 책상머리 이론의 천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정명은 철학사상이 아니라
정치적 이념이고, 사회시스템의 이론적 토대였다는 점이다.
공자의 정명을 분서갱유까지 들먹여 아카데믹한 연구의 차원으로
끌고 가는 목적은 정역주의의 전통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우주변화 원리”가 설명하는 것은 전통적이고 순수한 음양오행론과 상수학이
아니다. 정역주의적 우주관의 피력인 것이다. 정역이란 소위 개벽사상의 모태이다. 원시반본의 근거이다. 이런 종교적인, 혹은 관념적인 우주론과
결부될 때 음양오행이나 상수학이 어떻게 타락하고 변질되고야 마는지를 보여주는 책인
것이다.
구름~~
"우주변화의 원리"를 소개하는 이유
2006. 8. 3. 1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