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2 문의 문화재 단지- 송계- 적성산성- 단양.

 

청원 문의 문화재 단지에서

두원과 한나절을 함께 놀다가...

 

늦으막이 저녁나절에

떨어져 지지않는 길을 떠난다.

 

단양으로 가는길...

괴산 연풍을 지나

월악 송계 계곡을 경유 하면서

 

물레방아 휴게소 동생집과

덕주골 산장 형님집엘 들르는데

 

묵어 가라고

그렇게 가면 어떻게 하냐고

잡는손길을 마다하고

 

걸음을 재촉한다.

 

 

 

 

 

 

 

 

 

 

 

 

 

 

 

 

 

 

 

 

 

 

 

 

 

 

 

 

 

 

 

 

 

 

 

 

 

 

 

 

 

 

사자빈신사지 석탑(보물 제94호)

  빈신사터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탑으로 상·하 2단으로 된 기단 위에 4층의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기단은 글이 새겨져 있어 탑의 조성 경위를 알 수 있으며 위기단은 사자 4마리를 배치하여 탑신을 받치고 있는 특이한 모
습이다. 네 모서리에 한마리씩 배치한 사자의 안쪽 공간에 비로자나불상을 모셔 두었다. 앉은 모습의 비로자나불상은 특이하게
도 두건을 쓰고 있으며 표정이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의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을 모방한 것
으로 이 밖에도 몇 기의 탑이 더 전해지고 있다. 현재 탑신에는 지붕돌이 4층까지 남아 있는데, 아래기단에 있는 글을 통해 원래
는 9층이었음이 확인되었다.

  고려 현종 13년(1022)에 만들어진 이 탑은 연대가 확실하여 각 부의 구조와 양식, 조각수법 등 다른 석탑의 조성연대를 추정하
는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탑이다.
지대석 위에 방형하대(方形下臺)가 놓여 있고, 상부(上部)에 두꺼운 테를 돌려 부연(副椽)을 삼았으며, 그 밑 각면에 3개씩의 안
(眼象)을 새겼다. 안상 안에는 꽃모양을 새겨 고려시대(高麗時代) 수법(手法)을 나타내고 있고 중석(中石)의 4면에는 넓은 우주형
(隅柱形)을 새겼으며, 이곳에 79자의 명문(銘文)을 새겨 확실한 연대를 알게 하였다. 특히 상층기단(上層基壇)의 중석(中石)은 가
장 특색(特色)있는 부분으로 네 귀에 네 마리의 사자를 앉혀 갑석(甲石)을 받치고, 중심에는 비로자나불좌상(毘盧舍那佛坐像)을
안치한 특수구조로 되어있다. 갑석의 위 네모진 면에는 16개의 연꽃잎이 새겨져 탑신부(塔身部)를 받치고 있다.
(隅柱形)을 새겼으며, 이곳에 79자의 명문(銘文)을 새겨 확실한 연대를 알게 하였다. 특히 상층기단(上層基壇)의 중석(中石)은 가
장 특색(特色)있는 부분으로 네 귀에 네 마리의 사자를 앉혀 갑석(甲石)을 받치고, 중심에는 비로자나불좌상(毘盧舍那佛坐像)을
안치한 특수구조로 되어있다. 갑석의 위 네모진 면에는 16개의 연꽃잎이 새겨져 탑신부(塔身部)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의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는데, 1층탑신은 특별히 크고 2층부터는 급격히 작아졌다.

  옥개석은 4층까지 남았는데 평박(平薄)하며, 받침은 3단(段)이다. 또한 추녀의 우각(隅角)은 크게 반전(反轉)하였으며, 낙수면(落
水面)의 경사가 완만하다. 원래 9층이던 이탑은 현재 5층 이상은 상실되었으나, 고려시대(高麗時代) 석탑의 특색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명문(銘文)에 의해 고려(高麗) 현종(顯宗) 13년(태평(太平) 2년, 1022)에 조성(造成)되었음을 알 수 있는 건실한 탑이다.

 

단양신라적성비(국보 제198호)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碑)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

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

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관의 관등과『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

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

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단양 적성(사적  제265호)

  단양 성재산에 있는 돌로 쌓아 만든 산성이다. 주위가 약 900m이나 대부분 붕괴되고, 북동쪽에는 안팎으로 겹쳐 쌓은 부분의

안쪽 성벽이 일부 남아있다.

  성의 남서쪽, 남쪽, 동남쪽의 3곳에 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성벽의 절단부가 있다. 북쪽은 남한강과 가파른 절벽의 자연

적인 지리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다.

  1978년 성내에서 적성비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신라와 고구려의 세력관계 변동을 알 수 있다. 비석외에 삼국시대의 토기조

각과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유물도 있어 대략 고려 후기까지 오늘날의 단양지방을 다스리는 읍성의 구실을 했

을 것으로 보인다. 축성방법이 매우 견고하게 되어있어, 신라의 성 쌓기 기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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