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3 단양 온달산성- 영주 부석사.소수서원- 안동.

 

여행 마지막 날이면 어김없이

비가 내린다.

 

이른아침...

우산을 들고 온달산성을 오른다.

 

일부 복원되어진 구간도 있고

일부 복원중인 구간도 있고

일부 복원을 기다리는 그런 구간도 있다.

 

빗방울이 가늘어지면서

피어오르는 안개가 장관을 이룬다.

 

하산을 해서 더덕구이로

조금은 비싼 아침식사를 하고는

 

꼬불꼬불 꼬불꼬불

백두대간 마구령을 넘어

 

15년전 다녀 갔었던 부석사

그리고 소수서원을 다시 찾는다.

 

 

    - 온달산성 -   

 

 

온달산성.

 

 

 

 

 

 

말끔하게 단장을 마친 산성과...

 

복원공사중인 산성.

 

 

 

 

 

본래 모습의 산성.

 

 

 

 

 

 

 

 

 

 

온달산성(사적 제264호)

  남한강이 보이는 성산의 정상부근을 돌로 둘러쌓은 산성이다.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0)의 사위인 온달장

군의 이야기가 이 지방에 전해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성이 언제 쌓아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전기에 이미 성산

성이란 이름으로 있었던 기록이 있다. 벽의 안팎을 모두 비슷한 크기의 돌로 가지런히 쌓아 올린, 둘레 683m의 소규모 산성

이다. 성 안에는 삼국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며, 우물터가 남아있고, 성벽 바깥부분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배수구가 있다. 남서

쪽 문터의 형식과 동문의 돌출부는 우리나라 고대 성곽에서 드물게 보이는 양식으로 주목할 만하다.
  성의 북동쪽 남한강의 강변 절벽 아래에는 온달굴이라는 석회암 동굴이 있고, 성을 바라보는 북쪽 강 건너의 산에도 온달과

관계되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성벽의 보존 상태가 좋아, 축성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아침식단.

 

   - 마구령 - 

 

고개를 넘다가 잠시...

 

 

   - 부석사 -

 

 

부석사당간지주 (보물 제255호) 

  절에 행사가 있을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

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입구에 1m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마주보는 안쪽 옆면과 바깥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양쪽

모서리의 모를 둥글게 다듬었다. 기둥 윗부분은 원을 2겹으로 경사지게 조각하였고, 옆면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기둥

머리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 있다. 기둥 사이에는 한 돌로 된 정사각형의 받침 위에

원형을 돌출시켜 깃대를 세우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 주변에는 연꽃을 장식하고, 윗면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

의 밑면을 받치고 있다.

  대체로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지주이다. 또한 가늘고 길면서도 아래위에 다소 두께 차이가 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안정감을 주며, 간결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천왕문.

 

 

 

 

 

시도유형문화재 (제130호)

  부석사에서 약 200m 떨어져 있는 옛 절터에 남아 있던 두 탑으로, 1966년 이곳 부석사로 옮겨 세웠다. 탑을 옮길 때 세워 놓

은 비석에 의하면 서쪽의 탑은 익산왕궁리오층석탑(국보 제289호)에서 나누어 온 부처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한다. 동·서로

서 있는 두 탑은 크기만 약간 다를 뿐 형식은 같아서, 모두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과 탑

신부의 몸돌에는 기둥을 본 떠 새겼는데,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조각을 두었고, 몸돌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몸돌

을 덮고 있는 각 층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끝에서 살짝 들려 가벼움을 실었다.

  꼭대기에는 후에 보충한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비록 지붕돌 밑받침이 4단으로 줄어들었으나 전체적으로 당당한 기품을 잃

지않은 모습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세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량수전(국보 제18호)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

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부석사삼층석탑 (보물 제249호)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에는 각 면

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아래층 기단은 가운데에 2개씩의 조각을 두고, 위층 기단에는 하나씩을

두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있는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은 밑면

의 받침이 5단으로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문무왕 16년(676)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아래층 기단의 너비가 매우 넓고, 1층 몸돌 또한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넓어서 장중해 보인다.

  1960년 해체하여 복원할 때 철제탑, 불상의 파편, 구슬 등이 발견되었고 이 때 일부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

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이나 이 석탑은 법당의 동쪽에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

도 하며,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세워진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

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4각 바닥돌은 옆면에 무늬를 새겨 꾸몄으며,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기둥을 받치고 있다.

전형적인 8각 기둥형태인 이 기둥은 굵기나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는데, 위로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윗받침돌을

얹어놓았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다.

  지붕돌도 역시 8각인데,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해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 조각의 정교함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부석.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

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

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조사당(국보 제19호)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

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를 기둥 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며, 건물 자체가 작은 크기이기 때문에 세부양식이 경내에

있는 무량수전보다 간결하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다.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이것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

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 지금은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

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부석사조사당벽화(국보 46호)

  이 벽화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시작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조사당(국보 제19호) 안

쪽 벽면에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지금은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 유리상자에 담아 무량

수전에 보관하고 있다.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백색·금색 등으로 채색하였으며, 각각의 크기는 길이 205㎝, 폭 75㎝ 가량이다.

  양쪽의 두 보살은 풍만하고 우아한 귀부인의 모습이며, 가운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 보는 건장한 모습이

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후대에 덧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율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에서 고려시대 불화의 품격

을 느낄 수 있다.

  건물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고려 우왕 3년(1377)임을 알게 되었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

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

고 있다.

 

선비화. 

  의상조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지팡이가 있었는데 조사가 열반하실 때 예언하기를"이 지팡이를 비와 이

슬에 맞지 않는 곳에 꽂아라. 지팡이에 잎이 나고 꽃이 피면 우리나라의 국운이 흥왕할 것이다"고 하매 문도들이 조사당 축대

에 꽂았더니 과연 음력 4월 초8일께 버선 모양의 누런 장삼빛 꽃이 피었다. 그 후로 국운이 흥하고 나라가 태평할 때는 늘 잎

이 피고 꽃이 피었으나 한말(韓末)에서 일제 때는 잎은 피어도 꽃은 피지 않았던 것이 8.15해방과 함께 30여년만에 꽃이 피었

다고 한다. 이 나무의 수령(樹齡)은 1300여년이라 하나 높이는 불과 1m 30Cm정도로 이지방의 고로(古老)들은 옛날이나 지금

이나 성장의 변화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나무의 잎과 가지를 애기 못 낳은 여인이 다려 먹으면 임신한다해서 몰래 꺾어 가지고 나무가 자랄 여가가 없었

다고도 한다. 일제 때 철책을 하여 방지하다가 그래도 피해를 면치 못하므로 지금은 쇠 그물을 처마까지 쳐서 철저히 보호하

고 있다.

 

 

 

 

자인당 석불(보물 제220호)

  자인당에는 3기의 석불이 앉아 계신다. 이 석불은 원래 이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부석사 근처에 있는 동방사지 에서

1957년에 불상을 이곳에 옮겨 놓아 보호하고 있다. 좌측불상은 나발의 머리에 원만한 상호를 이지만 우측불상보다는 얼

굴이 가름한 편이다.
  통견의 법의는 길게 내려와 손에 걸친 옷이 가부좌한 다리까지 내려와 있 다. 보주형 광배는 한쪽이 파손이 되어 보수

를 하였지만 원형에 가깝게 보수 를 하였고 양쪽에 삼존상의 화불을 조각하였다.. 좌대의 앙련은 약간 파손이 되었고 중

대석에는 각각 팔각에 상을 아름답 게 조각을 하였다. 하대석에는 안상무늬안에는 향로와 사자상등을 조각을 하였다.

 


  우측불상은 좌측불상과 비슷하게 조각을 하였지만 얼굴은 둥근 편이며 나 발의 머리에 목은 짧게 조각을 하였다. 주형광배

에는 위쪽에 삼존화불을 조각하였고 내려오면서 서로 대칭을 이 루면서 3구의 화불을 정교하면서도 아름답게 조각을 하였다.
  중대석과 하대석은 땅속에 오랜 세월동안 묻혀있었던 것으로 현재도 황토 색이 배어 있다. 조각형태나 수법이 좌. 우측 불

상 거의 비슷한 점으로 보아 동일 석공이 조각한 게 아닌가 싶다.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제45호)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

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

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

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지금의 손모양은 조선시대에 불

상의 파손된 부분을 고치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

르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장식하였으며, 작은 부처를 달

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

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에서 크게 벗어나

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소수서원 -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보물 제59호)

  이 당간은 소수서원 입구 소나무 숲에 남아 있는 것으로, 서원내에 아직도 당시 숙수사의 여러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

으로 보아 지금의 위치가 원위치로 보인다. 숙수사는 통일신라 전기에 창건된 사찰로,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다 소수서원의

건립으로 폐사된 듯하다.  당간은 마주보는 면의 바깥면 중앙에 세로띠를 새기고, 꼭대기에서 1.17m 밑에서 부터 2.34m 까지

사이가 면이 쑥 들어가 있어서 마치 넓은 홈을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네모난 기둥 끝으로 올라가면 약간 가늘어지고, 맨끝은

둥글게 경사지도록 하였다. 꼭대기 끝 안쪽 면에는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원래는 지주와 당간을 받치던 바닥돌이 있었을 듯하나, 현재는 지주 양쪽으로 길고 큰 돌 1장씩이 놓여있을 뿐이다. 전체적

으로 소박하며 돌을 다듬은 솜씨도 세련되어 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강학당(보물  제1403호) 

  강학당은 서원의 양대기능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장대석의 높은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초석을

놓았으며, 규모는 정면4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서 웅장하면서도 고색이 잘 간직되어 있으며, 사방 둘레에 너비 1m

정도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툇마루 가장자리는 높이 6.5㎝, 높이 8.5㎝의 턱을 두었고, 기단 네 모서리에 추녀를 받는 활주

를 설치하였다. 강학당의 정면은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서원입구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

을 설치하였다. 내부 대청의 북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紹修書院)' 이란 편액이 높이 걸려있다. 정면 4칸 중 좌측

3칸은 마루이며, 우측 1칸에는 방을 2개 설치하였고,기단3면(정면, 우측, 좌측)에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굴뚝은 마루 밑에 조

그마한 구멍을 뚫어 처리하였다.
  기둥 윗몸에서 앙서 하나를 내어 기둥위에 놓인 주두와 결구시킨 초익공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는 오량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치고, 종보 위에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주세붕 영정(보물 제717호)

  조선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주세붕의 상반신을 그린 초상화로 가로 62.5㎝, 세로 134㎝ 크기이다. 주세붕(1495∼1554)은 중

종 38년(1543)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후의 소수서원)을 세워 학문진흥에 힘썼다. 이 초상화는 사모관대의 정장

관복을 차려입고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얼굴은 간략한 선으로 묘사하고, 넉넉한 몸체에 목은 거의 표현하지

않아 권위적인 기품이 엿보인다. 옷의 깃을 낮게 표현한 것은 다른 초상화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양식으로 생

각된다.
  이 그림의 정확한 제작연대를 추정하기 힘들지만 색이 바라고, 훼손된 상태, 복식, 필법 등으로 미루어 제작연대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16세기 초상화가 대부분 공신상인데 비해 학자의 기품이 드러난 학자상으로 매우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순흥 향교 문화제 지료(제347호)

  순흥향교는 고려 충렬왕 30년(1340)에 처음 지었으나, 단종 복위운동으로 고을과 함께 향교가 혁파당하여 약 200여년이 지

난 숙종 9년(1683) 부(府)가 회복되면서 다시 세웠다. 이후 여러 차례 위치를 옮겨 세운 끝에 정조 14년(1790) 지금 있는 자리

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 교육 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삼문 등이다. 전체적인 배치는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앞에 두고,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뒤로 배치한

전학후묘의 공간 구성을 이루고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순흥 척화비(문화재 자료 제242호)

  척화비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해

서울 및 전국의 중요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로, 이 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비는 널찍한 사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모습으

로, 원래는 순흥초등학교 내에 있었으나, 1990년에 이곳으로 옮겨 왔다. 고종 8년(1871) 전국에 동시에 세워진 비로,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되고 세계 각국들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척화비는 철거되었으나, 이처럼 몇 기의 비들이

곳곳에 남아 옛 우리민족의 자주의식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

 

 

 

 

순흥 내리 벽화 고분(사적 제313호)

  비봉산 정상(높이 431m)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구릉의 경사면에 있는 무덤이다. 외형은 둥글고 내부는 널방(현실)

과 그 방에서 입구를 연결하는 널길(연도)로 이루어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널방은 4각형으로, 크기는 동·서 약

3.5m, 남·북 약 2m, 높이 약 2m이다. 벽에서 천장으로 갈수록 좁아지며 천장은 2장의 돌이 나란히 덮혀 있다. 천장을 제외한

모든 벽면에는 채색화가 그려져 있다. 
  동벽에는 새의 머리 그림이, 남벽에는 사람과 글씨가, 북벽에는 3개의 산과 연꽃, 구름무늬가, 서벽에는 나무와 집이 있고

수문장으로 추정되는 역사(力士)가 그려져 있다. 
  널길의 동·서쪽 벽면에도 그림이 있는데, 서벽엔 뱀을 손에 잡아 감고 있는 사나이의 모습이, 동벽에는 눈을 부릅 뜬 힘 센

사람의 그림이 있다. 이것은 무덤의 시신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그려진 것으로 해석된다. 
  이 무덤의 그림들은 삼국시대 회화는 물론 당시의 종교관·내세관, 고구려와의 문화교류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안동 이천동 석불입상(보물 제115호)

  자연암벽에 신체를 선으로 새기고 머리는 따로 올려놓은 전체 높이 12.38m의 거구의 불상이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고려

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는데,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보물 제93호)도 이와 거의 같은 수법을 보여준다. 머리의 뒷부분은 거의 파

손되었으나 앞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 있고,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

고 있어서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거구의 불상에서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미련스러움은 보이지 않는다. 머리와 얼굴 특히

입에는 주홍색이 남아 있어서 원래는 채색되었음이 분명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몇 개 안되는 옷주름은 매우 도

식적(圖式的)으로 표현되고 있다. 양 손은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어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배에 대고 있는 모

습이다.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지방화된 거구의 불상 가운데 하나로 당시 불상 양식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

고 있다. 

 

방래정. 
 

 

 

 

<인터넷 자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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