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1  장미산.

 

두원이는 어린이 집(유아원)에 갔고 

동원이는 잠이 들었다.

 

조금 자랐다고

전같이 울고불고는 안하지만

 

시무룩하니 집을 나서던 두원이가

마음에 걸린다.

 

두원.동원이를 만날때는 넘 좋은데

녀석들을 두고 돌아서는 발길은 영 무겁다.

 

두원아!

겨울방학 하면 포항에 놀러 오거라...

 

 

아이들을 뒤로 하고는 충주로 달린다.

 

계획대로라면 

포스코 한마음 산악회의 산행에 동행하여

남한산성을 거닐고 있을 시간인데...

 

대신으로 장미산성을 오른다.

 

장미산성은 충주시 가금면에 있는 장미산의 능선을 따라

둘러 쌓은 둘레 약 2.9㎞의 삼국시대 산성이다.

 

북쪽의 봉학사 지역 복원되어져 있는 일부 성벽이외의 

성곽 대부분은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는데.  

 

그 모습은 

포항의 뇌성산성. 경주의 반월성.남산산성.명활산성과 유사하다.

 

 

산행을 마치고 나니

16시가 넘었다.

 

예천 용문사 윤장대.목불각탱 둘러보는것은

다음으로 미루어 진다.

 

중원 고구려비(국보 제205호)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 입구에 있는 이 비는 1979년 2월 예성동호회원들에 의해 발견되어 학계에 알려지

1979년 4월 8일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고구려비임이 고증된 국내 유일의 고구려비이다.
  이 비는 오랜 세월의 풍화로 비문이 심하게 마멸되어 분명하게 확인할 수는 없으나 장수왕 때 고구려가 남한강 유

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서 5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4면비로서 전면 10행 23자씩으로 된 230자의 명문이며 향 좌측면에 155자가 새겨졌는데 뒷면과 우측면은 9행과 6행

명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와 신라 백제 삼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금석문이다.
  처음 입비 당시부터 대석과 개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의 모양이 만주 즙안현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축소된
 

형상이다. 원고구려비는 고구려가 충주 지역을 점령하고 이를 기념해 세운 비로서, 고구려의 전성기 때 영토의 범위

가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 입구에 있는 이 비는 1979년 2월 예성동호회원들에 의해 발견되어 학계에 알

려지고1979년 4월 8일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고구려비임이 고증된 국내 유일의 고구려비이다.
 

중원 고구려비 한켠에 설치되어져 있는 장미산 등산로 안내 표지판.  

 

장미산성.

 

 

연못터.

 

 

 

 

 

 

 

 

 

 

충주시 가금면에 있는 장미산의 능선을 따라 둘러 쌓은 둘레 약 2.9㎞의 삼국시대 산성으로 1997년 11월 11일 사적 제

400호로 지정되었다. 가금면에 있는 장미산(337.5m)의 능선을 따라 쌓은 석성으로, 충주 시내를 감싸고 흐르는 남한강

변의 요충지에 축조되어 있다. 

 

성의 크기는 둘레 약 2.9㎞, 너비 약 5∼10m 정도이다. 이 성에 대하여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에 기록이 남아 있

고 1992년 지표조사 결과 삼국시대의 고구려산성으로 확인되었다. 1992년 성 안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들을 검

토한 결과 백제,고구려,신라가 차례로 이 성을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장미산성과 보련산성 삼국시대 때 이곳 보련산 서쪽 가마골 마을에 장미라는 사람과 보련이라는 누이가 살았는데 명

산의 정기를 받은 이들은 둘 다 장수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옛부터 한 집안에 두 장수가 태어나면 그 중

하나는 희생되어야 하기에 두 사람은 성쌓기 겨루기를 하기로 하였다.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가슴을 저미는 고통을

느끼게 되는데 어머니가 보기에 보련이의 성 쌓는 솜씨가 아들인 장미보다 뛰어나 고민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결심

한 어머니는 손수 떡을 해서 보련이에게 떡을 보이고 다시 성을 쌓게 했는데 보련이가 마지막 돌을 하나 올리려는

순간 장미쪽에서 성을 다 쌓았음을 알리자 보련이는 어머니가 아들을 살리려 했음을 알고 집을 떠났다고 한다. 보련이

가 떠난 다음 날 보련이의 집에 큰 별이 하나 떨어졌다고 하며 그후 그 지역 산과 산성을 보련산-보련산성, 장미산- 장

미산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장미산 정상에서...

 

 

일부 복원되어진 장미산성.

 

성 북쪽에 위치해있는 봉학사.

 

장미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한강. 멀리로 월악산과 주흘산.조령산.희양산이 희미하다.

 

 

 

 

밤이삭.

 

장미산 자락에 2만여평의 밤나무 단지.

 

중원 창동 오층석탑(충북 유형문화재 제8호)과 약사여래불.

  오층석탑(좌)은 원래는 충주시 창동 242번지 주택의 후원에 있던 것을 보존이 어려워 1978년 원위치에서 정 남방 60m

점으로 옮겨 해체 복원한것이고 약사여래 입상(우)은 당초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 쇠꼬지 광산 옆 절터에 있던 것을

1960년 이곳으로 옮긴것이라고 한다.

 

중원 청명주 제조장(기능 보유자 김영기: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중원 청명주는 1년 24절기 중 청명일에 사용하기 위하여 술을 담겼다하여 청명주라 부르며 조선조 궁중의 진상주로

선택되기도 하였고, 사대부 집안에서 귀한 손님 접대용으로 사용되었던 명주이다. 청명주가 빚어지기 시작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조 이전부터 빚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향전록이라는 문헌에 청명주와 민간약방문이 수록되

어 전하고 있다. 전과정에 소요되는 시간은 주발효 기간 15일, 후발효 기간 35일, 후숙기간 50일 정도로 총 100일 정도

가 소요된다. 재료는 찹쌀과 누룩만을 사용하여 만든다.

 

중원 창동 마애불(충북 유형 문화재 제76호)

동남향으로 남한강을 면하고 있는 암벽 위에 얕은 선조로 조각된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크고 길게 찢어진 눈꼬리, 큼직한

코와 귀 등에서는 부처님의 자비로움보다는 근엄한 인상이 풍긴다. 통견의 불의에는 세 가닥의 선각과 더불어 구불구불한

선 위주의 특이한 옷주름과 대좌에는 연판 조각 등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바위의 박락이 있었고 또 표현도 부정확하여 잘 알 수 없지만 좌불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처럼 토속적인 분위기와 세련

되지 못한 세부 표현 그리고 하체조각이 생략된 수법 구불구불한 선조 등 이 지방에 꽤 많이 보이는 독특한 지방양식 불상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크게 주목되고 있다. 신립 장군의 화상이란 전설이 전한다. 

 

 

 

 

 <인터넷 자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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