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5 함양 백운산.
대방마을-묵계암-상연대-끝봉-중봉-백운산-서래봉-화과원-백운암-신촌-대방마을.
어스름 새벽에 집을 나서자마자 시내버스를 곧바로 탄것도 좋고
신호등이 제법 있는길을 별로 막히지도 않고 달리는것까지도 좋았는데
너무 이른가? 아무도 보이지가 않는다.
그런데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져주질 않는다.
오늘이 아닌가?
장거리고 하니까 진작에 출발을 했나?
...
인근의 파출소 출입문을 조용히 밀친다.
혹시나 누?가 될까 싶어서다.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깊숙하게 앉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찰관 한사람이 푸석한 얼굴로 바라본다.
인터넷 검색을 해봤으면 싶다고 부탁을 하니 자리를 비켜주며 하라고 한다.
정든 한우리 다음 카페에 접속을 해서 한서 산악회 산행시간을 보니 엥!!! 출발시간이 08시다. 언제 바뀌었지?
시간도 어정쩌하고 하여 아예 눌러앉아 신문도 보고 TV도 보고 하며 한시간이나 기다리게 된다.
이른 아침부터 파출소 신세를 진다.
...
산행인원 21명. 자리가 넓어 이용하는사람은 좋을런지 모르겠지만
음식등을 준비하는 집행부는 속상하는 일일것 같다.
산행 들머리인 대명리에 하차를 하면서 제물을 내리고 챙기는것을 보고
시산제 행사도 겸한 산행이란것을 알게 된다.
시산제를 함께 해야 하는지 마는지 갈등을 하고 있는데 이미 산으로 향하고 있는 일부 회원들이 있어
그들을 따라 오른다.
오르다 보니 또 혼자이다. 미지의 길이고 미답의 길인데...
공부좀 하고 올걸 하고 후회아닌 후회를 하면서 걸음을 서둔다.
정상에서 일정시간 조망을 즐기다가 빼빼재 방향으로 내려서는데 눈길이고 얼음길이다.
배낭에 아이젠을 두고도 설설 기고 있다. 하는짓 하고는...
서래봉을 넘고 얼마간을 더 진행 했을까? 우측 잡초가 무성한 헬기장 중앙으로 희미하게 길흔적이 있다.
하산하려는 대방마을 방향이라 일단은 들어섰는데 길이 길같지도 않다.
이내 사라져 버릴것 만 같은 불안감으로 하산길은 계속 된다. 그런데...
불안한 걱정이 사실로 되어버렸다. 그넘에 길이 정말 없어져 버린것이다. 길찾는다고 헤메이다가 포기를
하고는 길을 만들면서 진행을 하는데 다행히도 길게 늘어져 있는 고로쇠 물받이 호스가 눈에 띈다.
그 호스를 따라 조금 내려서는데 산중에 외딴집이 있다. 얼마나 반갑던지 ㅎㅎ
이리오너라!!가 아니고 안녕하세요.안녕하십니까. 하고 큰소리로 인기척을 하며 찾아 드는데
경계에 눈초리로 경직된 얼굴을 한 건장한 체구의 한 사내가 불쑥 나타난다.
조용히 지나칠걸 그랬나?
불러내긴 했는데 딱히 할말도 없다. 길을 묻는척 몇마디 말만 건네고는 돌아서는데...
뒤가 막 땡기는것 같다. 따라오는것도 같은것이 걸음이 더 빨라진다.
도를 닦는 도사 같지는 않고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숨어사는 사람만 같다.
길을 잃었을때 난감함보다 더 긴장되는 시간이었다. 세상이 하도 험악하다보니 그렇다.
십여분을 달려 화과원에 도착 산중에 외딴집 사내 이야기를 하니까 그들도 잘 모른다고 한다.
산제를 함께 하지 않았다고 노한 산신께서 보낸 사자였나?
화과원에서부터는 길이 넘 좋다. 용소폭포를 지나면서 큰골을 만나 두세번 건너면서 백운암까지 같이 간다.
백운암에 들렀다가 신촌. 대방마을까지도 큰골과 나란히 간다.
정해진 하산시간보다 훨씬 이른시간에 도착되어지긴 했지만 혼자만의 산행이 좀 걸린다.
담에는 함께 하는 산행을 해야겠다.
백운산 산행 들머리(좌측 묵계암 방향)
묵계암 대웅전.
근래에 건립되어진 원통보전.
상연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미끼골.
상연대.
상연대(上蓮臺). 고운 최치원 선생이 어머니의 기도처로 지은 암자이다. 여기서 최치원은 여기서 관음 기도를 하던 중 관세음 보살
이 나타나 상연(上蓮)이라는 이름이 불러 이후 암자의 이름을 '상연대'라 불리게 됐다 한다. 15m쯤 되는 벼랑 위에 사뿐히 앉아 있는
모습이 연꽃처럼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말에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선문이 이곳으로 옮겨와 선문의 마지
막 보루가 되었다고 전해온다.
끝봉에 올라서면서 바라보이는 백운산 정상.
백운산 정상에서 바라보이는 괘관산.
백운산 정상.
서래봉 조금 아래의 돌탑.
화과원 유허지(경상남도 기념물 제229호)
백룡성선사가 선농불교(禪農佛敎)를 실천하며 일제시대 독립운동 자금조달을 위한 농장이다. 백룡성선사(1864∼1940)는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운동가이고 불교에서는 반농반선의 선농불교를 주창·실천하였다. 백룡성선사는 이곳의 산림과 황무지를 개간하
여 과수를 심고 화과원이라는 농장을 설립하였다.
화과원 유허지는 백운산의 8부능선에 위치하여 외부에서의 접근이 쉽지 않다. 이곳을 거점으로 일제의 억압을 피해 뒷산으로 넘어 다니며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이곳에는 법당터, 선방터 등 9개소의 건물터와 축대, 석조물, 가마터 등이 남아 있고 고목이 된 배나무 등의 과일나무가 주변에 많이 남아 있다.
화과원 유허지에 세워진 법당.
백운암에서 화과원 유허지로 연결되어지는 모노레일.
백운암.
영은사지 석장승(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9호)
백운암 입구에 마주보고 서 있는 2개의 돌장승이다. 이곳은 영은사가 있었던 터로, 각각 ‘우호대장군’, ‘좌호대장군’이 되어, 사냥과 어로를 금
하고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장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호대장군은 높이 280㎝, 너비 50㎝이고, 좌호대장군은 높이 270㎝, 너비 50㎝이다. 우호대장군은 큰 상투를 얹은 머리와 툭 튀어나온 둥근
눈, 큰 주먹코, 꼭 다문 입과 입 주위에 수염이 표현되어 있다. 좌호대장군은 관모를 쓴 것 같은 머리부분이 특이하고 나머지 외형은 우호대장
군과 비슷하다. 전체적으로 조각이 뚜렷하며 익살스러움이 잘 표현된 조형물이다.
제작년대는 좌호대장군 우측하단에 새긴 기록으로 보아 조선 영조 41년(1765)에 제작된 것이 확인된다. 사찰을 수호하며, 풍수지리적으로 국
가의 번영과 임금의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복합적인 기능과 더불어 민간신앙의 기원대상물이었던 유물의 한 예이다.
백운암 입구에 세워진 석장승(石長丞)은 호법신장상(護法神將像)의 석장승(石長丞)으로서 신라시대(新羅時代) 영은조사(靈隱祖師)가 창건
(創建)한 "영은사(靈隱寺)" 경내지에 선 『우호대장군(右護大將軍)』,『좌호대장군(左護大將軍)』으로 호법규제(護法規制)와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장(守門將)이다. 조각의 형식이 뚜렷하고 조형성이 뛰어나며 관모를 쓴 머리, 큰 상투를 얹은 것 같은 머리와 왕방울 눈, 큰 주먹
코, 꼭다문 입, 입주위의 수염이 잘 표현된 작품으로 양각된 폭이 크고, 뚜렷하며 소박하고 익살스러움이 잘 표현된 조형물이다. 『좌호대장
군(左護大將軍)』의 우측 하단에 『건륭 삼십년 을유윤이월일(乾隆 三十年 乙酉閏二月日』이라는 간기(刊記)가 있어 영조(英組) 41년(1765)
에 제작 되었음이 확인되고, 백운암 입구에 세워진 부도군(浮屠群)의 연대(年代) 기록(紀錄)과 연호(年號)를 함께 하고 있어 제작 연대는 확
인(確認)된다. 장승(長丞)은 사찰(寺刹) 소유(所有) 부지(敷地)의 경계(境界)에서 사냥과 어로를 금(禁)하고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신(守門
神), 풍수지리적(風水地理的)으로 국기의 연장과 군왕(君王)의 장생(長生)을 기원(祈願)하기 위한 산천비보(山川飛報)등 복합적(複合的)인
기능(機能)과 민간신앙(民間信仰)의 기원대상(祈願對象)이 된다.
<인터넷 자료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