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4 공주 무령왕릉 →공산성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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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렁쇠
윷놀이.
고분군.
공주 사이버 시민 가입.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간 토속음식점.
공산성.
지석(국보 제163호)
왕(王)의 지석(誌石)은 표면에 5∼6cm의 계선(界線)을 만들고 그 안에 6행에 걸쳐 다음과 같이 새겼다. '영동대장군백제사 마왕년륙십
이세계 묘년오월병술삭칠 일임진붕도을사년팔월 계유삭십이일 갑신안조 등관대묘입지여좌'(寧東大將軍百濟斯 麻王年六十二歲癸 卯年
五月丙戌朔七 日壬辰崩到乙巳年八月 癸酉朔十二日 甲申安조 登冠大墓立志如左) 이 묘지의 내용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사와
일치된다.
뒷면에는 주위에 네모나게 구획선을 치고 그 선에 따라 십이지(十二支) 방위(方位)를 새겼으나 무슨 까닭인지 서쪽에 해당되는 부분은
생략되었다.
또 하나에는 왕비(王妃)에 관한 묘지를 새겼는데 2.5∼2.8cm 폭으로 계선(界線)을 치고 4행에 걸쳐 '병오년십이월 백제국왕대비수
종거상재 유지을유년이월계 미삭십이일갑오개장환대묘립 지여좌 (丙午年十二月 百濟國王大妃壽 終居喪在 酉地乙酉年二月癸 未朔十
二日甲午改葬還大墓立 志如左)'라 새겼다. 계선(界線)을 친 부분은 모두 13행이 되지만 나머지 부분은 공백으로 그대로 남겨 두었다.
이 지석(誌石)의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매지문(買地文)이 새겨졌다. '전일만문우일건 을사년팔월십이일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이전
건전송토왕 토백토부모상하 중관이천석 매신지위묘고립권위명 부종률령(錢一萬文右日件 乙巳年八月十二日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以前件錢訟土王 土伯土父母上下 衆官二千石 買申地爲墓故立券爲明 不從律令)'· 원래의 매지권(買地卷)은 '무령왕(사마왕, 斯麻王)'의
장사를 지낼 때 만들어진 것인데 그 후 왕비(王妃)를 합장하였을 때 이 매지권(買地卷)의 뒷면을 이용하여 왕비(王妃)에 관한 묘지문
을 새겼던 것이다. 2개 모두가 중앙보다 한쪽에 치우쳐 작은 구멍을 하나씩 뚫고 있으며 각섬석질(角閃石質)의 돌을 사용하였다.
금제심엽형이식<왕>(국보 제 156호)
은제팔찌<왕비>(국보 제160호)
공주시 무령왕릉 왕비의 나무널(목관)내 왼쪽 팔 부근에서 발견된 한 쌍의 은제 팔찌로, 바깥지름 8㎝, 고리지름 1.1㎝이다. 팔목이
닿는 안쪽에는 톱니 모양을 촘촘히 새겼고, 둥근 바깥면에는 발이 셋 달린 2마리의 용을 새겼다. 용의 조각은 세밀하지는 않으나 힘이
있어, 묵직한 팔찌와 잘 어울리고 있다. 한 개의 팔찌 안쪽에 새긴 글로 보아 왕비가 죽기 6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만든 사람
의 이름과 무게가 쓰여있다. 전체적인 윤곽이 깔끔하고 중후하며, 만든시기와 작가, 작품과 직접 관계된 글이 있는 예로, 고대 미술 연
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제수식부이식<왕비>(국보 제157호)
금제경식<왕비>(국보 제158호)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무령왕비의 목걸이로, 길이는 각각 14㎝, 16㎝이다. 9마디로 된 것과 7마디로 된 것 2종류가 있는데,
발굴 당시 7마디 목걸이가 9마디 목걸이 밑에 겹쳐져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활 모양으로 약간 휘어진 육각의 금막대를 끝으로 갈수
록 가늘게 하여 고리를 만들고 다른 것과 연결시켰다. 고리를 만들고 남은 부분을 짧은 목걸이의 경우 10∼11회, 긴 목걸이는 6∼8회 감
아서 풀리지 않게 하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연결된 금막대마다 고리를 만들고 마무리를 한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2개의 목걸이 모두 한
쪽 끝에 몸에 걸기 위한 작은 고리가 끼워져 있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은 간단한 구조를 하고있다. 현대적 감각과 함께 매우 세련되어
보이는 작품이다.
금제관식(국보 제154호 )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왕관(王冠) 꾸미개(장식) 한쌍이다. 높이는 각각 30.7㎝, 29.2㎝이고, 너비는 각각
14㎝, 13.6㎝이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을 뚫어서 덩굴 무늬를 장식했으며, 밑으로는 줄기가 있는데 아래위로 2, 3개의 작은 구멍이 있어 무엇인가에 부착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좌우로 벌어진 줄기 중간에는 꽃 무늬를 배치하였으며, 줄기가 길게 연장되면서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양새를 보여
준다. 두 가닥은 아래로 향하게 하여 변화를 주고있다. 앞면에는 전체에 걸쳐 구슬모양 꾸미개를 금실로 꼬아서 달았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2)과 왕비의 무덤으로, 벽돌을 이용해서 만든 벽돌무덤(전축분)이다. 출토된 유물들은 백
제 문화의 수준과 풍속의 일면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중 지석(誌石)은 삼국시대 고분 가운데 최초로 무덤에
묻힌 주인과 만든 시기를 확실히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있다.
금제뒤꽂이<왕>(국보 제159호)
이 문양(文樣)들은 모두 한쪽에서 두드려 낸 타출법(打出法)을 쓰고 세부에 대한 표현에는 선각(線刻)을 아울러 쓰고 있다.
공주의당금동보살입상(국보 제247호)
1974년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송정리의 한 절터에서 출토된 보살상으로, 높이는 25㎝이다. 튀어나온 부분의 도금이 일부 벗겨졌
을 뿐 금색이 우수하고 출토된 곳이 확실한 보살상으로 안정된 표현기법과 배꼽부분에서 교차된 구슬장식, 둥근 연꽃무늬 대좌 양식
등에서 7세기 백제 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석수(국보 제162호 )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때 만들어진 석수이다. 석수(石獸)란 돌로 만든 동물의 상(像)으로 좁게는 궁전이나 무덤 앞에 세
워두거나 무덤 안에 놓아두는 돌로 된 동물상을 말한다. 무령왕릉 석수는 높이 30.8㎝, 길이 49㎝, 너비 22㎝로 통로 중앙에서 밖을 향
하여 놓여 있었다. 입은 뭉뚝하며 입술에 붉게 칠한 흔적이 있고, 콧구멍 없는 큰 코에 눈과 귀가 있다. 머리 위에는 나뭇가지 형태의
철제 뿔이 붙어있다. 몸통 좌우, 앞·뒤 다리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날개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꼬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배설 구멍이 달려 있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무덤 수호의 관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
견된 것이다.
<인터넷 자료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