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3  명예회장 별세.

 

평생교육날로 회사에서 QSS활동중 박 명예회장님 별세소식을 접하게 된다.

17:20' 전회장님 별세.

 

30여년 근무하면서 한번도 뵙지 못했던 철강왕 박전회장님!!!

비보에

 

약속 되어져 있던 회식도 적당히 둘러대고

숙연한 마음으로 귀가를 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혼신을 다해

일하고 또 일하셨던 산업 근대화의 큰별이

박정희 전대통령 곁으로 가셨다.

 

 

마음이 착잡한데 핸폰 메세지 신호음이 울린다.

 

"고 박태준 명예회장을 경건하게 추모하기 위해몇가지 당부말씀 드립니다.

근조복장으로 출근 하시고 각종 행사와 회식등은 가급적 자제 하시기 바랍니다.

근조복장은 검은색 정장 또는 검소한 복장 또는 근조리본 착용/출근길배부"

 

회사에서의 추모관련 당부 메세지이다.

 

 

맡은바 소임을 성공리에 마무리 하고

충성을 다한 철강왕 박전회장님의 결과보고에

 

박전대통령은 얼마나 흡족해 하실까?

 

빈곤을 퇴치하고 경제대국으로의 대한민국을 보란듯 일구어내신 두분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할수 있으리오.

 

 

걱정 근심 없는 극락의 세계에서 편안히 영면하소서.

 

 

 

 

 

 

언론에 보도된 글을 스크랩해본다.

 

<한국 철강사 쓴 '철의 사나이' 눈감다 >

[아시아경제 조슬기나 기자]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에게 철은 곧 국가였다. '철의 사나이'라는 수식어는 국내 제일의 철강사 포스코

(구 포항제철)의 첫번째 수장으로 오늘날 한국 철강업을 일군 박 명예회장이었기에 붙은 별칭이다.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는 당대 35년 동안 연간 조강생산 800만t을 이뤘지만 박 명예회장은 25년간의 사장 및 회장 재임기간 중 2100만t을

달성했다. 그가 첫 삽을 뜬 포스코는 오늘날 세계 5위, 연간 조강생산량 3540만t에 달하는 굴지의 철강사로 성장했다.

박 명예회장은 1968년 포항종합제철의 사장을 맡은 후 1992년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민영화를 거치며

포항제철이 포스코로 바뀌고 새로운 전문 경영인들이 등장했지만, 포스코에 대한 그의 애정은 늘 변함이 없었다.

올초 포스코 청암재단 시상식을 찾은 박 명예회장은 포스코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뒤에 있는
정준양 회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정

회장이 잘하고 있다"며 믿음을 드러냈다. 9월에는 과거 포항에서 자신과 함께 근무했던 퇴직직원들과 19년만에 재회하는 자리를 마

련해 "청춘을 바친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우리의 추억이 포스코의 역사와 조국의 현대사 속에 묻어 있음을 잊지 말자"고

언급키도 했다.

박 명예회장이 포항제철소 건설을 진두지휘하기 전, 국내 철강산업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한국 정부가 철강산업의 중요성을 인식

하고 최초의 종합제철 건설 계획을 세운 것은 1958년 자유당 정부 시절이었으나 연간 선철 20만t 생산을 목표로 했던 이 계획은 자금

부족, 정국 혼란 등으로 무산되고 말았으며 결국 다섯 차례에 걸친 제철소 건설 시도는 모두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종합제철 건설 계획이 보다 구체화된 것은 1961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부터다. 정부는 철강산업이 다른 산업에 기초 소재를 제공하는

산업으로 빈곤에서 탈피하고 자립경제를 달성하기 위해 제일 먼저 기초를 다져야 할 필수 산업임을 인식하고, 조국 근대화라는 국가

적 비전을 이루기 위해 종합제철건설을 구상했다. 이 특명을 받은 자가 바로 당시 대한중석 대표이사 사장으로 재직중이던 박 명예회

장이다.

박 명예회장은 1968년 4월 1일 34명의 임직원들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의 창립식을 가졌다. 그리고 1970년 4월, 경북 포항 영일만에

조강연산 103만t 규모의 1기 설비 착공에 돌입했으나 공사는 좀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건설 경험도, 기술도 없던 터라 더욱 쉽지 않았

던 도전이었다. 박 명예회장은 "혈세로 짓는 제철소 건설이 실패하면 역사와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실패하면) 우

리 모두 우향우해 영일만에 투신해야 한다"며 입술을 깨물고, "국가숙원사업에 동참한 긍지와 사명감을 갖자"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불퇴전의 각오로 매진하자는 리더의 강력한 의지는 현장에도 그대로 녹아들었다. 결국 예정보다 1개월 앞당긴 1973년 6월 9일 우리나

라 최초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흘렀다. 한 달 뒤에는 연간 조강생산능력 103만t의 1기 설비가 성공적으로 완공됐다. 이후 박 명예회장

의 '우향우 정신'은 오늘날 포스코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이자 기업문화로 자리잡았다.

1981년 2월 18일 조강연산 850만t 규모의 포항4기 설비종합 준공에 이르기까지 포항제철소 건설사업은 규모나 물량, 공사 금액, 기간

등 어느 모로 보나 사상 초유의 대역사의 연속이었다.

포스코는 주설비 착공 13년만에 910만t 체제의 대단위 제철소를 세계 에서 가장 저렴한 건설비로, 가장 짧은 기간 내에 완공하는 기록

을 세웠다. 특히 1972년 7월 후판공장 가동 이후부터는 조업과 건설을 병행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매기(每期)마다 공기(工期)를

단축해 왔다.

특기할 일은 260만t 체제의 2기 설비를 준공한 1976년 5월 이후부터 우리의 철강생산 능력이 북한을 앞지르기 시작하여 910만t 체제가

완료 된 1983년 5월에는 2배 이상의 조강생산 능력을 갖추게 됐다는 것이다. 또한 1기 가동 6개월만인 1973년 말 46억원의 흑자를 기록

한 이래 매년 흑자행진을 지속하면서 2기부터 자체자금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설비확장 투자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이어 포스코는

1978년 10월 제2제철 실수요자로 확정되면서 광양에 4기에 걸친 총 1140만t 규모의 일관제철소 건립을 시작했다. 1992년 10월 2일 4반

세기 대역사 종합준공을 함으로써 광양 제철소는 최적의 생산규모를 갖춘 세계 최대의 단일제철소이자 21세기 최신예 제철소로 탄생됐다.

오늘 날 세계 5위(조강생산량 기준) 철강사로 성장한 포스코의 역사는 한국 경제의 성장사와도 궤를 같이하고 있다. 연간 조강생산

103만t 규모의 1기 설비로 시작한 포스코는 지난해 조강생산량 3370만t, 매출액 32조5820억원, 영업이익 5조470억원, 순이익 4조2030억원

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창립 당시 34명의 임직원은 1만7450여명(계약직 포함)으로 늘어났다.

또한 포스코는 조업 개시 이래 품질 좋은 철강재를 공급함으로써 조선, 가전, 자동차 등 국가 산업발전의 근간이 되는 주요 관련 산업이

선진국 수준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슬기나 기자 seul@

 

 

 

 

한국의 '철강왕' 고(故) 청암(靑岩)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그는 제철보국(製鐵保國)의 일념으로 국가경제 기틀을 마련한 불세출의 경영인이다.

맨주먹으로 포스코의 신화를 이룬 한국 철강산업의 아버지. 그의 불굴의 의지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포스코는 물론, 한국 경제의 신화도

없었을 것이라는 데 이견을 달기 어렵다.

'TJ'란 애칭으로 불렸던 그는 고 정주영 회장, 고 이병철 회장과 함께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한국의 3대 기업인으로 꼽힌다.

1920년대 일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포항제철의 설립자, 집권당 대표, 국무총리 등 군인과 경제인, 정치인, 행정가의 길을 걸어온 그의 삶

은 한국 현대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는 허허벌판이던 영일만 한복판에서 제철산업을 통한 산업입국을 다짐, 경제개발 5개년계획(2차)이 한창이던 1968년 4월 1일 '포항종합

제철주식회사' 현판을 내걸었다. '제철보국'을 향한 대장정의 첫발이었다.

그리고 5년 만인 1973년 6월. 다들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그는 포항제철소에서 쏟아지는 쇳물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좋은 철을 생산하는 포항제철소가 있었기에 한국은 세계 최고의 조선, 가전, 자동차를 만들 수 있었고 세계 1위의 조

선강국도, 세계 5위의 자동차 강국도 가능했다.

영일만의 기적 40여년이 흐른 현재 포항제철은 매출 100조원을 바라보는 세계적인 철강 기업으로 우뚝 섰다.

등소평은 "(제철소를 짓기 위해) 박태준을 수입해야겠다"고 까지 말할 정도였고 중국에서는 박태준 연구 열풍이 불기도 했다.

특히 그는 제철소 건설에만 신경쓰지 않고 나라의 인재를 키우기 위해 포항공대, 포항제철고 등 한국 최고의학교들을 설립하는데 기업의

이익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 등 사회복지에도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한겨레신문 창간 당시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도 있어야 한다"며 거액을 지원한 일, 10·26 사태 이후 방송출연이 금지된 가수 심수봉의 생계

를 챙긴 일 등은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사만큼은 '3김(金)'을 비롯한 '정치고수'들의 틈바구니속에서 순탄치 못했다.

육사 출신(육사 6기)인 그는 군부 후배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1981년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금배지를 달면서 정계에 입문, 자

민련 총재와 국무총리 등을 지냈지만 2000년 5월 총리직 사퇴를 끝으로 환멸을 느끼며 정계를 떠나야 했다.

YS와의 불화는 대선 이듬해 포철에 대한 국세청의 강도 높은 세무조사로 이어졌고 TJ는 이후 4년간 외국을 떠돌았다.

자민련 총재직에 오른 후JP에 이어 국무총리가 되지만 내각제 개헌과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둘러싼 당내 충청권 의원들과의 갈등과 DJP

공조 파기로 JP, DJ와도 잇따라 결별해야 하기도 했다.

정계를 떠난 뒤 그는 2002년 명예회장 자격으로 포스코에 컴백, 철강업계 '거목' 자리를 지켜 왔으며 정치인보다는 '경제인'으로 기억되길

희망했다.

84세로 영면한 고 박 명예회장은 부인 장옥자씨(80)와의 사이에 장남인 박성빈 사운드파이프코리아 대표(46) 등 1남4녀를 두고 있다.

 

 

 

포스코 창업자인 박태준 명예회장이 13일 오후 5시20분 지병인 폐질환이 악화돼 별세했다. 향년 84세. 유족으로는 부인 장옥자씨(80)와 1남4녀가 있다.

 

 

 

 

 

 


박 명예회장은 지난달 9일 호흡곤란으로 폐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지만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주치의인 장준 세브란스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폐에서 석면과 규폐(규소를 포함한 분진 때문에 생기는 폐질환)가 발견돼 이에 따른 염증 반응이 후유증을 유발했다”고 밝혔다.

고인은 한국 근대사에 ‘포철 신화’를 일군 ‘철강왕’이라는 평가 외에 5·16 군사 쿠데타와 관련된 군부 정치인이라는 이중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1927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박 명예회장은 1961년 5·16 쿠데타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됐다. 이후 대한중석 사장을 거쳐 1968년 포항제철 사장에 임명됐다. 그는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한국 최초의 일관제철소인 포항제철소를 건설하며 ‘포철 신화’를 쌓았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 등장 이후 민정당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진출했다. 11~15대 국회의원을 거친 그는 1992년 10월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민자당을 탈당했다. 이듬해에는 포항제철 명예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돼 4년간 해외 망명생활을 했다.

1997년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복귀한 박 명예회장은 자민련 총재로 영입돼 ‘김대중·김종필(DJP) 연합’을 주도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2000년 총리직에 올랐으나 부동산 투기 문제가 불거지면서 4개월 만에 물러났다.

이명박 대통령은 “우리나라 산업화에 공이 큰 분이 우리 곁을 떠나게 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포스코는 “철강 불모지인 이 땅에 최초의 일관제철소를 성공적으로 건설하고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철강사로 성장시킨 한국 철강산업의 큰 별이 졌다”고 추모했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향년 84세로 별세

 

'철강왕'이라 불리며 우리나라 산업 근대화에 이바지포스코 창업자 박태준 명예회장이 오늘 별세했습니다.

박 회장은 포스코가 국가 산업의 동력으로 성장해 만족스럽다며 더 성장해서 세계 최강의 포스코가 되길 기원한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빈소가 차려진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는 많은 기업인과 지인들의 추모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장에 나가있는 취재기자 연결하겠습니다. 이승윤 기자!

현재 빈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리포트]

이곳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오늘 오후 5시 20분쯤 포스코 설립자이자, 명예회장인 박태준 명예회장이 별세했습니다.

박 회장은 가족들에게 "포스코가 국가 산업의 동력으로 성장한 것에 대해서 대단히 만족스럽다면서 더 크게 성장해서 세계 최강의 포스코가 되길 기원한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또 포스코 창업 1세대 가운데 상당히 어렵게 사는 분들이 많아 안타깝다면서 포스코 임직원들에게는 항상 애국심을 갖고 일해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특히 부인인 장옥자 여사에게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말했고, 가족들에게는 화목하게 잘 살 것을 주문했습니다.

박태준 회장은 본인 명의로 된 집도, 포스코 주식 한 주도 없을 정도로 재산이 풍족하지 못해 자비로 병원비를 조달하기 어려운 형편이어서 자녀들이 입원비를 충당했다고 유족들은 밝혔습니다.

앞서 유족들은 신촌 세브란스 장례식장 특1호실에 빈소를 마련하고 오늘 저녁 8시에 기자회견을 열고 장례 절차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김명전 장례준비위 유족측 대변인은 평소 검소했던 고인의 뜻을 존중하고 싶어하지만, 법 규정에 따르면 국무총리를 지냈기 때문에 사회장으로 치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장례일은 5일장이 관행이나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일반 국민들을 위한 빈소를 따로 마련하겠다면서 오늘 중으로 장례 절차를 확정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포스코는 박 명예회장이 포스코와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 점을 고려해 최대한의 예우로 장례를 준비한다는 방침입니다.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대전 현충원 국립묘지에 안장될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이유는 세가지인데요, 먼저, 무공훈장을 받은 경력이 있기 때문에 국가 유공자 묘역에 안장될 수 있고, 육군 소장이었던 만큼 장군 묘역에 안장될 수도있으며, 국민훈장 1등 훈장을 받았기 때문에 국가사회 공헌자 묘역에도 안장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박태준 명예회장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닷새동안 거행되고 가장 등급이 높은 대전 현충원 국립묘지 국가사회 공헌자 묘역에 안장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질문]

박태준 명예회장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면서 박태준 명예회장을 추모하는 발걸음이 이어졌다고요?

[답변]

진념 전 경제부총리가 오늘 저녁 7시쯤 빈소를 찾는 등 오늘 이곳 병원에는 일찍부터 가족과 지인들이 많이 다녀갔습니다.

진념 전 부총리는 박태준 회장이 포스코를 세운 뒤 세계 최고의 회사로 키운 한국 산업 근대화의 주역이었다면서 관직에 있을 때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봉사했다며 고인을 추모했습니다.

이어 빈소를 방문한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사욕없이 살았던 기업인들의 큰 어른이 너무 빨리 떠난 것이 아쉽고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더 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이희범 한국경제인총연합회장과 강덕수 STX 그룹 회장이 방문했으며, 노태우 전 대통령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두산 박용현 회장은 조화를 보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우리나라 산업화에 공이 큰 분이 우리 곁을 떠나게 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며 애도의 뜻을 표하고 조화를 보냈습니다.

지금까지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YTN 이승윤[risungyoon@ytn.co.kr]입니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84세로 별세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84)이 13일 오후 5시께 지병인 폐질환 악화로 별세했다.

고인이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과 포스코 측은 이날 그의 타계를 공식 확인했다.

병원 측은 "오후 5시20분쯤 급성 폐손상으로 인한 호흡곤란이 발생해 운명했다"고 밝혔다. 고인은 무공훈장 수훈 등으로 자격을 갖춰 유족 측의 신청을 거쳐 국립묘지에 안장될 것으로 보인다. 또 포스코 측은 장례 절차에 관해 "유가족과 논의 중이며 법과 규정에 따르면 국무총리를 지내셨기 때문에 (사회장)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명박 대통령은 별세 소식에 "우리나라 산업화에 공이 큰 분이 우리 곁을 떠나게 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박정하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또 정치권과 재계에서도 "위대한 경영자를 잃었다"며 고인이 한국 철강산업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공적을 기리며 추모했다.

고인은 지난달 9일 호흡 곤란으로 흉막-전폐절제술을 받기 위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수술 후 회복될 것이라는 주변의 기대에도 지난 5일 급성 폐손상을 겪으며 중환자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다. 10년 전 흉막 섬유종으로 미국 코넬대 병원에서 왼쪽 옆구리 33㎝를 갈라 3.2㎏ 무게의 폐 물혹을 제거하는 수술이후 후유증을 겪어왔다.

고인은 1927년 경남 양산 출신으로 포항, 광양 허허벌판에 제철소를 세운 '제철보국 신화'를 이뤄낸 인물이다. 이와 동시에 5·16때 세력으로 분류되는 군부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도 있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중퇴)와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6기)를 거친 뒤 1961년 쿠데타 이후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된다. 그러면서 개발독재와 산업화의 양면을 그리는 대한민국의 성장의 한 축을 맡게 되는데, 그것이 1968년 포항제철 사장직이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 철강기술을 들여오고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포항제철의 일관제철소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후 한국의 철강산업은 물론 조선, 자동차, 기계 등 전 산업군에 철강을 공급하면서 산업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장옥자 여사(80)와 1남4녀가 있다.

/skjung@fnnews.com정상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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