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2 조계산.
한서와 3번째 산행이다. 보고 또보고 또보는 산님들이라서 보다 더 반가울줄 알았는데 영 거꾸로 올
씨다이다. 일행중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인사를 건네는데 시큰둥이다. 한사람이 그러니까 주위의 한
두사람까지 따라 그러는것 같다. 새벽부터 심상치 않던 분위기는 온종일 그렇게 이어지게 된다.
- 금죽헌
송광사 매표소를 지나면서 왼편으로 통나무 기둥위에 엄청나게 큰빗이 눈길을 끌어 들어가보니 낯선 미술관
이다. 이십여년전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전에는 무심코 지나쳐서 보지못했던 곳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손님은
아무도 없고 개량한복차림으로 머리를 길게 길러 뒤로 묶은모습이 예술을 하는 것같은 그런 한분과 스무살은
조금 넘어보이는 처자가 조용한 대화를 나누다 말고는 반갑게 맞는다.
물건을 살것도 아닌데...괜히 미안해서 구경좀 하려구요... 한다. 예술인으로 보이는중년의 남자분이 편안한
웃음으로 그렇게 하시라며 다가와서는 빗에 대하여 설명을 하시는데 사용하는 나무종류등 그런이야기들로 주로
과실(열매)이 달리는 나무로 만든다고 한다.
좀더 이런이야기 저런이야기도 하고싶지만 그냥 지나쳐간 일행들 생각에 잘보았다는 인사를 남긴채 서둘러 송
광사로 향한다.
송광사 경내 금죽헌 미술관 입구. 통나무위의 빗이 정말 크다.
왼편으로는 작업공구가 놓여져있고 그뒷벽면에는 완성된 제품(얼레빗)이 액자에 또다른 작품이 되어 걸려져있다.
정면의 진열장뒤 액자에는 그예술인으로보이는 분이 신문에 실렸었던 사진과 내용들인것 같다.
귀가후 인터넷검색을 해보니 예술인정도가 아닌 아주 귀한 분이시란것을 알게 된다.
그사진의 주인공은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된 낙죽장의 칭호를 받고 있는 김기찬이란 분으로 얼레빗
분야에서도 기능전승자로 지정돼 있는 분이셨다.
사진이라도 한장 찍어드리고 싶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가까이 하기가 어려워서 용기를 내지 못했었는데 알고보니
정말 대단한 분이시다.
김기찬 관장님이 제작해놓은 얼레빗들이 진열장에 전시되어져있다.하나에 돈만원정도씩 가격표가 붙여져 있는데
그예술성에 비하면 어디 가격으로 가늠되어질 일인가 싶다.
하나를 살려고 하다가...
얼레빗이란 대추와 살구, 박달나무 등으로 만든 나무빗의 일종으로 거의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공예품 중 하나로 김
기춘님에 의해 소량으로 만들어지는 국내 유일의 나무 머리빗으로 빗살이 촘촘한 참빗과 달리 빗살 마디가 다소 굵
고 성긴 것이 특징이이라고 한다. 정전기가 발생하지 않고 두피에 신선한 자극을 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
랑을 받고있는 그러한 빗이라고 한다.
- 송광사
금죽헌 기념관을 나서니 이미 일행들은 다들 지나간듯 아무도 보이질 않는다. 부지런한 걸음으로 송광사를 향한다.
오늘은 지난번 그냥 지나쳤엇던 송광사내 국보및 보물들을 하나하나 둘러볼 계획인데 아무래도 일행들과는 같이할
수 없을것 같다.
조금을 오르니 청량각이 발길을 머물게 하는데 그곳에서 일행 한분을 만난다. 다들 이미 멀리 올라가버린줄 알았었
는데 겨우 몇걸음 아닌 이곳에서 벌써 만나다니 반가움에 알분체를 하니까 낯선사람 보듯 한다.
허탈하고 뻘쭘한 기분이 되어 청량각을 건너 바쁘게 걷는데...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왔는지 소풍을 왔는지 수백명은 될듯 경내에 가득하니 도때기 시장을 방불케 정신이 없게 한
다. 오늘따라 왜이런지 모르겠다. 새벽에 한서와의 만남도 예전같지 않고 오는도중 섬진강 휴게소의 어이~~~건도
영 걸린다.
가만...그래... 목조삼존불감.국사전.고려고종제서.비사리구시.능경난사.쌍향수는 꼬옥 둘러보자.
청량각
배경사진을 찍고싶은데 난간에 어느 중년남자가 거슬린다.눈치도 없이 비켜줄생각은 않고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좋은
여행에서 좋은생각을 해야하는데 왜이렇게 거슬르는일들이 생기는지 ...
청량각은 송광사에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개울의 다리 역할을 하는 건물로 속세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는
곳으로 홍교를 쌓아올려 그 다리 위에 조성된 건물이다.
무지개 다리
청량각을 건너오니 생뚱한 안내현수막이 걸어서 내려가란다.
척주각과 세월각
척주각은 죽은 자의 위패를 실은 가마(영가 - 靈신령 영,駕멍게 가·탈 가)가 입사(入寺)하기 전에 이곳에서 속세의 때를
벗어야 사찰에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여겨 남자 靈駕(영가)가 목욕하는 곳이다.
세월각.척주각
세월각은 죽은 자의 위패를 실은 가마(영가)가 입사(入寺)하기 전에 이곳에서 속세의 때를 벗어야 사찰에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여겨 여자 靈駕(영가)가 목욕하는 곳이다.
광목천왕 - 계절적으로 가을을 맡았고, 가을에는 곡식이 열매를 맺는 시기인지라 일조량이 많아야 하고, 비는 적어
야 한다. 비는 용과 관계가 있는데, 용은 여의주를 좋아한다. 하늘 신은 그러한 용을 잘 다루어 이롭게 한다. 광목천왕
의 방위는 서쪽이다.
다문천왕 - 북쪽에 위치하는 다문천왕은 겨울을 나타내는 하늘신이다. 겨울은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때이다. 대개의
사찰에서는 불탑을 들고 있는데 반해 송광사는 우승기를 들고 있는 하늘신이다. 공든탑이나 우승기나 모두 완성을 뜻
하는 의미가 있다.
지국천왕 - 시간적으로 봄을 맡아 만물을 소생케하고 악기를 가지며 항상 웃는 얼굴로 방위로는 동쪽을 나타낸다.
증장천왕 - 계절적으로는 여름을 맡고 있으며, 대개 다른 사찰에서는 채찍을 들고 있는데 송광사의 증장천왕은 칼을
가졌다. 채찍이나 칼이나 모두 좋은 계절에 열심히 일하라는 경책의 의미이고 방위는 남쪽을 가리킨다.
지난번 들렀을때는 천왕문 통로 한켠에있었는데 승보전 한켠 처마밑으로 옮겨져 있다.
성보박물관
많은 국보및 보물들이 전시되어져 있다. 목조삼존불감.고려고종제서.능경난사등을 관람할수 있는데 안타까운것은
촬영이 금지되어있어 촬영을 할수가 없다는것이다.
승보전쪽에서 바라보이는 대웅보전.
성보박물관에서 목조삼존불감을 관람하고 나와보니 그많던 학생들이 썰물빠지듯 경내가 한산해졌다.
경내를 혼자 바쁘게 오가고 있는데 꿈나무님이 나타나셨다 반가움에 동행을 넌지시 타진을 하는데 전에 황매산
산행이 너무 힘들었다는 대답으로 대신하고는 먼저 가신다고 한다. 말끝에 16시까지 선암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야 한다고 하는데 시간을 보니 12시30분이 넘는다.
여행을 시간에 속박당하고싶지가 않고 그래서 시간개념없이 즐기고싶은데 아무래도 빡신 걸음이 불가피 할것 같
다.이곳 송광사 주차장 도착및 산행출발이 40여분이나 늦어졌는데도 선암사 도착시간은 기존 계획 그대로이다.
더욱 바쁜걸음으로 또 혼자가 되어 이곳 저곳을 부지런이 카메라에 담는다.
지장전
대웅전과 승보전
영산전과 약사전이 절마당 한켠에 다정하다.
승보전과 성보박물관
관음전과 오른편으로 상사당.하사당(보물 263호)
-상사당: 방장스님의 요사채
-하사당: 조선 세조 7년(1461년) 창건. 1899년에 중수.
우리나라에서 가장오래된 요사채로 솟을지붕식의 환기공이 특징이다.
관음전
관음전과 하사당
관음전에서 바라보이는 송광사 경내
관음전.
대웅전 좌측 상단에 위치한 관음전은 본래 성수전이라 하여 1902년 고종황제의 성수망육(51세)을 맞아 사액(賜額)
된 황실기도처로 1903년 건축되었다. 1957년 舊 관음전을 해체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이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지금도 관세음보살 좌우에 그려진 태양과 달이 왕과 비인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상징하고 있다. 관음전의 내부에는
다른 법당과는 달리 불단을 감실(불단의 좌우에 벽을 만들어 방과 같이 만들어준 공간)로 만들어 관세음보살을 모시
고 있다. 외벽의 벽화는 화조도, 산수화등으로 일반적인 사찰의 벽화와는 다른 것이 송광사 관음전의 특징이라고 하
는데 서둘다보니 자세히 둘러보지는 못한다.
설법전
대웅전 뒤의 계단을 올라 진여문(眞如門)을 통과하면 설법전이다. 설법전은 원래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봉안해
두던 곳으로, 1899년(광무 3년) 나라에서 해인사 대장경 4부를 칙인(勅-조서칙, 印-도장·찍을 인)하여 그 1부는 전
국의 명찰에 배포하고 나머지 3부는 삼보사찰에 각각 봉안토록 하여 보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통도사와 해인사의
대장경은 현재에도 잘 보존되고 있으나, 송광사의 대장경은 1951년 화재로 설법전과 함께 소실되어 버렸다.
현재는 법회 등을 위한 대강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정면에는 '팔만경당' 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고 하는데 접근
이 불가하니 볼수있는 방법이 없다.
지장전
원래 명부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이전, 증축한 것으로 지장보살과 시왕이 모셔져 있다.
승보전
1988년 중창 이전에는 대웅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서 당시에는 사찰의 중심 건물이었다.
영산전과 약사전.
영산전은 일명 팔상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법화경에서 비롯된다. 또한 영산정토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데 법화
경에 기록된 것을 참고할 때 석가여래가 열반을 보이는 것도 중생들로 하여금 해태심(懈怠心)을 없애고 불도를 닦게
하는 방편이요, 석가여래 자신은 과거 무량겁래(無量劫來)로 영취산에 상주하여 법화경을 설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약사전은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모시는 불전으로 약사여래는 병을 치료해주고 고통을 덜어주는 현실적 필요의
부처다. 약사의 세계는 동쪽 정유리정토이며, 일광월광보살을 좌우에 동반한다. 조선조에는 대웅전의 부불전으로 많
이 신앙되었다. 송광사 약사전은 규모가 작고 위치도 모퉁이에 있지만 건축적으로는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중요한 건
물이다. 원래는 약사전의 4면을 전각들이 둘러싸고 있었으나 현재는 대웅전에서 보아 앞마당의 좌측 모서리 부분에
영산전과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국사전
국사전은 승보사찰 송광사의 상징적인 건물로 16국사의 영정을 봉안하고 그들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전각으로 조선조 초기 목조건물 및 불화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요사채
대웅보전
송광사의 중심건물로,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 제도를 염원하는 삼존불(과거 - 부처님 진신사리, 현재불 - 석가불,
미래불 - 미륵불)과 문수·보현·관음·지장의 4대 보살을 모시고 있다.
영산각쪽에서 바라보이는대웅보전
대웅보전쪽에서 바라보이는 종고루
성보박물관
현재 유물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는 곳이다.
개 관 9:00∼11:00 12:00∼17:00
정기휴관 매월 첫째주, 셋째주 월요일
비나 눈이 오는 날은 유물보존을 위해 휴관을 한다고 한다.
송광사 약수
사천왕문및 우화각
사천왕문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인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사천왕은 부처님이 계시는 도솔천에 들어가기에
앞서 지나가야 할 최초의 하늘 세계로 모든 사찰에서는 일주문을 지나 위치하는 전각이다. 사천왕은 동·서·남·북
의 방위와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를 나타낸다.
종고루
해탈문이 있던 위치에 1962년에 중건된 종고루에는 범종, 운판, 목어, 홍고 등이 비치되어 있다.
임경당에 딸린 육감정과 우화각
일명 능허교(凌虛橋)라고 불리는 우화각에는 송광사를 거쳐간 시인묵객들의 한시가 빽빽하게 걸려 있다. 이곳
은 입구 쪽과 출구 쪽의 지붕이 각각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으로 서로 다른 형태로 되어 있다.
일주문
송광사 배치 안내도
윗쪽에서 내려다보이는 우화각
- 굴목재
송광사를 나서면서 의식적으로 시계를 보게 된다. 12시45분이다. 선암사 주차장까지 16시 도착하라고 했으니까
3시간15분이 남았다. 천자암을 들리고 보리밥집을 들리고 선암사를 들리고 승선교 선녀를 만나려면 아무래도 빡
빡하다. 부슬부슬 이슬비는 나리는데...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다. 먼저간 일행들은 어디쯤 갔을까? 가고 있을까? 송광사를 그냥 지나쳐 올라간 일행들과
는 적어도 사십여분이나 늦은걸음이다보니 마음이 급하다.
장군봉쪽으로 일행들을 곧장 따라 붙으면 장군봉쯤에서는 합류를 할수도 있을것 같지만 이래저래 혼자된것 천자
암쪽으로 향한다. 본래 나름의 계획이기도 하긴 하다. 송광사에서 송광굴목재방향으로 오륙백미터정도 오르다보면
조그만 냇가를 건너기전에 오른쪽으로 천자암 가는길이 있다. 천자암방향으로 접어드는데 시골집같은 농막에서 젊
은이 한사람이 비오는데 무슨산행을 하느냐고 염려인지 빈정거림인지 한마디 하는데 반갑지가 않다. 그농막 위는
농구장(송광사 스님들 체력단련용)으로 농구골대가 양쪽으로 세워져있고 그곳을 지나면서부터는 숲터널로 접어들
게 된다. 지속되는 오르막길을 오랜만에 땀좀 흘리는것같이 흘리면서 이름도 모를 지능선을 올라서는데(송광사
0.8km. 천자암1.8km) 20분이나 걸렸다. 0.8km에 이십분이면 이곳에서부터 천자암까지 1.8km는 50분이 걸린다는 얘
기인데 조금전 천자암 방향으로 들어서면서 보았던 안내표지판(천자암 80분)의 내용이 얼추 맞아지는것 같다. 그렇
담 마음만 급했지 별로 빠른걸음이지도 않았다. 능선의8~9부에 등산로가 조금은 오르락 내리락 하지만 오름길보다
야 빠르지 않겠는가? 미지의 초행길 안개속의길을 쌍향수를 생각하며 얼마를 달렸을까?
눈앞에 천자암 종루가 나타고 천자암 마당으로 들어서서 쌍향수를 만나게 된다. 13시30분이다.
능선에 올라서 천자암으로 이어지는 안개속의 등산로 이곳에서부터 천자암까지는 1.8km
안개가 걷히는가 싶더니 천자암 종루가 눈앞에 나타난다.
천자암 입구
인기척도 없는 비나리는 천자암을 조용히 들어선다.
쌍향수와 천자암 라한전
송광사 곱향나무 쌍향수.
는 나이가 약 800살 정도 추정되며 높이 12.0m.둘래 4.10m. 3.30m이다.
원통전.
초암사 쌍향수 앞에서...
스님옷색갈의 회색바지에 허름한 작업복 상의를 걸친 머리가 덥수룩한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니 비오는데 웬일로 올라왔냐고 이해할수가 없다는 표정이다. 내키지 않는 사진 부탁을 해보는데... 생각대로
성의가 전혀 없어보인다. 입에는 담배를 꼬나물고 한손으로 카메라를 들고는 그팔을 가지것 쭉 내민다. 이런 하고는...
사진이 제대로 나올리가 만무하다. 곧바로 확인을 해보니 구도가 전혀 맞지않았지만 고맙다며 수고하셨다며 다시
이렇게 저렇게 찍어달라며 재차 부탁을 한다.
그렇게 해서 다시부탁한 그림이 이모양이다. 심뽀 하고는...
전설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보조국사(普照國師)와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중국에서 돌아올때 짚고온 향나무를 이곳
에 나란히 꽂은것이 뿌리가 내리고 가지와 잎이 나서 자랐다고 한다. 담당국사는 왕자의 신분으로 보조국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나무의 모습이 한나무가 다른나무에 절을 하고 있는듯하여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나타내는 모습이라고 말
하기도 한다. 또한 한손으로 밀거나 여러사람이 밀거나 한결같이 움직이며 너무에 손을 대면 극락(極樂)에 갈수있다고
한다.
쌍향수와 십여분간을 함께 하다가 아쉬운 이별을 한다. 13시 45분이다. 자꾸만 시계로 눈이 간다.
천자암에서 천자암봉을 오르다가 만나지는 안내 표지판.
천자암봉
이곳 천자암봉 바위전망대는 연산봉과 장군봉이 지척으로 바라다 보이는 곳인데 오늘은 안개속에 묻혀 조망이
전혀 안된다.
누군가가 천자암봉에 이정표를 만들어 놓았다. 시계는 14시다. 굴목이재로 향하면서 굴목이재 조금 못미처의
보리밥집으로 향하는 갈림길을 살피는데 그러한 갈림길을 만나지 못한다. 하는수없이 굴목재로 내려서는데 왁
자지껄 사람소리가 가깝다. 굴목재에서도 도때기 시장이 열렸나?
이비오는날에 산을 오른이들이 한서말고도 또 다른사람들도 있나보다. 그런데 왜그렇게들 시끄러울까? 산새들
이 산란철이라고 하던데...
혹시나 한서님들? 한서님들은 아니겠지? 한서의 산행코스는 굴목이재 못미처 갈림길에서 연산봉으로 바로 오
르기로 되어있으니까 그리고 또한 시간상으로도 그렇다.
굴목이재로 내려서는데 낯익은 분들이 많다. 한서님들이 식사를하고 있다. 어떻게 된일인가?
나만 일탈을 한것이 아니고 많은 산님들이 계획된 코스에 이탈이 되어있는것이 아닌가...
자기들이 오른길이 아닌 어떻게 다른길로 올라왔냐고 다른길도 있었는가 의아해들 하신다. 이미 식사를 마치고
일어난 꿈나무님및 몇몇분이 점심식사를 하라고 하는데 생각이 없다.
굴목재에서...
주방.
아주머니 두분이 미나리를 다듬고 있는데...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도 반가운 기색들이 없다. 둘이 들어서면서 밥을 하나만 주문하니까 아주머니들 안색이
그런건가?
인터넷등에서 이곳을 다녀간 글들을 보고온터라 기대는 안했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나가기도 그렇
고 또 천자암 간 일행들을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던터라 식사를 하기로 한다.
보리밥.
별로 기다리지도 않아서 밥이 나왔는데 수저를 들려고 하다보니 미나리 무침에 긴머리카락이 섞어있다. 분위기만
괜찮았다면 골라내고 먹으면 그만일수도 있는 일이지만 아주머니를 부른다.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이 혼잣말로 왜 그런게 있냐며 미나리반찬을 들고는 보는앞에서 머리카락을 쭈욱 뽑으면서
나가더니 다시 가져다 놓는데 그릇모양이 같은 다른반찬인지 그반찬이 그반찬인지 영찜찜하기 그만이다. 보리밥 고
유의 구수한 보리맛도 없고 덩어리가 져서 잘 섞어지지도 않는다.
동동주?
동동주를 한주발 같이 시켰는데 아무리 보아도 동동주는 아니다. 아주머니 이거 동동줍니까 막걸립니까? 대답하기
가 곤란했던지 농주라고 한다. 동동주면 동동주고 막걸리면 막걸리지 농주는 또 뭐란말인가...그것도 좋다. 동동주던
막걸리던 농주던 무슨 술맛은 있어야 될것 아닌가? 술에 물탄것인지 물에 술탄것인지 네맛도 내맛도 없다. 음식(맛.
서비스.재료.정성등등)에 비해 터무니없는 값을 지불하고는 식사하면서 장밭골 계곡물소리 들은값 계산했다고 생각
을 한다.
더 앉아있고 싶지도 않고 길을 나선다. 놀며놀며 가다보면 뒤의 일행들을 만나지겠지...
계곡을 지나면서 일부러 다리아래로 내려간다. 혹시나 이름없는 그럴듯한 소(沼)라도 만날까 싶어서다. 그러는중에
뒤의 일행들과 합류가 되어지고 그러다보니 지금까지의 맡은바 소임(우리산악회 회장님 안내)도 다했다 싶어 선암굴
목재를 오르는데 그오름길에서도 벌써 일행과 시간차가 조금 벌어진것같아 굴목재에서 조금 서성이다가 깃대봉으로
향한다.
깃대봉길은 허리에서 가슴께까지 닿는 조릿대가 자라있어 이내 새앙쥐가 되고만다. 괜히 들어섯단 후회도 있다. 기
왕에 버린몸 정상까지는 갔다가 와야지...오기로 진행을 하는데 밍긋한 봉우리에는 아무런 표식도 삼각점도 없다. 부
지런한 걸음으로 굴목재를 되돌아 내려오니 한서님들이 막 선암사 방면으로 굴목재를 내려서고 있다.
굴맥이재의 이름과 전설을 친절하고 자세하게도 설명을 해놓은 안내판이 이슬에 함초롬하다.
여수 해양경찰서 산악회에서 만들어 놓은것 같다.
- 선암사
삼나무 군락.
선암 굴목재에서 선암사 거의 다내려와서 만나지는 군락이다.
막 출발을 한일행들 뒤에서 굴목이재의 완만한 비탈길을 따라 내려서는데 유일하게 손을 잡고 걷고있는 한쌍이있다.
아주 행복해 보이는것이 다정스런 부부같다. 가만봉께네 아까전 청량각에서 안면을 싹 바꾸던 그니다. 그래서 그랬었
나???
알것도 말것도 같은것이 괜히 깃대봉 다녀왔나 싶은 생각에 그니들을 지나쳐 달려내려간다. 그래도 강선루를 들러봐
야 하기때문이다.
삼인당.
선암사 일주문 입구의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만들었다는 조그마한 연못이다.
8월쯤 연못 가운데 섬위의 상사화가 그림같은 곳인데 꽃은 그렇다치고 알몸이 민망하다.
연못 바닥및 가장자리와 그주변을 보수한것같은데...
옛분위기가 반감되어져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선암사 일주문
선암사
전남 승주군에 있는 사찰이다. 542년(진평왕)에 아도화상이 처음 개창하여 미로암이라고 하였다 하나 875년(헌강왕5년)
에 도선이 창건하여선암사라 하였다는 설이 더신빙성이 있다.
절서쪽에 높이가 10장(丈)이나 되고 평평한 돌이 있는데 사람들은 옛선인들이 바둑을 두던곳이라고 하며 이때문에 선암
이라고 하는 절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으로 대웅이란 말의 뜻은 인도의 옛말 마하비라를 한역한 것으로 법화경에
서 석가모니부처님을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컬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선암사 영산 회상도
대웅전 본존불의 후면을 꽉채운 초대형의 이불화는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을 묘사한 영산회상도로서,석
가본존불은 거대한 화면을 압도하게끔 초대형으로 중상단에 걸쳐 배치하고 있으며 다른 협시상들은 상대적으로 작게
드려져 있다. 그러나 문수 보현등 화면의 아래쪽 협시보살들은 본존불의 광배에 따라 본존불을 둘러싸고 있는것 같다.
본존불은 거대한 체구만큼 대담하게 묘사되고 있는데 넓지만 각진 어깨 당당한 체구와 함께 둥근 얼굴의 원만한 표정
등에서 앞에앉은 괴체의 거대한 석가불상을 연상시켜주고 있다. 이불화는 압도하는 구도,대담한 형태,강렬한 색의 대
비등으로 장엄한 분위기를 잘묘사하고 있다.
원통전(圓通寶殿)
중생 구제를위한 대자대비의 원력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인 관세음 보살(觀世音菩薩)을 모신 전각이다.
대비전(大悲殿), 보타전(菩陀殿)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주불전일때는 원통전이라 부르며,부속 전각일때는 관음전
(觀音殿)이라고 부른다.
후불탱화로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도나 수월관음도 혹은 아미타불화를 봉안한다.
조사당(祖師堂)
선종사찰에서 그종파를 연 조사를 봉안한 절집이다.
선암사 경내에 있는 조선 후기의 불전으로 대웅전 바로 뒤에 있다.
선암사 대웅전(전라남도 유형분화재 제41)
선암사에 있는 조선후기의 불전이다.전체적으로 보아 출목수가 많아서 처마끝이 심하게 휘어올라갔으나 날렵하기
보다는 장중한 분위기의 건물로서 정면3칸.측면3칸인 다포계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선암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이다.
건물은 정면 1칸인 맞배지붕 겹쳐마집으로 서까래와 부연(副椽)을 한 다포시이다.앞에 9개의 돌계단을 설치하고 그
좌우로 용두와 비슷한 석상을 조각한 이건물은 다듬은 돌초석에 기둥은 민흘림의 기둥을 세유고 전후로 보조기둥을
세우게 되어있으나 위로부터 30cm중간에서 보조기둥을 절단 하였다. 이는 다른 일주문에서 볼수없는 기둥양편에 설치
된 담장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양기둥 위인 주두에 꼬리를 두고 서로 중앙을 향하여 곧 구름의 조화를 일으킬듯한 용두를 조각하여 승(僧)과
속(俗)의 경계에 위엄을 더하고 있다.
별기별은 없지만 소문난 선암사 해우소를 들어간다.
조금전 둘러볼때는 그냥 지나쳤었는데 선암사 입구에서 성화님을 만나서 두번째 둘러보다가의 일이다.
뒤깐에 앉아서 내려다 보이는 그림인데...
이그림? 만든다고 안봐도 될 볼일을 그것도 작은볼일을 바지를 내리고 쭈구리고 앉아보기는 또 생전 처음이다. 것참
별짓 다하고 산다. 옆옆칸에 일보는 사람들이 있어 더이상의 그림만들기가 난해하다. 초파일같은 행사때 들리면 재미?
있을것 같다.
대웅전 좌측 처마밑으로 선암사의 비사리구시가 비를 피하고 있다. 송광사의 비사리구시와 같은 용도였을까? 생김
은 송광사의 것과 영 다르다.
강선루
삼인당쪽에서 내려오는 조그마한 계곡 다리위에 세워진 누각인인데...
옆으로 차도를 만드는등 환경이 바뀌다보니 본래의 정감을 느낄수 없어 안타깝다.
승선교 (네이버 이미지)
선암사 입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석조 홍교로 길이14m.높이7m.너비3.5m로 보물 제400호이다.
길다란 화강암으로 다듬은 장대석을 연결하여 반원형의 홍예� 쌓았는데 결구솜씨가 정교하여 홍예밑에서 올려다
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과 같은 느낌을 준다.
홍예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둥글둥글한 내돌을 사용하여 계곡기슭까지 석벽을 쌓아 막았으며 측면 석축도 자연미
를 그대로 살렸다. 그리고 기단부에는 아무런 가설도 없이 자연암반이 깔려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휩쓸릴 염려가 없
다.또한 홍예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있어 석축에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있다.
승선교(네이버 이미지)는 임진왜란 이후 선암사를 중건할때 가설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1698년(숙종24)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시현(示現)을 바라며 선암사의 뒷봉우리에 있는 큰바위인 배바위에서 백일
기도를 하였다. 그러나 끝나도 관음을 보지 못하였다.
자신의 지성이 부족하고 심신이 약하여 만나지 못한것이라 여긴 대사는 낙심한 나머지 죽기로 작정을 하고 50척이
나 되는 벼랑에서 몸을 던졌다. 이때 한여인이 나타나 그의 몸을 사뿐이 받아놓고선 "나를 버리는것은 보리심이 아니
다"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대사는 자신을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곧 선암사에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 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400여년의 세월이 무색하리만큼 앳돼보이는 이승선교는 삼년전에 기존 승선교를 완전 해체하고 그자리에 거의 유
사하게 복제 해놓은 또다른 승선교이다.
문화재 보호도 좋고 관리도 좋지만 그가치가 훼손되는일이 너무 안타깝다.
...........
또 혼자가 된다.
빠른걸음으로 일행을 따라가는데 힘이 들어 선암사도 둘러보지 못하겠다던 성화님도 그말이 참이 아닌듯 보이지가
않는다.
주차장 버스옆에는 이미 다들 모여서 하산주를 들고들 계시는데 매번 산행때마다 꼭같은 풍경이다. 배낭을 벗어놓고
젖은차림으로 몇잔을 거푸 마신다. 역시 전과 유사한 행동이다.
그렇다 주변의 환경은 일상들은 늘 그대로인데...
지금까지의 행.불행은 내맘이 아니었을까?
인사가 전같지 않았던 산호님과의 아침 만남도 그렇고...
섬진강 휴게소에서의 어이~~건도 그렇고...
청량각에서의 눈치없는 중년남자의 건도 그렇고...
송광사에서의 북석이던 학생들때문에 정신이 없던것도 그렇고...
농막에서 반갑지 않은 인사를건네던 젊은이 모습도 그렇고...
천자암에서의 담배를 꼬나물고 쌍향수 사진을 엉성하게 맹글어놓은 절집 사람도 그렇고...
절집 창너머로 이비오는데 웬사람인가 멀쭘이 이상한 눈초리로 내다보던 보살님의 겉치레 인사도 그렇고...
보리밥집의 반찬에 머리카락. 비벼지지도 않던 따뜻하지 않은 밥덩이. 네맛도 내맛도 없었던 농주...
친절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볼수가 없는 그집 아주머니들...모습도 그렇고...
오늘의 그렇고...그렇고...그랬던 모든일들의 현상들은 나의 마음이었던것이다.
먼저 따뜻한 마음으로 한발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었는지...
술잔을 비운다.
생각해보면.....
그렇고.그렇고...의 와중이지만 그래도 나름으로 계획된 산행을 했고, 송광사 입구의 낙죽장 김기찬님도 만나뵙고,
송광사의 3대명물 비사리구시.능경난사.쌍향수도 보았고, 억지이지만 선암사 해우소에서 볼일도 보고, 우리들 회장
님 성화님이랑은 두번씩이나 단둘만의 데이트도 할수있는 행운도 있었고, 승선교아래 강선루에서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울것 같은 기대로 온종일 마음 부풀게 하였던 그선녀와 승선교는 아니지만 지금 술잔을 같이 들고있지를 않는
가? 둘러보니 모든이들이 선남이고 선녀님들인것을...
모든사람들이 아름답게...
모든일들이 긍정적으로...
보일수있는 그런 행복의 사랑색의 안경을 쓰자.
돌아오는길 만담으로 오랜동안 웃음을 선사해주신 이름도 알수없는 아주머니께 다음산행(함께 간다면)때 약주한
잔 대접해 드려야 겠다.
남에게 웃음을 줄수있다는것은 타고난 복이다.
복덩이 아줌마 아니지 젊은언니 화이팅!
[인터넷 자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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