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8

신문왕릉→사천왕사지→선덕왕릉→능지탑→김헌용 가옥→상서장→황복사지 삼층석탑→진평왕릉→보문사지

 

 

 

신문왕릉(사적 제181호)

 무덤의 지름은 29.3m, 높이는 7.6m. 신문왕이 죽은 뒤 낭산(狼山) 동쪽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

이 능을 신문왕릉에 비정하고 있다. 능의 형식은 무열왕릉에서 한 단계 발달된 형식으로, 봉토 밑에 벽돌모양으로 가

공한 돌을 마치 담을 쌓듯이 5단 정도로 쌓고 그 위에 갑석을 덮었다. 또 이 석축에 가공한 삼각형 돌을 수십 개 기대

어 놓았다. 이러한 형식은 둘레돌이 자연석에서 가공한 삼각형 석재로 변했고, 그 안의 석축은 무열왕릉의 경우보다

발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삼각형 둘레돌 중 남방을 향한 돌에 '門'자를 음각한 것이 있는데, 그 뜻은 알 수 없다.

봉토 동쪽에 석상이 있으나 성덕왕릉의 석상에 비하면 얕고 석재도 고르지 않아 원래의 것인지 의심스럽다. 이 왕릉에

는 아직 12지상·무인석·문인석·석수 같은 표지가 나타나지 않고 있어 묘제가 완전히 갖추어지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능이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있어 효소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천왕사지 당간지주.

 

사천왕사지(사적 제8호)

경주 낭산(狼山)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 옆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
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679)하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이곳은 원래 신유림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도리
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여왕이 죽은 지 30년만에 왕릉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
는데,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고 그 중턱은 사천왕이
지키며 꼭대기에는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이 있어 불국토가 시작되는 곳이라 믿었다. 이 설화를 통해 낭산을 수미산으
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
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인들
의 불교관·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낭산(狼山) 기슭 신문왕릉의 옆, 선덕여왕릉의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로 679년(문무왕 19)에 창건된 전형적인 쌍
탑식 가람배치의 절터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다음 가장 먼저 창건된 사천왕사는 신라 불교의 호국적 속성과 신라
인들의 불교관 및 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이 절터는 본래 신유림(神遊林)이라고 하여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
墟)의 하나로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미리 알고 있던 3가지 일 중 하나로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에 묻으라는 유언
을 남겼다고 한다.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인가를 묻자 이곳을 지목하였는데 여왕이 죽은 뒤 30년 뒤에 여왕의 능 아래
에 사천왕사가 지어짐으로써 여왕의 예지능력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신라인들이 낭산을 수미산(須
彌山)처럼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674년(문무왕 14년) 당나라는 신라가 계림도독부의 군사를 공경한다는 핑계로 50만대군으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明郞法師)에게 당나라의 침입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명랑법사가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밀교의 문두루비법을 쓰도록 권유하였다. 그런데 당나라의 침입이 급박하여 절을 완공할 시간이 없어 색이 있는 비단
으로 절을 짓고 풀을 묶어 오빙신상을 만든 다음 12명의 유가명승들에게 비법을 쓰도록 하였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
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군대의 배가 침몰되었다고 한다. 그뒤 정식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여 5년만에 완공
하여 사천왕사라 이름하고 성전(成典)을 두어 관리하였다.

가람은 금당지의 앞에 동서로 목탑을 세웠으며 금당의 북쪽 좌우 목탑과 대응되는 곳에는 경루를 두었다. 금당지는
초석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초석에 의하면 정면 5칸, 측면 3칸 건물이며 건물지의 중간부분에 불좌대의 지대석으로
추정되는 장대석이 남아 있다. 동탑지는 130㎝ 내외의 높이로 토단이 남아 있으며 사방 3칸으로 초석이 남아 있다. 탑
지의 중앙에는 118㎝ 내외 크기의 심초석이 남아 있는데 사리공이 있다. 서탑지는 동탑지와 동일한 형태로 심초석의
사리공도 같은 크기이다. 탑지의 앞에 중문, 금당지의 북쪽에는 강당지가 있고 이들 건물을 둘러싸는 회랑터가 있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 비신, 높이 2.4m인 1기의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절의 동편에 남아 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음각 등의 아름다움이 뛰어나며 무열왕릉의 귀부에 버금가는 뛰어난 것이다.

탑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사천왕상이 부조된 전은 일부가 복원되었는데 녹유전이다. 복원한 바에 의하면 천왕
들은 각기 2마리씩의 악귀를 깔고 앉은 생령좌이며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 본래의 모습을 비교적 잘 알 수 있는
동방지국천왕은 보관을 쓰고 왼손에 장도를 들고 있으며 남방증장천왕으로 추정되는 천왕상은 투구를 쓰고 양손으로
활과 화살을 잡고 있다. 이 사천왕상에 대해서 선덕여왕대에 활약하였던 승려 조각가인 양지(良志)가 만들었다는 팔
부중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 절에는 경덕왕대에 도솔가, 산화가 등의 향가를 짓고 피리를 잘 불어 달이 가기를 멈출 정도였다고 전하는 월명대
사가 있었다.
 

 

금당지.

 

 

 

 

 

 

 

 

 

 

 

선덕왕릉.

이 능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김덕만)이 모셔진 곳이다. 경주시 동남쪽에 있는 낭산(狼山)의 남쪽 능선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밑둘레 74m, 높이 6.8m, 지름 24m되는 이 능의 겉모양은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며, 아랫부

분에는 능을 보호하기 위한 2∼3단의 자연석 석축이 있다.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瞻星臺)를 만들고, 분황사(芬皇寺)를 건립하였으며, 황룡사(皇龍寺) 9층 목탑

을 축조하는 등 신라 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또 김춘추(金春秋), 김유신(金庾信)과 같은 인물들을 거느리고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삼국유사, 三國遺事>에는 "왕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낭산 남쪽이라고 말하였다. 그날에 이르니 왕이 과연 세상을 떠났는데, 여러 신하들

이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처음 건립

하였다. 불경에 말하기를 사천왕사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므로, 그제야 선덕여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

다."고 한다. 
 

능지탑(시도 기념물 제34호)

경북 경주시 남산에 흐트러져 있던 탑의 재료를 새로 맞추어 놓은 것으로 예로부터 능지탑 또는 연화탑이라 불려왔다고 한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12지신상을 새긴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있는 석재를 쌓아올린 5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은 임종 후 10일 내에 왕궁 밖 뜰에서 검소하게 화장하라고 유언하였는데,
 탑 주변에서 문무왕릉비 조각이 발견되고 사천왕사, 선덕여왕릉, 신문왕릉과 이웃한 것으로 보아 문무왕의 화장터로도 추정
되고 있다.
견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문무왕(文武王)이 "임종후(臨終後) 10일내에 고문(庫門) 밖 뜰에서 화장
하라"하고 "상례(喪禮)의 제도를 검약하게 하라"고 유언하였으며 이곳이 사천왕사(四天王寺),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 신문
왕릉(神文王陵) 등에 이웃한 자리인 것으로 보아 문무대왕(文武大王)의 화장지(火葬地)로 추정할 수 있다. 당초에는 사방에 소
조대불(塑造大佛)을 모시고 감실(龕室)을 세웠을 가능성도 있으나, 기단 사방에 12지상(十二支像)을 세우고 연화문 석재로 쌓
아 올린 오층석탑으로 추정된다.

 

 

 

 

 

 

 

 

 

 

 

 

 

 

 

 

 

김헌용 가옥.

이 가옥은 400여 년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개인의 집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 중의 하나이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웠던 부산첨사(釜山僉使) 김호(金虎)장군의 생가로 전해지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기와집 안채가 있고, 서쪽에 초가집 행랑채를 두었으며 동북쪽에 사당(祠堂)을 두었다.
안채는 앞면 5칸·옆면 1칸 규모에 왼쪽부터 부엌, 방, 대청, 방으로 단순한 구성을 보이고 있다. 건물을 구성한 기법들

은 옛 법식을 따르고 있고 대청 앞에는 문짝을 달았다.
안채는 앞으로 퇴칸이 없는 4칸집으로 가운데에 대청이 있는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공간구성이다.
아래채는 앞면 3칸·옆면 1칸이며 지붕은 초가지붕이다. 왼쪽부터 방, 방,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굴뚝을 부뚜막 한

쪽에 설치하여 구성의 특이함을 보이고 있다. 사당은 낮은 토담에 문을 달았다.
이 곳은 원래 신라시대의 절터로 추정되며, 많은 돌 자재(石材)들이 있다. 특히 집안의 우물돌은 원래의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상서장.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

   구황동 삼층석탑은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여 세워진 탑이다. 1943년 해체 수리 때 탑 속에서 많은 사리 장엄구가

나왔다. 그중 순금 여래좌상(높이 12.2)과 순금 여래 입상(높이 14)은 국보 제 79호와 80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

물관에 있다. 사리함 뚜껑 안쪽에 장문의 명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신라 효소왕이 부왕인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692년에 세웠다고 한다.

 

진평왕릉(사적 제108호)

  경주 보문동 들녘의 양지마을 오른쪽에 위치한 진평왕릉은 흙으로 쌓아올린 원형 봉토분으로 밑둘레를 자연석

으로 둘러 보호석을 마련했는데 이러한 자연석을 이용한 보호석열은 삼국 말기와 통일신라 초기의 양식으로 보

여진다.

  진평왕은 신라시대 최장수 기간인 54년 간 왕으로 재임하면서, 고구려, 백제와 빈번하게 전투를 벌였으며, 중국

의 수나라, 당나라와 친교를 맺어 외교에 힘씀으로써 후에 이를 이용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남산성을 쌓고 동쪽 명활성을 개축하기도 했으며 원광법사 등 승려들을 중국으로 유학 보내는 등 불교 진흥

에도 힘을 쏟았다.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보물 제 910호)

  진평왕릉 남쪽 논 가운데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가 남아있으며, 높이는 146cm이다. 현재 기둥의

아랫부분이 상당히 묻혀 있어서 아랫부분의 구조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현재 원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추정이 되며 동서로는 62cm의 간격을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정상부분 안쪽에 있는 너비 13cm의 큼직한 간구는 당간을 고정 시켰던 장치로 특히, 이 당간지주 상부 바깥

면에 설정된 사각구역안에는 지름 47cm의 8잎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와 같이 당간지주에 연화무늬를

조각하여 장식하는 예는 이 곳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 중에서 가장 특수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문화재다. 다만, 이

당간지주의 원래의 소속 사원이 동남쪽에 터가 남아 있는 보문사지였는지, 아니면 별개의 사원이었는지에

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보문사지 당간지주(보물 제123호)

  당간지주는 절터 서남쪽에 있으며 64cm의 간격을 두고 남북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 당간지주는 아

무런 장식이 없으며, 다만 바깥쪽면만 양변의 각을 죽여 다소의 장식을 보이고 있다. 북쪽의 지주는 윗쪽

이 절단되었으나 남쪽의 것은 완전하다. 또 이 지주에서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상하가 잘 조화되어 안정

감을 주면서 가늘고 긴 모습으로 보인다.

  가운데의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은 상·중·하 세 군데에 간공을 마련하여 장치하였던 것인데, 그 간공은 남

양지주의 것이 같지 않다.

 

 

보문사지 석조

  길이 273cm, 너비 90cm, 깊이 61cm의 화강암 재료로 하여 만든 이 석조는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안팎

으로는 아무런 장식문양이 없어 단순하고 소박할 뿐 특이한 구조는 없다. 다만 수조의 바닥 가장자리에는

지름 7cm의 배수용 구멍이 한개 뚫려있다.

  이러한 석조는 지금도 여러 사찰에서 급수용기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때, 그 당시에도 급수용기로 사용되

었을 것이다. 이 석조는 비교적 크고 조각수법은 단순하나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보문사지에 있는 대부분의 유물들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인 것으로 보아 이 석조도 그 규모와 다듬은

씨가 같은 시기에 함께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보문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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