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대박론의 허구성에 대하여 1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은 대박"이라는 희망찬 메세지가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별 저항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그 많은 통일의 전문가들, 정치인들, 학자들, 언론인들, 요즘 시세가 상종가인 정치평론가들, 직업적 토론가들인 패널들을 막론하고, 박대통령의 통일대박론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통일=대박'이라는 공식이 의심의 여지없는 결론으로 굳어져 가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나는 박대통령의 통일대박 소리를 들었을 때 과연 박대통령한테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통일방안이 있기나 한 것인지가 먼저 의심스러웠다. 대박이건 망통이건 통일이 되었을 때 이야기다. 되지도 않을 통일이라면 대박이다 뭐다 하는 이야기들은 결국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통일이 우리에게 대박일 것이라는 장미빛 그림을 내보이기 전에 어떻게 통일을 할 것인가 하는 통일의 실천적 방법론이 먼저 제시되어야 하고, 통일의 가능성에 대한 예측이 먼저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박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이 뜬금없는 잠꼬대처럼 들리는 이유는 바로 어떻게 통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이 선재하지 않았고, 어떤 통일을 어떻게 이룰 생각이기에 그것이 대박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대통령의 구상이 밝혀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박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은 안철수의 새정치론과 별 다를 바가 없다. 총론만 있고 각론은 없으며, 제목만 있을 뿐 내용이 없는 것이다.
그 많은 정치인들과 학자들, 브레인들, 멘토들이 드글드글하지만 어느 한사람 '새정치'라는 것을 그려내지 못하는 것이 이 나라의 수준이다. 통일부장관이 부총리급이고 그 밑에 통일의 전문가들이 수두룩빽빽하건마는 아무도 밥값을 못하고 대통령한테 통일에 대한 스케치 밑그림 한장 그려서 올려주지를 못하고 있다. 그 결과가 '드레스덴 제안'이다. 만약에 박대통령이 이런 제안을 김정은이가 '아이고 고맙습네다'하고 넙쭉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독일까지 가서 전세계 사람들 앞에서 내밀었다고 하면 통일에 관한 한 박대통령한테는 기대를 접는 것이 맞다고 나는 본다. 드레스덴 연설이 박대통령의 통일에 관한 소견의 전부라면 박대통령은 통일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만방에 공표한 것과 같다.
물론 그것이 박대통령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나라의 정치인들과 학자들과 언론인들, 관료 전문가들, 평론가들 기타 등등 통일에 대해 한자락씩 읊어대는 그 수많은 인물들 중에 통일에 대해 개념이라도 제대로 잡고 있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나는 이사람들이 '통일'이라는 단어의 뜻이라도 알고 통일, 통일 노래를 부르는 것인지 묻고 싶다. 뭐가 통일이냐고. 당신이 말하는 '통일'이라는 말의 뜻이 뭐냐고. 통일부 장관부터 통일부 최말단 공무원들 전부한테, 거기다가 청와대 비서실 소속 전원하고, 국정원 원장하고 국정원 현장요원들까지 전부 한자리에 모아놓고, 빈 종이 한장씩 나눠준 다음에 '통일'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아는 대로 써시오. 하고 논술시험을 쳐 본다면 어떤 답들을 적어낼까? 도대체 통일이 뭐라고 생각들 하고 사는지 나는 정말 궁금하다. '통일'이라는 말의 의미라도 제대로 알고 있다면 통일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또 어떤 통일은 가능하고 어떤 통일은 불가능한지 생각해 내는데 시간이 그다지 많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통일이 과연 대박이 될건지, 망통이 될건지, 우리 민족에 축복일지, 재앙일지 유추해 내는 것도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통일이라는 말의 뜻도 모르고들 있으니, 이게 천지분간이 될 리가 없다. 통일이 정말 될려는지, 도저히 안 될 일인지, 어떻게 될 것인지, 무엇을 해야 되는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누구도 어떤 일도 하고 있지 않다. 통일을 앞당기고 실현하는데 꼭 해야 할 일을 전혀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보다 통일이 무엇인지를 아예 모르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드레스덴 연설을 통해 박근혜대통령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예외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대통령조차도 통일은 추상적이고 모호하고 애매한 관념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드레스덴 연설을 네 글자로 줄이면 '우이독경'이고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네 글자로 줄이면 '오리무중'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에 대해서 '통일망통론'을 부르짖은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다. 그 잘나고 고매하신 지만원박사님이다. '통일은 대박이 아니라 망통이요, 삼팔따라지다'라고 씨는 주장하여 안 그래도 외로운 사람이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기는 대박론과 난형난제다. 왜 통일이 대박인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나 왜 망통인가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물론 지씨의 경우 통일망통론의 몇가지 논거를 대고는 있다. 씨의 통일망통론은 바꾸어 말하면 통일불가론이다. 통일은 안된다는 것이다. 설령 북한에 급변사태가 벌어지고, 김정은이가 비명에 횡사를 하는 일이 생겨도 그것이 통일로 연결될 리가 없다고 씨는 단언하고 있다. 불충분하지만 북한의 군사력을 그 이유로 꼽고 있다. 인민군이 해체되지 않고 존재하는 한 북한의 급변사태가 우리가 김칫국을 마시는 것처럼 통일로 연결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허기사 일리가 없지도 않은 소리다. 그런데 문제는 이 통일불가론이 필연적으로 '영구분단론'으로 치닫는다는 데 있다. 되지도 않을 통일에 헛고생하지 말고 이대로 영구히 분단된 채로 다른 두 나라로 사는 것이 정답이다 라고 씨는 주장하는데, 이 영구분단론이 또 씨를 외톨이 독불장군으로 만드는데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통일망통론이 통일불가론을 끌어내고 통일불가론이 영구분단론으로 연결되어 기어이 씨를 구제불능의 수꼴로 낙인찍히게 만들고 말았다. 이것도 다 씨가 통일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통일'이라는 말이 무슨 소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통일'이라는 말의 뜻부터 명확히 하고나서 과연 박대통령의 메세지처럼 통일이 대박일 수 있겠는지, 어떤 통일이어야만이 대박이 될 수 있는지, 어떤 통일은 재앙이 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통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는지를 짚어보려고 한다.
다음 글에 계속...
세월호 희생자들의 유족들께 구름이 진정으로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 통일이 되고 나면 지금보다 더 나은 조국이 되고, 이런 어이없는 참극이 없는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통일에 대한 글을 올립니다.
- 통일대박론의 허구성에 대하여 2
‘통일(統一)’이라는 말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로 역사상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진시황이었다. 진시황이 육국을 멸하고 천하를 하나의 나라로 만들었을 때, 진시황은 자신이 천하를 통일했노라고 선언했다. 이때 진시황이 하나로 만든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춘추시대의 이백여 개에 가까운 자잘한 나라들이 합쳐진 여섯 개의 나라였다. 이 나라들을 모두 쳐서 없애고 진나라의 군현으로 삼았다. 천하가 전부 하나의 나라가 된 것이다.
진시황이 하나로 합친 모든 나라들은 본시 하나의 나라였다. 원래가 주나라의 천하였고, 그 이전에는 은나라였으며, 그 이전에는 하나라였고, 그 이전에는 삼황오제가 다스리던 나라였다. 진시황이 하나로 합친 나라의 백성들은 전부 같은 말, 같은 문자를 썼으며 풍습과 생긴 모양이 같은 사람들이었다(물론 혈통적으로는 여러 민족으로 나눌 수 있다 해도). 그리고 같은 왕조의 백성들이라는 일체감이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진나라가 통일한 백성들은 전부 황제와 요순의 후손이며, 주나라의 백성들이었다.
본시 하나였던 것이 여럿으로 나뉘어지고 흩어졌다가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을 통일이라고 한다. 여기서 ‘본시 하나였던 것’에 밑줄을 좌악 치자. 통일의 대상은 반드시 원래 하나였던 것이 전제가 된다. 원래 하나가 아니었던 것, 하나였던 적이 없는 것들을 하나로 합하는 것은 통일이 아니라 통합이라고 한다. 로마제국이 그렇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비롯해서 지금의 영국과 프랑스와 스페인과 독일 땅, 그리고 북아프리카와 발칸반도와 중근동의 지중해 전역을 지배했던 대제국이었고, 수십 개의 나라를 정복하여 로마라는 하나의 제국을 이루었지만 어떤 역사학자도 로마가 유럽과 지중해세계를 통일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로마제국은 유럽과 지중해를 통일한 것이 아니라 통합한 것이다. 그래서 ‘팍스로마나’라고 표현한다.
진시황은 중국대륙을 통일했지만 카이사르는 유럽을 통일한 것이 아니었다. 진시황이 멸한 천하육국은 본시 하나였던 나라들이었지만 카이사르가 정복한 브리타니아와 갈리아와 에스파냐는 본시 하나였던 적이 없었다. 말과 문자와 풍습이 각기 달랐고, 자기들이 한 조상의 후손이라는 동족의식이 전혀 없었다. 훈족은 훈족이었고, 프랑크족은 프랑크족이며, 반달족은 반달족, 게르만은 게르만이었고 유대인도 역시 별종이었지 결코 로마인이 아니었다. 한국사람이 미국 시민권을 받는다 해도 그는 미국인이 아니라 여전히 한국인인 것처럼, 로마의 시민권을 받은 유대인은 로마인이 아니라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유대인이었을 뿐이었다. 갈리아인도 마찬가지고 게르만족도 마찬가지였다. 로마는 통일제국이 아닌 통합제국이었다.
중국인들이 왜 만리장성을 쌓았느냐 하면 장성 바깥의 사람들은 통일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중국이 몽고의 초원을 정복해서 그들을 복종시킨다 해도 중국과 몽고가 통일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이 한반도를 정복해서 동이족을 지배한다 해도 중국과 한국은 통일이 될 수 없다. 만주족이 중국을 2백년이나 지배했지만 결코 통일되지 못했다. 지금 티벳이나 서장도 마찬가지다. 본시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에 통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통합된 상태를 유지할 뿐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통일이 됐다고 말하는 것은 이들이 모두 환인과 단군의 자손으로 본시 고조선이라는 하나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같은 조상을 가졌으며, 같은 말을 하고, 같은 풍습을 가진 본시 하나였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통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통일이란 반드시 본시 하나였다가 갈라지고 흩어진 것들의 복원을 의미한다. 통일을 간단한 수식으로 표현하면 A1+A2+A3=A가 된다. 통합은 A+B+C=ABC로 표현할 수 있다.
이제 통일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남한과 북한이 하나로 합해지는 것은 어느 경우에 해당하는 것일까? 통일일까? 통합일까? 아니면 통일도 통합도 아닌 다른 것일까? 요즘 티비 토론 프로그램을 보면 사회자가 묻는 질문에 O와 X가 적힌 표말을 가지고 있다가 드는 방식을 흔히 사용하는데, 이런 방식으로 투표를 해보면 구름타운 가족들의 견해는 어떻게 드러날까? 통일이라고 대답을 할까? 통합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통일도 통합도 아닌 다른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어느 대답이 가장 많을지 궁금하다. 남과 북의 하나됨은 과연 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게 서 있지 않으면 통일의 추구는 난망할 수밖에 없다. 지금 통일문제가 혼란스러운 것은 모두 여기에 기인한다.
- 통일대박론의 허구성에 대하여 3
내가 왜 ‘통일’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길게 부연을 하는가 하면, 이것이 가장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개념을 명확하고 올바르게 잡지 못하면 반드시 낭패를 보게 된다. 좋은 예가 바로 왜국의 토요토미 히데요시다. 히데요시는 평생 동안 전쟁에서 져본 일이 없는 군사의 천재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생애는 그야말로 영광과 부귀영화의 극치였다. 그랬던 그의 말년이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대륙출병 때문이었다. 우리가 임진왜란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전쟁이다.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가 바로 개념을 잘못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히데요시는 응인의 난 이래로 갈가리 찢겨있었던 일본을 하나로 통일했다. 그 일본통일은 오다 노부나가의 천하포무에서 시작되어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지만 일본 통일의 전체적 얼개는 히데요시의 손에 거의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히데요시가 통일한 일본천하는 본시 하나의 나라였다. 모두 같은 왜말을 쓰고 한자나 왜글을 문자로 썼으며, 풍습과 생업의 형태가 모두 같은 사람들이었다. 오직 만세일계로 이어져 내려온 천황을 자기들 전부의 아버지로 생각하고 하나의 개국신을 국조로 생각하는 하나의 나라였다. 이것이 각 영주들의 점유물이 되어 양육강식의 전국시대로 이어졌지만 본시 한 나라였기 때문에 통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천하를 통일한 히데요시는 조선과 중국에 대해서도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즉 중국과 조선도 일본 국내와 마찬가지로 ‘통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일본의 문화와 습속을 조선과 명나라에 그대로 전하여 명나라와 조선을 일본과 같은 나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오판을 했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통일’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몰랐고, 개념의 정립에 착오가 있었다. 그것이 그의 말년을 불행의 나락에 빠트렸다. 불세출의 영웅으로 자처했고, 또 자타가 인정했던 행운아였던 히데요시가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 방바닥을 기는 비루하고 측은한 노인으로 변해서 온갖 추태와 주접을 부리다가 꼴사납게 죽기에 이른 것이 전부 개념의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가 일본 국내를 하나로 만든 것은 통일이지만 조선이나 명나라와 합하려고 하는 것은 통합이고, 무력에 의한 강제적인 통합은 정복이며 이것은 통일과는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무모한 전쟁을 일으켜 동양 삼국에 크나큰 참극을 불러왔고 그 자신의 생애 역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게 만들었다. 통일과 통합 또는 정복은 판이하게 다르다. 목적과 수단과 방법이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일본국내의 통일에서 그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조선과 중국을 통일하려고 덤볐다. 이게 뜻대로 될 리가 없었다. 일본에서는 통했던 것이 조선에서는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조선과 일본은, 그리고 명나라는 본시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통일을 할 수 없는 상대였다는 것이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대륙을 차지한 만주족(청나라)은 히데요시와는 계산이 달랐다. 중국과 만주는 본시 하나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만주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대륙을 지배하는 동안 결코 통일을 추구하지 않았다. 청나라가 망해서 마지막 황제 부의가 만주로 도망갈 때까지 중국인과 만주인은 하나가 된 적이 없었고,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중국인은 중국인, 만주인은 만주인으로 따로 살았다. 혼인도 하지 않았다. 이런 통합 상태를 2백년이나 유지했다.
반면에 왜인들은 같은 실수를 또 다시 저지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한일합방이란 것이다. 일본과 조선은 본시 하나가 아니고 하나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결코 통일을 할 수 없는 상대인데도 불구하고, 왜인들은 이 불가능한 시도를 다시 한 번 강행하는 어리석음을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역시 실패로 끝났다. 본시 하나였던 것이 아니면 통일은 불가능하다. 지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가지고 다투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민족이 다르고, 본시 하나의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에 소련이 붕괴되자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크림반도는 원래 러시아 것이지 우크라이나 영토가 아니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다수가 러시아인이다. 이런 크림반도가 우크라이나와 통일이 될 리가 만무하다. 결국 러시아는 러시아로 돌아가는 것이다.
영국은 아일랜드를 수백 년 동안 지배했지만 결국 영국과 아일랜드는 하나가 되지 못했다. 본시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드골이 모로코와 알제리를 손에서 놓고 독립을 시킨 것은 아무리 오래 동안 이 나라들을 쥐고 있어도 그것이 결코 프랑스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수백 년이 흘러도 모로코인이 프랑스인이 될 수 없으며, 프랑스 사람이 알제리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통일은 영구할 수 있지만 통합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결국에는 깨지게 마련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얻어야 할 명백한 교훈은 ‘본시 하나가 아니었던 것을 상대로 통일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왜 통일에 대한 개념을 명료하게 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북한과의 하나됨이 과연 통일인가 아닌가를 분명히 해야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올바른 대북정책을 수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소리야? 남북한은 당연히 하나의 민족이고,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하나의 나라였고, 한 민족이며, 같은 언어, 같은 문자, 같은 역사, 같은 풍습을 공유한 단군의 자손인데 남북한의 합침이 통일이 아니라는 말이야? 하고 눈을 흘겨 뜰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남북한의 문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통일의 대상이 아닐 수 있다는 데 있다. 현재 이 시점에서 그 사실을 꿰뚫어 보고 있는 사람은 구름 한 사람 뿐이다. 나를 제외하고는 남북이 통일의 대상이라는데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통일은 대박이라는 공식까지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정녕 그럴까? 남한과 북한은 통일되어야 하는 하나의 민족일까? 정말?
- 통일대박론의 허구성에 대하여 4
내재적 접근론을 주창한 재독 교수 송두율은 “625전쟁을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통일전쟁일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남침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이론으로서 송두율은 통일전쟁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김일성 집단의 남침도 분단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송두율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어느 학자, 교수, 박사도 명쾌한 반론을 제시하여 뭉개놓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송두율의 내재적 접근론조차 이론으로 논박된 적이 없으며 통일전쟁론도 학술적이고 이론적인 반론으로 철회되지 않은 채 아직까지 유효한 이론으로 남아있다. 이런 수준의 주장이 통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학계의 수준이 얼마나 바닥이 얕으며 그 토대가 부실한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차차 설명해 나가겠지만 한국전쟁은 결코 통일전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통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한국전쟁의 본질에 대해서 아직까지 제대로 설파한 학자는 한 명도 없다. 한국전쟁의 성격이 무엇인가는 아직도 올바르게 설명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육이오를 흔히들 ‘동족상잔의 비극’이라고 한다.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이라는 두 개의 정부가 싸운 전쟁이며 각각의 정부에 속해있던 인민들은 전부 동족이며 같은 동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계급장을 단 국군이든, 북조선인민공화국의 군복을 입은 인민군이든 전부 다 같은 겨레의 아들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건 사실과 다른 소리다. 국군과 인민군은 같은 동족의 군대가 아니었다. 그때 이미 북한은 우리와 같은 민족, 같은 동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모르고 있다. 육이오전쟁은 결코 동족상잔의 전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통일의 길을 열어갈 수가 있다.
한국전쟁은 한 민족의 구성원들이 두 개의 정부로 나뉘어져서 그것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싸운 전쟁이라고 보는 착시에 모든 사람들이 빠져있다. 한국전쟁은 두 개의 정부 아래 나뉜 한 민족 내부의 전쟁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두 집단 간의 전쟁이며, 그것의 본질은 바로 계급투쟁이라는 것을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김일성은 북한이라는 정부의 수반이 아니고 무산계급의 대표자이며 이승만은 대한민국이라는 정부의 대통령이라기보다 지주, 자본가, 지식인들의 대표였다. 이승만이 정부요직에 친일파들을 등용하고 친일파들의 처벌에 미온적이었으며, 군과 경찰을 일본군 순사 출신들과 일본군 출신들로 채워넣은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승만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바로 그들의 대표이며, 그들이 자신의 지지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왜 자기의 지지기반을 자기 손으로 무너뜨리고 자기의 지지자들을 감옥으로 보내려고 할 것인가 말이다. 이승만은 지주, 자본가, 지식인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대한민국을 건국했는데, 지지자들의 대부분이 왜정 때 친일적 색채가 강했던 사람들이었다. 친일하지 않고는 지주나 기업인, 상공인, 학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건 당연하고도 남는 이야기였다.
반면에 김일성은 프롤레타리아의 대표를 자처했고, 그가 정권을 잡은 북한에서 지주, 자본가들을 대거 숙청했다. 계급의 성격상 친일파들이 많았다.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했는데, 미군정은 토지개혁에 한없이 미적거렸다. 최종결론은 유상몰수, 유상분배였다. 역시 지주계급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
땅과 재산을 몰수당하고 심지어는 지주, 자본가라는 이유로 처형당하고 목숨까지 잃게 될 상황에 몰리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삼팔선을 넘어 남쪽으로 탈출했는데, 나이가 든 사람들은 고향에서 묻히기를 원하기도 했지만 아직 젊어서 전도 창창한 청년들은 북한에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살아있는 부모님과 하직을 하거나, 이미 목숨을 잃은 부모님의 무덤에 눈물을 뿌리고 삼팔선을 넘었다. 이들이 남한에 와서 서청(서북청년단)을 결성하여 빨갱이들을 때려잡는 전위가 된다.
북한에서 지주, 자본가 계급들이 남쪽으로 탈출한 것과 같이 남한에서는 소작인, 노동자, 무산계급의 아들들이 월북을 하거나 폭동을 일으켰다. 제주 43, 여순반란, 대구폭동 등등 해방 이후 무산계급의 반란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들 중 다수가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가 소탕되었다.
해방 후 5년이 지난 즈음에 남한은 지주, 자본가, 친일파들의 세상이 됐고, 북한은 노동자 농민의 세상이 됐다(이 말은 노동자 농민이 잘 살고 행복한 세상이 됐다는 말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이라는 계급의 사람들만 살아남은 세상이라는 뜻이다. 거기에 노동당원이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따로 생겼다). 북한에서는 살 수 없었던 지주, 자본가, 친일파들이 대거 남으로 왔고, 남한에서는 살 수 없었던 빈민계급들이 북으로 가거나 폭동을 일으키거나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됐다. 남한과 북한은 두 개의 정부로 나뉜 것이 아니라 두 개의 계급으로 나뉘었다. 한국전쟁은 같은 동족, 같은 형제간의 전쟁이 아니라, 불구대천의 계급적 원수 사이의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한국전쟁은 A1+A2=A가 되는 통일이 아니라 A+B=A이거나 또는 A+B=B가 되는 정복전쟁이 그 본질이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정복전쟁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정복을 수식으로 표현하면 A+B=A/B 또는 B/A가 된다. 우항에서 분자가 정복자, 분모가 피정복자이다. 그런데 계급전쟁은, 계급독재의 수식은 A+B=A 또는 A+B=B라는 형태가 된다. 합해진 다음에 A 혹은 B라는 어느 한쪽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승자가 패자를 완전히 절멸시키기 때문에 하나가 사라진 결과이다. 그래서 계급전쟁은 그 어떤 정복전쟁보다 더 무자비하며 더 참혹하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절멸시키는 투쟁, 그것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가 계급투쟁이고, 다른 하나가 인종청소이다. 계급투쟁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타도해서 절멸시키는 것이고, 인종청소는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학살하여 절멸시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통일이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한국전쟁은 통일전쟁도 정복전쟁도 아닌 계급전쟁이었으며, 계급청소였다는 사실에 눈을 뜨야 한다. 그래야 오늘의 분단이 바로 보이고 내일의 통일을 열어갈 수가 있다.
공산주의건, 사이비 종교건, 다단계판매건 광신적인 이념이 머리에 들어오면 그 이전과 이후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같은 바지저고리를 입은 조선사람이라도 공산주의 이념이 대글빡에 들어오는 순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고 만다. 그 순간부터 이 사람은 한민족이나 한국사람이나, 조선인이 아니다. 그는 공산주의자다. 좌익사상에 물들어 운동꿘이 된 대학생 아들은 이미 자기 아들이 아니다. 붙잡고 얘기를 해보라. 자기는 이미 그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정희나 이석기가 한국사람일까? 어느 면으로 그들을 한국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한국말을 유창하게 한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은 한국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과 30분만 대화를 해보라. 단 한마디라도 서로 소통이 되는지... 절벽이다. 그들의 말은 영어보다 더 알아먹기 힘들다. 그들 역시 한국말을 하는 우리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한다. 하루 종일 대화를 해도 서로 단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한 채 일어서게 된다. 이게 한국인이라 할 수 있을까? 얼굴 생김새는 비슷하고, 같은 음식을 먹고, 비슷한 말을 하기는 하지만 이정희 이석기와 대부분 대한민국 사람들의 차이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보다 크다. 그들과 우리는 우리와 중국인들보다 더 다른 사람들이다.
범위를 확대하면 지금의 북한사람들과 남한 사람들 전체로 확대할 수 있다. 대한민국 사람들과 북조선인민공화국 사람들이 같은 민족이며, 같은 겨레이고, 한 핏줄의 형제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이 질문에 자신있게 ‘예’라고 대답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과 통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 내 답은 역시 부정적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 통일대박론의 허구성에 대하여 5
맑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것으로 계급간의 적개심을 고취하여 계급투쟁을 선동하기 이전에는 상대방을 절멸시키는 전쟁은 그리 흔치 않았다. 왜냐하면 정복전쟁을 하더라도 피정복민은 생산력으로서 필요했기 때문에 노예로 끌어다가 일을 시킬지언정 전부 다 죽일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피정복민들을 모조리 죽여서 없애는 일이 정복자에게 이익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정복전쟁에서 어떤 종족이 절멸되어 사라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징기스칸이 서하를 정벌한 후에 고려 접경인 압록강 유역으로 피신한 서하인들을 고려과 연합하여 진압했을 때 모든 서하인을 살륙했는데, 한때 요나라를 세웠던 서하족은 그 이후로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아주 드문 예의 하나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인종 청소가 훨씬 더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사례이지만 이것도 드물게 볼 수 있는 사례이며, 인류 역사에서 일상화된 사건은 아니었다.
상대방의 완전한 절멸이 투쟁의 목적으로 부각되고, 이것이 일상화되기 시작한 것은 공산주의가 태동한 이후부터이다. 이때 절멸의 대상은 다른 나라나 민족 또는 종족이 아니라 다른 계급의 사람이었다. 즉 타도의 대상이 외국이나 외부의 적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의 다른 계급으로 바뀐 것이다. 인류가 기나긴 역사 동안 다른 나라, 다른 종족에게도 쉽게 하지 않았던 완전한 절멸전쟁을 같은 민족, 같은 동포에게 자행하게 만든 것이 바로 맑스가 인류사회에 뿌린 더러운 독소이다.
공산주의라는 사악한 이념에 물든 인간이 어떻게 변하며 무슨 짓을 저지르는가를 처음으로 목도하게 된 사람들이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집권한 공화정부의 인민전선은 개혁을 명분으로 지주와 카톨릭 교회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스페인 전국의 교회와 성당들이 파괴되고 성직자들이 학살되었으며, 수녀들이 무차별 강간되었다. 물론 당시 스페인의 교회가 토지의 상당부분을 소유한 지주계급의 일부이며, 부의 대부분을 교회가 독점하여 민중의 삶이 극도로 피폐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카톨릭을 말살하겠다는 인민전선의 광기는 도를 넘은 것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이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스페인 사람이 아니라 다른 별나라에서 온 외계인이나 다름없었다. 스페인 사람이 어떻게 같은 스페인 사람인, 그것도 성직자와 수녀들을 그렇게 학살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라는 이 돌연변이 인종들의 정체에 한동안 헷갈렸지만 곧 그 본색을 알 수 있게 됐다. 이런 민심을 살핀 군부가 인민전선의 공화파 정권에 반란을 일으켰고 프랑코의 반란군이 공화파 정권을 무너뜨리게 된다. 스페인의 공산주의자들은 패전 후에 자기들의 죄값에 대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루게 된다. 5만 명에 가까운 공산주의자들이 처형되었고, 5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도주했다.
스페인 내전의 본질은 땅따먹기였다. 토지를 지주와 교회가 가질 것이냐, 농민들이 가질 것이냐가 내전의 원인이었다. 땅을 두고 지주계급과 소작인 계급이 피터지는 전쟁을 한 것이다. 이 내전으로 5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전쟁도 본질에 있어서 스페인 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전쟁의 씨앗은 이미 해방 전에 싹트고 있었다. 곰팡이가 습하고 어두운 곳에서 번창하듯이 좌익은 불공평한 사회의 모순 속에서 움트게 된다. 일제시대는 빈부의 격차가 대단히 컸다. 그리고 부와 가난의 대물림이 거의 고착되어 있었고,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신분의 상승은 거의 불가능했다. 특히 농촌의 경우, 지주들의 횡포가 심해서 소작인들은 단 한 평의 토지도 자기 것으로 만들 재간이 없었다. 소작농으로 태어났으면 죽을 때까지 소작농이었고, 자기 아들도 역시 소작농이었다. 그것은 피할 길 없는 운명이었다. 소작농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방이 곡창지대인 호남이었고, 이곳에는 특히 일본인 지주들이 많았다. 가혹한 소작조건에 대한 쟁의가 가장 많이 발생한 것도 호남지방이었다. 그런데 소작쟁의는 법적으로 불법이었고, 대개 쟁의를 시작한 소작인들은 일방적으로 지주들을 감싸고 도는 편파적인 법에 의해서 엄한 처벌을 받는 것이 상례였다. 법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는 그들은 소작쟁의에 대한 처벌을 받거나 도망을 가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이들이 도망을 갈 곳이라고는 지리산밖에 없었다. 지리산에 숨어든 이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항일 빨치산이 되고 말았는데 이들을 구빨이라고 불렀다. 대부분이 무식한 농민들이었다. 맑스의 공산주의 이론을 이해할만한 교육을 받았거나 지성적인 바탕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였다. 이들에게 평등한 세상, 누구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은 사람이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호남을 중심으로 남한 사회에 좌익이 배양되었고, 그 수가 일제 말기에 이르러 급격히 증가했다. 남한 내의 항일운동가들은 대부분이 좌익이었다. 여기서 빨갱이=항일투사, 우익=친일파라는 등식이 나오게 된다.
해방이 되자 일제시대 때 도망다니던 범법자, 산에서 숨어살던 빨치산들이 대명천지에 활보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악귀나찰이나 다름없었던 조선인 순사들은 혹시 맞아죽지나 않을까 해서 숨도 못 쉬고 바짝 엎드려 있었다. 전국의 파출소는 텅 비었고, 각종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더러는 무장까지 해서 파출소들을 점거하고 자기들의 아지트로 삼았다. 소련군이 재빨리 접수한 북한과 달리 남한지역은 한동안 치안공백 상태가 이어졌다.
민중들의 생각은 당연히 이제부터는 친일파가 당할 차례이며 항일한 사람들이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그렇게 될 걸로 믿었다. 그러나 달콤한 꿈이었고, 김칫국물 마시고 헛물을 켠 꼴이 되고 만다. 미군이 상륙해서 군정을 하게 됐는데, 가장 시급한 것이 치안의 확보였다. 경찰조직의 재건이 군정의 최우선 과제였다. 한국사정에 어두운 미군정의 당국자들은 우선 손쉬운 방책으로 일제시대 때 순사였던 사람들을 다시 경찰로 복직시켰다. 잠시 잠깐 꿈에 부풀었던 이 땅의 순진한 독립지사들은 하루 밤새 다시 친일파의 세상이 되는 것을 목도하고 까무러칠 지경이 됐다. 어제까지 자기를 잡으러 다니고, 감옥에 처넣고 무지막지하게 고문을 해대던 그 친일파 순사놈이 해방된 조국에서 벌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더 높은 경찰나리가 돼서 째려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제 때 항일빨치산으로 산속에서 온갖 고생을 다했던 자기는 상은커녕 누구 하나 봐주는 사람도 없다는 현실에 이들은 분노를 넘어 돌아가실 판이었다. 세상에 이런 법은 없다. 그러나 그런 법이 있었다. 그게 군정이었다. 우리 힘으로 이룬 해방이 아니었고 우리가 쟁취한 독립이 아니었기 때문에 투덜거려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더 기막힌 사실은 토지 문제였다. 해방 후 가장 시급했던 것은 식량문제였으며, 이것은 토지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미국은 자기들이 접수한 한국민의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지원할 생각이 없었고, 한국 내에서 생산한 곡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미국이 그때 농산물 원조를 통크게 해서 지금 대한민국이 유엔평화유지군으로 파견나간 지역에서 해주듯이 아낌없이 퍼주고 원조쌀을 배터지게 나누어주고 해서 선심을 썼더라면 대한민국에 반미감정은 생기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당시 미국은 대단히 인색하게 굴었다. 우선 배고픈 한국인들을 먹일 생각보다는 대충 해놓고 손 뺄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일제시대나 미군정이나 별 달라진 것이 없다라는 것이 민초들의 소감이었고, 이것이 미국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친일파 일본넘들을 다시 요직에 앉히고, 왜넘 순사보 하던 넘들을 정식 경찰로 써먹는 것은 좋은데, 그럴러면 배나 부르게 먹여줘야 할 것이 아니냐 이 말이다. 그런데 미군정은 다시 친일파 세상을 만들어놓은 데다가 살림살이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기근은 더 심했다.
해방이 되었을 때 농민들의 희망은 ‘토지개혁’이었다. 일본인 지주들이 남기고 간 땅의 분배와 소작제도의 개선은 당연히 되어야 할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북에서는 이미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에 의한 토지개혁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마무리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에 더욱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미군정은 토지개혁에 손을 대지 못했고, 정부 수립 후 제헌국회에서도 토지개혁법은 차일피일 미루어지기만 했다. 그 와중에 반민특위는 해체되고 친일파 처벌은 물건너 가고 말았다.
만약 일제시대에 이승만박사나 김구선생이 연설을 하면서 ‘해방은 대박’이라고 말했다면 우리나라의 민중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래 해방은 대박이 틀림없지, 해방이 되기만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박이 터질거야.”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해방이 되고나니 대박은커녕 망통이요 삼팔따라지더라는 것이었다. 기근은 더 심해지고 세상은 더 엿같이 돌아갔다. 이게 해방된 세상이냐? 이런 꼴 보자고 해방됐더냐? 이런 불만은 남쪽만 아니라 북에도 팽배했다. 해방된 나라가 되어가는 꼴이 영 아니기는 남이나 북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북한에서는 서슬에 눌려서 입밖에 드러내어 말을 못했을 뿐이었다. 남과 북은 계급에 따라, 재산의 정도에 따라 불만의 크기가 달랐을 뿐, 해방이 대박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환상을 품게 했다가 막상 통일이 되었을 때 대박은커녕 망통이라고 느끼게 되면 그 결과는 해방 이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 통일대박론의 허구성에 대하여 6
해방이 되자, 국내에 있던 많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지지세력을 동원하여 각종 단체를 만들었는데, 여운형의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이 가장 규모가 컸다. 그러나 실제 해방 당시 가장 대규모의 조직을 거느린 사람은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이었다. 전국 시군구 및 읍면, 리동 단위까지 조직을 갖출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자는 박헌영이 유일했다. 수십만 명의 좌익이 전국 단위로 인민위원회를 결성했는데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에서의 공산당 활동은 김일성에게 주도권을 뺏기고 박헌영은 남로당의 지도자로 국한된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천부인권의 하나로 생각했던 것이 미국이었던 만큼 초기에 미군정은 공산당의 활동을 허용했고 좌익은 합법이었다. 그러나 좌익이 주도하는 파업과 폭동이 되풀이 되고, 친탁운동과 남한 단독선거 반대 등으로 군정에 배치되는 행보를 계속하자 군정은 공산당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좌익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물론 그것의 물리적 수단은 경찰력과 군대였다. 아다시피 당시의 경찰은 대부분 일제시대의 순사들이었고 대표적인 친일세력이었다. 좌익들은 대부분 크던 작든 일제시대의 항일투쟁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해방된 나라에서 친일파들이 항일투쟁가들을 잡으러 쫓아다니는 형국이 벌어졌다. 좌익들은 졸지에 수배자가 되어 도망다녀야 했고, 체포되면 빨갱이로 몰려 사형 아니면 장기간의 수형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좌익척결은 친일파들에게는 기사회생의 무대가 되어주었다. 반공이 살길이었다.
해방은 한민족의 대박이 되어야 했다. 그 대박은 일제시대 때 일제에 항거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의 것이어야 했다. 그리고 그럴 것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믿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 해방의 대박은 친일파들의 것이었다. 토지개혁과 적산(敵産: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의 불하는 지주와 자본가 계급의 노다지가 되었다. 토지개혁과 미곡의 매점매수, 그리고 적산의 불하로 친일세력은 해방정국 속에서 떼돈을 벌었다. 해방이 대박이긴 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에게 대박이었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통일도 대박일 것에 틀림없다. 그러나 단언컨대 모두의 대박은 아닐 것이다. 통일대박의 주인공이 누가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통일에는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통일의 대박이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의 집 잔치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수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무엇으로 표출될지 나는 그것이 두렵다. 박근혜 대통령이 과연 통일 후에 기다리고 있는 일들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서 ‘통일은 대박’이라고 말했는지 나는 궁금하다. 만약 모르고 한 소리라면 박대통령은 지극히 경솔하고 무책임한 사람이며, 알고서 했다면 놀라운 용기의 소유자다.
경찰의 수배를 받고 쫓기게 된 좌익은 이 좁고 섬이나 다름없는 한반도의 남반부에서 도망갈 곳이 없었다. 다시 지리산으로 기어든다는 것은 끔찍하고 궁상맞은 짓이었다. 결국은 도로 지리산이 되고 말지만 그때 좌익들에게 경찰의 수사권이 미치지 않는 성역의 문이 열렸다. 그것이 바로 군대였다. 남한단독정부의 수립이 기정사실화되자 국군의 창설이 시작되었고 국군의 전신이 되는 국방경비대가 모병을 시작했다. 징병제가 아직 실시되지 않아서 초기의 국군은 지원병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당시의 군대라는 것은 급식에서 시작하여 모든 보급과 처우가 바닥이었고 사병으로서 군에 복무한다는 것은 대단히 고생스러운 길이었다. 모병이 쉽게 될 턱이 없었다. 그래서 군은 과거의 전력이 어떠하든, 사상이 어떻든, 빨갱이던, 노랭이던, 광복군 출신이던, 일본군 출신이던, 범죄자이던을 가리지 않고 지원만 하면 무조건 받아주었다. 일단 군인이 되고 나면 경찰의 수사권이 미치지 않았다. 민간인이 아니기 때문에 경찰은 체포를 할 수도, 구속을 할 수도, 조사를 할 수도 없었다. 수배를 받고 도망다니던 좌익이 군에 입대만 해버리면 경찰은 닭 쫓던 개가 되어 버렸다.
장교들의 출신이력은 다양했다. 중국의 국민당군 출신, 팔로군 출신,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만주군 장교 출신, 일본육사를 나온 일본군 장교 출신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중 가장 많은 수가 만주군과 일본군 출신들이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국군의 상층부는 친일파가 다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사관들과 사병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경찰에 쫓겨서 타의로 입대한 좌익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는 하사관들과 사병의 70% 이상이 좌익이었다. 제주도의 국방경비대도 상황은 별 다르지 않았다. 이들 좌익군대가 역시 좌익성향인 민간인들과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 효시가 제주의 43사건이다. 여순반란은 제주43의 속편이다. 제주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로 출동하게 된 제14연대는 배에 오르기 전에 반란을 일으켰다. 제주도 인민을 진압하기 위한 출동을 거부한다는 것이 반란의 명분이었다. 제14연대의 하사관들이 주축이 된 반란군들은 소, 중대장들을 비롯하여 대대장 연대장까지 대부분의 장교들을 사살하고 여수 시내로 진격했다. 순식간에 광양, 구례, 순천이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여수, 순천 일대는 남한 내의 해방구가 되었다. 제주도에 이어 두 번째 해방구가 생겨난 것이었다. 제주도와 여수, 순천의 해방구 안에서 벌어진 일이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는 계급투쟁, 계급청소의 광란극이었다. 해방구내의 모든 경찰과 경찰가족들이 끌려나와 처형되었다. 지주들과 기업인들이 그 다음 차례였다. 판검사나, 의사, 교사 등의 지식계급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여수, 순천의 시내에 맞아죽고 찔려죽은 시체들이 널렸다. 어제까지 지주어른 지주어른 하며 굽실거렸던 소작인들이 지주와 그 가족들을 개잡듯이 때려죽였다. 그 장면을 눈앞에서 보게 된 사람들의 느낌은 이것들이 과연 한민족이 맞는가 하는 것이었다.
교회와 성당을 불태우고 신부들을 목매달고, 수녀들을 닥치는 대로 강간하는 인민전선의 해방군들을 보면서 스페인사람들이 느꼈던 것을 그때 한국인들은 느꼈다. 그리고 묻게 됐다. “너희들이 과연 같은 민족이며, 동포이고, 겨레인가?”
“이게 같은 나라 사람끼리 할 수 있는 짓인가?”
미군정 당국은 군의 반란에 대해서 단호한 응징에 나섰다. 동원가능한 전 병력이 호남으로 집결했고, 여수와 순천을 포위했다. 반란군은 병력과 장비에서 열세였다. 무엇보다 화력이 상대가 되지 않았다. 진압군은 멀리서 포위하고 박격포를 쏴댔다. 해방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반란군들은 시내에서 쫓겨나 여수 인근의 산과 들로 흩어져 달아났다. 잔당들에 대한 추격이 시작됐고, 시내에서는 복수극이 벌어졌다. 도망갔다가 돌아온 경찰들이 반란군에 부역하고 동조한 시민들을 색출하여 무자비하게 처단했다. 경찰서와 파출소 마당에 이번에도 시체들이 쌓였다. 가장 사납게 설친 것은 경찰과 군이 아니라 서청(서북청년단)단원들이었다. 제주도에서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것도 서청이었다. 이들은 북한에서 탈출하기 전에 인민재판을 받은 자기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삼촌들이 죽창에 찔려죽는 것을 보고 온 사람들이었다. 제주도와 여순의 해방구에서 벌어진 계급청소는 그 이전에 이미 북한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진 일이었다. 서청단원들은 그 계급청소의 목격자들이며, 피해자들이었다. 이미 한반도에는 더럽고 추악한 계급투쟁의 도화선에 불이 붙은 상태였다. 이것이 육이오동란이라는 대폭발을 일으키게 된다.
계급청소는 보복과 보복의 악순환을 거듭하면서 갈수록 잔인해지고 참혹해지게 된다는 점에서 가장 추악한 형태의 전쟁이다. 외적의 침입이나 외국의 지배 하에서도 사람은 살 수 있다. 설사 나라가 외적에 정복을 당한다 해도 정복자들이 피정복민 전부를 죽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외적의 지배 하에서도 연명은 할 수 있다. 복종하기만 하면 사는 것을 허락받을 기대는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급의 원수들은 그렇지 않다. 같은 민족이고, 같은 나라의 국민이고, 같은 동포인데도 상대를 살려주지 않는다. 지면 죽어야 한다. 살기 위해서는 이겨야 하고 자기가 상대를 죽일 수밖에 없다. 이게 계급전쟁의 본질이다. 때문에 계급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계급간의 적대감을 고취시키고 계급간의 투쟁을 선동하는 자들은 가장 악독한 비극의 씨앗을 뿌리는 자들이다. 이들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이며 좌익이다.
43폭동을 일으킨 제주도의 좌익이나, 반란을 일으킨 여순의 좌익들은 뒷감당을 할 능력이 없었다. 진압군에 맞서 싸우는 것은 결과가 뻔했다. 이게 다른 전쟁이라면 항복하면 된다. 전쟁을 하다가 항복하면 포로가 되고, 포로는 국제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다. 포로가 된다는 것이 죽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제주43과 여순반란은 전쟁이 아닌 계급투쟁이었다. 그래서 항복을 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했다. 손들고 투항한다고 살려주는 그런 전쟁이 아니었다. 항복한 사람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지 않은 투항자의 가족들까지 잡아서 죽이는 전쟁이었다. 그런 추악한 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은 좌익들이었다. 그러나 그 보복은 시작한 자들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부모와 형제를 눈앞에서 죽인 자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우익이라고 해서 덜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고, 우익이라고 해서 태어날 때 덜 잔인하게 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너가 할 수 있는 짓은 나도 할 수 있다. 너가 하는 만큼 나도 해주겠다. 이것도 인지상정이다.
진압군에 몰려 인근의 산으로 쫓겨간 반란군들의 희망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싸워도 죽고 항복해도 죽는 것이 자기들한테 남겨진 길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짓을 생각해보면 항복한다고 해서 살려줄 리가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당중앙의 구원이었다. 산으로 쫓겨간 반란군의 잔당들은 구원의 손길이 북으로부터 올 것이라고 믿었다. 당중앙은 자기들을 버리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이대로 진압군들 손에 자기들이 전부 죽어나가도록 당중앙이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그들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희망의 끈이었다. 그들이 살기 위해서는 삼팔선에 포화의 섬광이 번쩍여야 했다. 영용한 인민의 군대가 삼팔선을 넘어 남반부 전체를 해방시켜야 했다. 반란군들은 인민군을 영접할 그 날을 기다리며 길고도 힘든 빨치산의 길을 걷게 된다(이들을 일컬어 신빨이라고 한다).
한국전쟁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 추악한 계급전쟁이...
- 통일대박론의 허구성에 대하여 7
지금까지의 글을 통해서 분단의 본질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통일의 개념을 똑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분단의 본질을 알아야 하고, 한국전쟁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해방 후의 조국에서 어떻게 친일파들이 득세를 하고, 해방의 대박을 챙기게 되었는지, 어떻게 항일투사들이 죄인이 되어 쫓겨다니게 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긴다는 것과 엇비슷한 이야기로 들린다. 피는 항일투사들이 흘리고 그 과실은 친일파들 몫이 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 우익의 원죄가 되었고, 좌익의 정통성과 정당성의 토대가 되었다. 좌익들이 큰소리치는 바탕에 항일이 있고, 우익이 움츠러드는 자격지심에는 친일이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진실은 아니다. 팩트를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착시인 것이다. 망국의 초기에는 항일독립운동이 있었다.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이 그랬고, 31운동을 비롯해서 안중근의사나 윤봉길 의사의 장렬한 의거가 그러했고, 청산리, 봉오동의 가열찬 전투들이 그러했다. 그러나 이런 항일독립운동은 길게 잡아도 20년대 말까지였고, 그 이후에는 항일독립운동이란 사실상 명색뿐이었다. 상해임정이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을 뿐,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씨가 말랐고, 만주의 독립군들은 산산히 흩어져 중앙아시아로 근거지를 옮겼다. 국내, 국외를 막론하고 독립운동은 거의 소멸된 상태였다. 연합군의 승전에 유의미한 공헌을 조금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연합군이나 전후의 유엔에서 임시정부는 인정조차 받지를 못했으며, 미군정은 임시정부요인들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제시대에 생겨난 항일투사들은 무엇일까? 지리산에서 일본에 맞서 처절한 유격전을 했던 구빨들은 뭐냐 이 말이다. 그들은 해방 후에 항일투사로 자처했고, 친일세력을 비난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결코 항일독립투사들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일본제국에 저항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재산상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항거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계급적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 싸웠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외적과 맞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으며 후대에 가르치지도 않고 있다.
일제시대 좌익의 대부분은 소작농들이었다. 그들이 싸운 적은 일본제국이 아니라 악랄하게 소작인들을 착취하는 지주들이었다. 그 지주들 중에는 일본인도 있었지만 조선인 지주들도 많았다. 소작쟁의는 일본인 지주들보다는 조선인 지주들을 향해서 더 많이 벌어졌다. 지주들을 감싸면서 이들을 탄압한 것이 왜인들의 법이고 왜인들의 경찰이고 왜인들의 사법이었기 때문에 얼핏 보면 이들의 투쟁 상대가 일제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기실에 있어서 이들의 적은 지주와 기업인들이었고, 태반은 같은 조선사람이었다. 좌익 항일투사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소작권과 생존권을 위해 싸웠다. 한 떼기의 땅을 가지고 싸운 사람들이지 조국이나 독립 같은 것은 머리 속에 있지도 않았다.
그들의 투쟁은 계급투쟁이었으며, 그들의 적은 유산계급이었다. 지주와 자본가들이 타도의 대상이었지 일본제국이 아니었다. 그랬기 때문에 해방이 되었다 해서 그들의 적들이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조국의 적은 물러갔지만 계급의 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오히려 본격적인 계급의 적에 대한 전쟁을 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었다. 이들이, 그리고 이들의 후손들이 아직도 항일투사로 자처하면서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을 친일파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계급투쟁의 전사들이 항일독립투사로 위장한 역사이며, 이 사기극은 보기좋게 성공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올바른 교육을 받지 못해서 지금도 이들의 감언이설에 속고 있는 중이다. 좌익=항일, 우익=친일이라는 등식이 굳어져 있는 것이다.
이 등식을 깨고 진실을 드러내야만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의 문을 열 수 있다.
- 통일대박론의 허구성에 대하여 8
조선 말기에 태어난 천재 중에 황사영이란 사람이 있다. 1791년(정조 15년)에 17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에 합격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고, 정조대왕의 각별한 귀염을 받았던 사람이다. 정조 시대 조선의 천재였던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이 황사영을 사위로 삼은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조선을 위해 큰 일을 할 인재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이 황사영이 1801년(순조 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천주교박해의 실상과 탄압받는 교도들의 참상을 전하는 편지를 북경에 있는 북경교구의 천주교 주교에게 보냈는데 이 편지를 가지고 동지사 일행에 끼여 북경으로 가던 황심과 옥천희가 체포됨으로써 백서의 내용이 만천하에 공개됐다. 백서에는 프랑스 황제에게 군대를 조선에 보내어 정벌해 줄 것을 청원하는 내용이 있었다. 이 편지는 흰색 비단에 쓰여졌기 때문에 백서(帛書)라고 한다.
백서를 쓴 황사영은 그 해 11월 5일(음력 9월 29일)에 붙잡혀 한양으로 끌려와 12월 10일(음력 11월 5일)에 처형되었다. 가산은 몰수당하고 어머니와 처 아들도 귀양을 갔다.
조정은 황사영의 백서 내용에 아연실색했으며, 온 나라가 황사영과 천주교도들을 비난했다. 그러나 우리는 황사영을 비난하고 욕할 이유가 없다. 백서를 지어 북경의 프랑스 선교사에게 보내려고 한 사람은 황사영이 아니라 알렉산드로(황사영의 세례명)이며, 그는 천주교도이지 조선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진사에 합격하던 청년기까지는 그의 이름이 황사영이고, 조선사람이었을지 몰라도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의 제자가 되어 세례를 받고 이름을 알렉산드로로 바꾸고 머리속을 천주교리로 채워넣은 다음의 그는 더 이상 조선사람 황사영이 아닌 것이다. 때문에 프랑스 황제에게 군대를 끌고 와 동족이었던 조선사람들을 죽이고 정벌하여 신유박해의 복수를 해달라고 청원했다 해서 그토록 놀라워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죽일 놈이라고 매도할 일도 없다. 조선에 해악을 끼치려 했으므로 그가 조선인이든 프랑스 사람이든 아브라함의 자손이든 우리 국법에 따라 처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어찌 조선사람으로서...’ 하는 비분은 거두어도 좋을 것이다.
황사영 같은 사람은 우리나라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일본에도 황사영 같은 인간이 있었고, 히데요시의 격분을 사서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이 벌어졌다. 그 이후로 일본에는 야소교가 기세를 잃고 두 번 다시 부흥하지 못했다.
육이오 직전에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대에 쫓겨 지리산으로 기들어간 좌익들은 알렉산드로(황사영)와 다를 게 없었다. 자기들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북쪽의 당중앙에 자기들을 구해주기를 간청했다. 제주43과 여순 반란사건이 일어난 이후 박헌영은 뻔질나게 평양을 드나들면서 남침전쟁을 요청했다. 남한 내의 좌익들이 이대로 말살되기 전에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고 박헌영은 강력하게 주장했다. 인민군이 삼팔선을 넘기만 하면 남쪽의 공산세력이 총궐기하여 남한을 전복함으로써 손쉽게 집어삼킬 수 있다고 김일성에게 장담했다. 전쟁 후에 박헌영은 거짓말을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지만 이때 그의 장담은 결코 허풍이 아니었고, 거짓말도 아니었다. 남한에는 수십만의 좌익이 있었고, 특히 당시의 국군은 겉은 파랗지만 속은 새빨간 수박군대였다.
그러나 미군정이 공산주의 활동을 불법화하고 좌익을 탄압하기 시작하자 수많은 세포와 조직들이 검거되었고, 남로당은 급격하게 약화되기 시작했다. 더욱 결정적이었던 것은 바로 제주 43과 여순반란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과 남한정부는 군의 좌경화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대대적인 숙군작업에 착수하게 됐다. 군 안의 빨갱이들이 전부 솎아져 나왔다. 박정희가 전향하게 되는 것도 이때의 일이다.
제주43과 여순반란 사건은 어떤 면에서는 대한민국에 크나큰 다행이었고, 백척간두에서의 서광이었다. 만약 이들이 육이오가 발발할 때까지 드러나지 않고 사회 각계와 군 내에 잠복하고 있었다면 그 결과는 실로 끔찍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순반란을 계기로 좌익은 대대적으로 소탕되었고 급속히 세력을 잃게 되었다.
남은 잔당들은 지리산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오지 않는 인민해방군을 기다리며 당중앙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얼어죽고, 굶어죽고, 맞아죽으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극한의 투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들의 애비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자기 새끼들이 지리산에서 말라서 비틀어져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인민군이 삼팔선을 넘었을 때 지리산 빨치산은 한 줌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구원의 손길인 인민해방군이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전쟁이 발발한지 3개월이 지난 9월이었다. 그들 앞에 나타난 인민군은 영용하고 늠름한 해방군이 아니라 빨치산들과 다를 바 없는 꺼러지들이었다. 안 그래도 사흘드리 굶기가 예사였던 빨치산들이 그들을 먹여살려야 했다. 인민군은 해방자가 아니라 학살자였고, 두 손에 피를 잔뜩 묻힌 꺼러지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었다.
자기들을 구해달라고 동족에 대한 침략전쟁을 간청했던 그들은 한국인이 아니었다. 황사영이 알렉산드로였던 것처럼 그들은 동포가 아니라 따와이리시(동무)들이었고, 한국인이 아닌 맑시스트들이었다.
정치적 이념이건, 종교적 이념이건 이념의 광신이 머리 속에 자리잡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이전의 그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 이들과는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통일의 상대가 아닌 것이다.
- 통일대박론의 허구성에 대하여 9
나는 이 글을 ‘통일’이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제 또 하나의 단어에 대한 뜻을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통일이라는 말은 ‘본시 하나였다가 갈라졌던 것을 다시 하나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통일’이라는 말은 ‘일통’이라고 쓰도 무방하다. ‘통일천하’나 ‘일통천하’나 같은 말이며 둘 다 어법상 문제가 없다. <사기>에는 “진시황이 일통천하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부터는 편의상 이 말을 ‘일통’이라고 사용할 것임을 미리 밝힌다. 그 이유는 지금부터 생각해야 할 중요한 하나의 단어와 발음과 이미지의 동형화 때문이다.
본시 하나였던 것이 여럿으로 나뉘어진 것을 다시 하나로 되돌리는 것이 ‘일통’이라면 본시 같았다가 서로 달라진 것을 다시 같아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라고 할까? 그것은 ‘일치(一致)’라고 한다. 본시 하나였던 것을 하나로 되돌리는 작업이 일통하는 것이며, 원래 같았다가 달라진 것을 다시 같아지게 만드는 작업은 일치시키는 것이다. 본시 하나가 아니었던 것을 하나로 뭉치는 일은 ‘통합’이다. 그렇다면 원래 같지 않았던 것을 같게 만드는 작업은 무엇이라고 할까? 그것은 ‘동화(同化)’라고 한다. 원래 하나가 아니었던 것은 아무리 한자리에 모아놔도 결국 하나가 아닌 것처럼, 원래 같지 않았던 것은 암만 닮게 만들어도 완전히 같아지지는 않는다. 비슷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동화(同化)라는 말은 종료되지 않는 상황이다. 언제나 진행형이지 과거완료형으로 쓸 수 없는 말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원래부터 다른 인종이며, 한 번도 같았던 적이 없다. 그래서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여 이 둘을 같은 것으로 만들려고 했을 때 그것을 동화작업이라고 했다. ‘같아지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러나 36년 동안 동화작업에 광분했지만 일제는 끝끝내 한국을 자기들과 일치시킬 수 없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남한사람들과 북한사람들은 원래 같았던 하나의 민족이고 뿌리가 같은 인종이기 때문에 서로 간에 동화라는 말을 쓸 수 없다. 즉 남한사람들이 북한사람들을 동화시킨다거나, 그 반대로 북한사람들이 남한사람들을 동화시킨다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 남과 북의 경우에는 동화가 아니라 일치를 시켜야 한다. 남과 북은 원래 같았기 때문에 다시 같아지게 만들어야 하며 그것은 둘을 다시 일치시키는 것이다.
일통을 할 수 있는 대상은 본시 하나였던 것이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본시 하나였던 것이어야만이 가질 수 있는 동질성 때문이다. 흩어지고 갈라져 있는 동안 이질적인 요소가 스며들었다 해도, 그 본성 속에 뿌리깊게 각인된 동질성이 있기 때문에 본시 하나였던 것은 일통이 가능하다. 그런데 본시 하나였던 것이라 해도 흩어지고 갈라져 있던 시간이 너무 길거나, 이질적인 요소의 혼입이 너무 심해서 동질성이 회복될 수 없을 만큼 훼손된 경우에는 일통이 불가능할 수 있다.
남과 북의 경우, 만약에 분단이 너무 길어져서 앞으로 50년 혹은 100년이 지나도록 분단상태가 지속되면 본시 하나였던 민족이고 원래 같았던 동족이라 해도 동질성이 약화되고 이질화가 너무나 진행되어 남북의 일통이 불가능하거나 한다고 해도 일통의 의미가 없는 통합에 그치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의 상황은 어떠한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분단이 거의 70년에 이르는 지금, 남북한의 동질성이 얼마나 남아있는가. 이질화가 얼마나 진행되었는가를 심각하게 따져봐야 한다. 그래야 현재의 남북한이 일통할 수 있겠는가, 일통해야 하는가에 대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을 따지지 않고 막연하게 원래 한 민족이었으니 통일은 당연한 일이고, 통일은 무조건 대박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의 순서를 헤아리지 못하는 우매함이다.
본시 하나였던 것만이 일통이 가능하다는 의미는 원래 같았던 것으로서의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어야만이 일치시킬 수 있고, 일치된 것이어야만이 일통할 수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일통의 전제조건이 일치이다. 일치시켜야만이 일통을 할 수 있고, 일치된 것만이 하나로 합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남북한의 일치에 대해서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다. 아예 일치에 대한 개념조차가 없다. 무턱대고 일통만 외쳐댄다. 그러니 이게 제대로 되어나갈 턱이 없다. 아무리 바빠도 바늘허리에 묶어 쓸 수 없다는 옛 말이 있다. 모든 일은 순서가 있고, 순서를 생락하거나 건너뛰면 반드시 낭패가 있다. 일치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일통은 대박이 아니라 망통이 될 수밖에 없다. 통일이 대박이 되는가 망통이 되는가는 바로 이 순서에 달려있다.
대박이 되는 통일은 먼저 일치시킨 다음의 일통이며, 망통이 되고 재앙이 되는 통일은 일통을 한 후에 일치를 시키는 역순의 통일이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최우선적인 개념인가에 대해서 지금부터 설명해 나갈 생각이다. 통일이 우리 민족에게 축복이 되고 대박이 되느냐 아니면 망통이 되고 재앙이 되느냐가 바로 여기에 달려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제안은 이 순서의 개념이 없다. 하려고 하는 것이 일치인지 일통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먼저 일치를 시키겠다는 것인지 일통을 먼저 하겠다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된다. 그러다보니 일치에 대한 방법도 없고 일통에 대한 방법도 없다. 막연하고 모호한 관념의 나열만이 있고, 북한이 받아들일 리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받아들이지도 않을 혼자만의 제안뿐이다. 우이독경은 소의 잘못이 아니라 염불하는 중의 잘못이다. 못 알아먹는 소한테는 죄가 없다.
터키인의 뿌리는 타타르(말갈)족이다. 고구려인의 방계다. 당나라가 침입해 왔을 때 연개소문이 동원한 고구려군의 2/3가 타타르족 병사였다. 오늘날에도 터키사람들은 자기들의 원 조상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를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헤어지고 갈라진지 1천오백년이 지난 지금도 코리아를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보다는 확실히 한국을 다르게 여긴다. 그러나 갈라진 세월이 너무나 길고, 달라진 것이 너무 많아서 지금의 터키인에게서 한국사람의 체취를 느끼기는 어렵다. 이미 일치시키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비록 동류의식이 남아있다고 해도 터키와 한국의 일통은 어려울 것이다. 일치가 불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에 일통은 안된다고 봐야 한다.
만주와 한반도도 마찬가지다. 만주의 여진족도 본시 동이의 방계로 우리와 같은 조상, 같은 혈통의 동족이다. 전부 고조선과 부여의 후손인 것이다. 청나라를 건국한 여진의 추장인 누르하치도 신라 김씨의 자손이다. 그래서 나라 이름이 본래는 금(金)국이었다. 하지만 지금 만주족과 한민족의 이질화는 심각하다. 서로가 많이 달라져서 어느 정도의 동질성이 남아있는지 불분명하다. 이질화의 정도에 따라 만주와 한반도가 다시 일통될 수 있는가가 정해질 것이다. 일치가 가능하다면 만주인과 한국인이 일통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무엇이 일치되어야 하는가. 언어가 일치해야 하고, 풍습이 일치해야 하고, 사상이 일치해야 하고, 가치관이 일치해야 하고, 법률이 일치해야 하고, 경제구조가 일치해야 하고, 정치제도가 일치해야 하고, 교육과정이 일치해야 한다. 동질성을 회복해서, 일치시킬 수 있다면 만주와 한반도의 재통일도 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과는 어떤가? 언어가 일치하는가? 풍습이 일치하는가? 법률이 일치하는가, 사상이 일치하는가? 정치제도가, 경제구조가 일치하는가? 교육과정이 일치하는가? 지금 남한과 북한의 차이는 한국과 터키의 차이보다 크다. 불과 70년 만에 1천5백년의 거리보다 더 멀어진 것이다. 모든 것이 다르고 불일치하다. 같은 것은 조상뿐이다. 이런 상태에서 과연 일통이 가능한 일인가를 진지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동화(同化)의 끝은 동일(同一)이다. 같아지는 것이 동화의 목적이다. 그런데 이 동일이라는 말 속에는 두 개의 비교라는 개념이 들어있다. 동일한가 아닌가는 두 개 이상의 대상에 대한 비교의 결과이다. 하나인 것에 대해서는 동일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 동일한가를 물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일치시키는 목적은 일통하는 것이다.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기 위한 작업이 일치이다. 한 민족의 통일은 동화가 아니며 그것의 목적은 동일화가 아니다. 통일은 일치시키는 작업이며 그것의 완성은 일통이다. 그래서 통일은 때로는 비극을 불러온다.
앞서도 잠깐 말했듯이 스페인은 내전이 끝난 후 5만 명의 공산주의자들을 처형했다. 대략 50만 명 이상의 맑시스트들이 국경 너머 프랑스로 도주했는데, 만약 도망갈 이웃 나라가 없었다면 스페인에서는 수십만 명이 처형되었을 것이다. 월남이 패망했을 때, 바다에는 보트피플이 쏟아졌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통해 탈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베트남에서는 10만 명 이상이 처형됐고, 백만 명이 강제수용소에 보내져서 사상개조작업을 받았다.
이런 참극이 벌어진 이유는 일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통했기 때문이다. 일통을 하기 전에 일치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일통한 후에 일치시키는 작업을 벌여야 했던 것이다. 그 일치 작업은 바로 일치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청소가 되고, 그것은 살육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일통되기 전에 일치가 선행되었다면 이런 참극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페인의 학살과 베트남의 보트피플은 모두 잘못된 순서가 불러 온 비극이다.
반면에 독일의 경우는 이와 순서가 달랐다. 독일은 일통하기 전에 일치가 먼저 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비극에서 비켜날 수가 있었다. 동독사람들은 통일이 되고 나서 공산주의를 버린 것이 아니라, 통일이 되기 전에 먼저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옷을 벗어던졌다. 아니 동독사람이 공산주의를 패대기쳤기 때문에 서독의 품에 안길 수가 있었고, 통일이 될 수가 있었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버린 동독인들은 나머지 부분에 있어서는 서독인들과의 이질성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동독사람들과 서독사람들의 언어가 지금 남북한 사람들이 쓰는 언어만큼 다르지 않았고, 법률체계도 유사했으며, 경제구조가 남북한처럼 판이하지 않았으며, 정치제도도 역시 본질에서는 과히 다르지 않았다. 소득의 격차와 국가의 경제력도 약 두 배 정도의 차이밖에 안 되었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버림으로써 비교적 손쉽게 일치될 수가 있어서 선일치 후에 후일통했던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이나 월남 같은 비극을 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떠한가? 누구도 먼저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일치에 대한 생각조차 전혀 없다. 그러면서 일통을 서두른다. 만주보다 더 멀고 터키보다 더 다른 북한과 무턱대고 하나로 합치자고 대드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만약 적화통일이 되는 경우(그럴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거의 없지만) 일치시키는 작업에 수백만 명이 죽어야 할 것이다. 남한이 북한을 흡수하는 경우에는 어떨까? 그 경우에도 내가 추산하기로는 적어도 30만 명은 처벌해야 할 것이다. 그 중의 3할은 살려둘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게 해서 일치시키지 않으면 일통은 의미가 없게 되고 끝없는 혼란과 내전 상태가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북한을 흡수해서 끌어안게 된다면 그 순간 우리가 부딪히게 될 문제 중 가장 고약한 것은 지난 70년 동안 북한을 지배하면서 온갖 인권범죄를 저지른 김일성 일가와 노동당 세력에 대한 척결 문제가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일통은 일통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용서할 수 있는 문제인가? 용서를 했을 때 남북이 과연 일치될 수 있는 것이며, 일통이 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어쩔 수 없이, 선택의 여지가 없이 우리는 이 이질적인 것들을 청소해서 털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수는 어림잡아도 30만 명을 밑돌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박근혜 대통령이 이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걱정스럽다. 박애주의와 인도주의가 넘쳐나는 드레스덴 정신을 가진 그녀가 과연 일통 후에 닥쳐올 일치작업을 완수해 낼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나는 머리가 지끈거린다. 지금 통일부 장관을 비롯해서 이 나라의 통일일꾼들이 과연 해낼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보기에 이 나라 통일부에는 전부 머저리들만 모여있고 비싼 밥만 축내는 세금도둑놈들 뿐이다.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나는 사람은 현재로서는 한 사람 뿐이다. 고박정희대통령. 그 분이라면 해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 딸은...
다음 글에서 일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통이 먼저 되었을 때 왜 참극을 피할 수 없는지에 대해 설명드릴 생각이다.
1950년 9월 15일에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고, 10월 1일에 삼팔선을 넘었으며, 10월 19일에 평양을 수복했다. 이날 중공군이 처음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10월 26일에 국군 제6사단의 선봉인 7연대가 압록강변의 초산에 도달하여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았다. 이때 중공군은 이미 30만이 넘는 대병력을 압록강 이남으로 들여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의도는 청천강 이북에서 한미 연합군을 포위하여 격멸한다는 것이었다. 중공군의 남하를 눈치채지 못한 유엔군은 중공군이 매복한 청천강 이북의 깊은 계곡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포위망은 점차로 완성되어 가고 있었고, 중공군과 국군의 첫 교전이 10월 25일에 벌어졌다. 탱크를 앞세우고 운산-온정 간 도로를 따라 북상하던 국군 제1사단의 선두부대가 중공군 120사단 360연대의 공격을 받아 패주했고, 온정에서 북진으로 진격하던 국군 제6사단 선두대대가 매복해 있던 중공군 제118사단 354연대와 353연대의 공격을 받아 풍중동, 양수동 일대에서 기습을 당해 궤멸 당했다. 병력의 대부분이 섬멸됐고 미군 군사고문관 3명을 포함한 수백 명이 포로가 됐다. 항미원조 제1차전역이 시작된 것이었다.
청천강을 건너 압록강을 눈앞에 두고 북진하고 있던 유엔군 대부분이 중공군의 함정에 걸려들 위기상황이었고, 유엔군은 이 함정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때 중공군의 작전계획이 큰 차질을 빚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제38군의 도착지연이었다. 양홍초가 지휘하는 제38군은 중공군 중에서도 정예 중의 정예로 손꼽히던 강군이었는데 계획대로라면 25일에는 희천에 도착해서 국군 제6사단과 제8사단의 퇴로를 끊어야 했다. 제38군이 희천에 제시간에 도착했었다면 국군의 2개 사단은 퇴로가 차단되어 꼼짝없이 전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제38군의 전진은 더디기만 했다. 강계에서 희천에 이르는 깊은 산속의 도로 위에서 꼼짝을 못하고 꾸물대기만 했다. 중국 대륙 수만리 광야를 바람처럼 누벼온 제38군으로서는 처음 겪는 낭패였다. 북경의 모택동과 조선에 들어와 있던 팽덕회의 신경은 온통 제38군에 쏠려 있었다. 그러나 끝내 38군은 제 시간에 맞추지를 못했고, 국군 8사단과 6사단은 가까스로 호구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중공군 제38군이 그토록 지연된 이유는 강계-희천 사이의 도로가 피난민들로 꽉 메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소달구지들이 길 위에 퍼져 있었고, 지게를 지고 옷보따리를 들러매고 아이들을 업고 걸리면서 북조선인민공화국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향하여 북행하는 피만민들이 넘쳐나고 있어서 양홍초의 중공 제38군은 이 피난민들을 헤치면서 남진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는 일사후퇴 때 흥남부두에서 필사적으로 미군 함정에 올라타 탈출하는 금순이를 기억하고 있다. 얼어붙은 대동강에 걸린 부서진 철교위에 개미떼처럼 새까맣게 들러붙어서 남으로 가던 피난민의 행렬을 기억한다. 전부 북한에서는 살 수 없어서,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남하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만든 나라가 자유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시기에 자유대한민국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 남한과 미군을 피해 북으로 가야만 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의 의식 속에 그들은 남아있지 않다. 누구도 자유대한민국을 건설했던 사람들과 다른 방향으로 달아났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흥남에서 철수하던 군수송선의 갑판이 사람들로 미어터지고, 대동강철교가 무너질듯이 출렁거리던 모습만 보여줄 뿐, 어떤 다큐멘타리도 북으로 향하던 피난민 대열을 보여주지 않는다. 중공 제38군의 이동이 불가능했을 정도로 도로를 가득 메웠던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증언하는 사람이 없다.
우리 시각으로 본다면 전쟁이 끝났을 때, 북한에는 남아있는 인민이 거의 없어서 텅 비어야 정상이다. 북한에 살던 사람들은 수차례 밀고 밀리는 전황 속에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북한을 탈출할 수 있었다. 남으로 후퇴하는 유엔군에 편승하면 남행은 그렇게 위험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피난살이가 고되고 힘들 것은 틀림없었지만...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북한에는 1천만에 가까운 인민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 중 많은 수가 그저 고향을 버리지 못해서, 피난살이를 각오할 수가 없어서, 차마 모질게 부모 형제와 작별할 수 없어서 마지못해 남아있게 된 사람이 아니라 죽어도 미제 치하의 세계에서는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자의로 남은 사람들이었다. 유엔군이 북진할 때는 이들의 치하에 남는 것이 두려워서 가산을 보두 버리고 북행피난길에 올랐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자식들이 지금 북한의 인민들이다. 북조선인민공화국 사람들이다. 어쩔 수 없이 북한에 태어나고 북한에 남게 되어 김일성 일당의 노예가 되고 가축이 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북조선인민공화국을 자신의 조국으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목숨을 바쳐 김일성을 옹위한 혁명의 전사들이다. 그들은 해방이 되자 소련군을 따라 북한에 들어온 김일성을 해방자로 맞이한 사람이고, 김일성의 사주에 따라 지주와 자본가들을 죽창으로 찔러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인 사람들이다. 지주들에게서 빼앗은 토지를 분배받고 좋아서 춤을 추었던 사람들이다. 사회주의 조국에서 새 세상을 열어가리라 믿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이름은 무산계급이며, 노동자, 농민이며, 프로레타리아이며, 혁명의 전사들이다.
해방이 되기 전에 이미 좌익이었던 사람들도 많았지만 전쟁이 남한과 미국을 원수로 만든 사람들도 많다. 북진한 국군과 미군이 북한 곳곳에서 양민을 학살했고(이것은 사실이다. 물론 보복의 차원이기도 했고 저들의 만행에 대한 되갚음이기도 했지만 그렇지도 않은 사례도 많다) 부역자, 동조자, 골수 빨갱이들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처자식들을 원수로 만들었다. 미군이라면 치를 떨었던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은 폭격의 희생자들이었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날아들어 북한 전역을 잿더미로 만들었던 미공군의 무차별 폭격에 가족과 형제를 잃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미국이라 하면 치를 떤다. 미제는 원수다. 불구대천의 원수다.
지금 북한 인민들은 이들의 자식들이다. 미제와 괴뢰정부인 남한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은 대를 이어 물려졌고 철천지한으로 사무친 사람들... 나는 70년 전에 북한에 들어 온 중공군을 끌어안고 엉엉 울던 사람들, 눈 내리던 겨울 산 속에서 한줌 쌀도 없이 피난길에 올라 만주를 향해 걷던 사람들을 잊을 수 없다.
우리가 일통하려고 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우리가 한 민족이요 겨레동포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똑바로 알아야 한다.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민족은 하나, 입에 진달래 꽃 따다 물고, 손에 손잡고~~~
제주43과 여순반란, 그리고 대구폭동 등 남한의 좌익들이 일으킨 소요사태들은 좌익들을 드러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진압과 소탕의 과정에서 숱한 전향자를 만들어냈다. 검거되거나 체포된 사람들은 모진 고문과 가혹한 수형생활을 견디다 못해 전향했고, 반란군과 빨치산들은 식량과 탄약이 떨어진 상태에서 손을 들고 산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붙잡혔건, 투항을 했건 살기 위해서는 전향을 해야 했고 전향을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토벌군한테 사살 당한 사람, 붙잡혀서 처형당한 사람들은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었지만 살아있는 좌익전력자들은 남한사회의 큰 불안요소였다. 교도소에서 복역하는 사람들은 격리되어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수십만 명이 넘는 좌익전력자들이 세상 속에서 활보하고 다닌다는 사실은 우익의 입장에서는 여간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우익의 거두인 유명한 반공사상검사였던 오제도와 선우종원이 앞장서서 1948년 12월에 보도연맹(保導聯盟)을 만들었다. 이 단체의 설립 근거는 국가보안법이었다. 좌익전향자들을 보호한다는 것이 명목상의 취지였지만 사실은 좌익전향자들을 감시하고 관리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전향자들의 속내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정말 공산주의 이념을 버리고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로 바뀌었는지, 겉으로만 전향하는 척을 할 뿐 속은 여전히 새빨간 수박인지 본인 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이 알 수 없는 속을 뒤집어보는 방법이 있었다. 속을 뒤집어보지 못하면 빨간 물을 빼면 되는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일제시대 때 왜정이 만든 대화숙(大和塾)에서 빌어왔다. 대화숙은 친일전향자단체의 이름이다. 왜정은 항일지사들을 끝없이 협박하고 구슬러서 친일로 전향하게 만들었는데, 문제는 좌익들과 마찬가지로 이 전향자들의 속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친일이 진심인지, 겉으로만 전향한 위장인지 알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방법은 이들로 하여금 친일행각을 하게 강제하는 것이었다. 친일나발을 불게 하고, 정신대 참여를 권유하는 강연을 하게 하고, 덴노헤이카를 찬양하는 시를 쓰게 하고, 징집에 응하는 호소를 하게 만들었다.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로 하게 만들더라도 그런 친일활동을 하게 하면 민중들에게 친일로 낙인이 찍히게 되고, 본심과 무관하게 친일파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광수, 김활란, 홍난파 등 일제 말기에 전향한 많은 인사들이 대화숙의 멤버가 되어 본인의 진심과 무관하게 친일행각에 동원되었다. 거짓전향자도 대화숙 멤버로서 활동을 하게 되면 자연히 친일파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일제의 흉계는 성공적이어서 수많은 한국의 뛰어난 인물들이 친일파의 누명을 쓰고 낙인이 찍혀 오늘날에도 <친일명부>라는 책자에 그 이름이 올라있다.
오제도가 만든 보도연맹은 대화숙의 아이디어 그대로였다. 좌익전향자들에게 반공활동을 강제시켜 광적인 반공인사로 만들었다. 속이 파랗든 빨갛든 관계없이 전부 파랭이로 만들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보도연맹의 초대 간사장은 민주주의민족전선 조직부장이었던 박우천이었고, 초대회장이 공산주의 운동가로 유명했고, 남파 간첩이기도 했던 정백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다 오제도가 뽑은 빨간물 빼기 작업에 동원된 허수아비들이었다. 보도연맹에 가입된 전향자들은 격렬한 친정부 데모, 반공시위에 동원되었다. 조금 이름이 알려진 좌익들은 여러 반공강연에 강사로 불려다녔다. 이러다 보면 억지춘향으로 진짜 우익인사가 되고 마는 것이다.
보도연맹의 가입자 수는 전국 시도별로 할당되어 거의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좌익전력자가 아닌 일반 농민들도 감언이설로 꾀어 가입을 시켰다. 헌혈을 하면 햄거버를 주듯이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고무신도 주고 막걸리도 주고 그랬다. 전쟁 직전까지 보도연맹에 가입된 숫자는 거의 50만에 육박했다. 그 중에 진짜 좌익전력자는 약 절반을 웃돌았을 것이다.
그런데 육이오가 터지자 좌익세력의 호응을 겁낸 정부는 전쟁 발발 5일 후인 6월 30일, 전국 경찰과 지서에 보도연맹원 예비검속령을 내려보냈다.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을 전원 체포해서 구금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런데 현지에서는 이 검속령이 체포구금으로 끝나지 않았다. 체포된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전쟁 초기에 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수는 전쟁통이어서 지금까지도 정확한 파악이 안 되고 있는데 진보진영에서 주장하는 수는 약 20만 명이다. 암만 적게 잡아도 그 수의 절반 이상은 처형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10만 명이다. 재판도 없이, 절차도 없이 파리목숨이었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좌익들도 교도소 마당에 끌려나와 그대로 총살되었다.
인민군이 삼팔선을 넘기만 하면 남한 내의 공산주의 세력이 들고일어나 순식간에 엎어버릴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박헌영의 말과는 달리 육이오 전쟁 때 남한 내에서 좌익의 호응이 없었던 이유는 경솔하고 너무 빨랐던 제주43과 여순반란으로 좌익세력이 급격하게 위축된 것과 전쟁초기에 남한 내의 좌익을 모조리 학살해버린 보도연맹에 힘입은 것이었다. 아예 전부 다 죽여버렸으니 말썽이 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죽은 보도연맹원들 중 절반 이상은 좌익이 아닌,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시골 농민들이었고 도시의 하급빈민층 공장노동자들이었다.
죽은 보도연맹원의 수가 10만이라고 쳐도 그 직계가족의 수만 7, 80만 명에 달한다. 당시에는 대개 한 가족이 그 정도의 식구수를 가졌다. 이 7,8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국군이 밀리면서 인민군이 들어오자 거리로 뛰쳐나가 인공기를 흔들었고, 인민군을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 팔에 붉은 완장을 두르고, 학교 운동장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인민재판을 열었다. 계급의 적들, 자기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을 죽인 원수들을 뒤져내어 복수했다. 그들은 빨갱이 세상이 영원히 이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영용한 인민군은 패배를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 세상은 석달을 넘기지 못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하자 이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심경이었다.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남한에 남아있다가는 살아날 길이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전부 다 도망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도주로가 막힌 자들은 남한 사회 속으로 숨어들었다. 일부는 지리산으로, 일부는 태백산으로, 일부는 피난민이 끓어넘치던 도시 속으로 그들은 숨었다. 다시 세상이 바뀌는 그날을 기다리며...
그때 북으로 간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북한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며, 그때 남한 내에 숨어들었던 사람들의 자식들이 바로 이정희, 이석기와 RO들이다. 이석기가 내란을 음모한 이유가 바로 보도연맹원 학살처럼 유사시에 자기들이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선제공격을 할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 자기들이 유사시에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다는 얘기다.
만약 한반도에 다시 전쟁이 벌어지는 날,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들을 그대로 두고 북쪽의 적과 사생결단의 싸움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일치될 수 없는 것들을 속에 두고 바깥의 일치되지 않은 것들을 일치시킬 수 있을 것인가? 남북의 일통에는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야 할 것인가? 그것을 헤아리고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통일은 대박’이라는 소리를 쉽게 하지 못할 것이다.
- 통일대박론의 허구성에 대하여 13
우리 현대사는 좌와 우의 대결의 역사였다. 그것은 현재도 그러하다. 오늘 이 땅에도 좌익이 있고, 우익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좌익과 우익의 개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무엇이 좌익이며, 무엇이 우익인가? 이쯤에서 이 두 말의 의미를 명확하게 할 때가 되었지 싶다.
좌파는 영어로 표현하면 '코뮤니스트(communist)'다. 어원이 되는 ‘코뮤네(commune)’라는 말은 본래 공유재산을 뜻하는 라틴어이다. 공산주의를 코뮤니즘이라고 하고, 그 주의의 신봉자가 코뮤니스트이다. 이런 공산주의의 기원은 아주 옛날로 올라가는데, 사회주의라는 말과 혼용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공산주의를 사회주의라 말하기도 하지만 현대의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와는 다르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사유제도의 철폐와 재산의 공유라는 가치 외에 프롤레티아 독재라는 계급혁명론을 추가했다. 무산계급의 독재를 거부하는 사회주의는 공산주의가 아니라고 단정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좌파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재산의 공유를 주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천방법으로서 계급투쟁에 의한 혁명과 무산계급의 독재를 실현하고자 하는 혁명적 의지를 가진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좌파는 계급투쟁가들이다. 좌파는 내부의 적인 계급의 적을 타도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반면에 외부에 대해서는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전세계적인 노동자계급의 연대를 지향하기 때문에 좌파는 국제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색채를 띤다. 이들은 침략전쟁을 부정하고 모든 나라의 무산계급이 손을 잡은 세계적 이상향의 건설을 꿈꾼다. 그리고 코뮤니즘은 본질적으로 개인주의라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물론 서구사회가 말하는 개인주의와는 좀 다르다. 전체가 개인을 책임지는 것을 공산사회의 토대로 삼는다. 즉 전체에서 뜯어내어 개인에게 지급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쏘련과 북한에서 실현한 모든 공공서비스의 무료화와 배급제도이다. 진보진영에서 그토록 보편적 복지에 매달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체가 개인을 책임지는 개인우선주의인 것이다. 좌파는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과 달리 본질에 있어서 전체주의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파는 어떤 것일까? 우파는 번역하면 파쇼(fascio)이다. 우파적 이념을 가진 자를 파시스트라 한다. 이 말은 본래 이탈리아어로 도끼를 묶어놓은 것을 의미하는 파스케스(fasces)에서 유래되었다. 우리말로 옮기면 결속(結束)이라는 말과 같다. 이 말을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에서 집권하면서 다시 쓰기 시작했는데 이때 결속은 모든 계급의 대동단결을 의미했다. 계급간의 투쟁이 아니라 모든 계급의 결속을 주장했던 것이다. 적대 계급의 타도가 아니라 적대계급의 타도를 외치는 계급투쟁가들의 타도가 파시스트들의 투쟁목표였다. 즉 계급투쟁의 박멸이 우파의 목적이다. 파시즘은 쏘련 혁명 후에 서구사회에 밀어닥친 붉은 파도로부터 서구사회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유럽 여러 나라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고 집권했다. 스페인의 프랑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가 바로 서구사회를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낸 우파의 거두들이다. 만약 파시즘이 생겨나지 않았더라면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을 필두로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이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당시 공산주의의 기세는 맹렬했다.
파시즘은 공동체 모두의 결속과 단결을 이념의 골간으로 하는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전체주의를 지향하게 했다. 왜냐하면 대동단결의 목적이 국가의 이익, 민족의 이익을 쟁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파인 코뮤니즘이 국제주의인 것에 반해 우파인 파시즘은 국가주의다. 즉 우파는 내셔널리즘인 것이다. 국민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고, 개인의 이익을 국가의 이익에 우선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좌파가 전세계의 무산계급들과 연대하고, 타국의 무산계급을 지원하는 것을 좌파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우파는 외부의 적을 타도하고 정복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좌파는 내전을 만들고, 우파는 정복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김일성이 전쟁 후에 북한에서 실천했던 정책들은 본질적으로 좌파적이었으며, 김일성은 코뮤니스트라 말할 수 있다. 당시에는 구쏘련과 동구권이 건재해서 전세계 무산계급의 연대와 원조가 실천되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모든 재산의 국유화와 주거, 교육, 의료를 비롯한 공공서비스의 무료화, 그리고 백프로 배급제가 시행되었다.
남한에서는 제대로 된 파쇼정권이 역시 장기집권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본질적으로 파쇼였다. 박정권이 노동운동을 억압한 것은 무산계급의 타도대상인 자본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고, 그가 지향한 것은 국가주의였다.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 같은 것은 국가주의 이념의 산물이었다. 인권과 복지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되었던 것도 전체주의의 영향 때문이었다. 박정희대통령은 민족주의자였으며, 유신체제는 파쇼정권의 완성이었다.
일본의 우익도 마찬가지다. 일본 우파는 국가주의자들이며, 국수주의적인 군국주의에 향수를 느끼는 자들이다. 그래서 외부적으로 배타적이며 공격성을 드러낸다.
박정희 시대야말로 남과 북이 제대로 된 좌익과 우익으로서 생사와 존망을 걸고 대결했던 시대였다. 그러다가 김일성이 죽고 김정일 시대로 넘어오면서 북한의 좌파는 몰락하게 된다. 우선 쏘련이 붕괴하고 동구권이 해체되고 중국이 개혁과 개방을 하면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자 코뮤니즘이 설 자리를 잃었다. 연대할 타국의 무산계급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북한은 철저하게 고립되었고, 코뮤니즘에 의한 연대와 지원이 모두 끊겼다. 동시에 권력을 세습하게 되면서 무산계급의 독재가 아니라, 김일성 일가의 독재로 변질되었고, 좌파권력의 유일한 치적이었던 배급제가 무너졌고, 국가의 무상서비스는 사실상 마비되었다. 더 이상 북한은 공산사회도 아니고, 통치이념이 코뮤니즘일 수도 없게 되었다. 김정일은 마적단의 두목이지 코뮤니스트가 아니었고, 그의 아들 김정은은 더더욱 그러하다.
남한의 사정도 다르지 않아서 10.26 이후 과도기적인 군부정권을 거치면서 문민시대로 넘어가게 되고, 민주화가 결실을 맺으면서 이제 더 이상 남한에는 우파가 존재하지 않게 됐다. 지금 남한에는 모든 계급의 결속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없고, 계급투쟁가들을 타도하려는 의지를 가진 자도 없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사라졌고, 공허한 평화주의자, 세계주의자들만 넘쳐나고 있다. 국가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이 우선되고, 개인을 위한 전체의 희생이 요구되고 있다. 그것이 넘쳐나는 복지 포퓰리즘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남과 북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파와 좌파가 없다. 남한에 있는 것은 철없고 유치한 종북과 무이념, 무대포 반북이 있을 뿐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좌파정권이라 말하기는 좀 그렇다. 이명박, 박근혜정부가 우파정부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친북정권, 아니면 반북정권일 뿐이다. 달리 말하면 더 친북이냐 덜 친북이냐의 차이 뿐이다. 나는 이정희나 이석기가 좌파라는 것을 믿을 수 없고, 문재인, 정동영, 문성근에 이르면 말할 가치가 없다. 이게 무슨 좌파. 지만원이 스스로 우파라고 뻗대는 것을 보면 그저 아연할 따름이다. 우파는 개뿔.
이런 현재의 정치상황을 제대로 읽어야만이 올바른 통일정책이 나올 수 있다.
- 통일대박론의 허구성에 대하여 14
나는 박근혜대통령이 “통일은 대박”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통일에 대해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구나 라고 느꼈다. 짐작컨대 박대통령이 ‘대박’이라고 생각하는 통일은 독일식의 흡수통일이 아니겠나 생각한다. 적화통일이 대박일 리는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박대통령이 김정은 정권을 상대로 연방제 통일을 구상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현재로서 상상해 볼 수 있는 통일의 유형은 다섯 가지다.
첫째가 전쟁에 의한 무력통일, 이 경우 전쟁의 결과에 따라 북진통일 아니면 적화통일의 두 가지 중 하나이거나, 또 다시 전쟁에 의한 승부가 나지 않아 다시 전쟁 전의 상태(휴전과 분단)로 돌아갈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현재로서는 전쟁의 가능성이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두 번째는 연합제 통일이다. 우리 국민들도 잘 모르는 이 연합제 통일이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인데, 이 연합제라는 것은 사실상 통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남과 북이 모두 고유한 정치체제와 독립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독자적인 외교권을 갖으며 서로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으면서 동맹국의 개념보다 더 긴밀한 상호협력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두 나라의 동맹이나 마찬가지다. 연합은 어느 일방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깰 수 있는 것이어서, 한 순간에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 이것은 통일도 아니고, 통일의 예비단계도 아니고 정확하게 말하면 분단의 고착화요 남북한이 영구적인 독립국가로 분리되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것이 현재까지 우리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이다. 이게 김대중 정권 때 우리나라 통일부 관료들의 머리에서 나온 유일한 작품이다.
세 번째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이다. 이것이 현재 시점까지 북한이 내놓은 공식 통일방안이다. 연방은 연합보다 훨씬 강력한 통합방식이다. 연방은 두 연방을 대표하는 하나의 정부를 두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연방국은 모두 같은 정치체제와 경제구조를 갖는다. 이것은 어느 연방이나 예외없이 동일하다. 완전한 통일과의 차이점은 각 연방국의 자치의 정도가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외교, 군사를 제외한 일반 행정과 사법을 비롯한 내치는 독립국과 거의 다르지 않다. 연방 정부는 연방헌법에 의해서 각 연방국의 자치를 폭넓게 보장하며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그런데 북한이 제안하는 것은 이런 연방제가 아니라 ‘낮은 단계의 연방제’다. 낮은 단계가 무엇이냐 하면 각 연방국에 정치와 군사에 독립성을 준다는 것이다. 연방제란 1체제 2국가를 말하는데 북한이 제안하는 고려연방은 2체제 2국가이다. 정치체제와 경제구조가 완전히 다르고 군사력이 독립된 연방이라는 것이 과연 연방일 수 있겠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남한의 연합제 통일은 통일이 아니고, 북한의 연방제 통일은 연방이 아니라는 심각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2000년 6월에 김대중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정일과 만나 합의한 615공동선언은 남한의 연합제와 북한의 연방제에 공통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남북이 절충점을 찾는데 노력한다는 것을 주내용으로 하고 있다. 통일도 아닌 연합제와 연방도 아닌 연방제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을 것이며 무엇을 절충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진보진영에서 김대중 정권의 업적으로 내세우는 615 공동선언은 내가 볼 때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네 번째는 독일식 흡수통일이다. 남한이 북한에 흡수되는 경우는 고려의 대상이 아닐 만큼 가능성이 조금도 없다. 흡수통일이 된다면 서독이 동독을 흡수한 것과 같이 남한이 북한을 흡수하는 통일 한가지 뿐이다. 아마도 이 시점에서 우리 국민들 대부분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이 이 흡수통일이다. ‘통일은 대박’이라고 말했을 때 박근혜대통령의 심중에 있던 통일방식도 아마 이 흡수통일이 아니었겠나 나는 생각한다. 북한에 1026과 같은 급변사태가 발생해서 김정은이 변을 당하면 북한에 재스민 혁명 같은 사태가 벌어져서 리비아나 이집트, 시리아에서 벌어진 것 같은 반독재정권 소요사태가 벌어지고 그 와중에 통일의 찬스가 올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이렇게들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나 꽁꽁, 이런 달콤한 기대와 환상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물론 차차로 이에 대해 고찰해 나가겠지만 먼저 결론삼아 말해둘 수 있는 것은 북한에 설사 급변사태가 벌어지더라도 그것이 통일로 연결(흡수통일)될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치고 대비하는 것이 올바른 접근방법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급변사태에 편승한 흡수통일은 대박이 아니라 망통이며, 축복이 아닌 재앙이 될 수밖에 없고, 우리가 시도해서는 안 되는 죽는 길이다. 한민족 멸망의 길이다. 나는 박근혜대통령이 이와 같은 흡수통일을 염두에 두고 ‘통일은 대박’이라고 말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등골이 오싹해 진다. 등에 진땀이 난다. 공포를 느낀다.
이상 간략하게 설명한 네 가지 통일방안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일치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통일이라는 점이다. 선통후치(先統後致)의 통일이다. 이런 통일은 필연적으로 참극을 부르고 비극으로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대단히 긴 설명이 필요하므로 앞으로 해나갈 예정이지만 여기서 진정 대박이 될 수 있는 유일한 통일방안에 대해서 일단 운을 띄워놓는다. 그것이 마지막 다섯 번째의 통일방안이다. 바로 먼저 일치시킨 후에 하는 통일이다. ‘선치후통(先致後統)’ 이 통일이야말로 유일한 대박통일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견지하고 고수해야 할 통일의 원리이며, 통일의 원칙이다.
지금부터 앞의 네 가지 통일방안과 마지막의 선치후통의 통일에 대해 하나하나 고찰해 보기로 하자. 이제 이 글의 본론으로 들어간다.
앞글에서 우리 정부의 공식 통일방안이 ‘연합제 통일’이라고 했는데, 사실 이런 통일 방안이 있다는 것도, 또 이것이 우리나라의 공식 통일방안이라는 것도 국민들은 잘 모른다. 더욱이 그 내용에 있어서는 더더욱 아는 바가 없다. 휴전 후 40년 가까이 우리나라에는 정부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이라는 것이 없었다. 박정희 정권 시대에는 통일이라는 말 자체가 금기시되다시피 했고, 통일을 주장하면 용공으로 몰렸다. 반공이 국시였고 통일은 불온사상이었다. 북한이 국력에서 우월했고 군사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통일은 곧 적화통일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 때까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남한에는 통일에 대한 비전이 전혀 없었다. 구상도, 정책도, 청사진도 전무하다시피 했다.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통일방안이라는 것이 연구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구쏘련이 붕괴되고 세계적으로 탈냉전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88년의 올림픽 개최로 국력에 있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된 노태우 정부 때 처음으로 공식적인 통일방안을 내놓게 된다. 1989년 9월에 노태우 대통령은 의회연설을 통해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그 내용의 골자는 1민족 1국가 1체제 1정부를 이루는 완전한 통일국가를 목표로 하되 그것을 3단계로 나누어 추진하며, 제1단계에서 화해와 협력을 이루고 제2단계에 가서 우선 1민족 2국가 2정부 체제인 남북연합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이 연합단계에 이르게 되면 최고결정기구로서 ‘남북정상회의’를 상설화 하고 남과 북의 대표로 구성된 ‘남북각료회의’와 ‘남북평의회’를 설치한다는 것인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노태우 정부의 뒤를 이은 김영삼 정부도 전정부의 통일방안을 그대로 답습하여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다시 한 번 제안하였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면서 이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김대중 대통령의 ‘3단계 통일론’으로 대치된다. ‘민족공동체 통일방안’과 ‘3단계 통일론’은 완전한 통일로 가는 과정을 3단계로 구분하고 있는 것은 같으나 내용은 조금 다르다.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1단계 화해 협력 --> 2단계 남북연합(2체제, 2정부) --> 3단계 완전통일(1체제 1정부)로 나누는 데 반해 ‘3단계 통일론’은 1단계 남북연합 --> 2단계 남북연방 --> 3단계 완전통일로 구분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3단계 통일론에서는 사전 작업이 없이 곧바로 남과 북이 연합을 하게 된다. 현재 시점에서 ‘연합제 통일’이라고 할 때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연합제를 말하는지 ‘3단계 통일론’에서의 연합제를 말하는 지가 애매할 때가 많다. 이 두 가지 연합제가 구분없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화해 협력의 단계를 거치든 안 거치든 두 방안 모두 남북의 연합을 통일의 한 과정으로 보고 있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또 한 가지 두 방안의 공통점은 ‘남북연합’의 성격이나 구체적인 형태에 대해서는 각론이 없다는 점이다. ‘연합’의 개념조차 정립이 되어 있지 않다.
노태우 대통령이나 김영삼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이나 또 그들을 보좌하고 통일정책에 관여했던 보조관들이나 관료들이 과연 ‘연합’이라는 말의 의미라도 제대로 알고 있었는지가 의심스럽다. ‘연합’이라는 말은 통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이다. 두 세력이 하나가 되는 통일이 아니라 두 세력의 힘을 일시적으로 합친다는 의미다. 연합하는 두 나라는 체제나 사상, 혹은 제도가 같거나 다르거나 상관치 않는다. 연합하는 두 나라가 서로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힘뿐이다. 연합은 공동의 적이 있을 때 성립된다. 전국시대 말기에 진나라에 대항하여 육국이 연합했던 합종(合從)이 그렇고, 삼국지에 나오는 동탁에 대한 18로 제후군의 연합이 그러하고,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나당연합이 그러하고, 독일과 일본에 대한 2차 대전의 미영 연합이 그러하고 소비에트에 대한 유럽의 연합인 나토가 그러하다. 연합이란 두 나라 군대의 연합이다. 동맹을 맺은 두 나라의 군대를 동맹군이라 하는데 연합군과 동맹군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동맹군은 각자의 군대를 각자가 독립된 지휘체계와 지휘관 아래서 움직이는 데 반해 연합군은 지휘가 일원화된다. 삼국지의 18로 제후 연합군의 총지휘관은 제후들의 맹주로 추대된 원소였고, 나당연합군의 총지휘관은 소정방이었다. 신라의 지휘관인 김유신은 소정방의 지휘를 받았다. 2차 대전 때 연합군의 유럽전선 총지휘관은 아이젠하워였고, 태평양 전역에서는 니미츠와 맥아더였다. 영국군이나 뉴질랜드군 호주군 캐나다군 등은 모두 미군 지휘관의 지휘 아래 있었다. 한국전쟁 때 한미연합군은 맥아더 장군의 지휘 하에 있었고, 이것은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맥아더 장군에게 이양한 것과 마찬가지로 김일성도 인민군의 지휘권을 팽덕회에게 이양했다. 이것은 현재도 마찬가지다. 한미연합군의 지휘권은 한미연합사에 있다. 현재까지도 한국군과 미군은 연합군인 것이다. 그런데 전시작전권이 한국에 반환되면 연합사가 해체된다. 그때부터는 한미 양군은 연합군이 아닌 것이다. 그때부터는 그냥 동맹군이다. 연합군과 달리 동맹군은 각자의 군대를 각자가 지휘한다. 나토도 연합군 체제이기 때문에 지휘가 일원화되어 있어 나토가맹국의 모든 군대는 나토 총사령관의 지휘를 받는다. 왜 연합군이 지휘를 통일하고 지휘권을 일원화하느냐 하면 그것은 공동의 적에 대처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당면한 적의 존재가 지휘권의 통일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휘가 통일되어 있지 않은 동맹군의 형태로는 적과 싸워 이길 수가 없기 때문에 연합군의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동맹이라는 것은 잠재적인 위협에 대비한 결속이고 우방의 다짐일 뿐 당면한 적에 대한 공동전선이라는 긴박함이 없다. 미국과 일본은 동맹국인데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중이 아니다. 미일동맹의 적이 누군가도 분명치 않다. 현재로서는 중국이 공동의 적으로 간주되지만 어디까지나 미래적이고 잠재적인 위협일 뿐, 현실로서의 적이라고 공언되지는 않는 것이다. 또 미일 동맹이 시작될 때는 중국이 적도 아니었다. 한국과 미국은 동맹국이라고 말해지기도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연합국이다. 두 나라의 군대가 하나의 지휘체계 아래 놓여있기 때문이고, 북한이라는 당면의 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적과 두 연합국은 현재 휴전상태에 있다.
자, 이런 상황에서 과연 남과 북의 연합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국군과 인민군이 연합군이 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남북연합군의 적이 누구이며, 누구에 대한 연합인가 말이다. 연합이라는 말 자체가 공동의 적에 힘을 합쳐 대항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공동의 적이 없고, 힘(군사력)을 통합할 수도 없고, 연합으로 할 일이 없는데 무슨 연합을 한다는 소리인지 실로 괴이한 것이 우리나라의 통일방안이다. 그러다보니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나 ‘3단계 통일론’이나 공히 연합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게 잡혀있지 않다. 군사력의 통합이 아니라 경제적인 지원과 협력에 무게를 두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경제적 협력과 지원을 위해서는 연합이 아니라 3통(통신, 통행, 통상)이 우선이다. 지금 남한과 북한은 한국과 소말리아만큼도 3통이 안 되고 있다. FTA를 체결한 페루가 한국과는 훨씬 더 가깝고 긴밀한 나라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연합제는 기본적인 3통도 안 되는 남과 북을 그냥 연합하겠다는 소리다. 이런 연합의 기능은 북한에 대한 무조건 퍼주기 뿐이다. 그것이 급했기 때문에 3단계 통일론이 나온 것으로 나는 본다.
남북의 연합이란 개념상으로도 성립되지 않으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말하자면 사기극이라 할 수 있다.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 되지도 않을 일을 될 것처럼 꾸며대는 일이 사기극이다. 만약 되지도 않을 일을 정말 될 것으로 생각해서 우겨대는 것이면 이건 어리석음이다. 부처님은 어리석은 것이 가장 큰 죄라고 하셨다.
일반 국민들이야 그런 것 까지 몰라도 좋다. 하지만 일국의 대통령이나 대통령을 보좌해서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고위 공직자들은 전문성과 학식을 겸비해야 하고, 인문적 소양의 바탕도 갖추어야 한다. 최소한 통일과 통합, 일치와 동화, 연합과 동맹의 차이 정도는 아는 사람들이 나라를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천안함 사건이 났을 때, 나라의 꼴이 어떠한지, 위로는 대통령부터, 국방부장관, 참모총장, 해군 수뇌부에 이르기까지 그 지리멸렬한 추태를 똑똑히 봤고, 작금에 세월호 사건에서도 비상사태에 대한 이 나라의 대응능력이 어떤 수준인지 목하 보고 있는 중이다.
연합이라는 것은 나라와 나라가 재미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강력한 적과 맞서기 위해 두 개 이상의 나라가 힘을 합치는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없는데 신라와 당이 연합을 할 이유가 있겠으며,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라는 3국 동맹의 주축국이 없는데 영미가 연합을 할 일이 있겠으며,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없는데 나토가 생길 턱이 있겠는가 말이다. 북한이 남침을 하지 않았는데 한미연합사가 왜 생겨났을 것인가?
연합이나 연대라는 말은 공동의 적이나 위협이 있을 경우에만 성립되는 것이다. 강력한 여당이 존재할 때 야권의 연대가 필요해 진다. 여당이 허약하고 국민의 지지도가 바닥이면 야권은 연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피터지는 각축을 하게 된다. 야권이 내부의 경쟁과 투쟁을 유보하고 연대를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선거에서 여당을 이기기 위해서이다. 여당과의 싸움이 목전에 있지 않으면 연대 같은 것을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연합이나 연대라는 말 자체가 공동의 적이 있을 경우에 한하여 성립이 되는 것이다. 적이 없는데, 눈 앞의 위협이 없는데 연합이나 연대를 하는 것은 정신나간 짓에 다름 아니다. 그런 연합이나 연대를 무엇 때문에 왜 할 것인가 이 말이다. 인류 역사에 그런 연합은 있어본 적이 없다.
<테프콘>이라는 소설은 남한과 북한이 연합해서 중국과 전쟁을 하고, 일본을 정벌한다는 줄거리로 짜여 있다. 소설이지만,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이 구성은 일리가 있다. 중국이나 일본이라는 적이 있기 때문에 남과 북이 연합을 할 수 있고, 남북한 연합군이 단일 지휘 체계 아래 외적과 싸운다는 개념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일본이 독도를 침공하기라도 해서 남한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이건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북한에 연합을 제의할 수도 있다. 아니면 중국이 북한의 국경을 넘어 침공하는 경우, 북한이 남한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고, 이럴 경우 국군이 북한에서 중국군과 전투를 하게 될 지도 모른다. 물론 비현실적인 소설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남과 북이 연합을 한다면 이런 경우 외에는 논의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 한국과 미국은 동맹국이며 군사적으로는 연합체제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한미동맹이 살아있는 한 한국이 북한과 연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친구의 적은 적이고, 친구의 친구는 친구다. 연합국의 연합국은 역시 연합국이다. 남한과 북한이 연합을 하게 되면 북한과 미국은 자동적으로 연합관계에 놓이게 된다. 남북미일은 자동적으로 동맹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적의 친구는 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남북한이 연합을 하고, 남북연합과 미일이 동맹관계가 되면 중국과 북한은 자동적으로 적대관계에 놓이게 된다.
남북연합이 실현되는 순간 북한의 핵무기는 남북의 공유무기로 변한다. 연합국의 무기는 바로 나의 무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은 연합을 하는 순간 남북한의 핵으로 바뀐다. 연합국인 북한의 핵에 대해 남한이 공동책임을 져야 하고, 핵의 개발과 보유에 따르는 국제사회의 제재도 같이 받게 된다. 국제사회가 용인하지 않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보유한 북한과 연합을 하게 되면 남한은 연합국을 두둔하고 변명해야 하며, 북한의 핵개발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아니라면 그런 연합이 무슨 연합이겠는가 이 말이다.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고안자나, ‘3단계 통일론’을 주장한 김대중 대통령은 이런 문제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고 있지 않다. 3단계 통일론‘은 ’론(論)‘이라는 글자가 붙어있다. 이것은 ’3단계 통일론‘이 체계적인 구조를 가진 하나의 이론이라는 말이다. 아니면 ’론(論)‘이라는 글자를 붙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인물이 체계를 만든 이론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설명되어져야 할 내용이 없다. 연합의 의미도, 개념도 이론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다만 연합체제 속에서 남과 북이 긴밀하게 협력하고 소통해서 다음 단계인 연방제로 발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다는 정도의 설명에 그치고 있다. 만약에 연합의 목적이 그것이라면 그런 일은 연합씩 안 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런 일을 위해서 구태여 연합씩이나 할 이유가 없다. 앞서 설명한 온갖 무리와 불합리를 무릅쓰고 남북이 연합을 하게 되면 오히려 협력과 소통에 지장을 받고, 남북한 간의 갈등만 더욱 노정하게 될 뿐이다.
현재 박근혜대통령도 노태우 정부 때 제기된 ‘통일방안’과 그것을 약간 개조한 김대중 대통령의 ‘3단계 통일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전 정권에서 제안된 통일방안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것으로 대치하겠다는 구상은 일체 발표된 적이 없고, 드레스덴 연설의 내용을 보더라도 통일기조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김정은 정권과도 기존의 통일방안에 따른 ‘연합제’나 ‘연방제’ 통일을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은 여전히 불변인 것이다. 만약 북한에 어떤 급변사태가 발생해서 정권이 바뀌면 그 정권과도 역시 ‘연합제’나 ‘연방제’를 갖고 말장난을 할 예정인 것이다.
- 통일 대박론 허구성에 대하여 17
작년 11월 국회에서 열린 국방정보본부 국정감사에서 민주당의 김민기 의원이 “남한과 북한이 전쟁을 벌이면 어느 쪽이 이길 것으로 보느냐”고 물은 질문에 조보근 국방정보본부장은 “한미동맹이 싸우면 월등히 이기지만 남북한이 일대일로 붙으면 우리가 진다”고 답변했다. 이에 대해 의원들이 “북한에 비해 국방비를 44배나 많이 쓰면서 북한에 진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추궁하니까 조 본부장은 “전투력 숫자 면에서는 북한이 우세하긴 하지만 전쟁이란 유무형 전투력과 국가 잠재역량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불리하지 않다”면서 앞뒤가 다른 소리를 하고 나왔다. 앞의 말, “우리가 진다”와 뒤의 말, “우리가 불리하지 않다”는 말은 전혀 다른 소리다. 이기는지 지는지, 유리한지 불리한지 국방정보본부의 본부장이란 직책에 있는 자가 명확하고 분명한 견해가 없다는 사실에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다” 했다가 의원들이 추궁을 하니까 “불리하지 않다”고 말을 바꾸는 모습이 이 나라 안보의 실태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통일정책의 입안자들이 통일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처럼 국방을 책임진 군의 간부들은 전쟁에 대한 개념이 없고, 승패에 대한 전망조차 확신이 없다. <손자병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의 승패에 관한 계산법을 설명한 책이다. 승산을 따지는 것은 병법의 처음이고 끝이며, 알파요 오메가다. 그것을 설파했기 때문에 <손자병법>이 시대를 넘어 최고의 병법서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 군에는 전쟁의 승산을 제대로 따져서 승패에 대한 예측을 내놓는 사람이 없다. 국방백서라는 것은 그저 통계수치와 점수로 환산한 군사력 지표의 나열과 예산의 집행에 대한 내용들뿐이다. 한미연합사가 만든 ‘작계’라는 것들 역시도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낡은 전략사고에 기반하고 있다. 한반도에서의 전면전 발생을 가정해 수립한 작계들의 골자는, 전쟁 발발 초기에 휴전선과 수도권을 미군의 도착 때까지 방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격과 공세는 미군의 증원군 수십만 명이 도착하고 예비군의 동원이 완료된 이후에 하게 되어 있다. 이런 작계대로 전쟁이 수행된다면 우리는 이겨도 진 것과 같고, 살아도 죽은 것과 다름없다. 미군의 증원군이 한반도에 도착하는 것이 계획대로 차질없이 착착 수행된다 해도, 몇 개월이 걸린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미군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전개하는 데 6개월이 걸렸다. 불과 20만 병력이 전개하는데 걸린 시간이다. 한반도 유사시 계획된 미군의 증파 규모는 약 60만 명에 달한다. 60만의 병력과 보급품이 태평양을 건너오는데도 이와 비슷한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에 한반도는 잿더미가 되고, 전쟁 이후 70년 동안 우리가 피땀으로 일궈낸 모든 번영과 경제적 성과의 토대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만다. 지금은 육이오 때와는 전혀 다르다. 변변한 공장 하나 없던 당시에는 모든 것이 부수어지고 내려앉고 잿더미가 되어도 그리 아까울 것이 없었다. 어차피 우리는 맨손뿐이었고, 맨 땅에 헤딩하면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전쟁으로 잃은 것보다 전쟁으로 얻은 것이 더 많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3년 동안의 처절한 전쟁을 통해서 우리 민족은 처음으로 현대전을 경험했고, 전 세계 초일류강국인 미국의 전쟁수행법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당시의 최고 최신의 군사장비와 무기들을 사용해 볼 수 있었고, 보유할 수도 있었다. 세계 최고수준의 군사와 행정을 배우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3년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우리의 번영이 가능했을 리는 없다.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의 비극이고 참화였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행운이고 기회였으며, 도약의 계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다시 한 번 그런 전쟁을 겪게 되면 우리 민족은 끝이다. 두 번 다시 도약하기 힘들 것이다. 지난 70년 동안 우리가 했던 일을 다시 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제는 시대가, 세계가 그런 기적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내야 하는가? 만약에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어떤 전쟁을 해야 하는가? 전쟁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며, 어떤 전쟁을 할 수 있는 군대를 길러야 하는가? 다섯 가지 통일 방안 중에서 첫 번째 방안으로 말했던 전쟁에 의한 무력통일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마지막에서 별도의 장으로서 상세하게 논할 생각이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요약만 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만약에 남북한이 전면전을 하게 되는 경우는 그 전쟁은 일주일 안에 끝내야 한다. 길어도 열흘 이상 넘기면 안 된다. 열흘 이상 전쟁을 끌게 되면 대한민국은 회복불가능한 정도로 파괴되고 만다. 그 후에는 통일을 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고, 소용도 없으며 그런 통일은 대박이 아니라 비극의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미군이 증파되어 올 동안 몇 달씩이나 전쟁을 하고 있을 여유가 없으며, 미군을 기다리는 동안에 우리 민족은 멸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만다. 전쟁이 나면 무조건, 이유 없이, 일주일 내에 평양을 점령해야 하고, 열흘 이내에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중국과 경계를 지어야 한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군대를 길러야 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하며, 오직 그것을 위한 작계를 만들어야 한다. 미국은 공군과 해군만 지원하면 되고 지상군은 개전 때 이미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만으로 같이 싸운다고 각오해야 한다. 미지상군의 증파 없이 주한미군과 한국군만으로 열흘 이내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 아니면 전쟁에 이겨봐야 팔천만 한민족은 꺼러지가 되고 만다. 재기가 불가능해 진다.
10일 전쟁은 민족의 존망과 사활을 건 지상명령이다. 오천년 역사와 선열의 비원이 담긴 절대명령이다. 우리 군은 이런 각오를 가져야 하며, 이 사명을 수행할 역량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진다” 아니다 “불리하지 않다” 같은 헛소리를 하는 넘들은 가차 없이 군에서 추방해야 한다. 열흘 내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강철 같은 의지와 충만한 공격정신이 결여된 군인이 아닌 군바리들은 사정없이 쫓아내야 한다. 우리는 6일 전쟁을 수행했던 이스라엘보다 더 절박하다. 그들이 6일에 할 수 있었던 것을 우리는 열흘에 끝내야 하는 것이다.
개전 첫날 24시간 이내에 북한의 공군을 말살해야 하고, 48시간 내에 북한의 해군을 격멸해야 하고, 휴전선을 넘어온 인민군의 주력에 섬멸적 타격을 가해야 한다. 72시간 내에 반격을 시작해서 96시간 안에 휴전선을 넘어야 하고, 148시간 내에 평양을 점령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개전 48시간 내에 김정은의 은신처를 찾아내서 폭살하는 것이다. 전쟁을 열흘 안에 끝내려면 김정은을 48시간 안에 찾아내어 죽이는 것이 불가결한 급선무이다. 육이오 때는 김일성이 도망다니는 것을 추적할 방법이 없어서 완벽한 제공권을 가지고서도 김일성을 죽일 수 없었다, 김일성이 어디 있는지 정보가 있다 해도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정밀한 공격수단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인공위성과 무인기를 포함한 첨단기술의 정화인 각종 정찰수단이 있고, 은신처로 의심되는 지역이 떠오르면 족집게로 도려내듯이 타격할 수 있는 초정밀 공격수단들이 있다. 우리 군은 유사시 전면전이 발발하면 48시간 내에 김정은을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군비의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능력과 수단을 가지는데 수조원의 예산이 든다 해도 결코 비싸지 않다. 김정은은 만약 전쟁을 일으키면 지 놈의 목숨이 48시간 안에 끝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야 한다. 이것이 전쟁을 예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전쟁에 의한 통일방안에 대해서는 말한 바와 같이 이 글의 끝부분에서 제대로 상세하게 다룰 것이라는 것을 약속하면서 여기서는 개괄적인 이야기만으로 일단 끝낸다.
지금과 같은 전략과 작계를 가지고는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 승패에 관계없이 우리민족이 나락으로 떨어질 것을 피할 수 없는데, “통일은 대박”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박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이 시점에서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통일방안을 확고하게 세우는 것이며, 전쟁에 대비한 실제적인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다. 우리 현실에 맞는 작계를 새로 짜야한다. 전쟁은 우리 민족의 전쟁이며, 죽는 것은 우리다. 미국이 아니다. 미국이 짜주는 작전계획만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무능한 밥버러지들을 국가안보실과 전략회의에서 몰아내야 한다.
- 통일 대박론 허구성에 대하여 18
연합제나 연방제 통일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두 개 이상의 국가 사이에 성립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 헌법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 전체를 우리 영토로 규정하고 있고,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 헌법상 북한은 반국가단체이며, 북한 지역은 우리 행정이 미치지 않는 임시적인 미수복지역일 뿐이다.
그런데 국가연합이나 연방제통일을 하고자 하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해야 하며 우리 헌법의 개정이 불가피하다. 국가도 아닌 반국가단체와 연합을 하거나 연방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연합제나 연방제 통일을 한다는 것은 북한을 우리와 대등한 국가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 순간 휴전체제는 종식을 고한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의 적국과 연합을 하거나 하나의 연방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에 휴전협정은 폐기되어야 하고 정전협정이 새로 맺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되면 현재의 군사분계선은 두 나라 사이의 국경이 되고, 서해의 NLL 역시 남북이 동의하는 새로운 해안국경으로 조정되게 될 것이다.
유엔군사령부는 없어지게 되고, 유엔대표부도 철수하게 될 것이며, 한미상호방위조약도 폐기되고 주한미군은 철수해야 할 것이다. 남과 북이 연합국가가 되거나 연방국이 되는 이상 남한에 미군이 주둔할 수는 없는 것이며, 한미동맹이 더 이상 계속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연합제가 결코 연합이 아닌 것처럼, 북한의 공식통일방안인 연방제 역시 연방제라 말할 수 없다. 그들이 말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연방제라는 개념과는 전혀 다르며, 이건 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이웃 국가 사이에 친선의 약속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목적은 오직 하나, 한미동맹의 파기와 주한미군의 철수에 있다. 연합제나 연방제는 실질적인 기능이 아무 것도 없으면서 북한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게 만들어 한반도를 두 개의 나라로 영구적으로 분단하는 결과를 만들 뿐이다. 동시에 주한미군의 철수를 이끌어내어 전쟁의 가능성만 키우게 된다.
지금까지 남한과 북한이 각자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이라고 내세운 연합제와 연방제는 현실적으로 실현될 가능성이 전무하며, 설사 실현된다고 해도 우리 민족에게 어떤 실익도 없으며, 통일에 도움이 될 건덕지가 조금도 없는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런 허망한 짓거리들을 통일방안이라고 내세운 이유는 그것 말고는 유용하고 현실적인 통일방안이라는 것을 만들어 낼 재주가 없었기 때문이다. 통일을 하기 위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방법론이 있기는 해야 하겠는데, 도무지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이 없었던 것이 이런 말장난이나 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다. 김대중대통령이나 김정일이나 모두 자기가 내미는 통일방안이라는 것이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봐야 통일이라는 것과는 조금도 연결되지 않는 짓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둘 다 이런 소리로 국민대중을 기만해 온 것은 북한정권의 유지라는 하나의 목적에 그것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현재 시점에서 볼 때 그나마 실현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방안이 ‘흡수통일’이다. 북한이 경제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곧 무너지지 않겠느냐는 현실적인 희망이 ‘흡수통일’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흡수통일’은 흡수통일이 된 후에 우리를 기다리고 일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대박이 아닌 망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며, 기회가 아닌 참극이 될 수밖에 없다.
만약에, 이것은 만약이지만 북한에 어떤 급변사태가 발생하여 김정은 정권이 소멸되고, 동구권이 무너질 때 동독이 그랬던 것처럼 전 북한인민들이 남한으로의 귀순을 원하여 휴전선이 무너져 북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옴으로써 어느 날 갑자기 통일이 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랬을 때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을 알고 나서도 우리는 흡수통일이 대박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의 하나가 될 수 있겠는지를 생각해 보자.
남한이 북한을 흡수하게 됐을 때,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난제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오게 된다. 그것은 한민족을 순식간에 난파선으로 만들만큼 거대하고 복잡하며, 엄청난 해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수천, 수만의 난제들이 난마처럼 얽히고 얽혀 우리 모두를 압도하게 되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근본적이며, 그 중 단 한 가지라도 해결에 실패하거나 시행착오를 저지르는 순간 우리 민족을 존망의 위기로 치닫게 만들 다섯 가지 문제가 있다. 이 문제들을 과연 우리가 현명하고 지혜롭게 처리해 낼 수 있겠는지를 따져보기 전에는 ‘흡수통일’을 말할 수 없다. 세월호 참사에 대처하는 대한민국의 수준으로 볼 때 흡수통일 후에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해 나가리라는 믿음을 나는 가질 수 없다. 대한민국 관료들의 실력과 수준으로는 기대하기 힘든 일이라고 나는 본다. 그렇다면 ‘흡수통일’의 결과는 분명해 진다.
다섯 가지 과제는 다음의 것들이다. 지금부터 이 다섯 가지 과제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한다.
1. 2천만 북한인민의 생존 보장(식량, 의약품, 생필품의 공급)
2. 인민군의 인수와 무장해제, 그리고 핵무기의 처리.
3. 국가재산의 분배(북한은 모든 토지와 건물과 시설 일체가 국유재산이다)
4. 화폐의 통일과 경제의 통합
5. 김일성 일가와 인권범죄자들에 대한 처단
우리가 과연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일들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이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준비를 해 오기나 했는가? 무슨 준비가 되어 있는가? 무엇을 해놓고 ‘흡수통일’을 하겠다는 것인가?
- 통일 대박론 허구성에 대하여 19
진주만, 웨이크, 미드웨이, 키스카, 과달카날, 뉴기니, 에니웨톡, 콰잘린, 뉴조지아, 애드미럴티, 펠렐류, 타라와, 뉴브리튼, 메이킨, 티니안, 레이테, 필리핀, 이오지마, 사이판, 오키나와... 이 지명들은 태평양전쟁의 격전지들이다. 미국은 우리에게 지금도 생소한 태평양의 수많은 섬들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106,207명이 전사했고, 248,316명이 부상당했거나 실종됐다. 유럽전선의 희생자들을 포함해서 당시 미국은 서너 집 건너 한 집은 아들이나 남편의 전사통지서를 받았다. 막대한 전비를 감당하기 위한 후방 국민들의 내핍생활은 극한의 상황까지 내몰렸다. 온 나라가 B-29의 폭격에 잿더미가 되다시피 한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만 1,740,955명이 전사했다(중일전쟁의 전사자 제외). 전 인구의 2%가 태평양의 이름모를 낯선 섬으로 끌려가 죽었다. 170만 명이 넘는 병사들을 죽이면서 일본은 악착같이 싸웠다. 1945년 8월 15일 항복할 당시 일본은 동남아와 중국, 만주, 조선에 아직도 3백만 명이 넘는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다.
일제가 전쟁 말기에 강제로 징용한 조선인의 수는 육해군을 합해서 약 26만 명에 달했다. 일본 육군은 그 중 약 6만2천명을 한반도에 배치했고, 중국 본토와 만주, 대만에 약 4만3천명, 일본 본토에 약 2만 명, 남방전선에 약 1만4천명, 또 각지의 항공군과 선박군에 약 2만명을 배치했다. 일본해군은 한국의 진해에 약 2만1천명, 요코스카(橫須賀) 사세보(佐世保) 마이쓰루(舞鶴) 오미나토(大湊) 등 일본 군항의 군속으로 약 8만 명을 배치했다. 미군과 가장 치열하게 싸웠으며 대부분 옥쇄로 끝난 태평양의 여러 섬들에 보내진 조선인 병사의 수는 상대적으로 비율이 낮은 편이다. 남방전선은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가장 낮았다. 물론 태평양전선에서 미군의 포로가 된 일본군의 80% 이상이 조선인이어서, 항복하여 포로가 된 자가 거의 없었던 일본군에 비해 포로로 살아남은 비율이 높기는 했다. 중국방면은 전사율이 그리 높지 않았고, 많은 조선인 병사들이 중국의 국민당군이나 팔로군에 투항했고, 광복군이 되기도 했다. 1949년 3월에 김일성이 모스크바에 가서 <조소 우호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오는 길에 만주의 심양에 들러 조중비밀군사협정을 체결했는데 이때 중국내전에 참여한 조선인 병사들을 북한에 귀환시켜 새로 창설한 인민군에 편입시키기로 약조했다. 이때 개략적인 대상자의 수가 약 3만에서 5만 명 정도로 기재되어 당시 중국 측도 정확한 조선인 병사의 숫자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개석의 국민당군과 모택동의 홍군 사이에 병력의 유동과 혼입이 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외에 상해의 임정이 훈련시키고 있었던 광복군이 수천 명 있었고(많이 잡아서), 미국도 한반도 진공을 위해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주관 하에 조선인들을 선발해서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태평양 전쟁에서 조선의 역할이나 조선인의 참여는 전세에 별 영향을 주지 못했고 역할은 미미한 것에 그쳤다. 일본 측의 전력으로 보태어진 수가 약 26만 명인데 비해 항일전선에 가담한 수는 국민당군, 홍군, 광복군, 미군을 모두 합해도 그것의 5분지 1에 지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은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력하고 이바지한 역할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조선의 광복과 독립은 거의 전적으로 미국의 승리에 힘입은 것이었다. 미국의 아들들이 항복을 모르는 일본군과 온 태평양의 섬들 하나하나를 놓고 혈전을 벌였고, 2백만 명에 가까운 일본군을 죽이고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조선은 해방을 맞이할 수 있게 됐다. 이 전쟁에는 중국도 일정 역할을 했고, 마지막 단계에서 참가한 소련군도 한 몫을 하기는 했으나, 대일전의 승리는 미국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만약 미국이 일본과 싸우지 않았다면, 중국의 힘으로 일본에 맞서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소련도 시베리아를 지키는데 급급했을 것이다. 해방 직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애국지사들은 일제가 최소한 80년은 갈 것이라고 예상했고, 일반 민중들은 아예 광복의 가능성을 생각하지도 못했다.
일제의 패망은 그래서 완전히 의외의 사건이었으며, 광복은 너무나 갑자기 닥쳐온 믿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그것은 정말 너무나 뜻밖에 벌어진 사건이어서 모두가 한동안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을 정도였다. 당시에 우리가 광복의 희망을 전혀 가질 수 없을 정도로 강대했던 일본의 위세를 생각해 보면 해방은 진실로 기적과도 같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우리 민족을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나게 해 준 것은 오로지 미국이었다. 꿈도 꿀 수 없었던 해방을 가져다 준 은인이고 구세주였다. 우리 민족이 다시 조선이라는 이름을 되찾고 조선인의 이름을 다시 쓰고, 조선말, 조선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정말 머리로 신을 삼아도 미국의 은혜를 갚지 못한다. 조국의 해방은 우리가 우리 힘으로, 우리가 싸워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살펴본 대로 우리는 별로 한 일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징용되어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고, 고향을 떠나 이국에서 떠돌며 고생했고, 많은 여자들이 정신대로, 위안부로 끌려가 형극의 길을 걸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같은 시기에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각자 자기 나라의 운명과 민족의 존망을 걸고 극한의 투쟁에 나서서 감내해야 했던 희생에 비하면 실로 조족지혈이나 마찬가지다. 1, 2차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세계의 열강들은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수백만 명에서 수천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 이 시기에 조선사람의 희생자 수는 그야말로 미미해서 내놓을만한 숫자가 못된다.
우리는 광복을 공짜로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크나큰 은혜를 입은 미국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가를 보자. 미국 덕분에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를 이루었음을 생각하면 생기지도 않은 광우병을 가지고 수만 명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전쟁 때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서 이 땅에 와서 희생된 미군의 수는 모두 137,250명에 달한다. 그 중 전사자가 36,940명 이고, 부상자가 92,134명이며 실종자가 3,737명, 포로가 된 수가 4,439명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170만 명의 일본군을 죽이면서 발생한 미군 전사자 수가 약 10만 명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한국전쟁의 전사자는 그것의 30%가 넘는다. 그것을 생각하면 고의가 전혀 아니었던 단순한 사고로 숨진 효선이 미선이를 가지고 그토록 심한 모멸을 미국에 안길 수는 없었다. 그런 격렬하고 깊은 반미감정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일본 패망 후에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딜 때부터 미군은 조선인들에게서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미군이 노르망디 상륙 후에 파리에 입성했을 때, 파리 시민들은 거리에 뛰쳐나와 춤을 추고 미군 병사들의 뺨에 입을 맞추고 꽃다발을 뿌리면서 미군을 환영했다. 미국은 프랑스 땅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면서 프랑스의 유서깊은 도시들을 무차별 폭격했고, 수십만 명의 프랑스인들이 폭격에 희생되어 숨졌고, 도시들은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그런 것을 생각지 않고 미군을 열광적으로 반겼다. 독일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준 은혜가 수십만 명의 자국인들을 죽이고 수많은 도시를 폐허로 만든 죄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유럽인들의 환영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네델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같은 나라에서도 똑 같았다. 미군이 진주하는 모든 도시에서 꽃의 비가 내렸고, 여자들은 미군을 얼싸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진격을 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같은 미군이 해방시킨 한반도에서는 그런 광경을 보기 힘들었다. 전쟁 기간 동안 일본에 수십만 톤의 폭탄을 쏟아부어 전 일본을 잿더미로 만들고, 마지막에는 원자폭탄까지 던진 미국이었지만 한반도에는 단 한 발의 폭탄도 떨어뜨린 것이 없고, 조선사람을 죽인 일도 없었지만 미군의 진주를 보는 조선사람들의 태도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에서는 해방군을 환영하는 군중대회가 열리고, 거리마다 붉은 기가 휘날리고 했지만 한반도의 남쪽에는 성조기조차 걸린 집이 없었다.
미군이 진주했을 때 남한사람들의 태도는 ‘내 보따리’만 생각하는 막 건져진 사람이었다. 건져준 사람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없었고, 보따리만 생각했다.
- 통일 대박론 허구성에 대하여 20
일본 패망 후,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한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였다. 이것은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한국의 독립과 정부의 수립에 대해서는 뚜렷한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고, 한국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는 상태였다. 태평양 전선의 각지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인 징용자들에 대한 심문에서 얻은 정보가 대부분이었는데 막상 점령을 하고 보니 한국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나라하고는 많이 달랐다. 한국인은 그들이 접했던 여러 지배지역의 원주민들하고는 생판 다른 별종들이었다. 미국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니까 지배국가에 대해서 고분고분하고 순응할 줄 알았다. 그런데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고 보니 조선사람들은 자기들이 나라를 만들겠다는 야무진 꿈을 갖고 온갖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었고, 점령군인 미군의 계획이나 방침에는 아랑곳없이 자기들끼리 이미 주도권 싸움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었다. 더욱 미군을 당황하게 한 것은 이 나라가 지독하게 가난했다는 사실이었다. 미군이 태평양에서 점령한 나라들과 섬들은 열대기후가 대부분이어서 원주민들은 기근이라는 것을 몰랐다. 사시사철 과일과 곡물이 풍부해서 미군이 점령지의 원주민들을 먹여살려야 하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필리핀만 해도 삼모작을 하는 아시아 최대의 쌀생산국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실정은 달랐다.
해방 1년 전인 1944년에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결과로는 당시에 한반도에는 총 25,920,000명 정도가 살고 있었으며 이중 남한의 인구는 15,880,000명이었다. 이 인구 중에 일본인이 710,000 정도가 포함되어 있었고, 중국인, 만주인 등 외국인이 72,000명 정도 있었다. 일본이 패망하자 70만 명 정도의 일본인이 일본으로 돌아갔고, 대신에 외지에 나가있던 조선인들이 대거 귀국했다. 귀환동포의 숫자는 소련이 진주해있던 북한의 경우 정확한 통계수치가 남아있지 않지만, 남한의 경우 1944년의 인구가 15,880,000이던 것이 해방된 해인 1945년 연말이 되자 16,870,000명이 됐고, 광복 1년이 되는 46년 8월에는 19,370,000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남한의 인구증가에는 북한에서 벌어진 계급청소를 피해 월남한 사람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해방된 날로부터 약 3년이 지난 48년 12월말까지 일본에서 약 1,120,000명이 돌아왔고, 중국에서 약 70,000명, 필리핀을 비롯한 태평양의 각 도서에서 14,000명 정도, 기타지역에서 약 17,000명이 귀국했다.
이렇게 인구가 급증하자 실업문제는 심각해져서 45년 말에 미군정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한의 실업자 수는 798,000명으로 실업률은 11.3%에 달했다. 광복 당시 남한의 농가 수는 2,065,000호로 이중에 자기 땅을 가진 지주와 자작농 비율은 13.8%인 285,000호에 불과했고, 약간의 자기 땅을 가지고 있으면서 소작도 겸해서 하는 자작농 겸 소작농의 비율이 34.6%인 716,000호였다. 자기 땅이 전혀 없는 순수한 소작농의 비율은 가장 높은 48.9% 인 1,010,000호에 달했다. 여기에 지주나 자작농에 고용된 가구(노비나 하인에 다름없었다)가 약 2.7%인 55,000호였다. 순수 소작농과 고용가구를 합하면 절반을 웃돌았다.
전체 조선인 중 15세 이상의 인구는 13,710,000명이었는데 국민학교나 서당조차 다니지 못한 불취학 인구가 11,100,000명으로 전체의 81%에 달했고 전문대졸 이상의 학력소지자는 29,438명으로 15세 이상 인구의 0.2%에 불과했다. 해방이 되자 일본말은 폐기되고 다시 조선어가 국어가 되었는데 일제시대 때 한글을 가르치지 않아서 남한의 13세 이상 인구 중에서 국어인 한글을 해득하지 못하는 사람의 비율이 77%에 이르렀다.
.일제시대 때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 수명은 여자가 45세, 남자가 42.5세로 평균 43.8세였다. 영아사망률은 인구 1천명당 102.4명으로 세계 2위를 기록했다(1위는 인도). 출산은 대부분 집에서 했고 전문적인 의료인의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출산시 영아의 사망률도 1천명당 5명이라는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하고 무지한 백성들이었지만 정치에 대한 관심은 대단히 높아서 47년 5월에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된 정당사회단체 수는 1백18개에 달했고, 이들 단체의 회원수는 당시 남한인구 1천9백90만 명의 2배인 3천8백45만 명이었다. 뿐만 아니라 집단적이고 정치성을 띤 테러와 폭동사건이 빈발해 45년 9월부터 47년 4월까지의 20개월 동안 총 3백11건의 테러사건이 발생해서 28명이 죽고, 7백31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렇게 골치 아픈 나라와 1천5백만 명에 달하는 굶주린 백성을 떠안게 된 불운한 사람이 미군의 군정책임자로 임명된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이었다. 하지는 미 제25사단의 부사단장으로 태평양전쟁에 참가하여 첫 전투지는 과달카날이었다. 여기서 큰 공을 세운 그는 한국에 오기 3개월 전인 1945년 6월에 오키나와에서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오키나와 주둔 미 제24군단의 군단장이 되었고, 1945년 8월 27일 주한미군사령관으로 임명되어, 9월 8일에 제24군단을 이끌고 남한에 진주해 오게 된다. 하지가 주한미군사령관으로 임명받은 이유는 그의 24군단이 당시에 한반도에 가장 가까이 있는 부대였기 때문이었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하지 중장은 순수한 야전군인이었고 정치적 감각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한국이 조금도 달갑지 않은 임지였다. 그에게는 한국에 대한 어떤 정보도 주어지지 않았고, 그가 받은 명령은 그저 “최대한 빨리 한국으로 가라”는 한 줄 뿐이었다. 하지는 훗날, 한국의 군정책임자로서의 역할은 자기 평생에 맡은 임무 중 최악의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하지 뿐만 아니라 미군의 모든 장교와 사병들에게 한국은 가장 달갑지 않은 최악의 주둔지로 여겨졌다. 일단 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으면 미군은 장교건 사병이건 가릴 것 없이 코를 싸매 쥐었다. 그들에게 한국의 첫인상은 바로 지독한 인분 냄새였다. 온 논과 밭에 비료 대신 인분을 뿌렸기 때문에 미군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인분 냄새에 오래 길들여진 한국사람들은 똥장군을 지고 다니면서 똥을 잔뜩 뿌려놓은 논길 위에서 밥도 먹고 새참도 들었다. 별 역겨움을 느끼지 못할 만큼 인분냄새에 둔감했지만 미군들에게는 끔찍한 충격이었다.
하지는 한국에 상륙하자마자 포고령이라는 것을 내걸었다. 조선인민들은 연합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복종하라는 간단한 내용이었으며, 만약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혼란을 야기하는 자는 즉시 적당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엄포도 들어 있었다. 한 가지 특기할만한 내용은 일본의 항복을 이행하게 만들기 위해 현재의 행정기구(조선총독부)를 그대로 유지하고 사용하겠다는 대목이었다. 이 딱딱하고 요령부득한 미군의 포고령은 인민의 자유와 행복 그리고 보호를 약속한 북한 소련군정의 성명서와 두고두고 비교되어 반미의 시비거리가 되었다.
해방 전후의 사정을 되짚어 보는 이유는 이것이 흡수통일을 했을 때 우리가 북한에서 겪게 될 여러 가지 사건들에 많은 교훈과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흡수통일을 하게 되는 날, 우리는 해방 직후에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의 입장과 비슷해질 수 있고, 하지와 미국이 저지른 실수를 그대로 하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실수들이 남긴 것이 바로 뿌리깊은 반미감정이며 우리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게 된다면 북한인민들의 마음 속에 남게 될 반남의 증오심이 수십 년, 혹은 수백 년도 넘게 우리 민족을 괴롭히게 될 것이다. 다음 글에서도 이어서 해방전후사를 조금 더 살펴볼 생각이다. 오늘에 당면한 모든 문제의 해답은 지난 역사에 있다. 우리가 지금의 문제에 올바른 해답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지난 역사를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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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9일에 주한 미육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조선총독으로부터 정식으로 항복문서를 접수하였고 이어 9월 12일 하지 중장은 아놀드(Arnold,A.V.) 소장을 군정장관에 임명하였다. 20일에 군정청의 성격·임무·기구 및 국·과장급 인사를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미군정체제가 시작되었다. 이때 한국에 들어 온 미군에는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미군정당국은 영어가 가능한 한국인들을 물색해서 군정장관을 돕는 고문으로 임명했다. 김성수를 비롯한 11명의 한국인이 미군정의 고문이 되었다. 그러다가 12월에 가서 군정청 산하의 각 국장을 미국인 1명과 한국인 1명으로 하는 2인 국장제를 실시하면서 한국인 고문제도는 폐지되었다. 이때부터 미군정은 사실상 통역정치였다. 영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 통역들의 권한이 막강했던 것이다. 한국 사정에 어둡고, 언어가 통하지 않았던 미군정의 당국자들은 통역들에게 많은 것을 의존했다. 자연히 행정조직의 실세는 영어가능 한국인들이 되었다.
다음해인 1946년 3월 29일 법령 제64호로 군정청의 행정편제가 확정되었다. 국을 부로 개편하면서 군정장관 산하에 문교부·재무부·사법부 등 11개 부와 인사행정처·물가행정처 등 5개 처를 두었다. 아놀드 군정장관은 과거에 조선총독이 가졌던 권한을 행사하였으며, 각 부·처장은 그의 각료역할을 담당하였다. 각 부·처장의 업무와 미군정장관의 활동을 중간에서 조정하는 기구로서 한국인 민정장관이 있어서 미군정장관을 수석으로 하고 미국인 각료들로 구성된 일단의 미국인 기구와, 민정장관을 수석으로 하고 한국인 각료들로 구성된 한국인 행정기구가 공존하였다. 그리고 그 밑에 행정·사법·입법의 삼권이 통합되어 있었다. 다만, 군점령재판소 관할 이외의 일반 법원의 재판의 독립성은 대체로 보장되었다.
모든 행정권이 한국인에게 인계된 것은 1947년 6월 3일 남조선 임시정부가 수립된 다음이었다. 이때부터 2인 국장제가 폐지되고 각 부·처장 자리에는 한국인 1인만이 임명되었다, 미국인은 행정일선에서 물러나 고문의 자격만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이 독립국가가 된 것은 이때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패망한 후 47년 6월 3일까지의 2년 동안은 독립국가가 아닌 피식민지 상태의 연장에 있었던 것과 같았다. 미군정은 일본의 조선총독부와 다를 게 없었다. 일본이 물러가면 바로 독립이 실현되고 자주적인 정부를 갖게 되리라고 기대했던 한국인들에게 이 현실은 커다란 박탈감과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일제는 망했지만 우리 민족은 독립하지 못했던 것이다.
북한은 약간 사정이 달랐다. 1945년 8월 9일 종전을 며칠 앞두고 대일선전포고를 한 소련군은 다음날인 10일부터 북한으로 진주하기 시작하여 24일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Chistiakov,I.) 대장이 선발대를 거느리고 평양에 진주하였다. 북한 전 지역의 장악에 성공한 소련군 사령부는 같은 해 10월 12일 <치스차코프 대장의 포고>·<붉은 군대는 무슨 목적으로 조선에 왔는가>·<소련 제25군 사령관의 명령> 등을 차례로 발표하였다. <치스차코프 대장의 포고>는 소련군이 북한주민들의 문화활동의 자유와 사유자본 및 개인기업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소련군은 진주와 동시에 북한 전지역에 대한 수탈에 착수했다. 북한산 쌀을 소련으로 실어보내기 시작했고, 수풍댐의 발전시설과 흥남의 비료공장 등 주요 산업시설들을 곧바로 국유화하고 모든 생산수단의 개인소유를 금지했다. 소련은 평양의 제25군 사령부 산하에 로마넹코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민정부를 두었다. 이것은 로마넹코 사령부라고 불리웠는데, 정당의 조직활동 및 5도행정국과 각도 임시정치위원회의 제반 활동을 지도하였으며 출판물에 대한 검열도 맡아서 실시하였고 교통·체신·산업경제·농림·재정·신문방송·학교교육 및 정당과 기타 단체를 담당하는 행정부서들이 체계적으로 편제되어 북한 주민의 모든 생활영역을 빈틈없이 통제하였다. 로마넹코 사령부가 북한지역의 사실상의 통치기구였으며 소련의 군정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에 있어서 그렇다는 이야기고 겉으로는 소련은 직접적인 군정을 실시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해방 후 남한 지역에서는 각종의 정치단체가 난립하여 미군정이 자치를 허용할만한 통일된 조직과 체계를 가진 정파가 없었지만 북한에서는 좌익이 주축이 된 자치위원회가 작 지방별로 조직되었고, 소련은 이 자치위원회를 임시정치위원회로 개칭하도록 명령하고, 이 임시정치위원회가 각 도의 치안유지와 행정권을 접수하게 했다. 임시정치위원회의 5도 대표가 1945년 10월 8일에 회동하여 5도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민족파 15명, 공산파 15명의 동수로 30명의 위원을 선출하고 위원장에는 조만식을 선출하였다. 이 임시인민위원회가 소련군 사령부의 승인을 얻어 북조선 5도행정국으로 명칭을 바꾸게 된다. 미군이 조선총독부를 승계하여 남한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군정통치를 선언한 것에 반해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각 지역의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후 곧바로 지역 인민위원회에 치안과 행정의 권한을 위임했다. 물론 로마넹코 사령부의 지시와 승인없이는 나무 한포기 옮겨 심지 못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북한은 인민위원회에 의한 자치가 광범위하게 실현되고 있었다. 소련은 북한지역을 직접적으로 통치하지 않는 모양새를 취했고, 정치권력을 김일성과 인민위원회에 신속하게 넘겨주었다.
남이나 북이나 새로운 통치세력에 가장 시급했던 문제는 식량과 생필품을 비롯한 물자의 조달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미국과 소련은 영광에 빛나는 승전국이었지만 내부 사정은 그리 여의치 못했다. 미국은 잿더미가 되어 폐허만 남은 유럽의 재건이라는 짐을 져야만 했고, 일본만 해도 1억 가까운 일본인들이 기아상태에 몰려 있었다. 한국은 내놓은 자식이나 마찬가지였고, 관심밖의 문제였다. 모든 면에서 최하위의 순위에 머물렀다. 물자는 맥아더가 있는 일본에 우선적으로 보내졌고 그 중에서 남는 것이 있으면 한국에 보냈다. 2차 대전 최고의 피해국이었던 소련은 더욱 어려운 사정에 놓여 있었다. 북한인민을 먹일 식량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쌀을 실어내기 바빴다. 일제가 북한지역에 세워놓은 공장설비들을 닥치는 대로 뜯어서 시베리아로 옮겼다.
해방 다음해인 1946년에는 남북한 모두 크게 흉년이 들었다. 기근이 삼천리 강토를 뒤덮었다. 굶주린 유랑민들이 들판을 헤매고 다녔고, 짐승들의 사료로 쓰는 콩기름을 짜낸 찌꺼기인 콩깻묵을 만주에서 가져와 배를 채웠다. 소련은 48년 5월 14일 정오를 기해 삼팔선 이남으로 보내지던 전력을 끊었고, 흥남비료공장의 비료 공급을 차단했다. 흥남의 질소비료공장은 한반도 전체에 공급되던 유일한 비료공장이었다. 북한으로부터의 비료공급이 막히자 남한의 쌀생산고는 급격하게 줄었다. 1946년에 남한의 발전량은 2억2천4백만 KWH에 불과했고 북한으로부터 4억6천5백만 KWH를 공급받아 총 6억8천9백만 KWH를 사용했고 48년 총발전량은 4억7천9백만 KWH로 늘었으나 북한으로부터의 송전이 단절됨에 따라 전력난이 급속히 악화됐다. 왜정 말기인 40-44년 단보(3백평)당 쌀 생산량은 평균 1.326석이었는데, 북한이 화학비료의 공급을 끊은 46년에는 1.088석으로 줄어들었다가 47년에 가서 1.233석으로 약간 회복되었으나 일제시대보다 떨어졌다. 통일벼가 보급되고 10년이 지난 80년대 말의 단보당 쌀 생산량은 3.0석을 초과해서 90년대에 이르면 3.2석을 넘어 46년의 3배에 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전력과 식량사정이 악화되자 시중의 물가가 뛰어올라 극심한 인플레가 발생했다. 일정 때는 전쟁 중이었어도 물가는 비교적 통제되었는데 해방이 된 후에는 8월 15일부터 그해 12월 사이에 물가가 25.4배로 폭등했다. 48년의 서울시 소매물가는 광복 직전인 44년에 비해 278.4배가 올랐다. 같은 기간 동안 임금은 90.6배 오르는데 그쳤다.
이런 인플레 속에서 서민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쌀값의 폭등이었다. 주식시장도 예금시장도 발달해 있지 않았던 당시에 돈을 가진 사람의 투자처는 주로 고리대금업(사채 또는 전당포 운영) 아니면 매점매석이었다. 일부의 부자들이 농촌을 돌면서 수확한 쌀을 사들여 개인창고에 쌓아놓고 시중에 풀지를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쌀값은 두 배씩 폭등했고, 자본가들은 폭리를 취했다. 45년 말에 한 말에 124원이던 쌀값은 48년 말에 1,840원으로 13.4배가 올랐다. 미군정은 쌀의 매점매석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단속을 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폭등하는 쌀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미군정은 백미 최고가 동결, 미곡수집령 공포, 미곡자유반입매매 단속, 미곡공출제 강행 등의 조치를 잇따라 발표했는데, 이런 정책들이 오히려 농가에 고통을 가중시켰다. 추수한 쌀의 개인 매매를 금지하고 전량을 정부에서 강제로 사들였는데 이때 수매가가 시중의 쌀값보다 낮았기 때문에 농가에서는 수집령에 응하지 않으려 했다. 1949년에 시중의 쌀 가격이 한 말에 1,840원이었는데, 정부의 수매가는 60kg 한 가마에 1,960원이었다. 농가가 수집령에 응하지 않자 정부는 수매가 1,960원은 현금으로 주고, 별도로 액면 1천원권의 비료구입권과 1천원 상당의 광목 2마를 보상으로 지급했지만 농가의 불만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정부의 미곡수집사업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47년에 징역, 구류, 벌금 등의 형을 언도받은 사람이 8천6백31명에 달했다.
당시 미군정은 실정을 많이 저질렀는데 미곡정책의 실패와 함께 적산(敵産)의 정리가 그러했다. 광복 당시에 일본이 한반도에 남겨놓고 떠난 일본인의 재산을 적산이라 하는데, 그 규모는 한반도에 소재한 주식회사 자본 총액의 91.2%, 공업투자액의 94%, 토지 총면적의 70%, 경지면적의 28.4%에 이르렀다. 일본인들이 재산을 그대로 두고 서둘러 한국을 떠나고 나자, 이 적산을 두고 한국인들 사이에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일단 일본인들이 살던 집과 건물, 일본군들이 주둔했던 병영 시설들은 대부분 약탈당했다. 가재도구와 이불, 옷가지, 심지어 창문의 유리까지 모조리 뜯어내 가져가 버렸다. 그리고 대문이나 벽에 누가 “모 아무개의 소유임” 하고 써놓으면, 다른 사람이 그 옆에 더 크게 “ 이집은 일본인 주인 히야시가 조선사람 누구에게 양도하고 떠난 집임”하고 써붙였고, 그러면 또 다른 사람이 그것을 지워버리고는 “이 집을 양도받은 아무개가 다음 달 며칠에 식당을 열 예정임”하고 써붙였다. 모두들 적산에 야무진 꿈을 꾸고 침을 흘렸다. 이것은 남북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건 모두 김칫국이었고, 적산의 임자는 따로 있었다. 해방은 어떤 사람에게만 대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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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은 포고령 제2호를 발령하여 모든 적산의 처분권을 장악했는데, 이것은 미군정이 남한을 태평양전쟁의 전리품으로 생각했음을 잘 보여주는 일이었다. 적산은 한민족의 재산이고, 그것의 처분은 우리 민족이 행사해야 할 권리였으나 미군은 한국에 한민족의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적산을 인계해 주는 대신 자신들의 전리품으로 간주하여 마음대로 처분했던 것이다(군정 기간 동안 처분하지 못한 일부 적산은 이승만 정권에게 넘겨졌다).
미군정 하에서 실시된 적산의 불하는 그야말로 대박의 정도가 아니라 노다지요 횡재였다. 누구에게? 당연한 얘기지만 그 수혜자들은 친일파였던 일부 자본가들과 통역들과 줄이 닿았던 친미파들이었다. 적산의 불하 가격은 시가의 10분지 1에 지나지 않았고, 그 대금조차도 15년간 분할상환이었으며, 인수 대금에 대한 융자와 세금감면 등의 각종 특혜가 제공되었다. 대구의 조선방직을 예로 들면, 1947년 당시 시세가 30억 환이었는데 미군정은 이것을 해방 전의 시가인 7억 환으로 매겼고 막상 불하될 때는 3억 6천만 환이라는 헐값에 넘겼다. 이것이 15년간 분할상환이었기 때문에 15년 후인 1961년의 물가로 환산하면 단돈 12만환에 넘긴 셈이었다(61년도의 물가는 47년의 300배). 일부 친일파와 미국에서 돌아온 친미 인사들에게 적산은 공짜나 다름없이 넘겨졌다.
적산불하와 함께 또 한 가지 대박이 터졌다. 바로 미국의 원조물자였다. 유럽과 일본의 재건에 퍼부었던 어마어마한 원조에 비하면 실로 눈물겨운 새발의 피 같은 양이었지만 그래도 45년부터 61년 사이에 미국은 총 31억불 상당의 원조를 했는데, 이것이 또 적산의 불하로 하루아침에 재벌이 된 친일파들과 친미파들에게 노다지가 되었다. 일제시대 때까지는 우리나라에 밀농사가 유지되고 있었고, 이 밀을 가공하는 제분소가 전국에 300여개 있었는데 미국산 밀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남한에는 밀농사가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에는 밀이 생산되지 않는다. 전국의 제분소는 모두 문을 닫았고, 원조 밀의 가공이라는 특권을 손에 쥔 대한제분, 풍국제분, 조선제분 등이 밀가루 시장을 석권했다. 시멘트 공장도 원조 시멘트 때문에 대부분 문을 닫았고, 설탕이나 면화사업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와 함께 남한의 경제는 급속도로 미국의존형으로 바뀌어 갔다.
대부분 소비재인 원조물자 때문에 국내의 산업기반이 붕괴되어 미군정이 실시된 3년차인 1948년에 우리나라에는 수출을 할만한 산업이 존재하지 않았다. 48년 총수출액이 71억9천6백만 원이었는데 이중 마른 오징어(38.4%)와 김 (14.6%)의 2개 품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53.0%에 달했다.
미국은 한국을 통치하면서 많은 실책을 저질렀는데 대표적인 실정은 다섯 가지로 볼 수 있다.
1. 조선총독부 체제의 계승과 친일파 재등용
2. 적산의 특혜 불하
3. 토지 개혁의 지연
4. 미곡정책의 실패
5. 좌익탄압시 양민학살과 인권유린
이것은 모두 미군이 남한을 전리품으로 생각한 데서 비롯된 실책이었다. 한국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 해방은 해방이 아니었고,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미군의 조선총독부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통치의 고위층이 일본인들에서 미국인으로 바뀌었을 뿐 그 아래를 차지한 한국인들은 해방 전이나 해방 후나 별 다름이 없었다. 왜정 때의 친일파들이 미군정에서도 요직을 그대로 차지하고 있었고, 해방의 이익을 독차지했다. 대박은 그들만의 것이었고,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잔치였다. 일반 민중들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어떤 면에서는 일제 말기보다 더 살기가 어려웠다.
조선시대 말에 소작료는 대략 40%였던 것이 일제시대에 와서는 50%로 늘어났고, 해방이 되자 이것이 60% 정도로 올라갔다. 쎄가 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소작인의 손에 들어오는 쌀은 소출의 40%에 지나지 않았고, 그 양으로는 가족들이 1년 동안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작인들은 자기 몫의 쌀을 팔고, 그 돈으로 옥수수, 콩, 좁쌀 등의 잡곡으로 바꾸어 다음 일 년을 근근히 버텨야 했다. 소작인들은 자기가 지은 쌀을 자기 가족들에게 먹일 수가 없었다. 쌀을 잡곡으로 바꾸어 먹고, 감자나 고구마 등의 구황작물로 주린 배를 채워도 그것도 부족해서 조금만 흉년이 들면 장리빚을 내야 했는데 이 빚을 갚지 못하면 배겨낼 수가 없어서 결국 야반에 도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후에는 화전민이 되거나 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가혹한 소작료에 불평을 하거나 지주한테 항의를 하게 되면 그나마 소작이 떼이는 것으로 끝이 났다. 소작이 떼이고 나면 살아갈 길이 없었다. 이런 소작농이 전 농가의 절반을 넘었고, 자작농이라 해도 경지가 적어서 남의 논에 소작을 겸하거나, 다른 소득을 위한 노동을 겸해야 했던 영세 자작농까지 합하면 생존의 기로에 서 있던 농가의 비율은 전체의 70%를 넘었다. 때문에 군정이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이 토지개혁이었다. 일제 때부터 생기기 시작한 빨치산은 결국 토지문제였고, 토지개혁이 없이는 빨치산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제주43이나, 여순반란도 문제의 근원은 바로 토지문제였고, 소작제도의 모순에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토지개혁에 미적지근했다. 결국 이 문제는 제헌의회가 열리고 나서 토지개혁법을 제정할 때까지 수년 간 미루어지게 된다. 이런 실정들이 한국 민중의 마음 속에 반미감정이 싹트게 만들었다. 소련놈 속지 말고, 미국놈 믿지 마라, 일본놈 일어선다, 조선사람 조심할사. 이런 말이 유행가처럼 떠돌았다. 민생이 도탄에 빠진 것은 북한도 마찬가지였으나, 달랐던 점은 북한의 경우 소련이 직접적인 통치자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련은 철저하게 한국인들의 행정조직에 권한을 위임한 것처럼 위장하여 이 뒤에 숨어서 북한을 통치했지, 일본을 대신한 새로운 지배자로서 내놓고 군림하지 않았다. 때문에 실정이 있어도 그것이 소련의 책임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김일성과 인민위원회의 책임이었고, 그것은 곧 조선 사람 자신의 책임으로 귀결되었다. 북한 사람들은 ‘내 탓이오’ 할 수밖에 없었고, 소련놈 탓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친일파에 대한 척결이 인민재판을 통해 전국에서 벌어졌고,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따른 토지개혁이 일찌감치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북한에 있어서 해방의 대박은 친일파의 것이 아니라 무산계급의 것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그들은 과거의 일본인 지주들보다 더 악랄하고 지독하며 무자비한 공산당이라는 주인을 모시게 됐다는 사실을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눈치를 챈 사람들은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당의 수탈은 과거 역사의 그 어떤 악독한 지주들보다 더욱 혹독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는 아직까지 한참의 시간이 더 흘러야 했다. 어쨌거나 남한 민중들 사이에 움트기 시작한 반미감정과 같은 반소감정이 북한에서는 생겨나지 않았다. 물론 약간 성격이 다른 혐오의 감정은 만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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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소련 고문단들은 자신들이 드러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북한에 부임해 올 때도 부임식은 고사하고 환영 회식조차 갖지 않았고, 북한을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임식이나 환송파티 같은 것은 없었다. 같이 일하던 북한사람들에게도 온다 간다 말도 없이 그냥 사라졌다. 어제까지 같이 일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안 보이면 본국으로 귀환한 것이었다. 최고 지휘부의 장군들을 제외하면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기간 동안 북한에서 근무했던 소련군 장교나 고문단의 명단은 지금까지도 비밀에 붙여져 있다. 그만큼 소련은 위성국가의 통치와 지배에 노련하고도 세련된 모습을 보였다. 마치 점령군처럼 진주해서 정복자로 군림한 미국과는 확실히 차이가 났다.
하지만 일반 병사들의 행동거지는 달랐다. 일반 병사들의 자질과 문명화의 정도는 소련군보다 미군이 아무래도 나았다. 소련군들은 대부분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무학의 농촌 출신들이었고, 어릴 때부터 극도로 가난하고 힘든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었다. 군대의 문화도 야만적이었고, 풍속도 미개했다. 소련군 병사들은 북한 전역에서 시민들을 괴롭혔다. 아무데서나 사람들을 불러 세워놓고 “야폰스키, 다와이, 다와이(일본놈이지, 다 내놔)”하면서 함부로 몸을 뒤지고 시계나 만년필, 지갑 등을 빼앗았다. 털이 뒤덮인 팔뚝에 시계를 여나믄 개나 차고 있었고, 호주머니 안에는 빼앗은 반지, 목걸이가 잔뜩 들어 있었다. 여자들에 대한 추행도 마구잡이로 저질렀다. 북한 인민들은 “이렇게는 못 살겠다” 싶어서 소련군 지휘부에 진정을 하기도 했고, 몰려가서 항의도 했지만 “일본군들이 같은 짓을 했을 때 너희들이 일본군 부대의 지휘관을 찾아가서 이렇게 항의를 했다면 어찌 되었을 것 같으냐? 일제 때 너희 조선인들이 일본군들의 만행에 감히 항의라도 할 수 있었느냐?”는 면박을 받으면 대꾸할 말이 없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남한에서도 미군 병사들의 민폐나 일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소련군에 비하면 그래도 양반이었다. 미군은 아이들이 쫓아오면서 “긴미 초컬릿, 긴미 츄잉껌”하면 잘 던져주기도 했다. 북한의 아이들은 소련군 병사들을 붙잡고 “에린 다와이(빵 좀 주쇼) 에린 다외이(빵 좀 주쇼)”하며 매달렸지만 빵 한 조각 떼주는 병사들은 극히 드물었다.
한국인의 반미감정에 대해서 미국은 억울한 구석이 있다. 군정에 친일파들을 등용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다른 대안이 없었고, 미국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친일파들의 지식과 능력, 경험을 빌지 않고서는 한국의 적화를 막을 길이 없었다. 원조물자들을 들여와 한국의 산업기반을 무너뜨렸다고 욕을 해대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굶주린 한국인들을 먹이기 위한 원조였지 미국이 돈 벌려고 장사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왜정 때 한 해 평균 800만석의 쌀을 수탈해 갔다. 그러나 미군은 한국에서 쌀 한톨 실어간 것이 없고, 공장의 문짝 하나 떼 간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이권을 챙긴 것도 아니었다. 남한에는 미국이 챙기고 싶어도 챙길만한 이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의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애치슨라인이 그어진 것도 한국에는 미국이 지켜야 할 이익이라는 것이 도무지 없었기 때문이었다. 생기는 것은 땡전 한푼 없는 가난해 빠진 야만하고 미개한 나라에 사람들은 왜 그리도 억세고, 뻔뻔스러운지 도와줘도 고마워할 줄을 몰랐다. 미군이 수십만 명의 피를 흘려가며 일본과 피터지게 싸워서 자기들을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시켜주고, 거기다가 독립까지 시켜주려고 돈을 쏟아부어가며 도와주고 있는데, 돌아오는 건 욕뿐이었다. 물에서 건져주니까 보따리부터 내놓으라고 멱살을 잡았다. 쌀값이 올라도 미국 탓, 물가가 폭등해도 미국 탓, 생필품이 부족해도 미국 탓, 도둑이 들끓어도 미국 탓, 지주들의 횡포가 심해도 미국 탓, 전염병이 돌아도 미국 탓, 전쟁이 터져도 미국 탓이었다. 미국의 바램은 오직 하나, 이 지겨운 나라에서 빨리 손떼고 물러나는 것뿐이었다. 미국이 한국에 바란 것은 오직 한 가지, 도망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도망치듯이 이 땅에서 떠났다. 그들을 다시 불러들인 것은 김일성이었다. 주한미군 철수하라고 수십 년을 한결같이 염불을 하지만 떠난 미군을 다시 한반도에 돌아오게 만든 것은 바로 김일성 자신이었다. 한국전쟁은 미국에게는 재수 옴붙은 전쟁이었다.
따지고 보면 미국은 한국에 뭐 죄지은 것이 없다. 일제의 식민지로 신음하고 있던 불쌍한 백성들 구해준 것뿐이고, 굶고 있으니까 쌀하고 밀가루 퍼다준 것뿐이고, 나라 지키라고 총주고 대포주고 훈련시켜 준 것 뿐이고, 야만하고 미개한 사람들 일깨우고 가르쳐준 것 뿐이었다. 그런데도 왜 미국은 한국사람들한테 그토록 욕을 먹고, 이 땅의 반미감정은 그토록 뿌리깊은 것일까?
그 이유는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다. 첫 번째 미국은 한국에 진주할 때 어떤 구체적인 계획도 방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의 군정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지금 우리가 흡수통일을 하게 된다면 ‘통일은 대박’이라는 박근혜 대통령은 남한에 진주하던 하지 중장보다 얼마나 더 준비를 하고 있고, 얼마나 더 구체적인 계획과 방안을 갖고 있는지 나는 의문이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말 속에는 흡수통일을 하게 되는 경우 북한을 우리의 전리품으로 생각하는 오만함이 깃들어 있다고 나는 본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북한이라는 땅덩이는 그야말로 군침도는 먹이감에 틀림없다. 저 땅 전체가 주인이 없는 무주공산인 것이다. 일본인이 남기고 간 적산하고는 그 규모와 공짜성에서 비교가 안 된다. 흡수통일은 곧 우리가 북한을 접수하는 것이며, 달리 말하면 북한은 우리의 피정복지가 되고 북한인민들은 우리의 피정복민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북한을 우리 맘대로 할 수 있으리라고, 그리고 맘대로 해야 한다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 중에는 남한의 대통령인 박근혜도 있고, 통일부 장관도 있고, 곧 만들어질 통일준비위원회의 위원장과 멤버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청해진 해운하고 별 다르지 않은 도덕성으로 무장한 수많은 재벌들과 자본가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권을 챙겨주고 자기들 호줌지도 채우는 유능한 관료들이 있다. 그들 모두에게 통일은 대박이다. 흡수통일이 되는 날, 우리는 한반도에 진주하던 미군처럼 북한을 점령하러 갈 것이다.
대박을 위하여~~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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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을 일제 식민지의 질곡에서 구해주었음에도 수십년이 넘는 지금까지 미국이 욕을 먹는 이유는 군정의 실패 때문이고, 그 중에서도 민생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한국을 진정한 자주독립국가로 키울 생각이 있었다면 미국은 한국의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하며 민족자본이 축적될 수 있도록 해야 했는데, 미국은 당장의 불평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생필품을 원조했다. 산업재나 생산재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고, 쌀과 종이, 피복, 밀가루, 설탕 같은 소비재가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왔다. 이것은 바로 한국의 영세한 산업기반을 무너뜨리고 수많은 영세기업을 도산으로 내몰았다.
미국은 한국인의 손에 신형 릴낚싯대를 쥐어주고, 새로운 낚시법을 가르쳐주어야 했는데, 미국은 그러지 않고 자기들이 먹고 남은 물고기를 광주리채 안겼다. 한국사람들은 대나무로 만든 조잡한 낚싯대로 겨우 물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이제 그마저도 던져버리고 쏟아지는 물고기를 주우려고 뛰쳐나갔다. 그런데 이 물고기들은 어떤 사람에게는 차떼기로 주어진 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뼈다귀나 국물도 돌아가지 않았다.
이런 현실은 좌익들에 의해서 과장되고 부풀려졌으며, 바로 선동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더 어려워진 삶과 친일파들의 득세와 그들의 핍박에 몰린 민중들은 좌익의 선동에 휩쓸려 무모한 폭동을 일으켰다. 그 시발은 제주 43 사건이었다. 43사건은 나중에 따로 다루어 볼 예정이지만 세계의 민중항쟁사에서 예가 드문 참혹한 양상을 띠었다. 박근혜 정부가 제주 43 추모공원을 짓고, 정부에서 공식사과를 하는 등 지난 상처를 쓰다듬는 조치들을 뒤늦게나마 취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미군정은 제주 폭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서청(서북청년단)이 앞장선 토벌대는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죽였다. 이것은 곧바로 여순 반란 사건을 불러왔고 남도 일대가 피로 물들었다.
나는 예전에 좌익작가들이 쓴 민중문학들을 섭렵했던 적이 있다. 조정래의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 황석영의 장길산 등 한때 80년대에 봇물을 이루었던 민중문학의 대표작들을 거의 빠짐없이 읽어 본 터다. 이런 작품들에는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한 교묘하고 음흉한 왜곡과 일방적인 해석이 있다. 조정래의 작품들에는 리얼리즘의 극치라는 수식이 붙는데, 이건 사실과 다른 소리다. 그의 작품은 리얼리즘을 가장한 프로파간다이다. 미군이나 국군, 또는 경찰이 양민을 학살하거나 귀순자들을 처단하는 장면은 소름이 끼칠만큼 생생하게 그야말로 리얼하게 그려서 보여주는 반면에 반란군이나 좌익 빨치산들이 우익인사들을 학살하고 처형하는 장면은 별다른 묘사없이 어물쩍 넘어간다. 흑인 병사가 한국인 소녀들 끌고 창고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눈앞에 보듯이 그리지만 같은 시기에 이북에서 소련군들이 저질렀던 무차별 겁탈들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이승만이 국군의 지휘권을 미군에 이양한 것을 두고 자주권을 포기하고 괴뢰가 되었다고 비난하면서도 김일성이 인민군의 지휘권을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에게 이양한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남한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에 대해서는 탄복할만큼 유려한 필력으로 생생하게 그려내면서 같은 시기 그 성공했다는 토지개혁을 끝낸 북한 농민들의 참상에 대해서는 봉사요 귀거머리 흉내를 낸다.
좌익들은 문화를 선전과 투쟁에 이용하는데 아주 능란하다. 소설, 연극, 영화, 미술이 모두 민중의 세뇌와 선동에 이용된다. 군정의 실패와 좌익의 선전에 의해 반미감정의 씨앗은 뿌려졌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그 무성한 잎사귀를 드리우고 있다. 뿌리는 더욱 길게 자라서 남한 전역의 땅 속에 그물처럼 얽혀있다.
나는 일치되기 전에 일통이 먼저 되는 경우,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다섯 가지 과제가 있다고 말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2천5백만 북한 인민의 생존문제였다. 이들을 우리가 어떻게 먹이고 재우고, 병에 걸리면 치료를 해줄 것인가 이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경제력으로 그 정도는 해낼 수 있으리라고 낙관하는 듯 하다. 현재 남북한의 국민소득은 거의 20배의 격차가 있다. 우리가 북한사람들보다 20배나 잘 살기 때문에 흡수통일이 돼서 그들을 끌어안게 되더라도 먹여살리는 것이야 그리 어렵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이다. 남한은 인구에서도 북한의 거의 두배이다.
그런데 해방 직후에 미국과 한국의 국민소득 격차는 20배가 아니라 200배를 넘었다. 인구는 미국이 남한 인구의 10배였다. 그런데도 미국은 한국인의 생계를 해결하는데 실패했고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비난과 원망을 받고 있다. 해방 직후부터 미국은 매년 10억 달러에 달하는 원조를 했는데, 당시 화폐가치로 10억달러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80년대 말에 러시아가 우리한테 꾸어가서 현물로 겨우 갚은 차관의 액수가 30억 달러이다. 김종필-오하라 메모에서 합의한 일본의 전쟁배상금이 6억달러였다. 50년대에 10억달러라면 지금의 100억 달러를 상회하는 금액이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한국인의 생존이 보장받지 못했다.
지금 북한에는 수많은 기업소가 있고, 인민들의 생필품들이 생산되고 있다. 의복, 신발, 비누, 그릇, 차를 잘 만들지는 못해도 자전거는 만들어 내고, 중국산 짝퉁일망정 컴퓨터에 스마트폰도 만든다. 그런 기업소들은 협동농장과 마찬가지로 북한 노동자들의 일터이고, 밥줄이다. 어쨌거나 김정은이는 이런 기업소에서 일하는 근로자들한테 봉급을 주고 배급품을 주고 있고 공장들은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흡수통일이 되는 순간, 이 기업소, 공장들은 어떻게 될까? 그날로 전부 문을 닫게 될 것이다. 남한의 생필품들이 북한에 쏟아져들어오는 순간 북한의 모든 공장과 기업은 경쟁력을 상실하게 되고, 더 이상 제품의 생산이 불가능해 진다. 물론 북한 근로자의 임금이 남한보다 턱없이 낮기는 하지만 북한의 낡은 생산설비와 비효율적인 생산방식, 낙후된 경영의 수준은 남한의 기업들과 경쟁이 아예 불가능하다. 품질과 가격, 그리고 물류에서 비교가 안되는 격차를 갖고 있다. 지금의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북한의 자생경제체제에서는 억지로 공장을 돌릴 수 있지만 남한의 경제권에 흡수되는 순간 북한의 전 산업기반은 하루아침에 고철로 변하게 된다. 이건 농업도 마찬가지다. 조선이 합병된 후에 조선에서 수탈해 간 쌀 때문에 쌀 가격이 폭락해서 일본의 농민들이 굶어죽은 사실이 있다. 해방 후에 미국의 값싼 쌀과 밀가루의 원조 때문에 남한의 농민들이 한때 거지로 전락했던 적이 있었다. 북한의 협동농장들에서 생산하는 쌀은 남한의 남아도는 쌀과 가격에서 경쟁이 되지 않는다. 지금 북한에는 남생이(채소) 재배를 포기하는 농가가 늘고 있다, 그 이유는 중국산 채소가 값싸게 시장에 나오기 때문이다. 예전에 시장이라는 것이 발달하기 전에는 텃밭에서 재배한 남생이들을 내다 팔아서 겨우 생계를 꾸려나가기도 했지만 시장이 커지고 중국산 물건들이 들어오게 되지 남새마저도 가격경쟁력이 없어서 심어봐야 내다팔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남한의 농산물이 북한에 들어가게 되면 북한의 농업은 그날로 막을 내리게 된다. 다시 경쟁력을 회복하는데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흡수통일이 되면 북한은 어느 정도의 자생력이 있고, 경쟁력 있는 기업들을 갖고 있었던 동독과는 달리, 자체의 생존능력이 전무하고 경쟁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2천5백만 명의 난민캠프로 변하고 만다. 북한의 경제체제는 하루아침에 마비되고, 북한 전역은 생산이 전혀 없는 굶주린 2천5백만 명의 거지 떼가 유랑하는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김정은의 위대한 영도 하에서는 겨우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최소한의 기능은 수행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상 북한은 경제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다. 화폐가 없고, 은행이 없다. 북한 화폐는 휴지나 마찬가지고, 은행은 은행으로서의 기능이 전혀 없다. 때문에 저축이라는 것이 없고, 환율의 개념도 없으며, 신용장 한 장 개설할 수 없다. 이런 경제체제는 김정은이 몰락하면 그 순간 같이 끝이다. 북한의 경제는 김정은 일가의 독재가 유지되는 한에서만 돌아간다. 흡수통일은 남한이라는 국가가 북한이라는 국가를 접수하고 인계받는 것이 아니다. 인류 역사상 있어본 적이 없는 가장 거대한 규모의 난민캠프를 인수하게 되는 것이다. 난민의 수가 2천5백만 명에 달한다.
이들이 과연 김일성 일가의 독재에서 해방시켜주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하고 감지덕지할 것인지, 아니면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눈을 흘기고 멱살을 잡을지 누가 아는가? 미군정의 민생정책 실패는 제주43과 여순반란 같은 참극을 불렀다. 북한인민들이 분노하게 되면 그 결과는 내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제주나 여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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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덴노헤이까 히로히토의 항복선언이 일본과 조선반도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 방송을 들은 2천만 조선동포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 춤을 추며 태극기를 손에 손에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다.”고 역사 교과서에 실려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그랬으리라는데 일말의 의심도 갖고 있지 않다. 일본패망과 조국 독립의 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을 들으면서 해방의 감격과 환희를 느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눈 앞이 캄캄해지면서 일거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감과 낭패감을 느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내가 짐작하기로는 당시 일황의 항복 소식을 들은 순간 해방을 기쁨과 환희로 맞이한 사람은 조선사람 전체의 30퍼센트를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과 거의 비슷한 숫자의 조선인들은 “이거 큰일 났네. 나는 인제 죽었구나.”하는 공포감에 사로잡혔을 것으로 본다. 그들에게 일본의 패망은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나머지 약 40퍼센트의 조선인은 그저 어리둥절했고, 해방의 의미가 뭔지 독립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몰랐다. 일본의 패망과 해방이 자기한테 어떤 이익이 되고 혹은 손해가 될 것인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었던 사람들이다. 해방이 대박인지, 망통인지, 축복인지, 재앙인지 감도 못잡은 사람들이 많았다.
1980년 10월 26일, 박대통령 서거 소식이 방송을 타고 흘러나왔을 때 한국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재자의 사망으로 유신독재가 끝났음을 반긴 사람도 있고, 위대한 지도자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눈물을 흘린 사람들도 많았다. 김재규에게 박수갈채를 보낸 사람도 있었고, 김재규한테 복수의 칼을 갈았던 사람도 있다.
만약 김정은이 어느 날 갑자기 축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 대한민국을 포함해서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것은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며, 일대경사일 것은 틀림없다. 북한사람들은 어떨까? 김일성이 죽었을 때처럼 온 나라가 슬픔에 잠기고 눈물바다를 이루는 광경하고는 좀 다를 것이다. 김정일이 죽었을 때와 비교를 해도 확실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박대통령의 서거 때 한국인들이 보여주었던 것에 비해서 낮지 않은 애도의 물결이 있을 것으로 본다. 오랜 습관에 의해 본능적으로 슬픈 척을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북한 사람의 절반 이상은 그 슬픔이 연극은 아닐 것이다.
일제시대는 불과 36년이었지만, 그 마지막에 일본의 패망을 반길 수 없었던 조선인들이 3할은 되었을 것으로 보면 북한은 이미 70년간 3대에 걸친 통치를 해 오고 있다. 우리는 오늘이라도 김정은의 신변에 급변이 생기고 그것을 계기로 흡수통일을 하게 되는 경우, 2천5백만 북한인민들이 춤을 추며 휴전선을 타고 넘어 자유대한민국의 품에 안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야무진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김일성 일가의 세습권력이 무너지면 자신도 끝장이 난다고 생각하는 기득권층이 20%는 될 것이다. 세상이 바뀌면 살아남기 힘든 김일성 일가의 공범들과 그 가족의 수가 적게 잡아도 그 정도는 된다는 얘기다. 또 기득권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배계급은 아닐지라도 북한사회에서 그래도 안정적인 삶을 누려 온 사람들이 약 30%는 될 것이다. 아무리 북한이 가난하고 억압당하고 인권이 유린되는 야만적인 사회라 해도 그 중 절반은 자기 조국이 그렇게 끔찍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오랜 세월 계속된 세뇌와 선전에 의해 의식이 마비된 탓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김정은의 급변사태가 벌어진 후 한동안은 최면에서 깨어나지 못한 의식없는 유령들이 북한인민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들이 통일 후에 외부의 정보를 자유롭게 접하고 자기들이 살아온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할 것이다. 이인모 같은 장기 비전향수가 있는 것을 보면 북한인민들 중 상당수는 세상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김일성 일가의 독에 중독되어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들이 과연 흡수통일이 된 후에 대한민국의 통제와 관리에 순응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그들 중 일부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극한의 투쟁을 감행하려 할 것이다. 만약 해방 후의 미군정처럼 우리의 대북한정책이 실패하고, 북한인민의 삶의 수준이 실질적으로 향상되지 않고, 남북한 간의 소득격차가 심화되고, 남한사람들의 북한사람에 대한 멸시와 업신여김이 일상화된다면 영호남간의 지역감정이 문제가 아닐 정도로 심각한 남북 지역감정이 생겨나게 될 것이고, 이것은 바로 폭력적인 저항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북한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 대부분이 10년 이상의 장기 군복무를 한 사람들이다. 군인으로 10년 세월 청춘을 보낸 사람들인 것이다. 인민들이 무기를 다루고 전투를 하는 평균적인 숙련도에 있어서 전 세계 어느 나라의 국민도 그들보다 뛰어난 경우는 없다. 한국의 남자들도 대부분 군필자이고 예비군이지만 북한인민들과는 숙련도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북한인민들이 총을 들게 되면, 이라크의 반정부군이나, 아프가니스탄의 팔레반들하고는 수준이 다를 것이다. 거기다가 북한은 엄청난 전쟁무기가 쌓여있는 나라이다. 흡수통일을 하면서 우리가 북한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북한 내의 군사무기에 대한 인수가 철저하고 완벽하게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이라크는 미국과 다국적군의 완벽하고도 신속한 군사적 승리에 의해 점령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이라크 전국의 무기고에서 상당한 양의 무기가 민간과 반군의 손에 흘러나갔고, 그 무기들이 지금까지도 미군을 죽이고 있다. 우리가 무슨 수로 북한의 급변시에 북한 전역의 무기고를 장악하고 그 엄청난 무기들을 완벽하게 인수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재래식 무기뿐만 아니라 핵무기까지도 사라지거나 위험한 인간들의 손에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흡수통일에 반대하는 세력의 손에 핵무기가 들어가고 그들이 핵으로 공갈을 하고 협박을 해대는 상황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비책은 무엇인가? 이런 일이 현실로 벌어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통일이 대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북한인민들 전부가 남한으로의 흡수통일을 바라고 있고, 흡수통일이 된다면 남한사람들을 독재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준 해방자로 반기고, 지옥 같은 삶을 천국처럼 바꾸어 줄 구세주로 생각해 줄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아나꽁꽁 그건 택도 없는 소리고 망구에 우리 생각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현재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험악한 것인지에 비추어 조금만 배불리 먹여주고, 어느 정도만 향상시켜 주어도 그것으로 얼마든지 만족하고 감지덕지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우리의 속편한 생각일 뿐이다. 그들이 통일 후에 어느 정도를 기대하고 요구를 할른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아직 그에 대한 연구조차 이루어진 것이 없다. 세끼 이밥에 고기국만 먹게 되면 고마워해 줄 것인가? 겨울에 얼어죽지 않을 만큼 따뜻한 방구들만 제공되면 불평없이 남한의 지배를 받아들일 것인가? 과연 그럴까? 해방이 되면 그들은 잘사는 남한사람들의 풍족한 생활을 눈앞에 보게 될 것이다. 언제까지 어느 정도까지 격차를 받아들이고 감내해줄 것인가는 의문이다. 불평과 불만은 상대적이다. 과연 그들이 남한사람들보다 10배나 가난한 상황을 언제까지 참아줄 것인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이 그들의 삶을 이끌어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더 빠르다면 통일은 끔찍한 재앙으로 귀결될 것이다.
- 통일 대박론 허구성에 대하여 26
독일의 통일은 동독의 5개 주가 서독 연방에 가입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서독은 여러 개의 주가 가입된 연방국가였기 때문에 여기에 동독의 5개 주가 추가로 가입하는 형식을 띠는 것으로 절차가 마무리될 수 있었다. 동독의 독일연방가입은 1990년 7월 1일에 발효된 <화폐·경제·사회통합조약>에 구체적인 방법과 절차가 명시되었고, 이어 8월 31일에 동서독 간에 <통일조약>이 체결됨으로서 실질적인 경제통합에 착수하게 되었다. 조약의 내용 중 가장 먼저 시행된 것이 바로 화폐의 통합이었다. 화폐를 단일화하는 것이야말로 연방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이고, 화폐가 먼저 통합되어야만 다른 경제의 통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통일 전의 구매력을 보면 동독의 마르크화가 서독의 마르크화에 비해서 구매력이 그리 낮지 않았다. 말하자면 동독의 1마르크로 동독인들이 자국내에서 구매할 수 있는 물품은 서독인이 서독 1마르크로 서독에서 살 수 있는 물품의 양과 비슷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동서독 마르크화의 가치가 엇비슷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동독은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제공되는 여러 가지 화폐 외의 구매수단이 있었고 화폐의 구매력이 국가에 의해 강제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동독 마르크화의 가치가 서독 마르크화보다 현저하게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동서독은 <화폐경제사회통합조약>에서 동독의 마르크화를 서독의 마르크화와 1:1로 교환한다는 것에 합의했다. 이것은 동독인의 재산을 일시에 높여주었던 반면에 서독에게는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안겼다. 동독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동독마르크화가 서독마르크와 대등한 가치로 교환되면서 몇 배의 재산이 증식되는 것과 같은 대박을 누렸다. 서독이 이런 조치에 합의한 것은 통일 후 동독인들의 서독 이주를 막기 위함이었다. 동독인들이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서독으로 대량 이주를 하게 되면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타격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통일독일의 정부는 동독인들을 설득해서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아도 곧 잘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어야 했다. 동독인들 대부분이 동독을 떠나 서독으로 옮기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이것을 만류하여 주저앉히는 것은 통일의 성공과 실패가 걸린 중차대한 문제였다. 그래서 서독은 엄청난 부담을 감수하면서 화폐의 통합을 통해 동독인들의 재산을 늘려준 것이었다.
만약에 우리가 북한을 흡수통일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우리 역시 가장 급히 해결해야 하는 것이 화폐의 통합이다. 이것이 선결되지 않으면 경제 문제는 어느 것도 손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북한에 화폐가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북한 돈은 있지만 이 돈이라는 것이 화폐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제시대 때 일본군이 민간에서 징발할 때 끊어준 군표와 비슷하다. 가지고 있어봐야 시장에서 화장품 하나 살 수가 없다. 배추 한포기, 무 한토막 사는데는 쓰일 수 있을지 몰라도 약간만 고가품이면 중국돈과 달러 아니면 구매가 어렵다. 북한 화폐의 실질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김정일도 모르고 장성택도 모른다. 며느리도 물론 모른다. 북한에는 공식적인 환율이라는 것이 없다. 북한화폐를 가지고 은행에 가면 중국돈과 달러로 환전을 해주지 않는다. 환전을 해줄 환율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으니까 얼마로 바꾸어줘야 할지 은행장도 모른다는 것이다. 다만 달러나 중국돈을 가져가면 북한 돈으로 바꾸어주기는 하는데 이것도 들쑥날쑥 주는 넘 맘대로다. 우리도 외화가 귀하던 시절 명동에 나가면 암달러상 아지메들이 챙모자를 쓰고 돈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골목마다 쭈구려 앉아 있었다. 이 암달러상들이 바꾸어주는 비율이 당시의 환율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 환율은 아지메마다 달랐고, 날마다 달랐고, 골목마다 달랐다.
지금 만약 흡수통일이 되면 북한화폐는 우리 돈으로 얼마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즉 통일이 됐을 때 북한인민이 가지고 있는 북한돈을 얼마의 남한돈으로 바꾸어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실질가치로 따지면 ‘바꾸어줄 수 없다’라는 답이 나온다. 북한 화폐는 휴지나 마찬가지고 아무런 화폐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통일이 된 후에 북한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북한돈으로는 남한에서 들어온 쌀 한 포대, 화장품 한 개도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말은 통일이 되는 순간 북한인민 대다수는 그날로 거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러화나 중국의 인민폐를 감추어 둔 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하고 북한 돈밖에 가진 게 없는 다수의 인민들은 화장실에서도 쓸 수 없는 조악한 휴지조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억지로 북한돈에 가치를 부여해서 한국돈으로 교환을 해주는 경우, 북한 인민들은 한숨을 쉬겠지만 남한경제에는 파국적인 주름살이 지게 된다. 경제력이 막강했던 서독도 화폐통합 이후에 근 20년 이상 후유증에 시달렸다.
통일 후에 우리가 휴지나 다름없는 북한화폐를 사주지 않으면 북한인민의 90%는 그날로 거지가 될 수밖에 없다. 재산이라고는 땡 전 한 푼 없는 알거지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토지와 건물, 시설이 일체 국가재산인 북한에서 자기 집이나 땅과 같은 부동산을 가지고 있을 리도 만무하다. 공장이나 기업을 자기 소유로 갖고 있는 자본가도 있을 수가 없다. 달러와 중국돈을 꿍쳐놓은 소수의 지배계급을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전체 인민이 거지로 변하고 만다.
2천5백만 명이라는 난민을 관리하고 규휼해 본 경험을 가진 국가나 단체, 조직은 전 세계에 한 곳도 없다. 이런 거대한 난민 캠프는 인류 역사상 출현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누구도 해보지 못한 미증유의 사태에 직면할 것이 틀림없는데 ‘통일 대박’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통일이 될 당시 동독기업들이 생산하는 제품의 수준은 세계 일류기업들의 그것에 비해서 약 20년 정도 격차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막상 통일이 되자 동독의 제품들은 경쟁력이 전혀 없었고, 수년 내에 거의 모든 동독기업이 파산하고 문을 닫았다. 동독인 대부분이 실업자가 된 것이다. 동독의 실업자 문제는 통일독일을 괴롭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독일은 이 문제를 오늘까지도 완전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북한의 기업소들이 만들어내는 제품들은 남한기업의 그것에 비해 30년, 40년은 뒤떨어져 있다. 아니 그보다 더 격차가 클지도 모른다. 그들의 생산설비, 생산방식, 경영의 수준은 우리의 60년대, 70년대에 멈추어 서 있다. 통일이 되는 그날 이 기업소들은 모조리 문을 닫게 되고 북한인민들의 거의 전부는 실업자가 되고 만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대비책을 세우고 있나? 이 엄청난 거지떼를 어떻게 할 생각인가?
뭐 어찌 되겠지. 무슨 수가 생기겄지.
- 통일 대박론 허구성에 대하여 27
북한이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집단농장체제가 농민들의 경작의욕을 저하시켜 곡물의 생산성이 매우 낮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자기 땅도 아니고 수확한 곡물도 자기 것이 아니다보니 농민들의 자발적인 의욕과 창의적인 영농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북한이 사유재산을 허용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해서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해 주면 수년 내에 북한의 식량문제는 해결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2천5백만 명이라는 난민을 규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북한의 농업을 일으켜 세워 식량의 자급자족을 달성하는 일이다. 때문에 흡수통일이 되는 경우, 가장 시급한 과제가 화폐의 통합과 농지의 개혁이라 말할 수 있다. 100% 전 국토가 국유지인 북한을 접수했을 때, 어떻게 이 국토를 인민들에게 분배하는가는 가장 시급할 뿐만 아니라 전 인민의 진로와 생계에 직결된 초미의 관심사일 것이다. 이미 전국토가 국유재산이기 때문에 새삼 주인들로부터 몰수할 필요도 없으며, 문제는 어떻게 나누어주는가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나누어준다는 일이 결코 쉽지가 않다. 자칫 잘못하면 그야말로 민란이 일어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해방 후에 미군정이 실시했던 적산의 불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문제이다.
여기서 해방 후에 남과 북이 어떻게 토지개혁을 했으며 그것의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잠시 되돌아보자.
북한은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3월에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그 요체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였다. 땅을 가진 모든 지주들에게서 한 푼도 보상하지 않고 강제로 땅을 몰수했다. 다시 말하면 전 토지의 국유화를 단행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땅을 많이 소유한 지주들은 인민재판에 끌려나와 곤욕을 치루었고, 많은 지주들이 죽음을 당했다. 지주들이 화를 면할 수 있는 방법은 땅을 버리고 남한으로 탈출하는 것 뿐이었다. 지주들 뿐만 아니라 자기 땅을 경작하던 자작농들도 예외없이 땅을 빼앗겼다. 북한은 이 몰수한 토지를 전체 농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는데, 이때 나누어 준 것은 토지의 소유권이 아니었다. 땅을 받은 농민들은 그 땅을 팔 수도 없고, 저당을 잡히거나 담보로 제공하여 돈을 빌릴 수도 없었다. 일체의 양도와 양수가 금지되었고, 임대차도 불가능했다. 북한은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준 것이 아니라 경작권만 주었던 것이다. 경작의 조건인 경작료 비율은 30%였다. 그러니까 북한의 전 농민은 이전의 지주가 당으로 바뀌었고, 소작료가 50% 이상에서 30%로 낮아진 차이 뿐이었지 소작농 신세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또한 30%라는 일견 낮아 보이는 경작료도 함정이 많았다. 북한 당국은 전국의 농경지에 대한 실수확량 조사를 단행했는데, 이삭 하나당 쌀의 알갱이 숫자까지 셌으며, 각 농가의 텃밭과 기르는 닭의 수, 낳는 알의 숫자까지 조사했다. 일제시대의 그 어떤 악독하고 악랄한 지주도 실제 수확량에 대한 조사를 이렇게까지 했던 사람은 없었다. 50%라는 것은 그야말로 대충 봐서 50%였다. 그러나 공산당의 30%는 대충 30%가 아니었다. 피말리는 30%였다. 거기다가 비료대와 농기계 대여료 등 여러 잡세들이 붙어서 실제 경작료는 50%를 웃돌았고, 전쟁이 발발하자 무조건 수탈로 바뀌었다. ‘지주 없는 세상’, ‘누구나 공평하게 잘사는 세상’, ‘내 땅을 경작할 수 있는 농민의 세상’을 꿈꾸면서 일제 치하에서 빨치산을 했던 좌익농민들은 자기들이 그토록 바랐던 세상의 참모습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육이오 전쟁이 끝난 후 김일성은 전국의 모든 농지를 협동농장으로 전환해서 그나마의 경작권까지 회수해버렸다. 북한의 농민들은 소작농도 아닌 농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혁명의 결과였다. 노동자 농민의 독재라는 것이 이것이었다.
한편 남한에서는 토지개혁이 지지부진하여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미군정은 토지개혁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신정부에 토지개혁의 짐을 떠넘겼다. 이승만대통령과 국회가 이 문제를 가지고 서로 넘기고 받고 핑퐁을 하다가 최종적인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육이오사변이 일어나기 석달 전인 1950년 3월이었다. 처음에는 토지보유상한선을 2정보로 하려 했으나 최종 통과한 법안에서는 그것이 3정보로 약간 늘어났다. 즉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상한선은 3정보였고, 한 사람이 그 이상 갖고 있는 토지는 국가가 모두 몰수한다는 법이었다. 그러나 무상몰수는 아니었고 정부가 땅주인한테 땅값을 지불해주는 방식이었다. 재정이 빈약했던 당시의 정부에 지불해줄 수 있는 돈이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정부는 현금 대신에 지가증권을 발행해서 지급했다. 일종의 국채증서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몰수한 농경지를 직접 경작할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것도 공짜가 아니라 지대를 5년간 분할로 회수하는 방식이었다. 땅을 분배받은 농민들은 농사를 지어서 거기서 얻은 소득 중 일부로 땅값을 나라에 변제해야 했다.
이 농지개혁법이 해방 이후 5년 동안 미군정과 이승만대통령, 그리고 국회 사이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입법의 내용은 알려질 대로 알려졌기 때문에 지주들은 앉아서 땅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그들도 있는 대로 머리를 굴려서 농지개혁에 저항했다. 우선 자기 땅을 일가 친척이나 믿을 수 있는 지인들에게 명의를 이전해서 분산시키는 방법을 썼다. 일인당 3정보가 넘지 않도록 땅을 쪼개서 숨긴 것이다. 물론 명의제공자가 정말 자기 땅이라고 우겨댈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토지 매매 계약서에는 이면계약이 첨부되었다. 그러나 이런 명의도용은닉은 훗날 수많은 소송을 야기했다. 또 더러는 농지개혁이 되기 전에 시세보다 싼 가격에 토지를 팔아넘기기도 했다.
이승만대통령은 농지개혁법이 통과되자 신속하게 집행해서 육이오사변이 나기 전에 농지의 몰수와 분배를 마무리지었다. 경탄할 만큼 신속하고 과감한 법의 집행이었다. 농지개혁법이 오래 동안 지체되었기 때문에 그 동안에 이미 몰수 대상인 토지와 분배할 농민들에 대한 파악이 거의 끝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육이오 전쟁 중에 많은 농민들이 이승만정권과 대한민국의 편에 섰던 것은 이 농지개혁에 힘입은 바가 컸다. 만약 농지개혁이 전쟁 전에 이루어지지 않고, 지주제가 존속되었다면 아마도 농민들의 대다수가 인민군을 열렬하게 환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농민들이 자기 땅을 겨우 갖게 된 바로 그 시점에 터졌다. 농민들은 자기 땅을 지키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 아들들이 국군에 자원입대한 것이다. 농민의 아들들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은 그 전쟁을 치루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농지개혁으로 해서 남한의 지주 계급은 일시에 몰락하고 만다. 어쨌건 간에 대한민국에는 3정보 이상의 땅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된 것이다. 지주계급은 지가증권을 토지 대신 갖게 되었지만, 그것은 당장에 쌀 한말도 살 수 없는 증권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지가증권을 받자말자 바로 전쟁이 터졌다. 남한의 지주계급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던 호남 땅에 인민군이 들어왔다. 방호산이 지휘하는 인민군 제6사단이 호남지역을 무인지경으로 휩쓸었다. 공산치하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지주들은 낙동강 교두보 안의 부산으로 도망쳤다. 자기가 살던 터전을 버리고, 전 재산을 가지고 부산으로 간 호남 지주들은 살 길이 막막했다. 당장은 돈이 아닌 지가증권을 헐값에 팔아서 연명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호남 지주들의 지가증권을 사들인 것은 영남의 기업인들이었다. 부산 피난 시절이 끝날 무렵 호남 지주들의 지가증권은 대부분 영남의 기업인들 금고 속으로 들어갔다. 남한의 농업자본이 산업자본으로 탈바꿈을 하게 된 것이다. 호남의 지주계급이 몰락하고, 영남의 자본계급이 부상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이것이었다. 그리고 이때로부터 호남은 남한에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고, 영남의 패권시대가 열리게 된다.
해방 직후에 조선 13개 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던 것은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였고, 두 번째가 전라남도였다. 호남은 그만큼 인구도 많았고 부자도 많았다. 한국의 부는 쌀을 생산하는 토지에 있었고, 그 토지를 가장 많이 가진 사람들이 호남지방의 지주였다. 농지개혁은 남한의 부의 판도를 바꾸었다. 호남자본은 하루아침에 안개처럼 사라졌다.
- 통일 대박론 허구성에 대하여 28
농지개혁을 단행할 때 이승만대통령의 슬로건이 ‘경자유전(耕者有田)’이었다. ‘농사 짓는 사람이 토지를 가져야 한다’는 말인데 소작농의 폐해가 워낙 심했던 때문이기도 했지만 북한이 먼저 토지개혁을 마무리지었다는 사실은 남한에 엄청난 압력으로 작용해서 이 경자유전이란 명분에 지주계급들이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토지개혁을 하지 않으면 민란이나 폭동이 일어날 지도 몰랐고, 실제로 남한에는 여러 차례의 폭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건, 유상몰수 유상분배건 이런 토지개혁법은 위헌의 소지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100% 위헌법률이다. 이것은 혁명적 입법이기 때문에 토지개혁과 화폐개혁은 실패하는 경우, 정권의 몰락이 아니라 국가 자체의 파멸을 불러올 수 있다. 때문에 아무리 현실적인 필요성이 절박해도 쉽게 단행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북한의 참담한 현실은 농지개혁의 실패가 불러온 결과이며, 대한민국의 부흥은 농지개혁의 성공이 가져온 산물이라 말할 수 있다. 북한은 농지개혁이 실패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한 케이스이며, 한국은 농지개혁의 성공으로 한 나라가 중흥한 좋은 예이다. 이런 혁명적 조처를 하지 못해서 망한 나라도 많다. 필리핀이 그렇다. 필리핀은 15대 가문이 국부의 90%를 소유하고 있다. 필리핀은 농지개혁을 하지 못하는 한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해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북한이 먼저 토지개혁을 했기 때문에 불가능에 가까운 농지개혁을 기적적으로 해낼 수 있었다. 육이오 전쟁이 끝났을 때 대한민국에는 ‘지주’라는 계급이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에는 지주라는 사람이 없다.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이 농지를 소유할 수 없도록 한 법이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다. 정치인들이 청문회에서 곤욕을 치루는 사안 중 위장전입 다음으로 많은 것이 농지법 위반이다. 천년이 넘도록 우리나라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지주계급이 단 몇 년 만에 신기루가 꺼지듯이 사라진 것이다.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례라 말할 수 있다. 이승만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실패한 농지개혁이라고 우기기도 하지만 농지개혁은 이승만대통령의 가장 뛰어난 치적임에 틀림없고, 그 목적을 훌륭하게 달성했다. 반면에 북한의 농지개혁은 경자유전이 아니라 ‘경자무전(耕者無田)’을 실행했다. 농사짓는 사람 누구도 자기 땅을 가질 수 없는 세상이 됐다. 북한은 단 한 명의 농민도 자기 땅을 갖지 못하는 세계 유일의 국가가 되고 말았다. 모든 토지의 주인은 국가-가 아니라 김일성 일가의 소유가 되었고, 모든 농민은 김일성 일가의 농노로 전락했다. 소작료의 비율은 1백%였다. 전국시대 일본의 농민이 영주에게 바치던 세율이 30-40%였다. 30%를 받으면 자비로운 영주란 소리를 들었고, 40%를 받으면 가혹한 영주였다. 김일성은 100%를 받았다. 그리고 매일의 양식과 생필품을 배급해 주었다. 그것도 생존에 필요한 최소의 양으로... 북한인민들은 배급에 코를 꿰인 소나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는 지금 북한의 기근과 아사이다. 농노가 된 인민들은 겉으로는 위대하신 수령님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찬송하지만 자기의 것이 아닌 논밭에 기꺼이 땀을 흘리지 않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에서 “능력에 따라 전체에, 필요에 따라 개인에게”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그러나 실현된 공산주의세상에서 현실은 달랐다. “전부를 전체에, 최소한만을 개인에게” 이것이 공산주의가 드러낸 맨살이었다.
이제 흡수통일이 되면 우리에게는 진정한 북한의 농지개혁이라는 과업이 기다리고 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몰수할 필요는 없이 분배만 하면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게 쉬운 일일 턱이 없다. 해방 후에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하는데 5년이 걸렸다. 북한이야 지주들을 때려잡으면서 진행한 폭거였기 때문에 거칠 것도 없고 반대하는 사람도 없어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지만 남한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해관계가 얽힌 수많은 사람들과 계급, 조직, 단체, 정당이 각자의 입장과 이익에 따라 필사적으로 개입하려 들었고, 암투와 야합, 술수와 흥정이 난무했다.
통일 후에 북한의 농지개혁-농지뿐만 아니라 전체 국유재산에 대한 분배 문제는 통일을 대박과 망통으로 구분짓게 될 시금석이 될 것이다. 통일의 성공과 실패가 여기에 달려있다. 해방 후에 5년이나 걸린 입법이 과연 얼마 만에 가능할 것인가부터 걱정이 앞선다. 무상으로 분배할 것인지, 유상으로 할 것인지, 유상이라면 지대의 회수를 어떻게 할 것인지, 토지의 지가는 어떻게 산정할 것이며, 농가당 얼마의 농지를 분배할 것인지, 하나하나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생존이 결부되어 있다. 우리가 점령군처럼 북한의 전국토를 넘겨받아 손에 쥐고 마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누어준다고 했을 때, 과연 북한인민들 모두가 승복할 만큼 공정하고 투명하게 시행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자. 과연 대한민국의 이 깨끗하고 유능한 국회의원들이 시기에 늦지않게 제대로 된 법을 만들어 낼 것인가 생각해 보면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낀다. 당리당략에 목을 매고 정파싸움에 영일이 없는 이들이 사리사욕을 버리고, 이익집단에 휘둘리지 않고, 오로지 국가와 북한인민의 재활을 위해 공정하고 올바른 법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 하면 어림도 없는 소리란 답이 나온다. 또 그 법을 시행할 관료들은 어떤가? 세월호 사건은 어쩌면 대한민국에 크나큰 기회일 지도 모른다. 이 사건이 아니었다면 저 황당무계한 구원파 관련 기업들의 기막힌 불법행위들이 언제까지 계속되었을지 아무도 모른다. 이런 기업들이 구원파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들의 뒤에서 자기 호주머니 채우기에 광분한 관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이들에게 통일 후에 북한의 국유재산 분배를 맡긴다는 것은 고양이한테 어물전을 맡기는 일이나 진배가 없을 것이다.
앞의 글들에서 대구폭동이나, 제주43, 여순반란 등이 그 본질에서 계급투쟁이며, 그것은 토지문제라는 것을 말했는데, 통일 후 북한의 국유재산 분배와 불하는 폭동이나 민란의 정도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재기불능의 상태로 몰아넣을 내전을 촉발할 수 있다. 누가 이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박근혜대통령?
- 통일 대박론 허구성에 대하여 29
해방 직후에 남한에 들어온 미군의 군정은 승자의 권리였다.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였고,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여 무조건 항복을 했으므로, 일본의 모든 영토와 그에 속한 인민에 대한 처분은 미군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물론 일본의 패망 이전에 강대국들 간에 했던 약속인 카이로 선언이나 포츠담 선언을 지켜야 했고 전후에 설립된 유엔의 간섭이 따르기는 했지만 미국이 승전국으로서 점령한 일본과 한반도에서 미국의 권한은 절대적이었다. 맥아더는 곧 일본의 새로운 천황이나 마찬가지였고, 하지는 코가 크고 눈이 파란 조선총독이었다. 그래서 하지는 적산의 불하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었고, 하려고 맘만 먹으면 토지개혁이든, 화폐개혁이든 못할 것이 없었다. 이런 미군정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은 이승만정권은 새로이 나라를 세우는 건국기였기 때문에 혁명에 준하는 비상한 시대적 상황에 힘입어 토지개혁을 할 수 있었다. 적산의 불하나 국유재산의 사유화, 그리고 토지의 개혁 같은 것은 평상시의 민주정부는 수행할 수 없는 일이다. 새로 나라를 세우는 건국이나, 나라를 통째로 뒤집어엎는 혁명적 상황의 절대권력이 아니면 꿈꿀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북한을 흡수하여 통일을 하게 된다면 적국에 대한 군사적인 점령에 준하는 비상대권을 북한에 대해 행사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다섯 가지 과업은 정상적인 민주정부가 수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북한의 전국토와 전 인민에 대해서 생사여탈지권을 갖지 않고서는 시행할 수가 없는 일들이다. 이 말은 흡수통일이 되었을 때, 남한의 대통령은 현재 북한의 김정은이 갖고 있는 것에 버금가는 절대적인 독재권력을 북한에 대해서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니라면 북한은 해결이 불가능하게 된다.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다. 누가 2천5백만 난민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해줄 권한과 능력을 갖고 있으며, 누가 북한의 전 국토를 마음대로 인민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으며, 누가 북한의 모든 기업과 시설들을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전환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이 대한민국 대통령의 권한으로 가능한 일인가 생각해보면 어림도 없는 소리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다.
5대 과제를 실행하려면 특별법을 제정해서 그것에 필요한 권한을 한국의 대통령에게 위임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즉 일통 후에 일치시키기는데 필요한 조치들을 할 수 있는 비상대권이 합법적으로 남한의 대통령에게 위임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필요한 권한의 정도는 군사적으로 점령한 적국에 대한 군정에 맞먹는 것이어야 하고,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제한없이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북한은 일시적으로 남한의 군사적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과 같다. 국제적으로도 북한 전역이 난민캠프로 간주되고 남한 정부가 이 거대한 난민캠프의 관리자라는 것을 인정받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북힌 인민 전체가 자기들 스스로 자생력이 조금도 없는 난민의 신세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남한 정부의 통제와 관리에 순순히 응하고 따라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어떻게 이와 같은 합법적인 권한을 우리 정부와 대통령에게 위임해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정부와 우리 대통령이 무슨 수로 통일 후에 북한의 재건과 난민의 규휼에 필요한 권한을 가질 수가 있겠는가 이 말이다. 차라리 전쟁을 해서 우리가 북진통일을 하면 이야기는 간단하다. 우리는 승자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군사력으로, 무력으로 북한인민을 제압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북한을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전쟁을 해서 북한을 정복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통치에 반항하면 진압하면 그뿐이다. 그런데 이게 흡수통일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박대통령이 대박이라고 말하는 통일은 흡수통일밖에 없는데 흡수통일이 어떻게 되길래 박대통령이 이런 권한을 갖게 된다는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우리 국회가 합법적 절차에 따라 과반수 이상의 의결로서 ‘북한의 통치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하면 되는 것일까? 대한민국의 국회에서 정한 법률로 북한의 토지와 재산을 남한 정부 마음대로 처분하고 나누어주는 것을 북한사람들이 인정하리라고 보나? 아니면 동서독이 통일할 때 서독과 동독 양 정부간에 맺은 ‘통일조약’처럼 남북한도 조약을 체결해서 남한의 대통령한테 권한을 위임하나? 미안하지만 우리에게는 독일처럼 조약을 맺을 상대 정부가 없다. 김정일 정권이 남한하고 독일과 같은 <통일조약>을 체결할 가능성은 그야말로 눈꼽만큼도 없다. 독일의 통일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환경과 상황의 산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동독과 서독은 서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한 사이가 아니다. 좌우익의 대립과 투쟁으로 서로 죽이고 죽는 학살극의 증오와 적개심이 없다. 동독은 공산화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억지로 강제된 것이며, 동독인들 스스로의 계급투쟁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독과 동독 사이에는 400마일의 휴전선이 아니라 한 줄의 담장뿐이었다는 사실이다.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사이의 분계선이라는 것은 그저 보로쿠로 쌓은 담벼락이었다. 그 위에 철조망이 얹히고 감시 초소에서 감시병들이 기관총을 겨누고는 있었지만 그 실체는 단순한 벽돌담에 지나지 않았다. 소비에트가 무너지고 동서의 냉전이 종식되면서 베를린 담장의 감시병들의 군기도 같이 풀어졌고, 이전과 같은 삼엄한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해외 여행 자유화’를 요구하는 동독의 시위대가 베를린 장벽에 다가오는데도 이전 같으면 발포를 해서라도 접근을 막았을 감시병들이 “어어어...” 하면서 우왕좌왕하기만 했고, 시위대는 순식간에 장벽에 다가와서 이윽고 그것을 타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아예 밀어서 무너뜨려 버렸다. 45년 동안 동독과 서독을 갈라놓은 베를린 장벽은 10분 만에 어이없이 무너졌고 그 무너진 틈을 통해 수백만 명의 동서독인들이 하나로 합쳐졌다. 더 이상 이들을 갈라놓을 방법이 없었고, 독일의 통일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우리에게는 이런 터무니없는 해프닝이 벌어질 까닭이 없는데 이런 극적인 대반전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3년에 걸쳐 수십만 명이 희생된 참혹한 전쟁을 치루었고, 동족상잔의 증오심과 적개심을 서로의 가슴에 품은 채 400마일의 군사분계선을 철통같은 요새로 구축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되고 강력한 요새인 군사분계선이 한반도의 허리를 관통하고 있다. 백만의 군대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한반도의 군사분계선은 보로쿠담이 아니다. 그리고 김정은은 호네커가 아니다. 북한인민들도 동독인민이 아니다. 그들은 여행자유화를 외치는 시위를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누가 한국정부와 통일조약을 맺는다는 말일까? 김정은이 급살로 죽고 나면 그 다음에 북한에 정신이 제대로 박힌 정권이 들어서서 ‘자기들을 맘대로 해줍셔’ 하는 조약에 서명을 한다는 말일까? 그 정권은 누구로부터 그럴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을까? 지금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지방정부들이 하는 것처럼 국민투표를 한다는 소릴까? 그래서 북한인민들이 국민투표로 남한에 흡수될 것을 결정하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망상에 빠진 사람이다. 앞으로 짚어보겠지만 북한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 도대체 흡수통일을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나는 그것을 설명한 글이나 말을 접해본 적이 없다.
누가 어떻게 무슨 이유로 대한민국의 대통령에게 흡수통일을 해서 북한을 관리하고 재건해나갈 절대권력을 쥐어준다는 것인지 나는 정말 알고 싶다. 그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으면 따라다니면서 머리로 신을 삼아서라도 평생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 박근혜대통령은 대답할 수 있으려나?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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