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7 태실봉
지난 갓바위.은해사 산행때 들러보지 못했던 태실봉을 찾아 나섰다. 백흥암에서 얼마간을 머물면서스님한테 태실봉길을 물어보는
데 길찾기가 난해하니 되돌아나가 신일지에서 백흥암.운부암 갈림길사이로 난 길이 있노라고 알려준다. 운동도 조금은 할요량으로
중암암까지 올랐다가 되내려와 태실봉을 오르는데 오름길 내내 포크레인 트랙자국이 선명하다. 얼마전까지도 태실 석물들이 흩어져
방치 되어져 있었다고 들었는데 복원공사를 하고 있다. 기존의 일부 석재들과 새로 만든 석재들을 조합하여 복원을 하는데 기존의
석재들로만 있는대로 복원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기기암.거조암까지 들러볼 계획이었었는데 시간이 안된다.
- 백흥암
사기(史記)에 의하면 이 절은 국사 혜철(惠徹)이 861년(경문왕 1년)에 착공하여 873년에 완공하였으며, 절 주위에 잣나무가 많아서
송지사(松旨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1546년(명종 1)에 백흥암으로 개칭하였고, 1651년(효종 2)에 중건하였으며, 1677년(숙종 3)에
중수하였다. 1730년(영조 6)에는 보화루(寶華樓)를 중건하였고, 1858년(철종 9)에는 청봉이 영산전(靈山殿)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
고 있다. 이 절은 한때 수백 명이 수도하였다고 하며, 규모도 암자로서는 매우 큰 편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極樂殿)을 중심
으로 영산전·명부전(冥府殿)·문루(門樓)·산신각(山神閣)·선실(禪室)·원주실(院主室)·요사 등이 있다. 백흥암에는 보물 제790호 극락
전(極樂殿)과 보물 제486호 극락전 수미단(須彌壇)이 있다.
- 중암암
일명 돌구멍 절이라 불리는 중암암은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이 수련한 곳이다. 세 살 먹은 어린이가 흔들어도 흔들린다는 건들바위, 만년을 살았다는 만년송, 우리나라에서 제일 깊다는 해우소, 이런 것들이 유명하며 기암괴석이 빼어난 경치 역시 자랑이다. 장군수는 김유신이 열일곱 살 때 이곳에서 수련하면서 마셨다 하여 붙어진 이름으로 물맛이 매우 뛰어난 석간수이다.
- 태실봉
- 운부암
운부암은 신라 선덕여왕 11년(서기 711)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지세가 연꽃모양을 하고 있는 형국이라하여 연화지라 일컬어지는 명당이며 예적에는 팔공산 주인이 이곳에서 난다고 하였을 정도로 지기가 출중한 곳으로 알려졌다 한다. 성철스님이 수행하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도량 옆 뜰에는 의상대사가 창건 당시 짚고 온 지팡이를 땅에 꽂으니 즉시 살아나 푸른잎이 돗아 났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지금도 그나무가 살아 있다고 한다.
현재 운부암에는 신라말에 혜철국사가 인도에서 모셔왔다는 보물 제 514호로 지정된 청동 보살좌상을 비롯해 많은 성보가 소장되어 있으며 당우로는 원통전, 선원, 우이당, 보화루, 요사, 산신각, 독성각, 공양실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 은해사
신라 41대 헌덕왕이 즉위한 809년에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사인데 이 해안사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된다.
해안사 창건후 고려시대 1270년(원종 11년)에 홍진국사가 중창하였고, 1275년 충렬왕 때 원참스님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도 1485년 성종 16년에 죽청스님과 의찬스님이 묘봉암을 중창하였으나, 1545년 인종 원년에 큰 화재가 발생해 사찰이 전소되었다. 이듬해 1546년 명종 원년에 나라에서 하사한 보조금으로 천교화상이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이 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
은해사 내에는 보물 제 1270호인 은해사 괘불 탱화, 대웅전 아미타 삼존불, 후불탱화, 괘불, 신장탱화, 쇠북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다.
*** 은해사 홈피 자료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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