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4  천동탑.

 

  남산리 삼층석탑→ 천동골→ 이영재→ 삼화령→ 용장사지→ 설잠교→ 은적골→ 고위산→ 백운암→ 봉화대→ 신선암→ 칠불암→

염불사지→ 서출지.

 

 

남산리 삼층석탑(동) 

 동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이 넓게 2중으로 깔려있고, 그

위에 잘 다듬은 돌 여덟개를 한 단처럼 짜 맞추어 기단부(基壇部)를 이루고 있다. 탑신부(塔身部)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돌 하나로 만들

었으며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과 낙수면이 모전석탑처럼 똑같이 각각 5단으로 층을 이루고 있다. 
 

남산리 삼층석탑(서)

 서탑은 위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2단의 기단은 한 면을 둘로 나누어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새겼다. 팔부신중은 신

라중대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탑을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나타내려는 신앙의 한 표현이다. 탑신은 몸돌

과지붕돌이 각각 돌 하나로 되어 있고 각 층에 모서리기둥을 조각하였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5단이다. 
 

 

  천동골 천동탑.

 

 

  천동탑 조금 위의 절터.

 

 

 

  천동골.

 

  디딜방아.

  천동골 사지 조금 아래의 삶의 흔적.

 

 

 

 

 

 

  천동골에서 올라서면 만나지는 능선길. 금오산에서 고위산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이다.

 

  삼화령.

  삼화령은 "삼화수리"라고도 하는데  수리는 높은곳을 의미하고 세곳 수리는 금오봉과 고위봉.그리고 두봉우리와 삼각형 위치에 해당하 는 이봉우리를 합하여 삼화령이라 부른다. 선덕여왕 시절 생의 스님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나를 따라 오라"하며 남산 남쪽 골짜기로  데리고 가 풀을 묶어 놓으며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은 나를 파내어 시원한 곳에 있게 해주시오'라고 했다. 다음날 그곳에 가보았 더니 꿈속에서 처럼 풀을 묶어놓은곳이 있었다. 생의 스님을 땅속을 파 돌미륵을 얻어 삼화령 꼭대기에 모셔놓고 그자리에 절을 지어 공 양 하였다.

 

  순환도로에서 올려다 보이는 연화 대좌.

  경덕왕때 향가.안민가와 찬기 파랑가를 지은 충담스님이 해마다 삼월삼일.구월구일에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를 공양했다는 삼국사

기 기록이 있는데 바로 그부처님으로 짐작된다. 지금 미륵불은 없어지고 다만 지름이 2m가 넘는 연화 대좌만 남아있다. 순환도로 아래쪽

에 절터가 남아 있으니 그곳이 생의사터로 추정된다. 자세한 내력은 절터옆에 서있던 비석에 있으련만 비석은 사라지고 비석받침만이 역

사의 궁금증을 더해주고 있다.

 

  남산 순환로에서 용장골로 내려서는 초입에 만나지는 용장골 안내 입간판.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보물 제 186호)

  용장사는 매월당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쓰며 머물럿던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몇군데의 석축이 남아있어 절터였음을 짐작게 해줄뿐 이다. 용장사의 법당터보다 높은곳에 세워진 이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것으로 추정되며 자연암반을 다듬어 아랫기단으로 삼고 그위 에 면마다 기둥새김 셋이 있는 윗기단을 설치하여 산 전체를 기단으로 여기도록 고안되었다. 층마다 몸체돌 하나에 지붕돌 하나씩 3층으 로 쌓았는데 지붕돌과 몸돌을 별도의 석재로 사용 하였다. 1층 몸돌은 상당히 높은편이고 2층부터는 급격히 줄오들고있다. 지붕돌은 밑면 의 층급방침이 4단이고 처마는 직선을 이루다가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윗부분이 없어진 탑의 높이는 4.5m밖에 되지 않지만 하 늘에 맞닿은듯이 높게 보여 자연과의 조화미가 엿보인다. 바위위에 세운 석탑으로서 통일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우수작으로 꼽힌다.

 

  용장사지 마애여래 좌상(보물 제913호)

  이불상은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조각 되었는데 머리 둘레 의 두광과 몸둘레의 신광은 2중의 선으로 표현 하였다. 얼굴은 풍만하고 머리

에는 나선형 머리카락을 표현 하였으며 귀는 눈에서 목까지 상당히 길게 표현 하였다. 왼쪽 어깨 바깥부분에 "태평 2년8월"에 무엇인가

하였다는 내용인데 마멸이 심하다. 조각으로 보아 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불좌상( 보물 제 187호)

  이불상은 용장사터에 있는 미륵 장육상으로 추정되는 석불 좌상이다. 삼륜대좌 위에 모셔진 특이한 구조로 되어있으며 1932년 일본인들

에 의해 복원된것으로 머리 부분은 없어졌다. 손과 몸체 일부가 남아있으며 대좌에 비해서 불상은 작은편이다. 목에는 세줄의 뚜렷한 삼

도가 있고  어깨는 넓지 않고 다소 좁은 편이나 당당함을 잃지 않고 있으며 좌측 어깨에는 매듭지어진 가사끈이 사실적으로 조각 되어있

다. 이석불은 특이한 둥근형태의 대좌뿐 아니라 석불 자체의 사실적 표현이 작품의 격을 높여준다. 제작시기는 주각양식으로 보아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용장사터.

  금오봉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가장큰 봉우리를 주산으로 삼아 용장사터가 자리하고 있다.용장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고

신라.조선시대 유물들이 함께 출도되어 천년의 역사가 최근까지 이어진 유서 깊은 절이었음을 알수 있다.  지금 남아있는 거대한 돌축대

들은 이절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가를 말해주고 있다. 건물터로 추정되는 이곳에서 동북방향으로 바라보면 위쪽에 삼륜대좌불과 마애여래

좌상이 있고 그정상에는 삼층석탑이 우뚝하게 솟아 마치 도솔천을 연상하게 된다.

  용장사는 통일신라시대 대현스님이 법상종을 개창했던 절이며 조선시대 대학자이자 스님인 김시습이 머물던 곳이다. 김시습은 단종이

폐위되자 세상을 버리고 출가하여 이곳에 머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5편의 이야기를 짓고 금오산의 이름을 빌어 금오신화라

고 하였다.

 

  하산하면서 되돌아 올려다 보이는 용장사곡 삼층석탑.

 

  설잠교.

 

  설잠교.

  설잠은 김시습의 법호이다. 신라시대 용장사가 있었다 하여 용장골로 불러 왔다. 용장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조선초

(1465~1470)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면서 금오산실을 짓고 유금오록에 155수의 시를 남겼고 특히 우리나라에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

를 지은 곳이며 또 신승으로 있으면서 단종에 대한 변함없는 충절로 북향화(北向花)를 심었던 곳이다. 이 유서 깊은 용장골에 다리를 놓

으매 매월당 김시습을 기려 설잠교라 하였다.

 

  용장계곡.

 

  은적골 초입. 

 

  은적사지를 들른다는것이...

 

  길을 찾지 못하고 고위봉으로 곧바로 오르게 된다.

 

  고위산에서 천룡사터로 내려서다 만나지는 청룡바위.

 

 

 

  백운암. 

 

  봉화대.

 

 

  봉화대 능선에서 조망 되어지는 아주 멀리 희미한 신불산.

 

  봉화대 능선에서 건너다 보이는 토함산.

 

  봉화대 능선에서 내려다 보이는 칠불암.

 

  칠불암 갈림길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산마을과 남산들.

 

  칠불암 스님 기도터(신선암 마애불 위)에 눈이 소복하다.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 반가상( 보물 제199호)

  이불상은 칠불암 위의 곧바로 선 절벽 면에 새겨져 있어 구름위에 앉아있는듯이 보이는데 머리에 삼면 보관을 쓰고 있어 보살상임을 알

수있다. 얼굴은 풍만하고 오른손에는 꽃가지를 들고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올려서 설법하는 모양을 표현 하였다.팔각형으로 보이는 대좌

아래로 옷이 흘러내리고 오른쪽 다리는 아래로 내려놓은 자세이다. 발은 연꽃위에 있으며 이처럼 유화좌를 표현 하였고 그아래에 뭉게 뭉

게 피어나는 구름이 조각되어있다. 불상 높이는 1.4m이며 통일신라 시대인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인다.

 

  신선암에서 내려다 보이는 칠불암.

 

  칠불암 바로 아래 산기슭에 방치되어져 있는 탑재.

 

  가장 귀중한 날.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보물 제200호)

  이불상들은 경주 남산 봉화골의 정상 가까이 위치한 마애삼존불과 사방불이다. 삼존불 가운데에 있는 본존불은 앉아 있는 모습으로 미

소가 가득담긴 양감 있는 얼굴과 풍만하고 당당한 자세를 통해 자비로운 부처님의 힘을 드러내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는 옷은

몸에 그대로 밀착되어 굴곡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무릎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왼손은 배부분에 대고 있는 모습이

다. 사방불도 모두 연꽃이 핀자리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각기 방향에 따라 손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다. 보살상이 본존을 향하고 있는 것이

나 가슴이 길고 다리가 짧게 조각된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시대인 8세기경에 만들어진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이 붕괴 직전인데도 비구니 스님이 한분 거쳐를 하고 계신다. 

 

  無料. 

 

 

 

  염불사지 발굴 현장.

 

 

 

 

  남산동 삼층석탑(보물 제124호)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두 탑이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서출지(사적 제138호)

  경주 남산 기슭에 위치한 삼국시대 연못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신라 소지왕 10년(488)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

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줘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중과 공주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

에게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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