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8 경주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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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규.수연
명활산성 작성비(신라 551)
이비석은 1988년에 큰비가 내렸을때 석성의 북서쪽 성벽터에서 발견 되었다. 축성할때 비석을 세우는것은 공사의 책입한계를 분명히 하
고축성에 참여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한것으로 연대는 진흥왕12년(551) 으로 추정된다. 비문은 9행 148자의 헤서체로 새겼는데 신미년(辛
未年)의 간지와 서두,공사 총책임자와 실무자의 이름.공사의 담당 거리.위치.참가자의 수.기간.글쓴이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이비의 발견
으로 신라의 신분제와 역역(力役) 동원체제 새로운 직명등이 밝혀진 계기가 되었다.
남산 신성비(신라 591)
남산 신성비는 1934년 제1비가 발견된뒤 2000년도까지 모두 10기가 발견되어 이성을 쌓을때의 상황을 자세히 알수 있게 되었다.비문에는
591년 성의 축조당시 공사에 참가한 책입자의 관직과 이름.출신지.맡은 구역과 함께 3년안에 성이 무너지면 어떤벌도 달게 받고 다시 와
서 쌓겠다는 맹세가 기록되어 있다.이비석에 적힌 신해년 2월 26일의 간지는 삼국사기에 기록된성의 축조연대와 일치 하였다. 한집단이 1기의남산 신성비를 세웠을것으로 본다면 남산신성 둘레에는 20여기의 비석이 있었을 것이다.
김인문 묘비(통일신라 7세기말)
이비석은 1931년 경주 서악서원에서 발견된 비석의 하단부로 비석의 한쪽 면에는 3.3cm 크기로 네모지게 구획하고 그속에 해서체로 약
26줄 422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마멸된 부분이 많아 판독하기는 어려우나 대체적으로 태종 무열왕이 그에게 압독조 총관을 제수한 사
실 문무왕 6년(666)에 그가 당나라에서 벼슬을 제수받은 사실 백제를 항복 시키고 고구려와의 싸움에 참가했다는 내용인데 삼국사기와
일치하는 점이 많다.
문무왕릉비(통일신라 682)
비편은 조선 정조 20년(1976) 당시 경주 부윤이었던 홍양호가 발견한 두조각 가운데 하나이다. 그뒤 비편의소재를 몰랐으나 1961년 경주
시 동부동의 민가에서 우연히 발견 되었다. 이비는 원래 앞위면에 새겨져 있는데 신라에 대한 찬미.신라 김씨의 내력.태종무열와의 치적
문무왕의 사적및 백제 평정에 관한 내용이며 뒷면은 무령왕의 유언과 장례에 관한 내용이다. 글자는 앞쪽 20줄 294자.뒷쪽 20줄에 208자
이다.
흥덕 왕릉비(통일신라 860년)
흥덕왕릉의 주변에서 그동안 많은 수량의 조각들이 발견 되었다. 그가운데에는 흥덕이라고 새겨진 전액조각이 피장자를 확실히 알수있는
왕릉중의 하나이다. 비문은 해서체로서 앞면에는 흥덕왕의 핸적을 뒷면에는비믄을 세울 당시의근신들과 글쓴이가 새겨져 있어글쓴이가
임신 서기석(신라 612년 추정)
손바닥 너비에 높이 32cm의 자연석에 구획선 없이 다섯줄 74자가 새겨져 있는데 화랑으로 보이는 청년 두사람이 공부와 인격도야에 관한
내용이다. 명문중의 임신년은 확실히 알수 없으나 비문가운데 화랑도의 근본 정신과 통하는 총도를 실천할것을 다짐하는 내용으로 보아
화랑도가 크게 일어난 진흥왕 13년(552) 또는 진평왕 34년(612)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석탑 양화석.
창림사 삼층석탑 상륜부의 부재로 네귀퉁이에 가릉빈가.네면의 중앙에는 좌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그중 약사불이 가장 잘 남아 있다.
수연.두원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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