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1 시령봉표-만리성-감은사지-문무대왕릉-감포-양포 방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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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골마을에서 감재방향으로 30여분 계곡을 따라 오르면 시령봉표가 덩그러니 모습을 드러낸다.
시령봉표.
延慶墓香 炭山因 啓下 枾嶺封標. 辛卯十月 日 墓監 臣 金昌祜 監董 臣 李命喜
"연경의 묘에 쓸 향탄 즉 목탄을 생산하기 위한 산이므로 임금의 명을 방아 시령에 봉표를 세운다" 조선 순조 31년(1861.신묘년)
감재 마을 삶의 흔적들...
외동 모화리의 관문성.
관문성은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왜구를 막고자 쌓은것이다. 이성은 경주에서 동남쪽으로 약21km떨어진 외동읍 부근의 산에 축조 되어
있다. 치술령과 모화리 동편 사이에 길이 12km정도의 장성과 양남면 신대리의 산정상에 있는 둘레 약 1.8km 정도의 두성으로 구성 되어
있다. 성의 규모는 치술령에서 경상북도와 울산 광역시의 경계를 따라 신대리 동쪽 산까지 이른다. 지금은 대부분의 성벽이 허물어지고
성문터로 추측되는 석축이나 창고터.병사터등이 군데 군데 남아있다.
이곳은 김유신.김의원.김술종등이 뜻을 모아 세운 호국사찰 원원사가 있던곳이다.장대한 축대 중앙에 돌계단이 있고 그위에는 3층석탑이
동서로 있다. 이탑의 윗기단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겼고 1층 몸돌 둘레에는 사천왕상을 새긴것이 특이한데 8~9세기경에 세워진것으로 추
정 된다. 석등.돌 물통(石槽) 금당터.강당터등이 남아있으며 주변에 있는 부도 4기는 모두 고려시대 이후에 만든것이다.
원원사.
감은사지(사적 제31호)
문무왕(文武王)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역사를 시작했으나 중도에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해 682년(신문왕 2) 완성했다
고 한다. 절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鎭國寺)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호국충정에 감사해 감은사(感恩寺)로 고쳐
불렀다.
감은사지 삼층석탑(국보 제112호)
금당앞에 동서로 마주 보고 서있는 삼층석탑은 높이가 13.4m로 장대하다. 삼층석탑은 이중 기단위에 몸체돌을 올린 모습으로 처마밑은
받침이 5단이며 지붕위는 곡면을 이루어 통일 신라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인다.
감은사에는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의 대왕암에 장사 지낸뒤 용이 된 부왕이 드나들수 있도록 금당밑에 특이한 구조로 된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문무대왕 수중릉(사적 제158호)
양북면 봉길리 해변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바다에 있는 신라 제 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이다. 바위섬에 동서와 남북으로 십자 모양의 물길
을 깎은 다음, 가운데 작은 못처럼 파여서 항을 이루고 있으며, 이곳에 깊이 3.6m, 폭 2.85m, 두께 0.9m의 큰돌을 물속 2m 깊이에 놓아 그
밑에 유골을 모신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감포.
감포항.
양포항.
양포 방파제.
양포 등대.
양포 전경.
<인터넷 자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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