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7 경주 박물관.남산 기암곡.
지난 10일 찾아보려다가 헛걸음한 기암사지.
그가는길(들머리)을 자세하게 안내 받게 되는곳이
생각지도 않은 통일전 관광 안내소였다.
자상한 안내와 더불어
다음주에 포석정 안내소에 근무하게 되는데
올수있으면 오라고 하신다.
동행을 해주시겠다고...
안내소에 연락메모를 해놓고 다녀오면 된다고...
안내소 조그만 창을 사이로 안과 밖의
대화여서 얼굴도 똑바로 보지 못하지만
그창으로 보여지는 살포시 머금은 입가의 엷은 미소에
기암곡을 찾지 못했던 허망감이
이내 사라져버린다.
안내소를 떠나면서 인사를 나누는데
함께 시간을 할수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신다.
얼결에 대답도 못했었다.
기암골 기암사지로의 데이트 약속
기대로 부풀려지던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고...
지금껏 다녀오던 그런 남산 산행이 아니라
미모?의 전문 요원 안내까지 받을수 있는 보다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들이 될것만 같은 설레임으로 채비를 하는데
옆지기가 따라나선다.
육감인가?
차창에 몇방울씩 떨던 빗방울이
아니나 다를까...
상서정을 지나는데 소낙비가 된다.
씰데없는 궁상 말란듯...
차를 돌려 반월성을 지나 경주 박물관으로 향한다.
둬시간 두루 돌아보고나니
이슬비 안개비로 바뀌는듯 하더니 멎는다.
기암사지 삼층석탑?
잔잔한 미소?
아님 둘다?
미련을 가지고 포석정으로 향한다.
포석마을 전용? 주차장에 차를 놓고는 마을길을 걷는데
차에 지갑을 놓고왔다며 옆지기는 되돌아가고 혼자가 된다.
아니 이런 절호의 기회가...
ㅎㅎㅎ
그란디 어쩐일인지 맘따로 몸따로다.
포석정 관광안내소로 들어서지는것이 아니고
그냥 지나쳐 지는것 아닌가 !!!
남산 관광순환 임도 입구 바리케이트(쇠사슬)을 넘어 곧바로 우측으로
난 농로길로 접어든다. 지난번에 안내받은...
삼백여미터 가까이 오르면 탱자나무로 울타리가 둘려져있는 농장의 닫혀있는 엉성한 문을
중심으로 왼쪽 오른쪽 양쪽으로 길이 잡초에 묻혀있는데 어느길로 가야되는지???
안내소에 들릴걸 그랬나?
오른쪽으로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아서 걷는데 또 길이 갈린다.
어느길인지 알도리가 없다. 또 오른쪽 길로 방향을 잡는다. 조금 걷다보니
계곡이 아니고 야트막한 능선위로 올라서는데 아닌것 같다.
되돌아가야 맞다. 길을 잘못 들었을때는 알고 걸었던 길까지는 되돌아가는것이
백번 옳다. 가끔은 그렇게 안되어지지만...
알바까지나 한끝에 기암곡 삼층석탑을 만나게 된다.
후즐근하게 젖은 바지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혼자 오르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내려오는길에 안내소를 들른다.
일주일만의 반가운 재회.
비로소 대면을 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낯익은 수줍은듯한 미소
어디서 봤었더라???
아~~~
천년의 미소 !!!
- 경주 박물관
얼굴무늬 수막새.
수줍은듯 실짝 미소짓고있는 신라여인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수막새는 오릉의 북쪽 영묘사 터에서 발견 되었다. 부분적으로
파손 되었지만 반원통형의 수키와와 붙였던 흔적이 뒷면에 그대로 남아있어 실제로 지붕에 쓰여졌음을 알수있다고 한다.
빗살무늬 토기.
등잔모양 토기.
서수형 토기(瑞獸形土器)
이 유물은 경주시내 황남동(皇南洞) 고분군(古墳群) 내의 미추왕릉지구(味鄒王陵地區) C지구 3호분에서 출토되었다.
'瑞獸(서수)'는 상서러운 동물이라는 뜻이며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다. 둥근 그릇 받침 위에 거북의 모체(母體), 용
의 머리와 꼬리 등이 복합된 상상의 동물이다. 몸체는 속이 빈 용기로 등에는 주입구(注入口)가 있고 가슴부분에는 위로 치솟은
긴 대롱형의 출수구(出水口)가 있다. 몸체에는 영락(瓔珞)이 달려 있고 머리에서 꼬리까지 날카로운 이[齒]가 솟아 있다.
매우 특수한 형태의 이형토기(異形土器)로 주입구, 몸체, 출수구가 관통되어 액체를 담을 수 있는 용기의 역할도 가지고 있으나, 무덤 부장용의 明器이었으리라 추정된다.
천마총 금관(국보 188호)
천마총은 1973년 발굴되었고, 11,526점에 출토유물 중에서 전형적인 신라 금관이다. 발굴조사 당시 시신의 머리에 착용된 채 발견되었다. 금관 안에 쓰는 내관이나 관을 쓰는데 필요한 부가적인 물건들이 필요한대, 모두 널(관) 밖에서 다른 껴묻거리(부장품)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머리 위에 두르는 넓은 띠 앞면 위에는 山자형 모양이 3줄,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이 2줄로 있는 형태이다. 山자형은 4단을 이루며 끝은 모두 꽃봉오리 모양으로 되어있다. 금관 전체에는 원형 금판과 굽은 옥을 달아 장식하였고, 금실을 꼬아 늘어뜨리고 금판 장식을 촘촘히 연결하기도 하였다. 밑으로는 나뭇잎 모양의 늘어진 드리개(수식) 2가닥이 달려있다.
두녀니 할머니.
수연.한영 엄마.
기마인물형 토기(騎馬人物形土器).
무장을 한 신라의 무사가 말을 타고 있는, 작은 "테라코타" 작품이며, 풍취가 가득한 신라 무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토우장식장경호 土偶裝飾長頸壺 (국보 제195호)
토우장식장경호는 몸체가 둥글고 입 부분이 약간 벌어져 세워진 원저장경호(圓底長頸壺)로 목 부분에는 3줄, 몸체에는 2줄의 두드러진 띠를 돌리고, 같은 간격으로 밀집 사선을 그어 구획하였으며, 그 구획 안에 원권점문(圓圈點紋)을 찍어 장식하였다.
목과 어깨 부분에는 거북이ㆍ새ㆍ개구리ㆍ악기를 타는 사람ㆍ성교를 하고 있는 모습 등의 토우(土偶)를 부착시켰다.
회청색(灰靑色)의 경질도기(硬質陶器)로,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지구(味鄒王陵地區)의 계림로 16지구 30호분에서 파손된 채로 출토한 것을 수리하였으며 결손된 부분도 있다.
이처럼 임신한 여자가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과 성교를 하고 있는 남녀의 모습, 그리고 뱀이 개구리를 물고 있는 모습들은 출산이나 풍요, 그리고 벽사(?邪)를 기원하는 뜻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토우가 부착되어 있는 장경호는 드물며, 고분 출토의 확실한 예로서 고대 신라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보게 하는 작품이다. 신라 5∼6세기에 의식용의 기명(器皿)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고선사 삼층석탑(국보 제38호)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고선사의 옛 터에 세워져 있던 탑으로, 덕동댐 건설로 인해 절터가 물에 잠기게 되자
1975년에 지금의 자리인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놓은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성덕대왕신종( 국보 제29호)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
물관에서 정밀실측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
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
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
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
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 기암골
기암사지 가는길.
기암사지 삼층석탑.
기암사지 주변 딸기.
[인터넷 자료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