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9 진주 촉석루.남해 금산
이른아침 촉촉한 봄비를 맞으며
봄을 맞으러
남도를 향한다.
진양휴게소에서
목적지가 소매물도에서 진주로 바뀐다.
비가 끝이지 않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기가 좋지 않다는 기상예보가 있어서다.
진주에 도착하면서 비가 멎는데
하늘은 잔뜩 흐리다.
진주성.
임진란때 진주성 1차 싸움에서 3800여명의 군사로 10배에 가까운 왜적을 물리쳤던 김시민 장군.
2차 진주성싸움에 민.관.군 7만여명이 왜군12만여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이지만 끝내 패하게
되자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충절을 다한 논개의 얼과 전설이 스며있고 전해져오는 곳.
장군의 호령소리가 아직도 쩌렁쩌렁 울리는것만 같은 촉석루에 올라 논개가 투신했다는 의암을
내려다 본다.
유유히 흐르는 저 남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으련만...
의암(義岩)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끌어 안고 순국한 바위다. 이에 논개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영남사람들은 이 바위를 의암이라고 부르게 되었
으며, 인조7년 (1629년) 진주의 선비 정대륭은 이 바위 서쪽 면에 전서체로 "의암"이라는 글을 새겼고, 남쪽 면에는 한몽삼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확인해볼 방법이 없다..
의암사적비(義巖史蹟碑)
그바위 홀로서있고 그여인 우뚝 서있네
이바위 아닌들 그여인 어찌 죽을곳 찾았겠으며
이여인 아닌들 그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를 들었으리요
남강의 높은 꽃다운 그이름 만고에 전하리
지수문 앞에서...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해 촉석루 옆에 논개사당인 의가사가 마련되어 있다.
논개(論介)의 영정.
임진왜란 때의 의기(義妓) 논개는 전북 장수 출신으로 성은 주씨(朱氏)이다.
1593년(선조 26) 진주싸움에서 전사한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혹은 충청병사 황진(黃進)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등 여러 가지 주
장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1593년 6월 김천일(金千鎰)·최경회·황진·고종후(高從厚) 등 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이 이끄는 일본군에게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일본군이
진주성을 유린하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 것에 의분한 논개는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벌인 주연에 기녀로서 참석하
여 술에 만취한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촉석루.
촉석루는 강가에 돌이 쭝긋쭝긋 솟아 있어 그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일명 남장대(南將臺) 또는 장원루(壯元樓)라고 부르기도 하며, 임진왜
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10년 (1618년) 병사 남이흥(南以興?~1627)이 전보다 웅장한 건물로 중건하여 1948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
년 6.25동란으로 불탔다. 지금의 건물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중건하였으며 건물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
작지붕 형태로 되어있다.
호국종각.
촉석문.
조선시대의 화포. 진주대첩때 쓰였던 현자총통 이라고 한다.
공북문(拱北門)
북장대(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4호)
북장대는 조선중기에 건축된 정면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락집형 건물로서 내성과 외성에 포진한 성의 병력을 지휘하던 곳이다. 일명
진남루라 부르며 임진왜란당시 불타 없어진것을 1618년 병사 남이홍(?~1627)이 중건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964년에 중수한것이다.
진남루에 올라서...
진주성 포루.
진주성을 방어하는 포진지이다. 선조 40년(1607) 병사 김태허(?~1620)에 의해 진주성 내.외성에 12좌가 설치 되었는데 여지도서의 경상
우도 병마절도영 조에 의하면 내성의 포루는 3곳이니삼가.곤양.의령등 3읍의 소속이고 외성의 포루는 9곳이니 진주.초계.거창.사천.함양
남해.합천.단성등 8읍 소속이라고 하였다. 1939년부터 진주성을 복원하면서 상징적으로 1개소만 복원 하였다.
창렬사(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5호)
창렬사는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히 순국한 분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경상도 관찰사 정사호(1583~?)가 건립하여 선조 40년(1607)에 임금의 사액을 받았다.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 대승리를 거둔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추민사가 고종5년(1868)대원군의 사원 철폐령으로 헐어지게 되자 장군의 신위를 이곳으로 옮겨와 함께 모셨다. 지금 이사당에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맨윗자리에 모시고 창의사 김천일.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등 임진왜란때 순국한 39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호국사.
고려시대에 창건된것으로 전하는 이절은 원래의 이름은 내성사(內城寺)였다고 한다. 고려말기에 왜구를 막기위해 진주성을 고쳐쌓고 승병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것으로 생각되는 이절은 임진왜란 때는 僧軍의 근거지가 되었다.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임금께서 護國寺란 이름으로 재건 하였다고 전한다. 최근에 진주성을 정화 하면서 일주문 자리가 발견되어 새로 세웠으며 사찰의 건물들은 모두 근년에 새로 이룩된 것이다.
호국사 대웅전.
서장대(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6호)
진주성의 서문에 속하는 장군 지휘소이다. 여지도서에는 회룡루로 기록되어 규모는 작으나 남장대인 촉석루와 같은 다락집이었다고 전한다. 지금의 건물은 허물어진것을 1934년 서상필씨가 출자하여 새로 지은것으로 정면 3칸.측면 2칸의 옆에서 보면 팔자모양의 팔작지붕을 올린 목조 기와집이다.
국립진주 박물관.
선무공신 김시민 교서.
1592년 10월 엿새 간의 진주성전투를 승리로 이끈 진주목사 김시민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604년 전공의 내용, 김시민 및 그의 부모와 자
손들에게 내리는 포상의 내용을 적은 임금의 글이다.
김시민 선무공신교서는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가 일본의 고서화 경매시장에 출품되어 존재가 알려졌다. 작년 5월 국내 각 언
론은 이 공신교서에 대하여 보도하였고, 6월 말부터 MBC 느낌표 위대한 문화유산 74434와 문화연대-문화유산위원회, 진주 시민이 하나
가 되어 ‘우리 문화유산 되찾기’를 위한 국민 모금 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결과 이 공신교서를 2006년 7월 24일 일본에서 구입하여 7월
25일 국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업경대.
업경(業鏡)은 불교에서 죽은사람의 업을 보여준다는 거울이다. 이 업경대는 사찰의 법당을 꾸미는 장엄 장식도 겸하는데 전체적인 모습
이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연꽃을 싣고 항해하고 있는 형태이다. 맨위에는 동자와 누워있는 소를 그린 둥근면이 있어 업경을 상징한다.
남강.
국립 진주 박물관을 둘러보고는
삼천포 연륙교를 건너니 남해 상주 해수욕장이 눈앞에 있다.
해수욕장 인근 원일 민박집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는
이곳에서 짐을 풀까 하다가...
금산을 오른다.
남해 상주 해수욕장.
쌍홍문.
상사바위.
보리암.
흔들바위.
정상.
하산을 하고는
남해대교를 건너 순천으로...
낙안읍성에 도착하니
불도 없고 인적도 없다.
그렇게 늦은시각도 아닌데...
어디가서 묵고
어디가서 묵나?
낙풍루(樂豊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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