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몇번 말했지만 나는 전공(대학을 역사학과 졸업했다는 의미가 아님)이 역사여서 모든 사물이나 어떤 사안을 접할 때도 제일 먼저 그것의 역사를 본다. 역사부터 알아보고 그 외의 것을 더 알아볼 것인가 아닌가 결정한다. 역사를 보면 그것의 가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퍽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역사를 모르면서도 어떤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매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크리스챤들도 의외로 바이블이 기록되던 당시의 중동 역사에 무지하다. 공부할 생각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바이블이란 책의 기록에 자기 온 생과 사후의 생까지도 맡겨버린다. 나는 그 용기가 참 부럽다.
화두참선을 하는 스님들이 많지만 역시 선불교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는 화두를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공안이라는 개념이 언제 어느 절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수십년 동안 화두를 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 깡다구는 경탄할만 하나, 그 단순함과 우매함에도 존경을 보낼 수밖에 없다.
선종의 종조는 달마이고 선종에서 날조한 유래까지 소급하면 1대조사는 마하가섭이 된다. 그러나 그건 지어낸 전설이고 1대조사는 달마다. 그런데 이 달마는 사실 판단이 곤란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가 내린 선의 종지, 즉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대명제와 혈맥론같은 이론서의 내용이 매칭이 안된다는 것이다. 혈맥론은 나중에 따로 소개를 하겠지만 선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불교이론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혈맥론'을 달마의 저작이라고 보지 않으며 달마와 관계없는 이론이라고 본다.
달마로부터 달마가 쓰던 밥그릇과 옷(의발이라고 한다)을 물려받은 2대조사가 혜가이고, 그 다음이 승찬, 도산, 흥인으로 이어진다. 이게 5대조까지이고, 제6대조가 문제의 혜능이다. 이 혜능이야말로 사실상의 중국선불교의 개산조이고 실제적인 선의 창시자이다. 불교가 불교아닌 것으로 변질된 것은 혜능의 무식 때문이다. 혜능이 선을 창시한 것은 그가 무식해서 불경을 읽거나 공부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식과 지체가 높은 고승들과 겨루어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이 해독할 수 없는 문자보다 강력한 수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동원한 것이 마음이다. 글보다 마음이 우선이고 글을 보기보다 마음을 보아야 깨친다는 해괴한 주장의 힌트를 1대조사인 달마로부터 얻었다. 불립문자 교외별전이 그것이다. 혜능에게는 불립문자가 아니라 불가해독이었을 뿐이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선불교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육조단경의 기록에 의하면 혜능은 638년에 태어났다. 어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려서부터 편모슬하에 나무꾼으로 일하며 성장했다. 이십대에 접어들 때까지는 어떤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이었고 문자를 전혀 해독할 수 없는 문맹이었다.

여기서 1차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혜능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떤 건지 전혀 모르는 불맹이었다.

그런 혜능이 어느날 나무를 판 돈을 받아 나오는데 어떤 경읽는 소리를 듣고 크게 느낀 바 있어서 경을 읽은 사람에게 노자돈까지 얻어 그 길로 출가를 하게 된다. 그때 혜능이 한번 듣고 크게 마음이 열렸단 구절은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머무는 곳 없이 마음을 낸다)'이라는 구절이었다고 전한다.
경읽던 사람이 알려준 황매산의 동선사라는 절을 찾아간 혜능은 달마의 5대째 후계자인 홍인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혜능은 당시 중국사람들이 오랑캐가 사는 미개지역이라고 여기던 영남사람인데다가 일자무식의 나무꾼이었기 때문에 출가해서 승려가 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홍인이 비록 달마의 후계이긴 해도 당시의 신분사회를 파괴하는 파격적인 결정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홍인은 혜능을 부엌에 두고 밥짓는 일을 시켰다. 즉 승려가 된 것이 아니라 행자(절 심부름꾼)가 된 것이다.

홍인이 혜능을 행자로라도 받아들인 이유는 비범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비범이라는 것은 학식과는 관계없이 가능할 수 있다는 사례를 보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오다 노부나가가 시장통에서 처음 보았을때 노부나가는 히데요시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자기 신발을 간추리는 일을 맡겼다. 히데요시는 왕무식이라 병서를 읽은 적이 없었다. 손자병법은 고사하고 무라까미 전술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역사상 손꼽는 군사의 대가들에 비추어 손색이 없는 전쟁의 천재였다. 용병과 용인의 달인이었다. 또 하나 이런 비범의 예를 든다면 채키 찬이 있다. 성룡이 그 사람이다. 성룡은 글자를 배우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곡마단에서 컸다. 무술은 배웠지만 글은 배우지 못해서 까막눈이고 수표의 금액도 읽을 줄 몰랐다. 영화의 대본을 읽지 못해서 항상 대본 읽어주는 사람이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는 무술 뿐만이 아니라 영화의 천재이다. 그가 찍은 영화의 액션씬들은 모두 그의 상상력의 산물이다. 많은 영화의 줄거리와 소재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어떤 연극영화과 교수도 성룡 앞에서 큰소리 칠 수 없다

이와 같이 무식한 천재는 역사에 더러 있는 바이다. 그 중에서도 혜능은 탁월한 천재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배우지 못한 천재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또한 사실이기도 하다.


 혜능이 동선사에 와서 하루종일 한 일은 장작 패고, 방아찧고, 군불 때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혜능이 동선사에서 뭘 배웠을까? 만약에 혜능이 글을 알았다면 스님들 몰래 숨어서 불경을 읽으면서 공부했다는 말도 성립될 수 있다. 행자가 그리 한가한 몸이라면 법당 뒤에 숨어서 법문을 엿듣고 깨칠 수도 있다. 그러나 행자는 절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다. 동선사에 와서 혜능이 한 일은 그야말로 종질 뿐이다. 공부는 무슨 개뿔이다.

여기서 두번째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혜능은 절에 들어오기 전에도 불교를 몰랐지만 절에 행자로 들어온 후에도 불교를 알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 혜능이 어떻게 홍인의 눈에 들어 그의 의발을 전수받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야성을 보게 된다. 오다 노부나가의 신발담당이던 히데요시가 일약 사무라이로 인정받게 된 데는 유명한 일야성 사건이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이웃한 미노국과 싸울 때 두 나라 사이에는 강이 하나 있었다. 이 강을 건느면 평야지대라서 군대가 의지할 방벽이 없었다. 지리적인 이점이 없다면 군사의 수가 많아야 하는데 노부나가가 모을 수 있는 군대의 수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노부나가는 수하 장수들에게 그 강 건너편에 성을 쌓게 했다. 그런데 내노라하는 노부나가의 수하 부장들이 누구도 성을 쌓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노부나가군이 성를 쌓는 것을 미노군이 두고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성이 되어갈만 하면 쳐들어와서 뭉개버렸다. 이때 이 성을 자기한테 맡겨주면 쌓아보이겠다고 손들고 나선 것이 히데요시다. 평소같으면 그런 건방진 수작은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나는 것이 관례이지만 그때는 노부나가가 워낙 다급할 때였고, 하나같이 실패한 막하 장수들은 히데요시에게 화를 낼 입장이 아니었다. 히데요시는 강의 상류에 인부들을 데리고 숨어들어가 무수한 나무를 벤 후에 뗏목으로 엮어서 어느날 밤에 거세게 비가 오는 것을 이용해서 성을 쌓아야 하는 지점까지 타고내려왔다. 그리고는 그 목재를 이용해서 하룻밤 사이에 목성을 쌓아버린 것이었다. 나무로 둘러친 방책이었는데 미노군은 이 목책을 공격했지만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나게 된다. 이 목성은 곧 견고한 돌성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성이 미노 공략의 발판이 되어 마침내 노부나가는 사이또 도산이 세운 미노국을 병합하고 천하통일의 기초를 쌓게 된다.이때의 공로로 히데요시는 일약 아시가루에서 정식 사무라이로 승격하게 되는 것이다.
일자무식에 천한 신분의 사람이 완고한 신분사회, 학식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이와 같은 일대사건이 필요하다. 혜능에게도 이런 사건이 일어난다.


 혜능은 한가지 사건으로 선종의 후계자로 떠오르게 된다.
그 일은 혜능이 동선사에 행자로 들어온 지 팔개월쯤 지났을 때 일어났다. 5대조사인 홍인이 갑자기 양위의 뜻을 밝힌 것이다. 조선의 3대임금인 태종은 심심하면 한번씩 양위쑈를 벌였다. 교단이던 조정이던 최고위자가 생전에 양위의 의사를 밝히는 것은 숨은 목적이 있는 행위이다. 태종의 경우 죽여야 될 놈을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었고, 홍인의 경우 땡중들을 긴장시키자는 목적이었다. 그것은 달마 이후 불과 5대째에 이미 불교가 얼마나 개판으로 변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동선사는 중국불교의 교조가 대빵으로 있는 절이다. 그런데 그 절의 분위기가 당췌 공부하고는 거리가 멀었다는 얘기다. 묵조선의 선풍에 물들면서 이미 절에는 공부하는 분위기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전부 눈감고 탱자탱자하는 놈들만 득시글 거렸다. 이것을 보다 못한 홍인이 예의 양위쑈를 벌인 것이다. '누구던 각자 수행하여 느낀 바를 게송을 지어라. 그것을 보고 가장 뛰어난 게송을 지은 자에게 내 의발을 물려주리라'하고 공지문을 올렸다. 홈페이지에 올린 것이 아니라 법당 입구에 방을 써 붙였다.
중국불교의 제6대 제자가 누가 되느냐 하는 숨막히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었다. 당연히 피말리는 경쟁체제로 돌입되어야 했다. 그러나 달마독에 물든 땡중들은 그 상황에서도 탱자탱자였다. 나한테는 인연없는 물건. 나는 해봐야 안되는 일. 이미 동선사의 중들은 경쟁의 의지조차 없는 죽은 넘들이었다. 그때 이미 중국불교는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때 게송을 지어 응모한 사람은 동선사 제일의 수재로 자타가 공인하던 신수라는 스님이었다. 공식적인 동선사의 제2인자로서 교수사(敎授師)의 직책에 있던 사람이었다. 훗날 측천무후에게 등용되어 출세간에 나갔다가 비참한 말로를 보게되는데 그건 먼 훗날의 일이다.
아뭏든 이 신수가 그래도 동선사에서는 제일 잘 나가는 사람이라 모두들 보나마나 신수가 후계자가 될 것으로 생각했고. 신수와 경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기록에는 전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신수라는 사람이 훗날의 출세와 몰락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 지혜로운 사람도 아니었고, 그다지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비범이 아니라 범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정도의 인물에 전부 주눅이 들고 양보를 해서 누구도 자기의 게송을 올릴 생각을 못했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당시 동선사의 수준이었다. 중국선종의 본당이라 할 것 같으면 오늘날로 치면 하바드 대학 정도의 수준을 유지해야만 하는데 달마로부터 겨우 5대째밖에 안된 싯점에서 동선사는 한국의 무허가 신학대학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 대학에서 최고 우수학생이 창원대학교 꼴지보다 못한 정도였다.
이 동선사 최고의 수재가 얼마나 한심했느냐 하면 지가 겨우 지어낸 게송을 스승인 홍인한테 내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누가 썼다는 이름조차 쓰지 못하고 도둑놈이 도둑질하다가 똥사고 나오듯이 한밤중에 살슴살금 까치발로 법당에 다가가서 게송을 붙이고 도망쳐 나온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 홍인이 법당 밖을 나가보니 응모게송이 한장 떡 붙어있어서 다가가 읽어보니 언넘이 쓴 건지 이름도 없는게라. 그래서 이게 누구의 작품이뇨? 하고 물으니 그제서야 기들어가는 목소리로 '접니다요 스님'하고 쭈빗거리는 화상이 있었어. 보니 신수였다 이말이지.
그때 신수가 제출한 답안지를 한번 보자.


 身是菩提樹(신시보제수) : 몸은 보리수요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 마음은 거울이로다.
時時勤拂拭(시시검불식) : 틈틈이 털고 닦아서
勿使惹塵埃(물사야진애) : 먼지와 때 묻지 않게 하리라.

이것이 동선사 제1의 수재라는 신수가 응모한 게송이다. 한 눈에 범작임을 알 수 있다. 지극히 평범한 수준의 글짓기다. 사실은 우리집 둘째 현정이한테 주제를 수신이나 수행으로 주고 글짓기 시키면 저 정도 나온다.
그런데 홍인이 이 게송을 읽고는 누구의 작품인지 묻지도 않고(척 보고 신수작임을 알았다고 기록에는 전한다) '썩 좋은 게송이니 누구던지 이 게송을 읊으면서 수행하면 득도하리라'하고 말했다 한다.
그러자 동선사의 모든 땡중들이 머리(이때 머리의 동의어는 장식품이다)를 주억거리면서 '그럼 그렇지, 신수스님의 게송이니 당연 조사님의 맘에 들 수 밖에 없지'하고는 흩어졌다. 당근 다음날부터 동선사 인근에는 신수의 게송이 훗날 해동성국에 유행했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맞먹는 대히트를 쳤다는 것이다. 게나 고동이나 개나 소나 중이나 스님이나 전부 이 게송을 흥얼거리고 다녔다는 것이다.
누구도 이 게송을 지은 신용필이 그날 밤에 스승한테 불려가서 혼이 났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신수의 체면을 생각해서라고 육조단경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동선사의 수준이 들키는 것이 쪽팔렸다는 것이 이유라고 본다. 어쨌건 홍인은 신수를 조용히 불러서 다시 한번 응시할 기회를 주었다. "제발 좀 그럴듯한 걸로 다시 써와라. 너만 믿는다." 이런 주문이었다. 신수는 고개를 푹 떨구고 돌아와서 그날부터 지 방에 처박혔는데.
 

 절 안의 사람들이 전부 신용필 노래를 부르고 댕기니까 당근 부엌떼기 혜능의 귀에도 이 노래가 들렸다. 하루는 혜능이 신수의 목욕탕가를 부르는 스님을 붙들고 '스님요, 그 노래가 누구 노랜교?'하고 물었겠다. 그러자 스님이 '와, 니같은 오랑캐도 이런 노래 좋은 줄은 아나? 이게 그 유명한 톱스타 신용필이 부른 목욕탕가 아니냐. 우리모두 때를 벗기자. 반짝반짝 광이 나도록 때를 벗기자 이런 노랜데 어떻노, 노래 지기제?'
'지기기는 개뿔' 혜능이 들어봉께 영 파인 노래였다. 해동성국 방방곡곡 울려퍼졌던 새마을가보다 영양가가 없다고 생각됐다. 문제는 그거였다. 오랑캐 땅에서 글자도 배우지 못한 행자의 눈에 동선사 중들이 하나같이 '조오또 아인 놈들'로 보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비록 혜능이 천재였다 해도 동선사의 스님들이 스님들답고 그들의 실력이 선종의 본당다운 것이었다면 혜능이 감히 치받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동선사에 온지 팔개월만에 동선사 중들은 혜능의 눈에 '조오또 아닌 놈들'로 비치고 말았던 것이다.
일자무식의 오랑캐 행자눈에 그렇게 우습게 보이고 만만하게 보였다면 그 동선사의 수준은 그야말로 알쪼 아니겠나 이말이다.
이미 동선사 자체가 우스워진 혜능은 신수의 게송을 들은 후부터 갑자기 걸음걸이가 이상해졌다. 배속에 있는 간이라는 놈이 너무 부어올라서 걷기가 힘들어진 것이었다.
불교? 개뿔이라 해라. 교수사? 이건 토끼뿔. 스님들, 이것들은 조오또 아닌 놈들. 혜능이 이렇게 되는데는 긴 세월이 필요치 않았다. 동선사 생활 8개월로 충분했다.


 아시가루 신분에 지나지 않았던 히데요시가 기라성같은 오다가의 무장들 앞에서 자기가 성을 쌓아보겠다고 나섰다면  한가지는 분명하다. 성을 쌓을 수 있다는 자신감은 둘째 문제이고, 그 시점에서 이미 히데요시의 눈에 오다가의 그 많은 무장들이 병신들로 보였다는 것이다. 히데요시는 속으로 "그것도 못하냐, 빙신들. 내가 하는 걸 함 봐바." 이런 자신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왕당파의 본거지인 툴롱 항구를 공격하는 지휘관으로 자기를 보내달라고 자청했을 때 그의 속마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까짓 항구 하나를 떨어뜨리지 못하는 프랑스 혁명정부의 쟁쟁한 장군들이 얼빠진 인형들 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사람을 우습게 본다는 것. 이것이 천재들의 공통점이다. 천재들이 범인들을 보는 심정은 거의 같다. 그 심리상태를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은 한국밖에 없다 "조오또 아닌 놈들"
혜능도 틀림없는 천재 중의 하나였으므로 동선사에 오자마자 스님들의 실력과 정체를 꿰뚫어볼 수 있었다. 그리고는 경멸했다. 그것이 바로 택도 없는 호승심을 불러 일으켰다. 일자무식의 오랑캐 행자가 동선사의 제2인자인 천재스님 신수를 상대해서 조져부겠다는 생각을 하리라고 누가 믿었겠는가? 그러나 이미 동선사 스님들 전부를 밥값도 못하는 놈들로 단정지은 혜능은 신수의 게송을 자기가 밟아버리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정도까지는 글자를 몰라도 천재성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히데요시가 병법을 전혀 배우지 않고도 일야성을 쌓은 것과 같은 이치다. 천재성, 그것은 무모한 자신감을 동반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설사 행자이고 오랑캐출신에 일자무식의 부엌떼기였다고 해도 8개월이나 나무를 하고 방아를 찧어서 스님들 공양을 해올리다 보면 친한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리고 혜능같은 천재성 인물은 반드시 인간적인 매력이라는 것을 갖고 태어난다. 매력은 모든 천재들의 공통점 중 두번째이다. 그래서 그 비범함을 홍인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같이 느끼게 된다. 다만 쥐뿔도 모르는 땡중들 대다수는 교만이라기보다 어리석고 철이 없어서 그저 오랑캐거니 하고 질시하고 천대하면서 우쭐거리는 꼴갑을 떤다. 인간 세상은 구중궁궐이나 심산사찰이나 대현학계나 다를 바 없다.
아마도 성이 장씨인 어떤 스님이 혜능과 다소 친했던 모양이다. 혜능의 부탁을 듣고 혜능이 지었다는 게송을 글로 써준 것이다. 육조단경에는 그 과정이 제법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반은 픽션에 가까운 소리고, 어쨌거나 요지는 혜능이 이틀 동안 신수의 게송을 뭉개버릴 게송을 하나 지어가지고는 글자를 모르니까 한 스님에게 부탁해서 그것을 글로 옮겨 적었다는 사실이다. 엄청난 반란이고, 당돌한 기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한가지 결론이 나온다 : 깨달은 결과물이라고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게송이 깨달음하고는 무관한 것이라는 결론이다. 왜냐하면 혜능은 이 게송을 지어내기 전에 어떤 공부도 한 바 없으며, 설법도 들은 바 없고, 참선은 더더욱 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동선사에 와서 귀동냥 법문도 듣지 못햇다는 증거는 육조단경에 기록된 혜능의 말에서도 잘 나타난다. 혜능은 동자승에게 자기는 홍인이 계시는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어서 신수의 게송이 붙어있는 장소가 어딘지도 모르니 그곳을 좀 가르쳐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혜능의 게송은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불교하고는 관계없는 것이며, 달마의 참선(묵조선)의 산물도 아니다.
혜능의 게송을 한번 보자.


 내가 결론이라고 따로 정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으면 해보라는 의미다. 단산님 외에는 해낼 사람이 없어 보인다.

 

菩提本無樹(보제본무수) : 보리에는 나무가 없으며
明鏡亦無臺(명경역무대) : 거울 또한 대가 없도다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 :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 : 어느 곳에 먼지와 때가 앉으랴.

이것이 혜능이 짓고 장씨성 가진 스님이 글로 옮겨준 문제의 게송이다. 이것을 얼핏 보면 신수의 게송보다 더 깊이있고 더 한경지 위에 있는 각성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표절작이다. 다시 말하면 혜능의 오리지널 창작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4줄의 게송이 모두 신수의 그것을 뒤집은 내용이다. 그러니까 신수가 흑하면 백, 선하면 후로 글자를 바꾼 내용이다. 신수의 게송이 없는 백지에서 이 정도 게송이 나왔다면 선사의 자격이 있다. 하물며 일자무식 행자랴. 그런데 남이 써놓은 시를 뒤집어쓰는 건 일종의 유희고 장난이다. 김시습이 압구정에 써붙여논 한명회의 시를 정반대로 뒤집어 야유한 것이 이와 비슷하다. 김시습의 조롱시가 아주 통쾌하지만 그것은 한명회의 시라는 원판이 있기에 나온 것이다. 우리는 유명 시인의 시나 경구를 비틀어서 얼마던지 그럴듯한 새로운 경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런 일에 필요한 건 창작력이 아니라 장난끼요 재치다.
혜능이 동선사에 와서 8개월 행자생활을 하는 동안에 많은 스님들의 토론이나 방담을 듣게 되었을 것이다. 부엌일이라고 행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양주보살이나 동자승, 계급이 낮은 스님들도 같이 한다. 8개월 동안 두서없이 줏어들은 불교의 이야기만으로 '본래무일물' 정도는 나올 수 있다. 그리고 게송이라는 것이 별달리 깨닫지 못해도 10만원의 상금을 위한 글짓기의 노력으로도 대개 나올 수 있는 소리들이다. 신수의 것이나 혜능의 것이나 찬찬히 읽어보라. 별시리 정각씩이나 요구되는 소리가 아니고, 깨달음씩이나 얻어야 할 수 있는 소리도 아니다. 혜능의 이런 게송 정도는 구르미가 맘만 먹으면 하루밤에 열개도 써낸다. 이건 자랑도 교만도 아니고 사실이 그렇다. 벗님들도 마찬가지다. 하루밤만 긍끙거리고 볼펜 돌리면 저 정도 그럴듯한 소리 네줄은 써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저 게송을 보고 선종의 제5대조사이신 홍인이 끔뻑 넘어가 버렸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뻑 간 거다.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는 원효의 학문과 사유의 깊이를 그대로 보여준다. 누구도 원효의 글과 생각을 흉내내거나 모방할 수 없다. 그것을 비판한 사람도 한국불교 천년에 한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선불교의 게송이나 오도송, 그리고 선문답을 가지고는 아무 것도 판단할 수 없다. 읽는 사람이 그럴듯하다고 인정을 해주면 뭔가 가치가 숨어있는듯 아닌듯 헷갈리지만 냉정한 눈으로 보면 시도 아니고, 말도 아니고, 노래도 아니고 그냥 말장난이다. 이런 게송 하나로 수행자의 학문과 사유의 세계, 그 복잡한 내면을 짐작한다는 것은 궁예의 관심법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역대 조사들이 그런 관심법의 신통력을 가졌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게송으로 수행의 정도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가장 좋은 사례가 바로 선의 창시자라는 혜능의 등단이다.
이 사건은 마치 시를 전혀 배우지 않고, 습작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반장난삼아 긁적거린 글을 투고했는데, 이게 신춘문예에 입상을 한 거나 마찬가지다. 물론 여러 심사위원이 심사하는 신춘문예라면 이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세상이란 한탕주의, 벼락치기가 통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만약에 신춘문예의 시부문 심사위원이 딱 한사람이라면 이런 황당한 일이 생길 수 있다. 유치원 얼라가 맘대로 늘어놓은 글줄이라도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대단한 영감을 그린 시로 보이기도 하는 때문이다. 대부분의 선문답은 꿈보다 해몽이다. 그러나 시나 운문이 아니라 산문이거나 특히 논문의 심사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천재의 화려한 등장이라는 사건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선사는 절마다 넘치나게 많지만 용수나 원효는 백년에 한사람이 나온다. 그것도 제대로 된 학풍이 유지될 경우에 그렇다.'
혜능의 게송이 벽에 붙자, 그것을 읽은 동선사의 스님들과 신도들이 쇼크를 받았다. 자기들이 보기에도 혜능의 무때가가 신수의 목욕탕가보다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 정도 차원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가는 크게 논란거리가 못된다. 척보면 삼척이고 탁치면 억이다. 더군다나 일자무식의 행자가 게송을 써붙였다는 자체가 화제거리였다. 한 동자승이 홍인한테 쪼르르 달려와서 일러바쳤다. "스님요 스님요, 좀 나와보이소, 혜능행자가 게송을 붙여 놨심더"
홍인은 혜능의 게송을 쓰윽 보고는 "원 익지 않은 풋사과 같고나"하면서 신고있던 신발을 벗어 쓰윽 문질러버렸다.
보고있던 땡중들이 그제서야 "그러면 그렇지 행자 따위가 게송이 당키나 한 소리냐"하면서 돌아갔다. 이렇게 혜능의 무때가는 빛을 못보고 사라져갈 운명이었다. 한때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히트를 못하고 죽어있었던 것처럼.


구름이 볼때 불교 3천년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사건이 이때 일어난다.
그 다음날 혜능이 방아를 찧고 있는데 홍인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는 혜능한테 물었다. "방아는 다 찧었느뇨?' 하자 혜능이 대답하기를 "네, 방아는 다 찧었습니다만 아직 키질을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라고 했다.
이 대답을 들은 홍인은 주장자로 땅을 세번 치고는 등을 돌려 가버렸다. 주장자로 세번 땅을 친 것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노라는 뜻이며 통하였노라는 의사표시다.
그날 밤 배불역조의 대사건이 벌어진다. 혜능은 남몰래 홍인을 찾아갔다. 육조단경에는 그 시간이 삼경이었다고 전한다. 삼경은 절의 스님들이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다. 인류역사상 최대의 범죄는 이렇듯이 모두가 잠든 시간에 벌어졌다. 홍인은 일자무식한 행자 혜능을 앉혀놓고 금강경을 설했다고 한다.
희한하게도 이때 홍인이 혜능에게 들려준 구절이 또 그노무 '응무소주 이생기심'이었다는 거다. 우연치고는 기막힌 우연이다. 혜능이 고향을 떠날 때 만난 사람이 들려준 것도 이 구절이요, 홍인이 처음으로 혜능에게 설해준 것도 이 구절이란다. 육조단경을 보면 팔만대장경이 오직 이 한구절 뿐인 것 같다. 이게 다 훗날 지어낸 이야기라는 증거다. 팔만대장경을 통털어서 혜능의 선이라는 삿된 짓에 근거로 삼을 만한 구절이 이것 뿐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혜능은 마르고 닳도록 금강경의 이 구절을 지가 만든 야리꾸리한 이단종교의 방패막이로 삼았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
범죄의 밤은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그 직전까지만 해도 자기 이름조차 쓸줄 몰랐던 불학무식한 사람이 야반 삼경이 늦은 시간에 스승과 마주앉아 생전 처음으로 불과 서너 시간 금강경 몇구절을 듣고는 홀연히 깨달음을 얻어 일체의 의혹이 사라진 대광명에 눈을 떴다고 육조단경은 전하고 있다.
글자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깨쳐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홍인이 그 짧은 시간에 글자를 가르쳤을 리는 없다. 그냥 금강경의 이치를 말로 들려주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홍인은 서너 시간의 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의 정수를 완전무식한 나무꾼한테 들려주어서 대오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것이 된다. 이 말은 홍인이 석가세존보다 수백수천배 더 설법의 명인이요 탁월한 교사라는 말이거나, 듣는 혜능이 석가세존보다 수천배 근기가 뛰어난 전전생의 활부처라는 말이거나, 불교라는 것이 원래 서너시간 이상 떠들 것도 없고 떠들 이유도 없는 날맹탕이거나의 셋중의 하나가 된다.
그리고 동시에 홍인이 금강경을 서너시간 말로 가르쳐서 혜능을 깨우쳤다면 결국 불교의 진리는 말로써 전달이 가능하고 언어로써만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날 밤에 홍인과 혜능이 서로 눈감고 마주앉아서 화두를 물고 참선을 한 것도 아니고 무림의 고수들처럼 손바닥을 마주 붙이고 진기를 불어넣어준 것도 아니고 홍인이 마법을 건 것도 아니다. 오직 홍인은 세치 혓바닥을 열심히 놀려서 금강경을 설해주었을 뿐이다.
선의 창시자인 혜능이 그 스승으로부터 진리를 전수받은 방법은 바로 언어에 의해서였다. 다른 그 어떤 방법도 아니었다. 둘이 워낙 타고난 천재들이어서 소요된 시간은 극히 짧았을 지라도 그 방법은 틀림없는 말에 의한 설명이었다.
만약 그날 밤에 홍인이 혜능에게 들려준 법문의 내용이 전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불교의 진수일 것이고, 깨달음의 지름길일 것이다.
그러나 선불교는 깨달음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고 언어를 여읜 경지에 있다고 가르친다. 홍인의 설법을 듣고 깨친 혜능은 그럼 허깨빈가? 혜능이 대오했다는 그날밤의 사건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희대의 범죄는 달이 지도록 계속되었다.


 홍인의 설법을 듣고 크게 깨친 혜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마음이 본래 깨끗하여 더럽힘이 없는 것이며 마음이 나고 죽고 죽음을 분별할 뿐 오고 감이 없습니다. 마음이 열리면 일체 만법이 열리고, 만법이 하나이며 하나가 만법임을 알았습니다."
혜능이 깨친 이 소리를 듣고 홍인이 크게 기뻐하사 가로되, "그대는 이제 하늘과 땅의 스승이요, 부처님이로다." 하셨으니 경배할지어다. 할렐루야~~~~
개뿔.
이 두 황당한 스승과 제자는 그날 밤새도록 오직 한가지만 했다. 둘이서 얘기를 한 것이다. 말로 진리를 전해주었고 그것을 받아 깨친 바를 역시 말로 답하였다. 그리고 그 답이 맞다는 확인과 스승의 기쁨을 역시 말로써 했다. 이 두사람은 오직 언어로서만이 모든 것을 다했다. 그런데도 이 날 이후에 혜능은 모든 출가수행자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떠드는 자는 알지 못하나니 입닫고 눈감을지어다.
저거 둘은 진리를 주고받고 법통을 승계하면서 참선이라는 것은 단 한순간도 하지 않았다. 참선 따위가 끼여들 여지가 없었다.
어디 멀리서 닭우는 소리가 들려올 즈음에 드디어 5조 홍인의 입에서 불교를 붕괴시키는 최후의 한마디가 나오고 만다.
"이제 그대를 6조로 삼나니 스스로 잘 지켜 널리 중생의 이익을 위해 법을 펴도록 해라."
불교 역사 천년에 드디어 정법은 무너지고 말법의 세상이 도래하는 순간이었다. 팔만대장경의 위대한 학문이 지 이름도 쓸줄 모르고 경이라고는 읽어본 적도 없는 이교도의 촌놈한테 겁탈당하고 능욕당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불교의 역사를 공부하다가 이 대목에서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보석이 진흙탕에 떨어지는 순간이요, 보살이 도적에게 업혀가는 순간이었다.
이 날로부터 불교는 사라지고 선불교라는 말법이 세상에 나타났다. 혜능은 건업의 500개 사찰을 불태운 후경보다 더 극악한 불적이다. 이날밤에 홍인이 혜능에게 법통을 넘겨준 것은 불교 몰락의 시작이었다. 정도전이 멸한 것은 불교가 아니라 이 타락한 말법이었다.


 이쯤에서 다시 결론을 정리하자.
혜능은 선종의 제6대조로서 법통을 이어받는 순간까지 선이 뭔지도 몰랐으며 선이라는 것을 단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혜능은 선종의 법통을 이어받는 바로 그날밤 이전에는 불경 한페이지 읽어본 적이 없었고, 법문 한번 들어본 적이 없었다.
혜능이 법통을 이어받아 선종의 6대조가 되기 전에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 직전의 서너시간 홍인에게서 들은 금강경이 전부였다.
혜능은 불교를 공부하는데 필수불가결한 능력인 문자해독능력이 없었고 수계를 받지도 못했다. 그저 행자였을 따름이다.
이상의 결론이 말해주는 것은 혜능이 비록 천재였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어느 모로 보아도 불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불교를 알지 못한 사람이었다. 불교는 커녕 달마교도 몰랐고, 참선을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홍인이 혜능에게 의발을 넘겨줌으로써 중국불교는 이교도(불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통채로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홍인은 그런 혜능에게 후계를 시켰을까 하는 점이다. 홍인은 왜 그랬을까? 왜?

 


 혜능이 불학무식의 나무꾼이었다면 2대부처로 숭앙받는 용수는 팔난봉이었다. 심지어는 왕의 궁녀까지 건드려서 수배령이 내리기도 한 사람이다. 그러나 용수는 그후 한 도관에 처박혀서 팔만대장경의 숲을 모두 헤쳐나오게 된다. 부처님의 남기신 말씀들을 말 그대로 통채로 삶아먹은 사람이다. 이때 용수가 먹은 지식탕의 이름이 연기다. 용수는 이것을 먹고 중도를 뱉었다. 중도는 연기의 해석론이요 보충설명이다. 석가세존의 가르침과 한치의 어긋남도 없다.
그러나 혜능은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하지 못했다. 글자를 모르니 아예 공부 자체가 불가능했다. 글자는 나이든 후에는 깨치지 못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성룡이 스타가 된 후에 글자를 모르는 것이 한이 맺혀서 거금을 주고 과외선생을 모셨다. 가갸거겨오요우유... 결과는 실패였다. 성룡이 끝내 하지 못한 것이 문자의 해독이다. 그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어떤 천재도 나이 든 후에 글자를 깨칠 수는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결국 까막눈인 채로 죽었다. 동학의 2대교주 최시형도 죽을 때까지 문맹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때문에 불교를 모르는 상태에서 혜능이 만들어낸 선은 불교가 아닌 무엇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다. 불교를 전혀 모르는 혜능이 어떻게 불교와 일치하는 것을 만들어 내겠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천년의 간격을 둔 두사람인 석가세존과 혜능이 각자 깨친 것이 딱 떨어지게 맞았다는 얘기가 된다. 이럴 가능성은 얼마일까?
혜능이 뱉어낸 것은 잡탕을 먹고 만든 선이라는 짬뽕이지 결코 불교가 아니다.


 홍인이 혜능에게 불교를 통채로 넘겨준 이유는 혜능이 천재여서가 아니라 홍인이 무능했기 때문이다.
홍인도 소위 선문답이라는 것을 통해서 4대조로부터 법통을 전수받은 사람이다. 이 절차가 얼마나 헛된 것인가는 그것을 통해서 5대조로 등극한 홍인이 얼마나 무능하고 못난 사람인가를 보면 된다. 동선사에 온지 팔개월이나 되는 혜능이 홍인스님이 거처하고 설법하는 법당이 어디인지를 올랐을 만큼 동선사는 큰 절이었다. 아마도 탱자탱자하는 땡중들이 수천명은 무위도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많은 중들 중에 게송 하나 제대로 지을 줄 아는 넘이 없었다는 것은 1차적으로 홍인의 책임이다. 물론 더 원천척인 책임은 무소의경전(無所依經典)을 지향함으로써 불립문자, 교외별전을 종지로 하는 달마교 자체에 있다. 경전에 의지하지 않는다 하여 직지인심에만 매달리다 보니 스님들이 공부 안하고 빈둥거릴 수밖에 없다. 공부하기 싫은 백수들한테는 스님보다 더 좋은 직업이 없고. 절보다 더 나은 직장이 없는 법이다. 홍인은 이런 백수넘들의 수용소장이었다. 말하자면 사회시설의 관리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게 당시 불교의 현실이었고 오늘날에도 별로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홍인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스스로 절망하기도 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아직 건강하고 갈 때도 멀었는데 의발을 걸고 양위를 선포했겠느냐 이 말이다.
첫번째 이유는 홍인의 무능이요, 두번째 이유는 혜능의 말빨이다. 혜능은 배우지는 못했지만 천부적인 이빨이었다. 생전 첨 보는 사람한테서 노자돈까지 빌려서 먼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혜능은 타고난 언변가였다는 이야기다. 이 언변이라는 것은 배움과 상관없는 천부적인 능력이다. 자기 이름을 쓸줄 몰랐던 문맹들 중에 대 변설가였던 사람들은 역사상에 상당히 많다. 노예반란을 일으킨 로마의 스파르타쿠스도 그런 사람이다. 글자를 배우지 못한 노예였지만 스파르타쿠스는 능란한 언변으로 노예들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그들을 지도했다. 스파르타쿠스가 노예들에게 했던 연설은 세계의 100대연설에 들어간다. 일자무식의 농꾼이었던 히데요시도 역시 달변가였고 동학의 2대교주 최보따리도 달변가였다.
이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사람을 휘어잡는 언변과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었다. 홍인은 그런 점에서 혜능의 적수가 아니었다. 혜능은 불교의 불자도 몰랐지만 타고난 말빨로 홍인의 얼을 빼놓았다. 물론 말했다시피 그런다고 넘어간 것은 홍인의 자질 문제였다.
띨빵하고 한심한 5대제자 홍인의 용서받지 못할 무능함으로 말미암아 불교가 오랑캐 나무꾼 손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게 6세기에 중국 불교 내부에서 어느날 밤에 일어난 사건이다.
또 하나 들 수 있는 것은 당시의 불교에 절망한 홍인이 혜능에게서 한줄기 가능성을 보았다는 사실이다. 지가 워낙 졸렬하다보니 혜능이 환생한 부처로 보였고, 몰락한 불교를 중흥시킬 역사로 보였을 것이다.
멸망의 원인은 언제나 외부의 뛰어난 적이 아니라 내부의 못난이라는 사실은 불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희대의 사기꾼, 카사노바, 사이비 교주들이 한번씩 크게 물의를 일으킬 때마다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것은 대부분 그 주인공들이 무학이거나 기껏해야 국졸이기 때문이다. 국민학교 중퇴자가 사법고시 합격자로 가장해서 수십명의 여대생을 잡수신 사건도 왕왕 생긴다. 국졸 교주한테 판검사 부인들이 농락당하고 교수가 전재산을 바친 어이없는 꼴을 목격하기도 한다. 이럴때마다 의아한 것은 어떻게 저 무식꾼들 농간에 최고의 학력을 소지한 지성인들이 홀딱 넘어가느냐 하는 점이다. 그런데도 실제로 사람들은 깜빡 속는다. 그만큼 천부적인 재능은 후천적인 학습을 압도하기도 한다.
혜능이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편의 게송과 하룻밤의 독대로써 5대조로부터 법통을 받아 쥔 혜능의 놀라운 능력에 탄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날 밤의 대화는 홍인이 금강경을 설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혜능이 홍인에게 선을 강의했을 것이다. 물론 불교가 아닌 혜능작 신종교였겠지만. 불행하게도 홍인은 혜능의 요설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햇다. 왜냐하면 이미 홍인도 달마독에 중독된 불구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혜능의 변설에 홀려 얼이 빠진 홍인은 그의 눈앞에 나타난 부활하신 부처에게 지가 오히려 게송을 지어 바친다. 그 게송은 이런 것이었다.

有情來下種(유정래하종) : 뜻이 있어 씨 뿌리니
因地果還生(인지과환생) : 인연있는 땅에서 열매가 생기도다.
無情旣無種(무정기무종) : 뜻도 없으면 씨도 없나니
無性亦無生(무성역무생) : 성품이 없으면 남도 없도다.

이 게송의 수준을 말하지는 않으려 한다. 다만 혜능의 흉내를 내어볼 따름이다.

下種來有情(하종래유정) : 씨뿌리는데는 뜻이 있나니
還生果因地(환생과인지) : 한생을 돌아 인연있는 땅에서 열매를 얻도다
無種旣無情(무종기무정) : 씨 뿌리지 않음은 뜻이 없어서이니
無生亦無性(무생역무성) : 남이 없으면 성품도 없도다.

이건 구름의 게송이다. 어떻노? 모작이지만 오리지널인 홍인 것보다 더 그럴 듯 하자나. 내가 천년 전에 홍인을 만났으면 선종6대조는 따놓은 당상이다. 조사되는 건 장난이다.


 흔히들 선의 효용성을 얘기할 때 선종의 3대조사인 승찬과 6대조인 혜능을 예로 든다.  두사람은 모두 선을 알지 못했고 수행을 해본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 두사람에게는 진리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이 있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간절함이야말로 깨달음에 필요한 제일의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두번째 필요한 요소가 인연이다. 혜가가 달마를 만나고 승찬이 혜가를 만난 것과 같은 인연을 만날 때에 한순간에 불처럼 타올라 진리를 깨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간절함이 있다 하더라도 이런 인연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이다. 대입학원의 강사도 매년 자기가 가르친 학생들 중에 몇명은 서울대 보내는데 역대 조사는 몇명이나 이끌어주었나 말이다. 고작 평생에 한명이다. 달마는 혜가, 혜가는 승찬, 승찬은 도신, 도신은 홍인, 홍인은 혜능. 이런 식이다. 이런 방법으로 언제 수억만 사바대중을 교화시키나 말이다. 석가세존이 1,255인의 제자를 기르셨으면 하다 못해 그 10분지 1은 해야 될 거 아니냐 말이다.
선불교는 1000명을 바보로 만들면서 1명의 천재를 찾아내는 교수법이다. 그래서 천년의 세월 동안 고작 100여명의 선사, 조사들이 몇줄씩의 행적을 남겼을 뿐이다. 이것은 석가세존이 바라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선불교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한 마음을 바로보고 그 자리에서 깨닫는다는 선의 요체를 그 개산조인 혜능 스스로가 부정하고 있다. 육조단경의 기록에 의하면 분명히 혜능은 그날 밤 홍인으로부터 금강경 설법을 듣고 크게 깨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종의 법통을 홍인이 넘겨주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때 깨쳤다는 혜능은 그 후 15년 동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왜 사라져야 했을까? 


 무협지는 내용이 황당하고 줄거리가 조잡해도 독자들이 그것 가지고 책잡지 않는다. 독자가 무협지에 요구하는 것이 엄격한 논리성이나 수미일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종의 역사와 조사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건 그야말로 무협지보다 줄거리가 황당한 것이 많다. 조사들의 초능력이나 오묘한 선지식의 경지때문이 아니라 사건의 전개가 무협지보다 논리성을 갖추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 중 압권이 바로 혜능이 홍인으로부터 6대조사로서 법통을 인계받는 과정이고, 그보다 더 골 때리는 것이 바로 그 직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밤새도록 혜능과 대화를 나눈 홍인은 선종의 후계자로서 혜능을 결정하였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 과정을 밝힌대로이다. 그렇다면 그 후에 홍인과 혜능 두사람은 무엇을 했을까? 상식대로라면 날이 밝는 즉시 온 사바대중과 스님들을 회당에 다 모아놓고, 교수사인 신수를 일순간에 무색케 만들 만큼 탁월한 선지식과 근기를 갖춘 보석을 부엌에서 발견했노라 공표하고 약속대로 그에게 의발을 물려주는 양위식을 거행하여야 했다. 물론 파격적인 후계자의 발탁에 놀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반발도 있겠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방패로 삼고 혜능의 재주를 창으로 하면 그 정도 역풍이야 잠재울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그래야 조사로서의 자격이 있다 할 것이다. 석가세존 당시의 인도는 홍인 당시의 중국보다 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제자를 발탁하고 그 서열을 메기는데 그 사람의 신분에 별로 구애받지 않으셨다. 그 정도 반발 쯤은 안중에도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셨다.
그런데 우리 대선종의 5대조이신 홍인선사께서는 어떻게 하셨느냐? 날이 밝기도 전에 몇시간 전에 처음으로 대화를 나눠본 후계자의 손을 잡고 도둑놈처럼 살금살금 절을 빠져나가 제자를 멀리 도망보내고 돌아왔다. 이 제자는 그로부터 꼭 15년 후에 다시 중원무림에 파란을 몰고 등장하게 된다. 불교 이야기가 아니고 완죤 무협지다.
왜 홍인은 자기 후계자를 새벽에 피신시켜야만 했을까? 왜 혜능은 그후 15년 동안 세상에 나타나지를 못했을까? 불교 역사 최대의 미스테리를 추적해 보자. 불교판 역사스페샬이다.

 


 지금까지 홍인과 혜능의 이야기를 읽어온 독자라면 이쯤에서 이 사건의 본질을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특히 무협지나 추리소설을 많이 읽은 사람은 더더욱 눈에 보이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사건의 형사적 본질은 바로 증인이 없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혜능이 방아를 찧고있을 때 홍인이 나타난 싯점부터 그 다음날 새벽에 혜능이 사라지기까지의 사건은 선불교의 종통이 누구의 손에 넘어가느냐 하는 불교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사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당사자 두사람 외에는 어떤 목격자도 없이 진행된 사건이었다. 역사의 법정에서 이 두사람의 말 외에는 어떤 증인도 부를 수가 없어서 검사가 기소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다.
역대 조사의 후계는 본인들 외에도 목격자가 다수 있어서 그것을 증언하고 있고 기록도 다양하다. 그런데 5대조에서 6대조로 넘어가는 과정은 단 한명의 목격자도 남기지 않았다. 유일한 증인은 그날밤 법당의 서까래 밑에서 찍찍거린 두마리의 쥐뿐이었다. 이 두마리는 그때 마침 짝짓기를 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두사람의 유일한 피의자이자 목격자이자 증인은 두번다시 살아서 만나지 못했다. 홍인이 이로부터 3년쯤 후에 숨을 거둔 것이다. 물론 홍인은 이 유일한 후계자를 찾지도 않았고 후계자 역시 스승의 임종에 나타나지 않았다. 홍인은 그날밤의 범죄에 대해 생전에 누구한테도 털어놓지 않았고, 모든 비밀을 무덤 속에 가지고 가버렸다.
지금 육조단경에 기록되어 전하는 모든 내용은 바로 15년 후에 유령처럼 나타난 혜능의 진술에만 의존한 것이다. 모든 사건의 내막이라는 것은 오직 한사람 혜능이 그렇다고 말한 것 뿐이다. 그런데 이 진술에는 너무나 문제가 많다.


 이 사건에서 목격자가 있는 마지막 장면이 바로 홍인이 혜능의 게송을 신발로 문질러 버리는 장면이다. 혜능의 진술에 의하면 홍인은 행자출신의 미천한 오랑캐가 감히 선종의 후계가 걸린 게송에 응모했다는 것 때문에 혹시 사람들의 시기를 받아 위험해질까 염려해서였다고 한다. 과연 그랬을까? 신수와는 달리 혜능의 게송에는 '작자 혜능'이라고 분명하게 응시자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만약에 이게 신변의 안전을 걱정해야 할 정도의 일이었다면 누구보다도 혜능이 잘 알았을 것이고, 혜능이 불러주는 게송을 문자로 적어준 장씨성 가진 스님이 말렸을 것이다. 그러나 혜능의 진술에 의하면 이때 장씨성 가진 스님은 그런 걱정은 커녕, 5조 홍인의 뒤를 이어 선종의 법통을 잇게되고 크게 깨우쳐 부처님이 되거든 자기를 기억이나 해달라고 부탁했다 한다. 혜능은 신변의 위험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홍인은 왜 혜능의 게송을 신발로 문질러 버렸을까?
논리적으로 유추해낼 수 있는 유일한 답은 '바로 골치가 아팠기 때문'이다. 홍인은 혜능이 동선사에 온 첫날 자기가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날까지 홍인은 혜능에 대해 그리 깊이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혜능 자신이 그 사건 이전에 홍인을 한번이라도 배알한 적이 있거나 가르침 한번 얻었다는 말을 안하기 때문이다. 홍인의 기억에 혜능은 다소 당돌하고 당찬 오랑캐 행자쯤 되었을 것이다. 이런 혜능의 게송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장원을 했을 경우에 홍인은 감당하기 어려운 골치아픈 일들을 겪게 된다. 그 중에서도 제일 곤란한 것이 바로 동선사의 수준이 만천하에 뽀록이 난다는 점이다. 일자무식의 행자보다 나은 게송을 지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혜능의 탁월함이 아니라 동선사의 수준이 바닥이라는 사실이 먼저 부각될 수밖에 없는 성격의 일이었다.


 홍인은 혜능의 게송을 보자마자 '익지않은 풋사과 같은 게송이로다'하면서 신발로 그어버렸는데, 홍인의 속내가 어떤 것이었는지간에 그것으로서 혜능의 응시는 물을 먹은 것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선종의 조사인 홍인이 이랬다 저랬다 식언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설익은 풋사과'로 단정하고 신발까지 벗어서 문질러버린 게송을 다음날 바로 극찬을 하면서 그 지은이를 후계자로 삼는다면 이건 해괴한 웃음거리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홍인이 혜능의 게송을 보고 그것이 실로 깨달은 사람의 게송이고, 혜능이야말로 선종의 후계자로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홍인은 약간의 여지를 남겨뒀어야만 했다. 그러나 홍인은 어떤 번복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채점관의 최종 판정을 해버렸다. '불합격!'
그래놓고 홍인은 어떻게 할 생각이었을까? 다음날 낮에 혜능이 일하는 방앗간에 찾아갔다. 그리고 '방아를 다 찧었느냐'고 묻는다. 혜능이 '방아는 다 찧었는데 키질만 못햇습니다'라고 대답하자 홍인은 주장자를 땅에 세번 짚었다고 한다. 이것을 혜능은 훗날 해석하기를 자기의 말 뜻은 '이미 마음이 다 열려있고 깨쳤으니, 스승님께서 인가만 해주시면 됩니다'라는 뜻이었다고 하고 홍인은 이에 대해 주장자를 세번 두드림으로서 '그리 하겠노라'는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야밤 삼경에 홍인의 방에 찾아들었다는 것이다.
과연 두사람은 이렇게 척하면 삼척이고 탁하면 억이었을까? 하회를 보자.


 무협소설의 가장 고전적인 스토리는 이런 거다. 부모님을 억울하게 잃은 주인공이 복수를 하기는 해야 하지만 무공을 배운 적도 없는데, 어느날 깊은 산 속이나 동굴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너무나 우연히 은거중인 초절정고수를 만나서 비전의 무술을 전수받은 후 강호에 나와 부모님의 복수를 하고 사부님의 한을 풀고 아름다운 아가씨와 사랑을 한다는... 이런 이야기다. 이럴 때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은 초절정무공을 전수하는 방법인데, 대부분의 무협소설에서 주인공의 무공은 어느날 하루밤 사이에 수백, 수천배 파워 레벨이 올라가는 것으로 되어있다. 싸부님이 주인공의 등에 손을 얹고 몇시간 동안 진기를 불어넣어주거나, 혹은 신비로운 무공의 비결을 몇구절 외움으로써 주인공은 시골 촌놈으로부터 하루아침에 무림의 최강자와 겨룰 정도의 고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무협소설이라 해도 주인공이 아무런 계기도 없이, 이유도 없이, 싸부도 만나기 전에 이미 절정고수로 설정되어 있다면 이 무협소설은 만화방에서도 안받으려 할 것이다. 독자들이 보기에 뻥도 어느 정도 쳐야지 무협이라고 해서 이런 터무니없는 뻥을 치면 책이 안 팔린다.
그런데 우리의 호프 선종의 제6대조사이신 혜능은 이런 무협소설의 기본을 간단히 무시해버리고 등장한다. 혜능은 사부를 만나기 전에 이미 절정 고수이며, 그것도 어떤 공부나 수련, 연마의 과정도 없이 그렇다. 혜능은 홍인을 만난 자리에서 당돌하게 말한다. '방아는 이미 다 찧었노라고' 그는 키질만 하면 일이 끝나는 단계에 있었다고 스스로 진술하고 있다. 만화방에서도 안 팔릴 엉터리 무협소설이 천년동안 베스트셀라에 올라있었던 것이다.


 혜능의 진술에 따르면 그날밤에 홍인이 혜능을 기다린 이유는 "혜능에게 금강경을 들려주고, 게송 잘지었다고 칭찬해주고, 자신의 후계자로 삼겠노라는 엄청난 선언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미 홍인은 후계자의 게송을 신발로 문질러버린 다음이었다. 홍인이 그 게송을 보고 후계자를 찾았다고 생각했다면 왜 번복의 여지가 없는 최종판정을 분명하게 해버린 것일까? 나는 혜능의 진술을 의심하는 편이다.
나는 홍인이 혜능의 게송을 문질러버렸을 때, 이미 홍인의 결심한 바는 '추방'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당돌하게 겁대가리 상실한 오랑캐를 그냥 절에 두다가는 골치 아픈 일들이 자주 일어날 것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래서 혜능을 멀리 보내기 위해 타이르고 설득하는 자리가 그날밤의 대화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혜능이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가장 훌륭한 게송을 짓는 자에게 법통을 넘겨주겠노라고 했던 홍인의 약속이 그를 구속하는 바 컸을 것이다. 그 뿐이 아니라 혜능은 의외로 홍인이 짐작했던 것보다 선천적인 근기와 기량이 뛰어났을지도 모른다. 원래는 타일러서 쫓아보내려고 불렀다가 하루 밤이 새는 동안에 설득을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설득이라기보다 반했던 것은 아닐까? 혜능과 같은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머리가 좋고, 언변이 유창하고, 인물이 준수하며 자신감이 넘치고, 무엇보다도 사람을 휘어잡는 매력이 있다.
나는 전후의 맥락으로 보아 그날밤에 혜능을 만나기 전까지는 홍인의 마음에 법통을 물려줄 생각은 없었다고 짐작한다. 만약 그렇다면 선종이라는 것이 너무나 초라해진다. 그 정도의 짧은 게송 하나로 하루아침에 행자에서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선불교라는 얘기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홍인과 혜능은 긴 대화를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짐작컨데 그렇다는 얘기다.
홍인은 혜능의 말빨에 밀려서 결국 그를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이미 홍인은 결정을 번복할 입장이 아니었다.


 여기서 혜능이라는 사람을 한번만 더 정리해보자.
1. 혜능은 모두가 경멸하는 오랑캐땅 출신이어서 수계를 받고 출가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2.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를 모시고 스무살이 되도록 나무를 해서 먹고 살았으며 글자를 전혀 배우지 못했다.
3. 길에서 어떤 사람의 게송을 듣고 크게 생각한 바가 있어서 동선사에 오기는 했으나 그 이전에 불교에 대해 알거나 공부한 적은 전혀 없었다.
4. 동선사에 와서도 팔개월 동안 행자로 허드렛일이나 했을 뿐 공부나 수행은 꿈도 꾸지 못한 사람이었다.
5. 나이는 겨우 스물셋이었다.
나는 여기서 이때 혜능의 나이를 유심히 본다. 스물셋.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일자무식의 문맹인 스물셋의 촌놈이 아무런 공부도 수련도 연마의 과정도 없이 혼자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란 어떤 것일까. 전전생의 공덕이 있었던 사람이라고 우기면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이나 그러나 우리는 혜능의 나이 겨우 스물셋이었음을 기억하자.
나는 홍인이 차마 이 젖비린내나는 스무살 머시마한테 달마의 의발을 넘겨주지 못했던 심정을 이해한다. 나였더라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홍인은 혜능에게 립써비스로 떼울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냥 타이르고 야단쳐서 보내려고 했는데 상대가 워낙 빡빡하게 나오니까 구슬려서 보내기로 했다는 것이 전후사정으로 유추한 그날밤의 강상유람이다.
그러니까 "신수의 것보다 너의 게송이 뛰어난 것은 인정하마. 그리고 약속대로 제6대조로 인정할테니 다만 멀리 가기만 해다오."
똑똑한 혜능이 여기서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스승님, 후계자에게 전수한다는 달마조사의 의발은 안 주십니까?"
"당연히 달마조사의 의발을 너에게 주어야 하겠으나...."


 홍인은 혜능에게 다음과 같은 궁색한 변명으로 둘러대었다.
"예전에 달마스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법을 처음 펴실 때는 사람들이 믿음이 얕아서 이 가사와 그릇을 전하여 믿음의 표본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법이란 마음에서 아음으로 전해져 은밀하게 간직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뒤로는 가사와 발우의 전법함을 없게 하라. 만일 이 뒤로도 법을 전할 때 가사와 발우를 법의 상징으로 한다면 다툼의 원인이 될 것이니 명심하라."
"예 스승님."
스무세살짜리 촌놈은 노회한 선사의 교활한 구슬림에 넘어가고 말았다. 홍인은 이렇게 해서 달마의 의발을 혜능에게 주었을 때 일어날 지도 모를 골때리는 소동을 예방할 수 있었다. 홍인은 배에서 내려 멀어져 가는 제자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면서 안도에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원례 선이란 지혜의 다른 말이다. 선수행은 지혜를 닦는 것이다. 그런데 선불교의 5대조인 홍인의 하는 바를 보면 선수행이 지혜라는 것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 잘 알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공 두명 중의 하나인 홍인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자.

1. 홍인은 5대째 선종의 조사로써 동선사를 운영했는데 그 결과는 보았다시피 개판오분전이었다.
2. 그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홍인은 양위를 선언하고 후계를 게송으로서 결정짓는다고 발표했다.
3. 홍인은 신수의 게송을 보자마자 이름이 없어도 신수의 것임을 알아보았다. 이 말은 이미 동선사 중들의 수준을 누구보다 홍인이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4. 자기가 관리하는 절의 수준을 잘 알면서도 게송으로 후계자를 뽑는다는 발표를 했다. 즉 뻔한 결과조차 예견치 못할 정도로 우매한 사람이었다.
5. 혜능의 게송을 보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신발로 문질러 버리고는 다음날 밤에 혜능을 불러 후계자로 삼았다. 하루 뒤의 일도 예상치를 못하는 사람이다.
6. 후계자를 뽑아놓고도 당당하게 발표를 못하고 새벽을 틈타 강을 타고 탈출을 시켰을 정도로 겁이 많고 심약한 사람이었다. 책임감이 없는 사람의 전형이다.
7. 제자를 멀리 떠나 보내면서 어떤 징표도 주지 않았고, 제자에게 어떤 실질적인 도움도 주지 않았다. 노자돈도 안주고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혜능은 그야말로 입고있던 옷만 걸치고 쫓겨난 것이다.
8. 그렇게 혜능을 보낸 후에 홍인은 입을 싹 딱고 떠나보낸 제자에 대해서 일언반구하지 않았으며, 임종을 맞아서도 이 제자를 찾지 않았다.

선을 수행하면 사람이 이리도 어리석어지는 지 나는 묻고싶다.(교활함은 어리석음의 반려이니 교활한 것으로 지혜를 가장하지는 말고.)


지금까지 구름이 해온 추론이 맞다는 징후는 혜능을 떠나보낸 후에 홍인이 보여준 태도에서 제일 확실하게 발견할 수 있다.
홍인은 혜능을 보낸 후 며칠 동안 공양을 받지 못했다. 이런 상태를 식음을 전폐한다고 한다. 더 쉽게 말하면 며칠 동안 끙끙 앓았다는 소리다. 왜였을까? 당근 홍인의 머리속은 복잡했을 것이다. 혜능이라는 미친 넘을 일단 멀리 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거짓말을 했다는 양심의 가책도 있었을테고, 온 세상에 공표한 선종의 후계자 문제도 발등의 불이었다. 만약에 홍인이 혜능에게 후계 약속을 해준 것이 크게 맘에 걸리지 않았다면 다음날 바로 자초지종을 사람들에게 알렸을 것이다. 그런데 왜 홍인은 식음을 전폐하고 며칠을 앓았을까? 혜능이 충분히 멀리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였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곡기를 끊고 돌아누운 이유는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이유였다면 홍인은 더 태연히 식사를 하고 평상시처럼 행동해야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
어쨌거나 홍인이라는 대선사가 보여주는 행동은 범인의 상식이 안통하는 경지에 서있다. 육조단경에는 홍인이 혜능에게 가사와 바리를 주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이해불가능한 짓이다. 가사는 스님이 입는 옷이며, 바리는 밥그릇과 목탁, 그리고 불경 등이 들어있는 조그만 보따리다. 시주생활에 필수적인 물건이다. 그런데 혜능은 그 시점까지도 중이 아니었다. 중이 되려면 수계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수계식 때 머리를 깍는다. 그러나 혜능은 중이 될 수 없는 신분이어서 행자였다. 홍인은 중도 아닌 사람에게 중옷과 시주밥그릇을 주었다. 이건 정신나간 짓이다. 일의 순서는 후계자를 삼을 양이면 차라리 단둘이서 간단하게나마 수계식을 하고 홍인이 혜능의 머리를 깍아주어야 했다. 이게 순서다. 그런데 홍인은 중도 아닌 행자에게 중질에 필요한 물건을 주었으니 이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선사의 하는 행동이나 판단의 수준이 이 정도였다. 나는 홍인이 그저 혜능을 빨리 보내는 데만 급급해서 덤벙거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며칠 동안 제자들에게 닥달을 당한 끝에 겨우 실토를 하고 자백을 했는데, 그 조차도 당당하지 못했다. "여차여차하여 혜능에게 제6대 법통을 넘겼으니 너희들은 시비하지 말라."고 당당하게 말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우리의 불쌍한 5대조께서는 그저 "가사와 법이 남쪽으로 갔느니라"하고 구렁이 담 넘어가면서 방귀끼는 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혜능이 조사스님한테서 무엇을 뺏어서 달아났다는 소리로 오해하기 좋을만 하다. 홍인은 동선사 중들이 혜능을 잡으러 뒤쫓아가는데도 이것을 막아주지도 못했다.
더 골때리는 것은 시간을 어떻게 벌어주었길래, 이 불쌍한 제자가 몇발도 못가서 잡혔다는 것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였다.


 사람이 한 닷새 걸으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조선시대에 한양에 과거보러 가는 사람의 경우 부산서 서울까지 보름에서 스무날 정도 걸렸다고 한다. 열흘이면 대전까지, 닷새면 못 가도 대구까지는 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홍인이 식음을 전폐하고 돌아누워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혜능이 부지런히 걸었다면 그 정도 거리는 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동선사 중들은 혜능을 잡으러 나섰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동선사 중들이 혜능을 뭐하러 잡으러 나섰을까 하는 점이다. 그리고 잡으면 어떻게 하려는 생각이었을까. 살생을 금하는 불자들이, 더구나 승려들이 암만 오랑캐 행자라 해도 산사람을 때려죽일 생각은 아니었을 거다. 그러면 죽이지는 않더라도 몰매라도 가할 생각이었을까? 혜능이 그래야할 만큼 지은 죄가 뭐란 말인가? 만약에 혜능이 법통의 후계자로 낙점받은데 대한 앙심이나 시기라면 이건 혜능을 붙잡아서 해결될 일은 아니다. 그것을 번복할 사람은 홍인이기 때문이다. 자기 스승에게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아달라고 청원할 지언정 혜능을 치도곤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닌 때문이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동선사 중들이 달려간 이유는 하나 뿐이다. 바로 홍인이 혜능에게 주었다는 가사와 바리떼이다. 수백명이 넘는 중들이 상시 먹고자는 대사찰에서 가사 한벌이 그리 소중할 리는 없다. 그것이 달마조사의 사리마다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동선사 중들이 분기탱천했던 이유는 혜능이 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계도 받지못한 미천한 오랑캐가 가사와 바리떼를 가져갔다는 소리에 스님들이 야마가 돈 것이다. 거기다가 홍인은 자기가 손수 주었다거나 하는 자초지종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가사가 남으로 갔느니 하고 안개자욱한 소리만 했다. 나는 생각컨데 이때 동선사 중들은 혜능이 가사와 바리떼를 조사스님한테서 훔치거나 뺏어서 달아난 것으로 오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가사는 단순한 옷 한벌이 아니라 바로 중이라는 신분의 상징이다. 가사와 바리떼를 훔쳤다는 것은 스님이라는 신분을 도둑질한 것이다. 동선사 스님들은 공부할 때는 보여주지 않았던 결기를 이 신분도둑놈을 잡는데는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상한 것은 대구만큼은 가 있어야 할 혜능이 얼마 못간 자리에서 덜미가 잡혔다는 것이다.


 혜능이 광주의 법성사에 홀연히 나타난 것은 38세의 장년이 되어서였다. 스승 홍인은 이미 죽은지 12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 홍인은 혜능을 떠나보낸 후 3년 쯤 뒤에 죽었다. 모르긴 해도 혜능 사건은 내내 그를 괴롭혔을 것이고, 소심하고 심약한 홍인이 그 고뇌번민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수명을 단축시켰을까 생각하면 구르미 맴이 아프다. 그렇게 타이르고 구슬러서 멀리 멀리 가버리라고 일렀건마는 그 새벽에 가사장삼을 물에 적셔가면서 노 저은 보람도 없이 이 띨빵한 제자는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뽀록을 다 내버린 것이었다. 후계자를 정했다던가 법통을 넘겨주었다던가 하고 똑 부러지게 말을 하지 않고 안개를 피우고 구렁이 담넘는 쑈를 보여준 것이 마카 허사가 되버린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혜능에게 보란듯이 물려주고 말걸." 하는 후회도 치밀었다. 그러다가 한편으로는 "이 넘이 어떤 넘인지 알아야 법통을 물려주지... 아이고 골이야"하고 돌아눕기도 했다. 이 얄미운 놈은 지 맘도 모르고 사람들한테 나발을 있는 대로 불어 버린 것이다. 잔머리를 굴리다가 뒤통수를 된통 얻어맞은 홍인은 그 자책과 내상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하고 부처님 면회를 서둘렀다.
어쨌거나 홍인의 이 황당한 양위 소동으로 말미암아 전통과 역사에 빛나는 선종은 졸지에 조사 유고 사태를 빚게 되었다. 5대조가 후계로 삼았다는 머리 땋은 머시마는 종적을 알 길이 없고, 5대조는 대책도 없이 입적해 버린 것이었다. 종통이 없는 세월이 하염없이 흘렀다. 1년, 2년, 3년... 그러나 행자 조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따뜻한 봄날, 점심공양을 잘 드신 스님들이 식곤증에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 쯤, 할일이 너무나도 없다는 것이 유일한 삶의 문제였던 법성사의 스님 두분이 세계 철학사에 길이남을 대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절 마루에 세워놓은 깃발이 바람이 불어 움직이는 것을 보고, 한 스님이 '음... 바람이 부니 깃발이 움직이는군'하고 잠꼬대같은 소리를 했는데, 이를 받아 옆에 한 스님이 반박하기를 "아냐, 저건 바람이 움직이는 거야" 했다.
"머시라꼬? 일마가 돌았나? 저기 깃발이 움직이는 거지 우찌 바람이 움직이는 거고?"
"이 땡초가 밥을 잘못 묵었나? 저기 바람이 움직이는 거지 깃발이 움직이는 거가?"
'깃발이 움직인다', '바람이 움직인다'를 놓고 두 땡중이 드디어 멱살잡이에 들어가려는 찰나, 어디선가 부처님의 화신인 듯, 온화한 미소를 띤 거룩한 선사 한분이 나타나셨다. 그리고 두 땡초를 보고 가라사대 왈,
"저건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니라."
바이블에 보면 요단강가에서 예수님이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베드로를 보고 가라사대 "나를 따라오너라.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시니 베드로가 두말도 않고 그물을 걷고 예수님 뒤를 따랐다는 일화가 나온다. 이 정도는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을 낚는 어부" 얼마나 황홀한 소리고? 그래서 지금도 기독교의 문양이 바로 물고기다.
그런데 바람처럼 나타난 이 사나이의 한마디에 쌈박질을 하던 두 땡중은 물론이고 법성사 마당에서 졸고있던 중들이 전부 뻑 가버렸다. 마침 해우소에 가려고 마당에 내려서던 인종법사가 그 말을 듣고 이 싸나이를 법당 위에 모셔서 윗자리에 앉으시게 했다.
이 일화는 혜능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당시 법성사를 비롯한 불교의 수준이 얼마나 형편무인지경이며 참담했는가를 보여준다. 얼마나 중들이 밥처먹고 할 일이 없었으면 깃발이 움직인다, 바람이 움직인다를 갖고 논쟁을 하냐 이말이다. 세계의 어떤 철학사에도 이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안 나온다. 유치원 얼라들의 이야기지 이게 출가수행자들의 이야기겠나? 내가 이 일화를 처음 읽은 것이 스물이 되기 전이었는데, 읽고나서 욕밖에 안 나왔다. '뭐 이런 미친넘들이 다 있지?'
이게 얼라들 소꿉살이하다가 나오는 소리지 무슨 철학적인 논쟁이나 된다고 불교사에 버젓이 올라와 있으며, 선의 창시자라는 6조혜능은 또 뭐하는 짓이고? 신수가 지은 게송을 모작해서 동선사에서 한번 히트쳤던 그 수법을 또 써먹고 나온다. '그대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니라' 개뿔. 이게 무슨 선지식이야? 그냥 말장난이야. 처음 싸웠던 두 땡중이나, 끼여든 혜능이나, 끔뻑 넘어가서 혜능을 상좌로 모신 인종법사나 다 도낀데낀이야. 불교가 그랬던 것이야. 한때. 지금도 뭐 나아진 것도 없지만, 내가 쪽팔리서 어데가서 불자란 소리를 못하고 산다.
더 가관인 것은 이 일화를 읽고 오늘날에도 뿅가는 날중생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이고.


 오호 통재라! 달마독이 퍼지기 시작한지 채 2백년이 되지도 않아서 가장 엄격하고 정밀하고 심각하며 진지한 학문의 꽃이었던 불교가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참람한 말장난 개그로 타락해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고사하고 초딩이들 사이에서도 '깃발이 움직이는 거다', '아니다, 바람이 움직이는 거다' 수준의 언쟁은 없다. 이 다툼에는 어떠한 철학적 가치도 없고, 논리적 규명도 필요없으며, 종교적 물음은 더더욱 아니다. 아무 의미없는 헛소리일 따름이다. 문제는 불철주야 경전을 탐독하고, 궁극적인 의문에 도전하여 그 답을 찾고, 생각하고, 쓰고, 토론하고, 한편으로는 중생을 제도하는데 여념이 없어야 할 멀쩡한 스님들이 이런 농담따묵기나 하면서 소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더 한심한 것은 정작 본인들은 농담따묵기가 아니었고 딴에는 심각하고 진지한 설전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설전에 뛰어든 6대조사 혜능선사께서도 장난이 아니었다. 아주 진지한 대답이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 혜능의 답변은 선불교 천년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금자탑이며, 선불교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개선문이다. 선불교 역사에서 선문답이라 하는 헛소리 중 백미로 꼽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라. 저게 답이 되는지를. 답은 고사하고 말이나 되는 지를. 애초의 설전이 농담따묵기였으므로 답도 그럴 수밖에 더 있냐 하면 말은 그렇다. 그러나 정말 깃발이나 바람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는가 물어보면 이건 논리적으로 답이 안 나온다. 원효가 깜깜한 밤에 해골물을 마시고 대오했다는 일체유심조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원효의 일체유심조는 그야말로 하나의 화두로서 손색이 없다. 그것 자체가 무수히 많은 것을 말해주는 사건이다. 그 해골물 사건을 가지고 선사들은 10년 동안 생각할 거리가 나온다. 그러나 깃발 사건은 그렇지 않다. 해골물이 밤에는 꿀물이었는데 해골임을 안 순간에는 썩은 물이었다. 같은 물이지만 생각에 따라서 감로수도 되고 시체 썩은 물도 되는 것이구나 하는데서 일체유심조라는 각성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깃발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깃발이 움직이고, 우리 마음이 바람이 움직이는 거라 생각하면 바람이 움직이나? 두 땡초의 설전부터가 말장난이었고 혜능의 저 빛나는 명답도 들추어 볼 수록 똥바가지다. 원효의 사건에서 볼 수 있는 빛나는 영감은 고사하고 하나의 우화로서도 함량이 미달이다.
이 일화가 갖는 의미는 한가지뿐이다. 혜능으로부터 시작되는 선문답이란 황홀한 헛소리의 본격적인 효시라는 것이다. 5대조까지 전해지는 만화같은 이야기들은 예고편일 뿐이었다. 이로부터 불교는 찬란한 헛소리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우리의 히어로 혜능은 그렇게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혼자였고, 돌아오기 전의 이야기는 깜깜하다. 혜능은 얽힌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린 알렉산더처럼(31일날 애들과 알렉산더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누구도 풀지 못할 철학적 난제를 단 한마디로 해결해 버리고 그 길로 인종법사의 상좌로 모셔진다. 그리고는 엄청난 말빨로 단번에 법성사 땡중들을 제압해 버린다. 이것도 물론 소개하겠지만 혜능의 능력이라기보다는 법성사 중들의 수준에 문제가 있었다. 어쨌건 청산유수같은 설법에 뻑간 인종법사가 "혹시 15년 전에 사라졌다는 선종의 6대조사가 아니십니까?"하고 물었다. 이때 혜능은 맞다 틀리다 대답을 않고 그저 "부끄럽습니다"라고만 했다고 전한다. 왜 선를 하는 사람들은 딱 부러지게 대답을 못하고 이렇게 구렁이 트위스트를 추는 것일까? 기면 기고 아이면 아이고가 없다. 매사 이런 식이다. 부끄럽기는 뭐가 부끄럽다는 뜻일까?
"하이고, 몰라뵈었나이다. 용서하소서."하고 바싹 엎드린 인종법사는 선종의 6대조사의 머리를 자기가 깎아드리는 영예를 차지하게 된다. 드디어 혜능은 수계를 받고 비로소 스님이 되는 것이다.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햇던 것처럼 천하의 혜능도 수계를 받아야 스님인 것이다. 비로소 선종은 조사의 유고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 15년이 흐르는 동안 혜능의 동선사 탈출 사건은 엡솔롯 탈출처럼 하나의 전설로 변해 있었다. 사건 자체는 황당한 것이었지만 5대조인 홍인이 후사를 점지하지 않고 고만 꼴까닥해버리고, 법통이 공중에 떠 버리자 사람들은 자연히 홍인에게서 법통을 이어받고 떠나노라고 했던 그 머시마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 미친넘이라도 나타나주지 않으면 달마의 맥이 여기서 끊길 판이었다. 15년을 기다리다 보니 차츰 사람들의 기억은 신비로운 6대조사의 환영을 갖게 되엇을 것이다. 영리한 혜능은 그것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15년. 영리할 뿐만 아니라 인내심도 대단한 사람이며, 인간의 심리를 이용할 줄도 안다. 전설은 시간이 만든다는 것도 알고 그는 15년을 기다렸다. 그 동안 사냥질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시도 자신이 선종의 6대조사라는 것을 잊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불과 스물셋의 나이에 5대조인 홍인으로부터 후계자로 지정을 받았는데 어찌 한시인들 잊을 수 있었으랴. 화려하개 복위하는 그 날을 꿈꾸면서 이 거지왕자는 부단하게 자신을 연마했다. 물론 제대로 된 공부는 꿈꿀 수 없었다. 독학을 할 학문의 기초도 없었고, 절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자신을 받아주는 건 고작 사냥꾼 무리뿐이었으니까. 수련이라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 창작이었다. 혜능은 자신이 만든 독창적인 교리를 들고 나타났다. 어디서 줏어들었는지 달마교의 교리와 비슷하게 끼워 맞추기는 했으나 불교와는 전혀 다른.
의아스러운 것은 이 천재가 15년의 방랑기에 단 한명의 추종자도 만들지 못해서 여전히 혼자였다는 점이다. 무식한 사냥꾼 두어명은 감화를 시켜 똘마니로 만들었을 법도 하건마는 우리의 6대조께서는 수발드는 시종 하나 없이 나타나셨던 것이다.


수계는 출가비구가 되는 의식이다. 수계식의 가장 커다란 세가지 의미는 법명을 받는다는 것과 머리를 깎는다는 것과 스승을 가진다는 것이다. 세례를 받으면서 세례명을 짓듯이 모든 스님들은 수계식 때 법명을 받는다. 이 법명을 지어주고 머리를 깎아주는 분이 바로 스승이 된다.
때문에 혜능이 법성사의 인종법사에게서 수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면 인종법사가 혜능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해괴하게도 인종법사가 자기로부터 수계를 받은 혜능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계식에서 인종법사는 혜능의 법명을 지어주지 않았다. 혜능은 그의 속명이다. 그래서 혜능은 속세의 이름을 스님이 된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한 사람이다. 이런 점들을 살펴보아도 애당초 혜능은 불교도가 아니고 불교라는 종단의 규칙을 따를 생각도 없었던 사람이다. 혜능이 태어난 날, 스님 두분이 찾아와 중생을 제도하고 능히 불사를 할 아이이니 이름을 혜능이라고 지으라 하고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기쁘다 혜능 오셨네, 성인의 탄생에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찾아오는 것은 꼭 창조주의 독생자라야 일어나는 일은 아닌 모양이다. 혜능의 어머니는 젖이 모자랐는데 신인(神人)이 감로수를 먹여 키웠다고 한다. 탄생 신화는 예수그리스도를 능가한다. 유모가 신인이었다.
수계라는 것은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의 뒤를 따라 해탈정각과 중생제도의 길을 가기로 맹세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혜능은 이런 맹세를 한 바 없고, 부처님께 귀의하겠다고 결심한 바도 없다. 혜능은 수계를 받고 스님이 된 것이 아니라, 스님들의 오야붕이 되었다. 수계를 받은 후에 수행하고 공부한 것이 아니라 이미 공부가 완성된 사람으로 수계를 받았다. 그리고 그 공부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한 혜능이 스스로 깨친 대단히 독창적 세계였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중들한테 가르치고 퍼트리기 위해서 수계를 받았다. 혜능은 배우기 위해 출가를 한 사람이 아니라 가르치기 위해 출가를 한 사람이다. 그는 수계를 받기 전에도 불교를 공부한 적이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혜능은 그의 이력 어디를 들추어보아도 그를 불자라고 인정해 줄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는 사람이다. 홍인과 인종이라는 자격미달의 중들이 부처님의 교의를 무시하고 종단의 규정도 아랑곳없이 마도에 무릅꿇고 불교를 더럽히고 말았다.


앞서 말했지만 불교 교리의 두 기둥은 연기와 중도이다. 이 두가지가 모두 공(空)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공(空)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면 끝이다. 그것이 바로 정각이고, 그것이 바로 해탈이다. 이 공(空)의 실체를 알면 인생과 생노병사의 모든 의문이 다 풀린다. 그리고 그것들을 분명하게 알게되는 순간 고뇌와 번민으로부터 풀려나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두가지 뿐이다. 영원히 살던가, 아니면 죽음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던가이다. 전자는 불가능하지만 후자는 가능하다. 죽음이란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고나면 두렵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알려면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 것이 바로 공(空)이다. 이 공(空)이 바로 세계의 실상이고,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여 법(法)이라 한다.
공(空)은 결코 무(無)와 동의어가 아니다. '없음(無)'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있는 것인가? 아니다 '있음(有)'도 아니다.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면 그럼 뭐란 말인가? 모든 것은 연기를 따라 일어난 가실상이다. 용수는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했다. 진실로 공한 가운에 묘한 것이 있다는 모순된 어법이다. 진실된 공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데, 그 속에 무엇인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노자도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서 '유황유홀, 홀혜황혜. 황혜홀혜, 요혜명혜'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두 성인의 눈에 비친 이 세계의 본바탕은 그렇게 신비롭고 불가해하며 황홀하고 홀황한 무엇이었다.
두 성인이 파악한 바 이 세계는 있다고 해도 틀리고 없다고 해도 틀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을 제법의 실상으로 본다. 이것이 중도이다. 중도의 공사상을 가장 잘 표현해 놓은 것이 반야심경의 구절이다. 공즉시색, 색즉시공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부연이 뒤따라 나온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靜), 부증불감(不增不減).
색이면서 동시에 공이고, 공이면서 동시에 색인 이 것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는 것이라고. 때문에 공에는 색이 없다(空中無色)고 결론 짓는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한치의 빈틈도 없이 증명해 낸 것이 용수의 중론이다.
혜능이 수계를 받은 후에 선종의 6대조사로 행세하면서 떠들어 설법한 내용은 이런 연기와 중도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떤 논리적인 검증도 뒷받침되지 않은 헛소리의 나열이었다. 그건 연기도 아니요, 중도도 아닌 '불이론(不二論)이란 말장난이었다. 세상 만물을 두개씩 짝지워서 'A와 B는 둘이 아니고, C와 D는 둘이 아니고, E와 F는 둘이 아니고....' 하염없이 '둘이 아니고'로 이어지는 하품나는 소리 뿐이다. 둘이 아닌데 뭐가 어쨌다는 거냐? 하고 물으면 아무 할말이 없는 날맹탕같은 지겨운 헛소리.


 내가 작년에 온누리의 큰언니께서 외국인 근로자 후원의 밤 행사에 초청해주셔서 서울을 갔을 때였다. 아이들하고 같이 작은 백화점에를 갔는데 - 규모는 작아도 분명 백화점이었다. - 큰아이 눈에 아주 맘에 드는 핸드백이 발견되었다. 엄마한테 어울리는 핸드백이라고 생각되었던지 내 팔을 끌길래 들여다보았더니 디자인, 색상, 재질, 장식 등이 나무랄 데 없는 상품이었다. 특히 얼마나 싼지 가격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사면 돈번다는 말이 과히 틀리지 않는 경우였다. 그래도 한국 아줌마가 안 깎고 사면 뭔가 속은 듯 하자나. 그렇게 싼 가격에서 또 얼마를 빼고 핸드백을 샀다. 핸드백이라기보다는 조금 큰 손지갑이었다. 그런데 점원 아가씨가 물건을 건네주기 전에 "아줌마 딱지 바꿔 드릴까요?" 하고 묻는 거였다. 나는 딱지를 좀 더 나은 걸로 바꾸어주는 줄 알고 "그러세요" 했다. 그랬더니 그 점원 냉큼 마크를 부욱 뜯어내고는 새 마크를 딱 붙여주는 거다. 보니 명품 '에트로' 상표였다. 2만원짜리 남대문표가 순식간에 백만원짜리 진품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역시 서울은 마산 시골하고는 노는 물이 달랐다. 마산 창원에는 이렇게 노골적인 짝퉁짓은 구경하기 힘들다. 점원도 뭐 전혀 어색하거나 민망한 눈치가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원래 그렇게 판다는 그런 태도였다. 아이들하고 차를 타고 오면서 내내 웃었다. 나는 오늘도 2만원짜리 '에트로' 지갑을 들고 동창들을 만나고 왔다. 갱수기 손에 들린 명품 '에트로'가 짝퉁인 줄이야 눈치챘을라고. 저거가 들고 나온 것인들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제. 울나라 짝퉁은 진짜 겁나게 명품과 빼닮았다. 짝퉁 표띠가 거의 안 난다. 오리지널 메이커의 검사부 직원들도 한국 짝퉁은 보고서 분간을 못해낸다는 소리도 들은 것 같다.
새해 벽두에 왠 짝퉁 타령이냐 의아하실 법하다. 새해에는 구르미가 기가 막힌 짝퉁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게 바로 선불교란 짝퉁이다. 불교라는 레떼르를 붙이고 불교인 척 행세하지만 기실은 전혀 불교와는 무관한 짝퉁불교, 사기불교, 남대문 불교, 길표불교에 대한 보고서를 벗님들께 올리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재를 통해서 나는 선의 창시자라는 혜능이 선종의 6대조사가 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선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교와 관계없는 인물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를 말했다. 선을 창시한 혜능은 불자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공부한 적도 없었고,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바탕인 학문적 소양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문맹이 불교를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학자가 혼자 궁리해서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혜능이 독학을 했건, 혼자서 궁리를 했건, 전생의 공덕이 있어 천재성을 물려받았건 간에 그가 무언가를 알아낸게 있다면 그것은 혜능의 것이지 석가세존의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여기서 한가지 반론이 나올 수 있다. 두사람의 천재적인 물리학자가 서로의 교류나 지식의 공유없이 각자가 독자적으로 연구한 결과, 둘다 똑같이 상대성 원리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즉 혜능이 일자무식이고, 출신이 미천했던 관계로 중이 될 수조차 없어서 불교를 체계적으로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천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홀로 깨친 것이 부처님의 깨친 것과 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방법은 달라도 그 지향하는 목적지와 그 궁극의 목표는 동일한 것일 수 있지 않느냐 하는 반론은 가능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에 대해서 결론을 내려야 한다. 하나는 부처님의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가지일 수 있는 것이냐 하는 점이다. 만약에 여러가지 길이 있고 다른 방법이 있다면 왜 석가세존은 그것들을 다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부처님도 몰라서 안 가르쳤을까? 그러나 선가의 수행법은 부처님이 다 해보시고 난 후에 하지말라고 만류하신 것이다. 금하신 바다.
나는 부처님이 다른 방법도 있는데 몰라서 혹은 다른 이유로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달마나 혜능이 그럼 부처님도 못찾은 길을 새로 찾아냈다는 소리가 된다. 청출어람일까? 그것을 확인해 보자.
지금부터는 과연 달마나 혜능이 주장한 바와 제자들에게 가르친 바가 석가세존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인가를 하나 하나 따져보자. 달마가 10년 동안 벽보고 않아서 갔던 그곳과, 혜능이 활들고 사냥질 하면서 깨우친 바가 석가세존의 정각과 같은 것인지 살펴 보자. 과연 우리는 벽보고 눈감고 앉아서 또는 일자무식에 활들고 사냥질하면서 부처가 될 수 있겠는지 그 가능성을 알아보자.


 달마교와 혜능의 선이 불교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려고 하면 우선 무엇이 불교인가가 분명하게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됫박이 제대로 만들어졌는가 재 보려면 표준 됫박이 먼저 만들어져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불교는 석가모니라는 위대한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며, 그분의 말씀에 귀의하고 실천하여 그분의 뒤를 따라 부처가 되고자 하는 종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생사윤회의 업장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와 평온을 얻는 길과 방법에 대한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실상을 보여준 것이다. 전자를 사성제라 하고 후자를 삼법인이라 한다.
우리는 사성제를 통해서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있고, 삼법인을 가지고 이 세계의 실상을 볼 수 있다. 이 양자를 모두 어우르는 원리를 학문적으로 이름붙이면 연기와 중도가 된다.
때문에 불교는 사성제와 삼법인이라는 절대진리를 연기와 중도라는 이론으로 밝힌 과학이요, 철학이다. 아니 불교를 과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불교가 과학적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불교적이어야 한다. 불교적이지 않은 과학은 불완전한 과학이요, 아직 채 밝혀지지 않은 과학이요, 검증되지 않은 과학이요, 가설로서의 과학이다. 불교적인 과학일 때 비로소 과학은 완성된 것이다. 왜냐하면 삼법인은 과학의 토대를 이루고 과학적인 모든 삼라만상이 존재할 수 있게 하고, 사라지게 할 수도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바탕을 이루는 절대진리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법칙은 그것이 원리라고 이름지은 것이라 해도 절대진리는 없다. '우주에 광속보다 빠른 것은 없다'는 과학적 결론도 특수한 조건과 상황하에서는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러나 삼법인은 절대 무너지지 않으며, 훼손되지 않으며, 수정되지 않는 만고불변의 절대진리이다. 때문에 불교가 과학적인가를 따지는 것은 본말이 전도되고 주객이 바뀐 것이다. 불교는 절대진리이며, 과학은 이를 검증하고 확인하는 수단일 따름이다.
회자정리, 제행무상, 제법무아라는 절대진리를 우리는 왜 알아야 하는가? 왜 깨달아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사성제를 통해 우리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것을 모르고는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연기에 의해 이 꿈같은 세상을 세세윤회하면서 고통의 질곡 속을 유전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이 허상의 세계에 붙잡혀있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부처님은 보셨다. 그 원인을 우리는 왜 만드느냐? 무가치한 대상들에 대해서 무의미한 집착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 집착을 끊으면 우리는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말이 쉽지. 집착을 무슨 수로, 어떻게 끊는다는 말일까? 눈감고 벽보고 돌아앉아 10년만 버티면 집착이 저절로 다 끊어지나? 화두를 물고 하루종일 벽에 대글빡을 찧으면 집착이 사라지나? 부처님은 그런 방법으로는 절대로 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으셨다. 집착을 끊는 힘은 오직 한가지 '앎'에서만 나온다는 것을 부처님은 스스로의 체험으로 아셨던 것이다. 그 올바른 앎을 정각이라 했다. 그 앎을 얻은 것을 해탈이라 한 것이다. 해탈이 신비스러운 어떤 영적 체험의 상태나 경지가 아니다. 바로 삼법인을 체득하여 깨달으면 그것이 해탈이다. 회자정리를 깨달으면 모든 대상으로부터 애착을 거두게 된다. 제행무상을 알면 헛된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제법무아를 알게 되면 절로 모든 집착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게 해탈이다. 그렇다면 해탈이 곧 부처냐? 아니다. 해탈은 부처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삼법인의 절대진리를 한점 티끌만한 의혹도 없이 온몸으로 깨달아 납득했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생명체로서 심어진 뿌리깊은 습기가 남아있다. 이 습기를 제거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것이 제거된 만큼 완전한 부처의 경지로 다가가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단계까지 이 습기를 제거하신 분이다.
그러면 달마와 혜능은 뭔가? 그들이 하는 짓은 뭔가?


선불교라는 해괴한 수행교단의 사도들이 외우고 다니는 주기도문이 있다. 일컬어 달마가 제창한 선의 종지라는 것이다. 전부 4개의 구절인데, 앞의 두개는 날조된 거짓말이요, 뒤의 2개는 황당한 헛소리다. 선불교의 주기도문은 제법 유명해서 당나라 때는 절마당의 개도 외우고 다녔다. 교외별전에 불립문자요, 직지인심이면 견성성불이라 하는 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교외별전이 무슨 소리냐 하면 종교의 진수는 비밀리에 따로이 전해졌다는 말이다. 달마는 이런 새빨간 거짓말로 천하중생을 속여먹고 지옥에 갔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는 비밀리에 따로 은밀하고 내밀한 전수법에 의해서 전해진 적이 없다. 달마의 선의 종지는 첫마디부터가 완전한 날조요 쌩구라요 철면피한 거짓말이다. 부처님은 깨달아 아신 모든 것을 모든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근기와 지식과 이해의 정도에 따라 공개리에, 백일하에 투명하게 전해주셨지, 어느 누구에게도 은밀한 속삼임을 들려주신 적이 없다. 도대체 무슨 법이, 어떤 교가 별도로 전해졌다는 소리인가?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이란 경전의 기록에 의하면 부처님이 연꽃 한송이를 들어보이셨을 때, 마하가섭이 홀로 그 뜻을 알고 빙그레 웃었다는 염화미소의 이야기가 전한다. 그 일에 대하여 경에 적혀있기를, 마하가섭이 대견하신 부처님께서 가라사대, "나에게는 진리와 하나가 되는 깨달음에 이르는 비법이 있다. 이 비법은 형상이 없어 나타낼 수 없으나 진리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그러나 문자나 말로는 표현할 수도, 전해줄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이 비법의 열쇠를 마하가섭에게 전한다"리고 하셨다는 것이다.
달마는 이 일을 거론하여 불교의 진수는 문자나 말이 아닌 내밀한 비법으로서 별도로 전해졌다고 구라를 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이 기록은 의심스러웠다. 평소의 부처님 답지 않은 말씀인데다가 평상시의 가르침과도 전혀 어긋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게 정말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었을까? 정말 진짜 법은 별도로 마하가섭에게 넘어간 것일까? 나머지 1천2백55명의 제자들은 전부 부처님한테 뒷통수를 맞고 바보가 된 것일까? 이 사건이 유일하게 기록된 경전은 오직 '대범천왕문불결의경' 하나 뿐이다. 이 경은 대장경에 포함되지도 못하는 짜투리 경전이다. 아니나 다를까 근세에 들어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이 경은 사용된 언어와 고증의 확인을 통해볼 때에 백프로 조작된 위경임이 밝혀졌다. 누가 조작했을까? 달마는 이 날조된 경전의 구절을 들먹여서 '교외별전'이라고 사기를 친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불교에 교외별전은 없다. 부처님은 그렇게 은밀하게 한두명에게만 법을 전하신 적이 없고, 밝혀서 설명치 않고 숨겨놓으신 비법이라는 것도 없었다. 부처님이 아신 모든 것은 다 말씀하셨고, 그것은 문자로 남아서 오늘날에도 전하는 바다. 부처님이 문자나 말로 표현할 수도, 전할 수도 없는 비법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날조된 사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악한 달마교의 사도들이 불교를 도둑질해서 자기들의 가면으로 뒤집어쓰기 위해서 만들어낸 말인 것이다.
교외별전이 아니라 교전명백이다. 교는 분명하고 밝게 전해진 것이다. 달마의 선의 종지라는 황당무계한 헛소리를 조금 더 살펴보자.


정각해탈, 성불열반이 불교의 목표라면 성통공완 우화등선은 도교의 목표이다. 즉 신선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도교에서는 수백년을 산 진인들의 열전이 의심할 바 없는 사실로써 전해져 오고 있으며, 중인환시리에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선인(仙人)들의 기록이 역사로서 남아있다. 도교의 수련을 흔히 신선술, 또는 도인술, 또는 양생술이라 한다. 이런 신선이 되는 수행의 방법은 극히 내밀한 것으로써 각 도관마다 비전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불교와 달라서 이런 신선술은 교과서가 없다. 즉 무소의경전(無所依經典)으로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영역이다. 그리고 이런 비전의 최상승 경지는 다수의 제자들에게 강의되지 않으며 극히 소수의 계승자들에게만 물려진다. 이런 도교의 영향을 받은 중국의 무가들도 이런 성향을 띤다. 무협지의 주된 테마가 바로 이런 무공의 비전이다. 도교의 신비주의가 뿌리깊게 스며든 중국에서는 부처님의 불교처럼 비전이 따로이 없고 모든 것이 명백하고 밝게 드러난 진리라는 것이 쉽게 어필되지 않았다. 아무리 이게 다다 라고 설명해주어도 중국인들은 '그래도 숨겨진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꾸 그것을 들여다 보려고 하는 것이다. 최고의 것, 지고의 가르침은 몰래 전승해주고 숨어서 배운다는 이상한 습벽이 생겨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모두 도교에서 생긴 풍토이다. 승복을 걸치기 전의 달마가 도사였던 것을 생각해 보면 달마에게서 나온 선불교라는 것이 불교와 도교의 트기일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불교보다는 도교에 더욱 가까운 트기였다. 선불교라는 사생아는 불교라는 어머니를 닮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지 애비를 쏙 빼닮았다. 사람들은 이 선불교의 애비가 누군지를 모르고 그 어미만을 보고 '불교의 자식'이라고 쳐주었던 것인데, 그러나 일마는 결코 불교의 호적에는 오를 수 없는 놈이다.
사생아를 낳고야 만 달마는 이 애비없는 불쌍한 자식을 억지로 불교의 호적에 올리려고 동사무소에 가서 호적을 위조하고야 만다. 그래서 마하가섭을 교외별전의 시전으로 조작하고 달마를 가섭의 28대손으로 조작하였다. 이 엉터리 호적의 이름이 전등록이다. 스승과 수제자 사이에 내밀하게 이루어지는 법통의 전수라는 도교 특유의 승계방식을 불교에 이식하면서 마치 그것이 불교 본래의 방식인 것처럼 조작한 것이 바로 염화미소라는 날조된 에피소드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도교의 전수방식을 부처님이 시범해 보이신 불교의 본래적 방식인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선불교는 달마의 범죄적인 사기극의 산물이다.
본시 부처님의 불교에는 교외별전이 없으며, 불립문자라는 해괴한 소리가 있지 않았다. 부처님은 그런 무당파의 장문인 같은 소리를 하신 적이 없다.
선불교라는 사생아를 족보를 위조해서 불가에 입적시키는데 성공한 달마는 혹시 사람들이 이 아이의 정체를 알게 될까봐 노래를 지어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켰다. 직지인심, 견성성불. 이 노래는 아이의 혈통을 감추는 비밀의 커튼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노래야말로 선불교가 석가세존의 핏줄이 아님을 명백하게 밝히는 산 증거가 될 줄은 달마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천년 후에 구름이 태어나서 이 노래의 비밀을 밝혀내리라고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달마는 사람들이 헷갈리기 좋도록 교묘하게 암시와 최면을 걸고 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구절 속에 들어있는 '성불(成佛)'이 그것이다. 이 한 마디 때문에 사람들은 달마의 선이 마치 성불의 첩경인 줄로 깜빡 속고 말았다. 성불. 부처가 되라는 소리다. 그런데 문제는 달마가 말하는 부처는 신선이지, 석가세존이 이루신 부처가 아니라는 점이고, 그 방법이 석가세존이 가르쳐주신 방법과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달마는 직지인심(直旨人心)하여 견성(見性)하면 그 자리에서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헛소리 나발을 불었다. 공부도 필요 없고, 경전도 소용없으며, 근기도 막론이고, 아저씨나, 아줌마나 할배나 할매나, 심지어 개나 소나 전부 자기 마음 하나 척 바로 보고 자기 본성을 척 보면 곧바로 부처된다 이 소리다. 이게 바로 개뿔이고,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다. 그래, 달마 이후 천년 동안 그렇게 해서, 지 마음 하나 척 보고 곧바로 앉은 자리에서 성불한 넘 있으면 함 나와 봐바. 잘난 낯짝 함 보자.
달마는 저런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로 어린 백성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놓고, 사도말법으로 정법을 흐려놓고 지 말에 책임도 안 지고 죽었다. 아주 나쁜 넘이다. 왜냐? 달마는 저 소리에 대해 꼭 해줘야 할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마음을 바로 볼 수 있는 건지, 참된 본성이 무엇인지, 본성을 보면 뭐가 달라지는지, 자기 본성을 본 것과 성불하는 것, 즉 부처가 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각론에 대해서는 입 다물고 벙어리 흉내만 내다가 죽었다. 하기사 교외별전이고 불립문자라 했으니 스스로 그 모범을 보이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법통을 전수해준 혜가한테만 귓속말로 전해줬는지 그건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구르미처럼 알고지비 하는 불쌍한 중생들의 열망에는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후 지금까지 천년 동안 수많은 수행자들이 본성이 뭔지, 마음이 뭔지, 어떻게 보는 건지, 그걸 보고서 우찌 부처가 된다는 소린지 오리야 기리야 영문도 모른 채 달밤에 봉사들끼리 어깨동무하고 불놀이 구경가듯이 더듬더듬 하다가 모진 인생, 허송세월, 도로아미타불로 끝나고 말았다. 지금도 절마다 가봐. 속절없이 억울하게 고생만 하다가 골병이 들어서 뼈마디마다 진주가 생긴 넘들이 다비하면서 남긴 사리가 밤만 되면 기나와서 유령처럼 춤을 춘다. 속고 산 인생, 아니 중생이 서럽고 억울해서.
달마가 저걸 선의 종지라고 척 내농께네 천하의 돌중들이 기립박수를 치고, 환호를 지르고 난리가 났지. 마치 구름이 이번 연말에 '오페라의 유령' 영화보고 감명받은 것 맹쿠로 뻑 가고 자빠진 거다. 왜냐? 공부 안 해도 된다 소리였거든. 그 골치아픈 방대한 경전들을 날마다 디다보고 궁리하고 이해하고 그 이치에 통하려 하니까 안 그래도 근기가 80% 부족한 넘들이 죽을 맛이었는데, 달마 얘기를 들어봉께네 망구에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거든. 척 한 손가락 가리켜 지 마음만 보면 된다 카능기라. 할배 할매, 얼라들까지 난리가 났제. 일자무식 영감 할매도 할 수 있고, 영희도, 철수도 계남이도 할 수 있는 일인게라. 지 마음 지가 보는데 그거 못할 시러배 아들넘이 어디 있겠노? 부처가 되고 안되는 건 두고 볼 일이고, 당장에 마음 디다보는 거야 식은 죽 먹기제. 그래서 너도 나도 팔만대장경을 갇다 버리불고, 그날부터 벽보고 앉아서 눈감고 용을 쓰기 시작했는게라. 그노무 마음이 무엇인지 그거 함 보자꼬. 그런데 달마가 이 어린 중생들한테 미리 워닝을 안 해준 게 있었다. 마음이라 하는 것은, 그것을 한번 보고 나면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벙어리가 된다는 사실을 안 가르쳐 준 것이다. 정말 나쁜 넘이다. 지는 알았으면서 안 가르줬다. 그 후 천년 동안 줄잡아 1만명의 벙어리가 생겼을 뿐 부처는 단 한명도 안 나왔다. 어버버나무아미 벙어리타불


좋다, 달마가 내민 선의 종지란 것이 일리가 있다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달마는 최소한 했어야 할 일이 있다. 저 소리를 하려면 달마 본인은 자기 마음을 척 한번 바로 보고 성불을 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아무리 자비심이라고는 개미 뒷다리 비듬만큼도 없는 사람이라 쳐도 구르미처럼 간절하게 구하는 중생들을 위해서 마음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보라는 본성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도대체 마음을 어떤 방법으로, 어떤 것을 주의하면서, 어떤 부작용을 피하면서, 어떻게 조금이라도 빠르게, 또 쉽게 그것을 볼 수 있는지 설명을 해주고 죽었어야 했다. 그러나 달마는 저 소리만 내질러놓고, 마음이 뭔지도 안 가르쳐줬다. 본성에 대해서 설명도 안했다. 대관절, 마음 속에 있다는 본성이 무엇이관데 그것을 보면 부처가 되는 건지 그 이유도 말을 안했다.
달마가 남긴 저서라고 하는 '혈맥론'에는 이에 대한 이야기가 일언반구도 없다. 그래서 후대의 학자들은 '혈맥론'을 달마의 저작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유일하게 달마의 오리지널 창작으로 여겨지는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도 이에 대한 설명은 없다. 망구에 씨잘떼기 없고 영양가 없는 소리만 지지 늘어놓은 것이 이입사행론이다.
"곧바로 가리켜 한 마음을 보라!" 억수로 쉬운 소리 같다. 그래서 땡중들이 그토록 좋아했던 것인데... 그러나 개뿔, 쉽기는 토끼머리에 뿔나는 게 쉽지, 마음을 보는 게 쉬울 리가 있나. 달마 지부터가 그노무 마음을 보는데 장장 9년 동안이나 벽보고 앉아 있었다는 소리다. 그러면 나 같은 중생은 도대체 몇 년이나 벽을 보고 눈감고 앉아있어야 되겠노? 한 백년 버티면 되겠나? 도대체 마음이라는 물건이 무엇이관데, 그것을 보는데 9년씩이나 그 지랄삥을 떨고 앉았노 말이다. 지는 그랬으면서, 얼레, 남들보고는 아주 쉽게 말한다. 그네 타는 춘향이 고쟁이 훔쳐보는 일 정도 되는 듯이, 한 손가락 척 가리켜 지 마음을 보면 바로 부처니라 하고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를 했던 거였다. 그 마음 하나 보는 일이 팔만대장경 디벼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힘든다는 사실이다. 힘든 건 감수하겠는데 그 지랄염병을 하고도 얻는 게 하나 없는 도로묵 꽝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중들이 이 겨울에 뭐하는지 아나? 동안거한다. 동안거 뭔지 모르지? 선방에 기드가서 봄소식 올 때까지 버티는 거다. 요즘은 그정도 해갖고 중노릇 못한다. 중도 아무나 하나? 요즘은 아주 봉안거라고 최신 시스템이 도입됐다. 아예 선방 문을 밖에서 잠가분다. 그리고 개구멍으로 세끼 공양만 넣어준다. 수행이 아니고, 공부도 아니고 감옥놀이 하는 거다. 부처님이 이 꼬라지를 보시면 기함을 하실 거다. 무슨 노무 마음 하나 보는데 밖에서 방문을 잠가놓고 개구멍으로 밥을 넣어주냐? 차라리 교도소를 가라. 도 �는 데는 그보다 좋은 곳이 없다. 해마다 땃뜻한 봄이 오면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기도 전에 동자승 대갈통만한 자물통을 채워놨던 선방의 문들이 열리면서 까까중들이 기나온다. 그런데 뭘했는지, 그 컴컴한 방구석에서 무슨 지랄염병을 하다가 나왔는지, 봤다는 넘 하나도 없다. 그 수많은 세월을, 그 많은 절마다 선방마다 빼곡 들어차서 마음을 본다나 뭐라나 했으면 한 해에 열댓명은 '왔노라 봤노라 깨쳤노라!'하고 선방문을 걷어차고 중간에 튀나오는 넘이 있어야 될 거 아냐. 그러나 눈물겹게도 우리의 선불교 역사 천년에 그런 넘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해마다 동안거, 하안거, 봉안거가 끝나고 수많은 까까머리가 햇볕 속으로 나오지만 그 중에 본 넘은 없다. 그래 디다보니 보이데? 그 마음이라는 것이 우찌 생겼데? 본성은 뭐하디? 물어보면 다 꿀먹은 벙어리다.
환장할 노릇이다. 그럴거면 그 짓을 뭐하려 하노?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봐라. 부처님 말씀이나 읽고 생각해라. 무슨 뜻인가 궁구해서 이치에나 통할 생각을 해라.
달마가 해놓은 짓이 이거다. 내말 틀리나? 마음을 봐? 지랄한다캐라. 미련곰탱이 콘테스트고, 깡다구 올림픽이지 그게.


 달마교는 부처가 아니라 시시껄렁한 말장난의 대가, 조사들을 만들어냈다. 이 조사라는 물건들이 뭔가. 승복을 입혀놓은 도사들이다. 염불을 하는 신선 후보생들이다.
이 물건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혜능이라는 작자이다. 선불교의 땡중들이 중국 역사 1만년에 최고의 지혜로 꼽는 사람이다. 이 혜능은 스스로 자기의 깨친 바가 달마의 그것과 일치하노라 했다. 불제자라면 당연히 자기 깨우침이 석가세존과 같은 것이라 해야 하는데, 이 사람은 달마와 일치한다고 말했을 뿐 석가세존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한다.
이 혜능이 선종의 6대조로 등극하사, 높디높은 단상에 주장자를 짚고 앉아 온 법당을 가득 메운 어린 중생들을 굽어보시며 '내가 너희들의 눈 앞에 극락을 펼쳐 보이리라."하시면서 거룩한 한 말씀 설법하신 내용이 6조단경에 전한다. 이 황당무계한 말장난의 백미를 같이 감상해 보자.
6조 선사 왈,
"사람의 육신이 하나의 성(城)이요, 눈, 귀, 코, 입이 네개의 문(門)이다. 이 성 안에는 마음이 주인으로 자리하고 있어 주인에 따라 평화를 누릴 수도 있고 전쟁을 일삼을 수도 있다. 기쁜 잔치를 벌릴 수도 있고, 슬픔에 겨운 목마름이 더해질 수도 있다. 이 마음의 주인이 현군이면 성안이 태평하여 극락세계의 안락을 누릴 것이요, 이 마음의 주인이 폭군이면 성안이 나날이 불안해 지옥세계의 고통을 느낄 것이다. 사람들은 항시 밖으로만 구하나 눈, 귀, 코, 입, 몸과 뜻을 잘 다스려 길들이면 이 몸이 서방이 정토요, 이 마음이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임을 알지 못한다. 나를 떠나서는 행복과 불행도 없고 기쁨과 슬픔도 없는 것이다. 이 마음의 작용이 극락도 만들고 지옥도 만든다.
마음에 등불을 밝힌 자는 어둠 속에서 헤매이지 않아 극락세계에 있는 것이요, 마음에 주림과 목마름만이 있는 자는 스스로 지옥의 고통을 지어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마음 속의 부처, 마음속의 극락세계를 잘 보존토록 하라. 마음 밖에는 한 법도 없기 때문이다."
어떻노, 지기제? 이 문디손을 불제자라 말할 수 있겠나? 저 법문에서 극락세계를 무릉도원으로 바꾸고, 부처를 신선으로 바꾸면 딱 도교의 강설이다. 신선술의 요점이다. 그러나 불교하고는 거리가 만리나 떨어진 삿되고 요망한 소리다. 저 혜능의 요설은 석가세존의 가르침과 완전히 배치된다.
"마음 밖에는 부처가 없으니 오직 마음이 부처이다." 혜능의 이 소리는 그가 얼마나 불교를 모르고, 부처가 무언지도 모르고, 마음이 무언지를 모르는 지 잘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혜능은 사이비 도사지 승려가 아니다. 달마 역시 마찬가지.
저 해괴한 헛소리가 무얼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달마가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고 엉뚱한 소리를 해댄 데다가 혜능이 '마음 밖에 부처가 없으니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해괴한 소리로 맞장구를 친 바람에 석가세존 팔십년의 설법이 도로아미타불이 되버렸다. 부처님의 간곡하고 절절했던 가르침이 고마 하루아침에 무색해져 버리고 말았다. 말법으로 정법을 가리고 사도로 정도를 흐린 달마와 혜능의 죄는 성철의 말마따나 수미산보다 크고 항하수 보다 깊다.
육신이 성이요 눈, 귀, 코, 입이 대문이라? 그 안에 마음이라는 주인이 있다고라? 하하하하하하하, 부처님이 관 속에서 두 손바닥을 내 보이실 판이다. 잘 주무시는 부처님이 기여코 부활을 해서 창에 찔린 겨드랑이와 못이 박힌 손바닥을 보여주셔야 정신을 차리겠나?
달마와 혜능이 노는 꼬라지는 먼 훗날 데카르트 수준에도 못 미친다. 근대 서구가 나은 최고의 철학자라는 데카르트가 평생 동안 온갖 것을 의심하고 의삼해 본 나머지 오직 하나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자기가 생각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나발을 불었다. 이 유명한 철학적 명제는 그러나 참이 아니다. '나는 생각한다'는 전제가 참이면 '나는 존재한다'는 결론이 참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는 전제는 참이 아니다. 이게 참이라면 부처님의 삼법인은 그 봉인을 뜯어서 스레기통에 처넣어지고 만다. 만약에 데카르트가 조금만 더 생각할 줄 알았더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더라면, 불교를 배웠더라면 저런 유치한 나발은 불지 않았을 것이다. 저 명제에 대해서는 이미 2천5백년 전에 부처님이 결론을 내려주신 바가 있다. 부처님의 말씀이 정답이다. 부처님은 명백하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이게 제법무아이다. 생각하는 나가 있다면, 마음이라는 주인이 과연 있는 것이라면 삼법인은 날구라다. 꽝이다. 불교 전체가 한순간에 무너진다.
만약에 데카르트가 옳고 부처님이 틀렸다면 구름은 실존주의 철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달마와 혜능이 맞고 부처님이 틀렸다면 나는 달마교의 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데카르트가, 달마가, 혜능이 부처님보다 더 생각을 똑바로 한 넘들이었을까? 천만의 말씀이요, 만만의 콩떡이다. 부처님 발바닥에도 못 미치는 중생들이다. 과연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하는지, 생각하지 못하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따져 보자.


한국기독교총회에는 이단을 조사하고 판정하는 기구가 있다. 이 기구는 어떤 종파가 이단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조사항목들을 가지고 있다. 그 항목들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이단으로 판정을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일까? 기독교가 기독교일 수 있는 본질적 항목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사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땅에 온 메시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메시아 예수, 창조주의 독생자 예수를 부인하면 다른 어떤 조건을 갖추었더라도 그건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의 배다른 아들들을 자꾸 만들어내면 그건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 아들은 한명 뿐이다. 오직 예수다.
그렇다면 같은 이치로 무엇이 불교인가 생각해 보자. 불교의 가장 본질이 무엇인가? 그것은 부처님의 최종 결론인 절대진리, 삼법인을 깨우치는 것이다. 이 삼법인 속에 불교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이것으로서 불교는 이 세계의 실상과 나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법인과 배치되는 소리를 하는 철학이나, 종교나, 단체나, 문파는 무조건 불교가 아니다. 때문에 선불교는 당연히 불교에서 제외된다. 달마나 혜능이 떠든 소리들은 비록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지만 한가지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선불교의 교리는 제법무아가 아니라 제법유아를 따른다는 사실이다. '마음 속에 부처가 있다'고 주장하면 이미 이것은 반불교적 주장이며, 비불교적 철학이다. 그 외의 것은 돌아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마음 속에는 부처가 없다. 그리고 마음이라는 것도 없고, 마음이 주인 행세를 하는 나라는 성도 없다. 생각은 홀로 있으나 그 곳에 '생각하는 나'는 없다.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불적이며, 이단이며, 사이비다.
달마와 혜능이, 그리고 선불교가 왜 이단인가 계속해서 살펴보자.


 달마의 '견성성불'을 풀어서 설명하면, 사람-아니 미물들을 포함한 모든 중생의 마음 속 깊은 어디인가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성이 있으므로, 누구나 자기 마음을 바로 보고 이 본성을 발견하면 바로 부처가 될 수있다는 소리다. 여기서 본성(本性)이라는 말은 본래자성(本來自性)의 준말이다. 부처님이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에는 그것이 없으니 이 진리를 '제법무아'라 하느니라 하시고 도장까지 꽝 찍어서 시비를 할 수 없도록 선반 위에 올려버리신 바로 그 자성이다. 그런데 달마와 혜능은 사람의 마음 속에 이런 본성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 본성은 청정하고 깨끗해서 그 자체가 부처이기 때문에 누구나 이것을 찾아 발견하기만 하면 부처가 된다고 했다. 부처되기 너무나 쉽다. 쉬운건 좋은데 과연 우리 마음 속에 그런 본성이라는 것이 있느냐가 문제다.
석가세존은 우리 마음 속에 그런 얄구진 물건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아 안 사람이 부처라고 가르쳤는데, 달마와 혜능은 '아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본성이 있다. 그리고 그것의 본래 진면목이 바로 부처다'라고 나발을 불었다. 어느 쪽 말이 옳은 것일까? 과연 마음 속에는 본성이 있나? 그것을 발견한 넘이 있나? 그 본성은 어떻게 생긴 물건인가? 과연 불성인가?
원래 진리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만가지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이 나와야 진리다. 진리임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허위, 오류, 진리가 아닌 쌩뚱스러운 강짜들은 한걸음만 더 나가서 물어보면 콱 막히고 만다. 사람의 마음 속에 불성이 있다고 뻥을 쳐놓으니까 당근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된다. "그럼 개한테도 불성이 있습니까?" 원래 불성이라는 자체가 뻥이었기 때문에 개의 불성에 이르면 대답이 콱 막혀버리고 만다. 그래서 있다 했다가 없다 했다가 횡설수설로 도망다니게 되는 것이다. 첫단추가 잘못 꿰어진 옷이 끝에 가서 맞을 리 없다.
개한테 불성이 있냐고? 그렇게 묻는 너한테는 불성이 있을 거 같으냐? 니는 딴에 사람씩이나 되니까 불성 같은 고상한 물건을 달고 태어난 걸로 생각되는 모양이지.
좋다, 그노무 본성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지 한번 찾아보자.


 우리가 꼬인 실타래를 풀려고 하면 우선 실의 끝을 찾아야 한다. 그것을 실마리라고 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몇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나는 어떤 대상이던지 그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그것의 첫 시작점이 어딘지부터 본다. 선불교가 무엇인지 알려면 그것이 최초에 누구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먼저 보아야 한다. History는 모든 Story의 실마리다.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의 시작이 어디였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내가 나의 마음이라고 알고있는 것이 처음 생긴 것이 언제였는가부터 생각해 보자. 내 마음이 언제 이 세상에 나타났나 이 말이다. 일곱살 때 생겼나? 아니면 돌잔치할 때 선물로 얻었나? 아니면 백일 잔치때 내가 잔치상 위에서 거머쥐었나? 아니면 어머니 뱃속에서 생긴 것인가? 그렇다면 그 중에서도 언제쯤인가? 아버지 몸 속에서 튀어나온 한마리 벌레일 때 내 마음은 그때부터 있었을까? 어머니 몸 속에서 수정되었을 때 생겨났나? 아니면 세포분열이 시작되서 몸통과 사지가 생겨나고 대글빡 속에 뇌라는 것이 만들어졌을 때 생겨났나? 그렇다면 뇌가 어느 정도 완성되었을 때 마음이라는 것이 있게 된 것일까?
혜능이 말하기를 이 육신은 성이요, 눈, 귀, 코, 입은 대문이요, 마음이 주인이라고 했는데 도대체 나라는 성은 언제 완성된 것이며, 그 주인인 마음은 어느 단계에서 입성해서 주인노릇을 하기 시작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것이 실마리다. 이 실의 끝을 잘 잡고 따라들어가면 본성이 있는지 없는지, 마음에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불성이라는 넘이 언제쩍에 내 마음 속에 깃들었는지 그걸 알 수가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눈감고 벽보고 앉아서 마음 속을 헤집다가 찾은 게 아니다. 이와 같이 모든 세상이치에 대해 실마리를 잘 찾아서 그것을 끈기있게, 정연하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따라가신 끝에 찾은 답인 것이다. 눈감고 지릴염병하다가 쪼대로 씨부리는 말장난이 아닌 것이다.
각자 생각해 보시라. 내 마음이 언제 생겨난 것인지. 언제부터 내가 마음을 갖고 살았는지.,,


 내가 처음으로 마음을 갖게된 싯점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뇌라는 것이 생기기보다 이전은 아닐 것이다. 뇌가 처음 생기자마자 나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 나의 뇌를 구성하는 수억개의 뇌세포 중에 최초의 하나가 맹렬한 속도로 분열하고 있는 세포덩어리의 한 귀퉁이에 생겨난 그 찰나에 그 하나의 뇌세포에 마음이 생겼을까? 그건 아니지 싶다. 조금 더 뒤로 밀자. 아마도 뇌라는 것이 최초의 어떤 정보를 처리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떨까? 약간 신빙성이 생길라 한다. 최초의 뇌가 최초로 처리하기 시작한 정보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최초로 생기기 시작한 육신과 정보기관에서 들어오는 시그널들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처음에 그것은 아마도 테스트 시그널로서 한번씩 뇌세포를 자극하고는 사라지고 또 건들여보고 없어지고 했을 것이다. 감각이라는 정보라기에는 너무나 단편적이고 정보의 양이 적어서 무엇인지도 해독하기 곤란한 희미한 신호들이 온 육신과 생기기 시작한 불완전한 감각기관들로부터 아직은 효율적이지 못한 신경망을 따라 흘러들어와서 뇌세포를 자극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자극들에 반응하여 마음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원시적이고 기초적인 어떤 사념이 조그만 핏덩이의 내부에서 움트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마음의 탄생이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서 이 마음은 점점 더 많아지고 빨라지는 정보의 흐름 속에서 보다 체계화되고 유기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주변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와 어머니의 창자 속을 음식물이 통과하면서 내는 천둥같은 소리들이 우주의 반대편에서 전해오는 태초의 소리처럼 아련하게 생기기 시작한 고막을 울리고 그 소리는 뇌에 전해졌을 것이다. 온 몸의 피부에 신경조직이 연결되고 촉감세포가 자리를 잡으면서 자궁 속 양수의 따뜻함이 뇌에 전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몸통에 머리가 생기고 팔다리가 자라면서 눈, 코, 귀, 입의 형태가 생기면 유전자의 명령은 보다 명료한 형태로 마음의 일부로서 스며들어오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의 크기가 엄마의 엄지 손가락만 하게 되면 나의 마음은 유전자의 명령을 받아들여서 나라는 것에 집착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만약에 나의 부모가 나를 없애버리려고 결심해서 산부인과 의사선생님의 무시무시한 기구가 다가오면 나는 겁이 나 자궁 속에서 도망치려고 발버둥도 칠 것이다. 이쯤 되면 마음이 생겼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살려고 하는 생의 집착이 있고,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존재라면 마음이 있으리라고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자,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누가 이 일련의 과정을 주도했는가 하는 점이다. 최초의 소리가 최초의 고막을 통해서 최초의 뇌에 전달되게 만든 것은 누구였을까? 나라는 주인이 있어서 그렇게 결심하고 행했나? 최초의 마음은 어느 마음이 있어서 일으켰는가? 첫마음이 일어나게 만든 주인은 누구인가?
아무도 없었다. 마음은 누가 불러 일으킨 것도 아니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느날 홀연히 지 혼자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마음이 나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마음이 생기기 전에는 내가 없었다는 소리다. 열심히 엄마 몸에서 영양분을 빨아대면서 무섭게 성장하고 있던 핏덩어리는 그러면 뭔가? 그건 내가 아니고 내 껍데긴가? 마음이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있었다. 이미 있는 나한테 어느날 마음이라는 것이 생겨난 것이다.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눈깜짝할 사이에 마술과 같이 솟아오른 것이다. 나의 의사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생겨난 것이 내 마음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물건도 아니었다. 나하고는 관계없는 생소하고 낯선 놈이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나라고 생각하고 산다. 내가 생각하면서 산다고 믿는다. 이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착각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마음을 잘 들여다보면 어렵지 않게 한가지 결론을 얻게 된다. 생각은 저절로 솟아나서 지혼자 움직이는 것이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는 있지 않다는 사실을.

실마리의 끝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쥐고 한발 한발 더 따라가 보자.


최초의 생각이 무엇이었던 그것을 불러온 것이 내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 내가 나의 첫 생각을 불러왔다면 불러온 생각이 있기 때문에 불려져온 생각은 결코 첫생각이 아닌 때문이다. 나의 첫번째 생각은 생각이라 말하기도 어려운 생각의 티끌이었을 것이다. 이 티끌이 한번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한참 지나서 또 하나가 생겼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하면서 점차 이 티끌이 급격하게 불어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래서 보다 구체화된 생각이라는 것을 이루게 되었는데, 최초의 티끌 하나는 내가 부르지 않았다. 나는 결코 나의 첫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냉 생각이라는 티끌이 하나 생겼다가 사라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두번째 티끌을 내가 부른 것이냐? 그것도 아니다. 두번째 티끌도 그냥 왔다가 사라져갔다. 그렇다면 도대체 몇번째 생각부터 내가 한 것인가? 어느 생각부터가 내가 불러오고, 내가 한 생각이 되는가?
지금 이 순간 그대가 하고 있는 생각은 그대가 불러온 것인가? 그대가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과연 그런가?
숭산이 자주 묻기를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가?'라고 하는데, 생각을 그대가 하는 것이라면 그대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다. 고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은 그대가 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대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 혼자 올라오는 생각을 그대가 무슨 수로 올라오지 못하게 할 것인가? 그대가 하지 않는 생각을 어찌 그대 마음대로 할 것인가? 생각을 그대가 할 수 있다면 그대는 이 세계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만약에 마음이라는 것이 그대 가슴 속 어딘가에 깊이 숨겨져 있고, 그 마음이라는 것이 생각을 불러오고, 그 생각을 하는 것이 그대라면, 나는 단 1분내에 당신을 지금의 당신이 아닌 전혀 다른 당신으로 바꾸어 줄 수 있다.
나에게 주사기 하나와 히로뽕 0.01mg과 당신의 팔뚝에 그것을 주사할 수 있는 권한과 면책만 준다면 나는 당신을 완전히 바꾸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장담한다. 히로뽕이란 화학물질이 당신의 혈관을 타고 흘러들어가 뇌의 어떤 부분을 자극하는 즉시 당신은 지금까지 하던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신은 지금까지의 마음을 버리고 전해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된다.
조울증 치료제 한두알만 먹어도 당신은 달라진다. 두뇌에서 분비되는 몇가지 화학물질의 량을 약간씩 달라지게 만드는게 이 약들의 효능이다. 당신을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데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당신은 고작 그 정도 밖에 안되는 존재이다. 당신의 정체성이란 주사 한방이면 무너진다. 당신이 만약에 남자라면 다리 사이의 구슬 두개만 똑 떼어불면 그날로 당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만다. 당신의 마음 속에서 공격성은 사라지고 용감성과 투쟁심도 눈녹듯 사라진다. 당신이란 그 구슬 두쪽에서 분비되는 호로몬의 피지배물이다. 이런 당신의 어디에 본성이 있으며, 어디에 불성이 있고, 어디에 견실심이 있다는 소린가?


반제의 제왕이라는 어드벤쳐 영화는 다분히 불교적인 테제를 담고 있는 영화이다. 이 책과 영화의 성공에는 그것이 작용한 바가 컸다. 반지의 제왕은 한가지 파격으로 어드벤처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주인공인 반지 원정대가 무엇을 찾거나 얻으려고 떠난 모험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버리기 위해 떠나는 여행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반지원정대의 목적은 잃어버린 성궤를 찾는 것도 아니고, 초절정무공의 비서를 훔치기 위함도 아니고, 나치가 숨겨놓은 금궤를 찾자는 것도 아니다. 반지원정대의 목적은 오직 하나 악의 반지를 그것이 두번 다시 세상에 출현할 수 없도록 용암이 끓는 골짜기 속에 던져버리기 위함이다.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의 테마는 바로 불교의 그것과 같다. 불교라는 여행의 목적은 버리자는 것이다. 얻고, 구하고, 찾는 데 목적을 둔 여행이 아닌 것이다.
생각해 보라, 반지원정대가 왜 죽음을 무릅쓰고,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치면서, 수많은 마귀들과 괴물들과 싸우면서 그 여행을 해야만 했는지. 그들이 그 괴롭고 긴 여행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는지. 그것은 바로 하나 뿐이다. 바로 '반지'에 대한 지식이다. 이 반지가 무엇인지, 이 반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세상에 출현했는지, 이 반지가 세상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버려야 한다고 깨달았고, 그 깨달음이 그들을 여행에 나서게 만든 것이다. 만약에 이 반지가 무엇인지를 몰랐다면 그들은 그냥 예쁜 장신구를 하나 줏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손가락에 끼고 즐거워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해서 그들은 악의 일원이 되었겠지만 그것은 나중 문제이다.
이것이 바로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순서이다. 우선 급한 것은 반지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이다. 공부로서밖에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반지란 우리 자신이며, 우리의 마음이다. 부처님은 이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그것을 왜 버려야만 하는지, 왜 반지를 끼고 싶은 유혹, 즉 나라는 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끊고 잘라야 하는지 설명해 주셨다. 그 설명을 먼저 잘 듣고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이 이해되어야만 우리는 이것을 버리기 위한 여행에 나설 수 있다. 그리고 그 여행의 도중에 겪게 될 어떤 어려움과 위험과 고난이 있더라도 그것을 이겨내고 극복해나갈 신념과 의지가 바로 그것에서 생기는 것이다. 앎, 즉 깨달음이야 말로 나를 버리는 데 필요한 힘이 나오는 유일한 원천이다. 알아야 버릴 수 있다. 뭔지도 모르는데 왜 버리며, 왜 그런 힘든 여행을 하겠느냐 말이다.
그런데 달마나 혜능은 이 순서를 뒤집고 여행의 목적을 바꿔버렸다. 그들은 버리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구하기 위한 여행을 가자고 중생들을 유혹했다. 사르곤의 골짜기에 가면 절대반지라는 보물이 있다. 그것을 찾으러 가자고 사람들을 꼬셨다. 그 사르곤의 골짜기는 마음이라는 곳이며, 절대반지는 본성, 즉 불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찾기 위한 원정의 여행이 바로 선이다. 그러나 그 후 천년 동안 절대반지를 찾으러 떠난 수많은 사람들은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 그 원정들은 모조리 실패했으며, 골짜기 마다 들판마다 시체와 뼈다구만 즐비하게 늘려있게 만들었다. 애당초 있지도 않은 절대반지라는 황당한 물건을 있다고 믿은 죄과였다. 이게 달마와 혜능이 지은 죄다.
구하여 찾을 것인지, 집착을 끊어 버릴 것인지를 결정하려면 먼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여기까지는 행의 차원이 아니라 식의 단계이다. 먼저 공부하고 배워서 알아야 하고, 그 다음에 행해야 한다. 그래야만 행이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불립문자입네 하고 눈감고 앉아서 지랄염병을 먼저 떤다. 버려야 네가 산다고 그토록 부처님이 일러주셨거마는 일마들은 몸부림을 치면서 찾아 헤맨다. 불쌍한 넘들. 나무아미 타불이다.


달마와 육조선사의 어록에 뿅가는 사람이 있다하여 괴이할 일은 없다. 달마나 혜능의 말은 그 정도 수준과 차원에서는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을 수 있다. 달마나 혜능의 선을 행하여서도 무엇인가 얻을 것은 있을 것이다. 절대반지는 결국 발견하지 못할지라도 그 여행에서의 체험과 견문은 아니함만보다는 나은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달마와 혜능이 사람들한테 떠들어 주장한 내용의 가치를 평가하거나 그것들의 무가치함을 주장하려는 의도로 이 글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제목이 그러한 것처럼 이 글의 목적은 달마와 혜능이 주장한 것이 석가세존의 가르침과 전연 다른 것이라는 것을 밝히는데 있다. 어느 쪽이 더 가치로운 것이냐는 다음 문제이고 우선은 그 이질성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달마나 혜능이 승복을 걸치지 않고, 부처님의 집인 절에 기들어오지 않고, 저거가 도�던 토굴이나, 아니면 도관에서 자기들의 깨친 바를 사람들에게 설했다면 나는 달마를 보고 죽일놈 살릴놈 할 이유가 없다. 노자가 석가세존하고 다른 소리를 했다고 노자를 욕할 이유가 있겠나? 노자의 말씀 중에서도 가치로운 것은 배우고 얻어야 한다. 문제는 노자나 장자가 승복을 입고 절에 기들어와서 도인술을 불법인 것처럼 위장 강설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달마는 달마교라는 별도의 종단을 만들었어야 옳았다. 선교라 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을 '선불교'라고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구름이 시비를 가리려 하는 것이다. 혜능이 동선사에서 쫓겨나갔으면 절 밖에서 사람을 모아 혜능교나 견성성불교나 마음교나 일심교나 관심교를 창시했으면 구름이 시비할 일이 없다. 그런데 기여코 중도 아닌 것이, 불교도 모르는 인간이 다시 절로 기들어와서 못난 땡중들을 상대로 사기를 쳐서 기여코 불교의 법당 속에 또아리릍 틀었다는 사실에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달마교나 마음교 좋다. 얼마던지 믿고 따를 가치는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게 옳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이 따라가면 된다. 단, 불교라는 소리만 하지 말라. 부처님 말씀하고 전혀 다른 소리를 씨부리면서 불자라고 행세하지 마라.
왜 부처님께 귀의하고자 발심해서 출가를 한 젊은 승려들에게 종단을 점령한 늙은 도사들이 중질이 아니라 도사질을 시키느냐 이 말이다. 오늘날 이 순간에도 한국불교의 수많은 사찰마다 아까운 인재들이 멋도 모르고 사악한 도사놈들 밑에 들어가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도사 수련을 하고 있고, 도사질을 하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전부 자기가 하는 짓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 짓을 한다는 사실이다. 자기들딴에는 불법을 수행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실로 통탄할 범죄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저 불쌍한 중들을 도사질의 질곡으로부터 구해내는 것보다 더 시급한 불법의 중흥이 어디 있겠나. 한국의 중들은 달마와 혜능이라는 앵벌이조직의 왕초한테 사로잡혀서 그들이 지 부모라고 믿고 열심히 앵벌이짓 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들에게 그들의 참부모는 따로 있다는 것을 가르쳐줘야 한다. 석가세존이 아버지고 용수보살이 어머니다.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이모들이다. 이들 자애로운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악한 앵벌이 왕초들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일마들을 패죽여야 된다. 달마를 죽여야 불교가 산다.


 저작권이 달마에게 있다고 인정되어지는 것은 이입사행론 정도이다. 이입(二入)이란 진리(도)로 들어가는 문이 두가지 있다는 견해다. 하나가 이입(理入)이고, 또 하나가 행입(行入)이라는 것이다. 달마의 견해에 따르면 '이입'이란 이치에 통달하고 진리를 깨달음으로서 들어가는 길이고, '행입'이란 실천을 통하여 들어가는 길이라는 것인데, 이 행입에는 네가지가 있어서 이를 사행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달마는 주로 이 네가지 실천으로서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강조하여 벽관(壁觀)을 주장했다. 번뇌를 초탈해서 참된 성품으로 돌아가려면 마음을 다스려야 하고, 마음을 다스리려고 하면 벽관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벽관을 통해 참마음을 꿰뚫어 보면 범부와 성인이 하나같이 평등하다는 것이다.
이 벽관이라는 실천의 요체가 바로 4행인데, 그것은 보원행(報怨行: 증오의 과보를 갚는 행), 수연행(隨緣行: 인연에 따르는 행), 무소구행(無所求行: 구하는 바가 없는 행), 칭법행(稱法行: 진리에 따라서 살아가는 행)의 4가지이다.
석가세존이 설명하신 부처가 되는 길, 즉,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씨리얼적이라면, 달마의 그것은 패러럴적이다. 석가세존은 'and'이고, 달마는 'or'이다.
자, 어느 쪽이 맞는지 한번 보자. 우리가 길 가다가 지갑을 하나 주었다고 치자. 이 지갑을 열어보고 그것이 빈지갑이라면, '재수 옴 붙었군' 하고 그냥 던져 버릴 것이다. 만약에 그 속에 빼곡하게 지폐가 가득차 있으면 우리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걸 경찰서에 가져다 줘야 하나, 인 마이 포켓을 해버릴까. 횡재한 김에 친구들 불러서 한턱이나 쓸까? 마누라 목도리라도 하나 사들고 집에 갈까?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자, 일의 순서는, 지갑을 줏은 것이 먼저고, 그 지갑 안에 뭐가 들었는지를 보는 것이 둘째고, 그 속에 뭐가 들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그 다음이고, 버리던지, 파출소에 갖다주던지, 그걸로 잘 쓰고 놀던지 행하는 것은 알고 난 다음의 일이 된다. 이게 씨리얼적인 진행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and'...'and'이다.
그런데 달마의 말 대로라면 진리에 이르는 길은 지갑을 줏는 것과, 그것을 열어보는 일과, 그 속에 든 것을 아는 일과, 버리거나 갖는 일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소리가 된다. 지갑을 열어보던가, 버리던가 하는 것의 선택이다. 열어보지도 않고 파출소에 갖다주는 격이다. 줏지도 않았는데 그걸로 한턱 쓰는 셈이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이입과 행입이 'or'로써 병렬될 수 있나? 이는 행의 이유이다. 이유없는 행이 어떻게 가능하나? 이입없는 행입이 어디서 나온다는 말인가? 진리에 이르는 길은 이입 후에 행입으로 순차적으로 가는 것이지. 이입이나 행입 중에 선택하여 가는 길이 아니다. 이입과 행입은 동시에 진행될 수도 없다. 그 순서가 바뀌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보다 앞선 행은 무분별한 짓이 된다. 이유없는 반항이다. 몰라서 짓는 죄다.
달마의 주장하는 바가 이와같이 해괴하여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백팔십도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갑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도록 하자. 길에 떨어진 지갑을 보고도, 혹시 그 속에 거액의 현찰이 들어있는 지갑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것은 내것이 아니니' 하고서 그냥 지나쳐가는 사람을 누가 부처라고 말했는데, 그건 약간 모자른 생각이다. 부처는 어떤 사람이냐, 지갑을 줏어서 열어보고 그 지갑이 빈지갑이며, 지갑 자체도 낡고 헤어져서 누군가가 버린 물건임에 틀림없다면 그것을 가지고 가다가 쓰레기통에 넣는 사람이 부처이다. 길바닥에 그런 쓰레기가 떨어져있다면 줏는 것이 부처지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부처가 아니다. 만약에 그 속에 돈이 들어있다면 이 지갑을 잃어버리고 애타 할 원주인을 생각해서 파출소나 분실물 신고센타에 갖다가 안전하게 맡기고 자기 길을 갈 것이다. 이것이 부처다. 그냥 길에 두고 못 본척 해버리면 원주인이 돌아와 되찾을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횡재했다고 생각할 행인이 줏어갈 확률이 더 높다는 정도는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부처이기 때문이다. 자기 눈에 뜨인 이상 원주인에게 돌아가게 해주어야 한다는 자비심을 실천하는 사람이 부처이지 못본척 지나가는 사람이 부처가 아니다.
지갑을 줏어서 열어보지 않으면 올바른 실행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 비유에서도 잘 알수 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사람, 이런 사람은 얼핏보면 한경지에 간 것 같지만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다. 쓰레기가 길에 떨어져 있어도 내 일이 아니면 줏지 않는 사람이요, 돈이 든 지갑을 보고도 그 주인의 애타는 마음을 생각지 않는 사람이다. 길에서 땅에 떨어진 지갑을 보거든 무엇인지 알려하지 말고 눈감고 지나가라고 가르치는 것이 달마이고 혜능이다. 그것을 주워서 속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하고 그 앎에 기초해서 올바르게 행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석가세존이다.


부처님은 29세 때 가출하여, 35세에 정각을 얻으시고 세수 80에 열반에 드셨다. 깨달음을 얻으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45년을 더 사셨다.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해탈하신 후 열반하실 때까지 무엇을 하며 사셨을까? 왜 이 질문을 하느냐 하면 석가세존이 해탈후에 무엇을 하셨는지를 살펴보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지침 내지는 최소한 중요한 참고사항이 되기 때문이다.
석가세존은 정각해탈을 이루신 후 입적하실 때까지 오직 한가지 일밖에 안하셨다. 삼시 세끼 공양드시고, 세수하시고 화장실 가시고 주무시는 외에는 명상과 설법뿐인 생활이셨다. 이미 깨달으신 분이 무얼 더 알려고 그리 골똘하게 생각하셨을까? 내가 생각하기로 그것은 두가지였을 것이다. 깨달음에 살을 붙이고 미비한 구석구석의 각론을 채워 완성하시는 작업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당신께서 얻으신 정각을 사바중생들과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명료하고 알기쉽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한 궁리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두가지를 생각하시는 시간 외에는 거의 제자들과 대중들과의 대화와 설법이었다. 부처님이 얼마나 설법에 열심이셨는지는 마지막 돌아가시는 그날도 설법을 해주기로 한 마을로 걸음을 옮기시다가 그 직전에 드신 음식이 잘못되어 혈변을 쏟으시면서 쓰러지셨다. 그 몸으로도 설법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축을 받으시면서 힘겨운 걸음을 내딛으시다가 기여코 혼절하시고 만다. 쓰러진 부처님을 수행하던 몇사람이 급히 만든 들것으로 마을로 운반하였고 그 마지막 설법의 장소에서 부처님은 숨을 거두셨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세월이 흐르자 부처님이 하신 설법의 내용들이 점차로 기억이 희미해지고 저마다 살려내는 내용에 차이가 생기는지라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제자들이 모여서 부처님 생전의 기억을 서로 맞추고 확인해서 글자로 옮겨적은 것이 불경이다. 그래서 불경은 여러 제자들이 기억하는 내용이 일치하는 것과, 글자로 기록할만큼 가치가 크다고 생각되는 법문의 내용만을 우선 선별해서 기록한 것이다. 아주 짧았으면서 제자들의 수도 많지 않았던 예수님의 생애와는 달리 부처님은 45년 동안 설법을 하셨고, 제자들의 수도 1천2백55명에 달했는데다가, 흠모하여 따라다닌 일반 대중의 수까지 합하면 엄청나게 많은 군중 속에서 생활하신 분이라 45년 동안 매일 같이 하신 말씀과 사람들과 나눈 대화는 글자로 다 적는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양이 될 것이다.
부처님은 45년 세월 동안 문 걸어잠그고 몇년씩 안 나오신 적도 없고, 제자들을 골방에 처넣고 밖에서 자물통으로 잠그는 무식하고 잔인한 짓을 하신 적도 없고, 몇달 몇년씩 말을 안하는 묵언수행 같은 것을 하시지도 않았다. 일단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는 여늬 스승님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하셨다. 공자나 소크라테스의 일상과 거의 다른 점이 없다. 공자나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도 부처님만큼의 명상하는 시간은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명상의 성격도 비슷한 것이었다. 마음을 디다보고 본성을 찾는답시고, 벽앞에 몇달 몇년씩 앉아서 화두를 들고 용을 쓰는 그런 짓을 하신 적이 없다. 부처님의 삼매경이란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얼음처럼 차갑고 거울처럼 투명한 사색에 잠기어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색의 산물들은 제자들과의 대화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다 나왔다.
석가세존은 평생 말로 설명하고 가르친 강사로서 일관하셨지 입다물고 눈감고 돌아앉아서  선사짓을 하신 게 아니다. 이런 석가세존으로부터 시작된 불교를 공부하고 그 가르침을 구하는 제자들의 입에서 어떻게 불립문자가 나오며, 교외별전이란 망발이 나올 수가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진리라는 것이 아는 자에게는 설명할 필요가 없고 모르는 자에게는 설명해도 소용이 없으니, 각자가 지 스스로 깨칠 따름이라 하는 삿되고 요망한 소리가 나올 수 있나? 그런 소리는 오로지 사바 대중을 향한 간절한 설법으로 한평생을 살다가신 석가세존에 대한 모욕이며, 그분의 생애에 대한 먹칠이다.
이런 자들이 말법의 종자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달마와 혜능이 어찌 석가세존의 제자들일 수 있다는 소린가?


내가 앞에서 마음의 시작을 설명할 때에 누군가가 지적을 해주겠지 기대하면서 사리에 맞지 않는, 그러나 대단히 본질적인 오류를 적시해놓고 넘어왔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것을 알아채고 지적해주신 벗님이 없었다. 사실 비판은 그런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 올바른 비판이다. 옳은 소리, 맞는 말, 이미 참인 것이 밝혀져 있는 전제를 가지고 시비를 하는 건 비판이 아니라 땡깡이고 시비다.
나는 앞에서 나의 마음이 처음으로 생긴 시점을 태중에서 뇌라는 기관이 생기고 감각기관이 형성되기 시작할 무렵의 어디 쯤으로 상정해서 말씀드렸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육신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만들어져가는 과정 중의 어느 순간이라고 짚더라도 틀린 것이다. 임신 후 6주쯤이라 해도 틀리고, 8주 쯤이라고 짚어도 틀리고, 2개월쯤으로 겐또를 쳐도 틀리고, 6개월 정도로 잡아도 틀린 건 마찬가지다. 마음이 처음 생긴 시점이 임신후 8개월 쯤이라는 주장이 틀리다면 8주쯤이라 주장해도 틀리는 건 마찬가지다.
원래 없던 마음이 어느 순간 생겨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오류이다. 마음이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수정되던 그 순간에 없었던 것이라면 임신 4주째에도 없는 것이어야 맞고, 임신 3개월째에도 없어야 맞고, 임신 9개월 째에도 역시 없는 것이 맞으며, 출산 직후에도 없어야 하고, 백일 때도 물론이며, 돌잔치 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나이가 마흔을 넘긴 현재에도 나에게 마음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 맞다.
만약에 지금 나에게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면 역으로 소급해서 어머니 배 속에서 막 세상으로 나왔을 때도 마음은 있었어야 하고, 어머니 태중에 있던 열달 동안 내내에도 마음은 있었어야 한다. 수정되던 그 순간에도 역시 마음은 있었고,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로 분리되어 있던 그 순간에도 정자의 마음과 난자의 마음으로 존재했어야 한다. 이 정자와 난자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식세포에서 채 성숙되지 않은 상태일 때도 마음은 있었어야 하고, 생식세포로서 존재가 드러나기 이전에 아버지의 몸의 일부이던 하나의 원소인 상태이었을 때도 마음은 있었어야 하는 것이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아득한 그때부터 마음이 있지 않았다면 그것이 생기는 순간은 영원히 포착할 수 없다.
마음이 없던 때와 막 생긴 직후의 찰나를 가르는 순간이란 있을 수 없다. 즉 이때의 직전까지는 없었고, 이때부터는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그 찰나의 순간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 순간에 마음이라는 것이 없다가 뿅하고 나타났다고 말하는 건 무에서 유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건 비논리적이다. 때문에 배제되어야 하는 오류인 것이다.
마음은 원래부터 있었거나, 아니면 지금도 없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마음의 존재 여부에 대한 결론은 '있다'와 '없다'의 둘 중 하나이다. 그런데 불교에는 이 두 가지 답 외에 언제나 존재를 묻는 질문의 답으로 내밀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는 일견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하는 대답이 그것이다. 불교의 '공(空)'이란 '무(無)'와 달라서 이와 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결론을 논리적으로 끌어낸 것이 중관이다. 그렇다면 마음이라는 것의 존재에 대해서도 부처님의 대답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이다. 이것을 약간 다르게 표현하면 '실체로서의 마음은 없는 것이고, 현상으로서의 마음은 있다'가 된다. 불교에서 있다고 인정하는 '존재'는 언제나 '연기를 전제로 한 일시적인 현상으로서의 있다'이고. '실체가 아닌 가실상으로서의 있다'이다. 만약에 '실체로서의 마음의 존재 유무를 묻는 것'이라면 불교의 교리상 답변은 '없다'라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해서 '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불교를 잘 못 이해한 사람이다. 승과에 응시한 사람이 이런 답안을 제출하면 떨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연기에 의해 나타난 일시적인 가상으로서의 마음의 유무를 묻는 질문이라면 이 때의 답변은 '있다'가 된다. 때문에 불교의 교리상 존재를 따질 때는 반드시 실체로서의 존재이냐, 현상으로서의 존재이냐를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마음과 본성이라는 것은 우리의 실체로서의 마음이고, 자성으로서의 본성을 말한다. 이것을 있다고 말함으로 선불교는 틀린 것이고, 불교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 있지도 않은 하나의 현상을 부처가 되는 불성으로서 파악하려 드는 견성성불이라는 종지는 불가능한 도전이며, 이룰 수 없는 공이다.
근대 이전에는 모든 존재에 대한 부처님의 답인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는 중도와 연기에 의한 가실상의 존재와 실체의 부정이 쉬이 납득되지 않는 답이었다. 현대인들도 이것을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근세 이후에 이 말을 이해하게 된 사람들이 많이 출현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불자나 수행자들이 아니라 양자역학을 연구하던 물리학자들이었다. 유명한 '불확정성의 원리'나 '죽은 고양이가 든 상자'의 논리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사물은 현대에 들어와서 지극히 의심스러운 것으로 변했다. 과연 존재하는지가 불분명해진 것이다. 부처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신 답변이 과연 진리였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된 것이다. 부처님이 그것을 어떻게 아시게 되었는지는 불가사의하지만 그건 일단 미루어놓고, 존재에 대한 부처님의 직관은 오늘날 현대 과학이 다다른 결론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이 결론에 대하여 조금 더 여행을 떠나 보자. 우리의 마음은 있는 것일까? 본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 마음 속에는 불성이라는 것이 깃들 수 있을까? 어디 한번 보자.


음이 있는 것이라면, 과거의 내 마음도 있어야 한다. 과거엔 없었던 것이 현재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의 과거는 어디까지일까? 태어나는 순간까지인가? 그러면 태어나기 전에는 내 과거가 없나? 그렇지 않다. 어머니 태중의 과거가 있다. 그러면 어머니 태중에 자리잡기 전에는 내가 없었나, 내 과거는 거기까지인가? 내 과거가 거기까지라면, 나는 아버지의 몸에서 정자로 만들어진 순간부터 존재하게 되었다는 이야긴가? 나의 시작은 과연 거기부터인가? 한 마리 정자이던 순간부터 나인가? 그러면 만나지도 못한 어머니의 난자는 내 아닌가? 이상하다. 좋다 그러면 어머니의 난자와 수정된 순간부터 나라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이것도 이상하다. 그러면 만나기 전의 정자는 뭔가? 나 아닌가? 도대체 나라는 놈은 언제부터 있었다고 가정해야 옳은 것인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시점은 언제부터인가?
'나란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면 가장 먼저 '내가 언제부터 있었나'에 대해서 정의를 내려야 한다. 그러나 어떤 논리로도 내가 있게된 처음 순간을 결정할 수 없다. 무에서 나라는 유가 세상에 튀어나오는 순간을 오직 이 순간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는 그 한순간은 없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는 현재의 내가 존재하려면 나는 끝없는 과거부터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창조주의 천지창조가 논리적으로는 성립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창조라는 순간을 비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천지가 창조된 그 순간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시작된 바 없이 시작된 것일 수밖에 없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불생불멸이다. 불생하고 불멸하는 존재가 바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존재들이다. 바로 이 세상 삼라만상이 그렇다.
나라는 존재로 국한시켜 생각해도, 나라는 존재가 처음 있게 된 순간은 결코 찾아낼 수 없다. 오늘의 내가 있다는 이 사실 자체가 영원의 과거부터 내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영원의 과거부터 있었다는 이야기는 나는 최초로 있게 된 순간이 없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즉 태어난 적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때문에 태어난 적이 없는 존재가 멸할 이유는 없다. 나는 멸해질 수 없는 존재이다. 이것이 바로 윤회이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반복되는 현상이지 하나의 시작이나 끝이 아니다. 영원히 되풀이되는 현상이다. 이 시작도 끝도 없는 세계의 영원한 반복유전은 그래서 실체가 아니라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가실상인 것이다. 이 진리를 보는 것이 부처가 되는 첫단계인 해탈이다. 삼라만상은 잠시 뒤로 미루어놓고 나의 마음이라는 놈 하나를 붙잡고 계속 가보자.


 마음이 나에게 생겨난 시점을 밝혀낼 수 없다는 말은 마음이란 나라는 존재와 늘 함께 있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내가 먼저 있고 난 후의 어느 시점에서 마음이 뒤따라 생겨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한가지 의문에 대한 단서가 된다. 즉 마음이라는 측면에서의 인간과 다른 동물들, 혹은 식물과의 차이에 대한 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는 이생에서 발생하던 초기에 원시적인 단세포 생물로부터 식물의 단계를 거쳐, 어류,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의 단계를 모두 거친 후에 영장류의 한 구성원으로 꼴이 갖추어진 것이다. 만약에 저 여러 단계의 어느 시점을 나의 마음이 생겨난 시점이라고 비정할 수가 있다면 그 단계 이전의 생명체는 마음이 없다고 결론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점을 찾을 수 없다면 나의 마음은 저 모든 단계에 걸쳐서 언제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내가 단세포 생명체일 때는 그 단계의 마음이 있었고, 식물이었을 때도 그 수준과 형태의 마음이 있었고, 물고기의 꼴을 하고 아가미를 갖고 있을 때도 그 단계의 마음이 있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그런 차원의 존재였을 때 마음이 있었다면 현재 그런 차원으로 존재하는 여러 생명체들도 다 마음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도리가 없다. 그리고 마음 속에 불성이라는 것도, 인간인 나에게 그것이 있다면 개에게도 당연히 있어야 하고, 하늘을 나는 새에게도 당연히 있어야만 한다. 이것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나의 마음과 그 마음속의 불성이라는 것이 태어나기 직전의 어느 순간이나, 태어난 후의 어느 순간, 즉 어느 모로 보더라도 내가 인간임에 틀림없는 모습을 갖춘 후에 생겼다는 주장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이 생에 지금 같은 모습으로 짠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엄청나게 다른 존재로 변화를 거듭했고, 수많은 단계의 생명체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 엄청나게 달라서 도저히 같은 물건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각각의 존재들이 다 그 당시에는 틀림없는 나였다. 그리고 마음은 그 각각의 나에게 언제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내 마음이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의 경우에서 미루어 보건대, 우리는 모든 생명체가 공히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생각이라는 것은 마음의 한가지 요소이며, 마음이 감각기관을 갖게 됐을 때 일어나는 움직임이다. 감각기관이 없는 생명체들도 마음은 없다고 볼 수 없다. 왜? 내가 감각기관을 갖고 생각을 하기 전에도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음은 생명체에만 있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과연 그럴까? 마음이라는 것이 물질에는 없다가 생명체에만 갑자기 솟아나는 것일까?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자.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떤 것이 있을까? 비교적 근사치에 가까운 대답 중의 하나가 '관계가 만들어 내는 일체의 반응'이라는 것이다. 마음을 비유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레이다와 흡사하다. 레이다는 전자파의 송출을 한다. 이것은 주변 상황과는 관계없는 독립적인 행위이다. 레이다가 이것으로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자아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레이다는 그것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레이다의 스코우프는 반점 하나 찍히지 않는 텅빈 화면으로 언제나 멈추어져 있을 것이다. 이 전파가 공간을 퍼져 나가다가 무엇인가에 부딛히면 그 반사파가 되돌아 와 그것이 부딛힌 상대에 대한 정보를 스코우프 위에 빛나는 하나의 점으로 나타내 줄 것이다. 주변에 부딛히는 반사체가 수백개 수천개가 있다면 레이다의 스코우프는 번쩍 번쩍 빛나는 반점들을 무수히 표시해 나갈 것이다. 반사체들이 움직이고 있거나 새로 나타나기도 하고 멀어져서 사라지기도 하고, 어떤 것은 움직이며, 어떤 것은 정지해 있고, 어떤 것은 가까이 있고, 어떤 것은 멀리 있으며,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으며, 어떤 것은 빨리 움직이고 어떤 것은 느리게 움직인다면 그것들을 표시하는 레이다의 스코우프는 눈부시게 활발하게 변화하고 움직이는 형상을 그려낼 것이다. 이 움직이는 스코우프의 화면이 바로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레이다 스코우프에 나타나는 표식들은 두 가지에 따라 달라진다. 하나는 송출하는 전파의 특성과 모드의 세팅이고 다른 하나는 주변에 존재하는 반사체의 성격과 유무이다. 탐색파의 파장과 세기 및 탐색 모드에 따라 어떤 대상은 걸러지기도 하고 어떤 대상만 주로 포착할 수도 있다. 그것에 따라 주변 상황은 변함이 없는 그대로이지만 스코우프에 나타나는 무늬의 형상들은 달라지게 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주변의 대상물들은 레이다가 어찌할 수 없는 주어지는 조건이다. 레이다가 전파의 특성과 모드를 바꾼다 해도 그것과 무관하게 주변의 대상물은 존재한다. 다만 존재하지만 스코우프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라질 뿐이다. 분명한 것은 레이다는 반사체를 만나지 못하면 아무 것도 표시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레이다라는 존재는 반사체와 분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자기 혼자 전파를 발신하고 있다는 사실은 레이다의 존재를 증거하지 못한다. 반드시 반사체가 존재해야만 스코우프 상에 표식이 나타나고 그 표식이 나타남으로써 레이다가 활동중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스코우프에 아무 것도 보이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레이다가 고장났거나 작동을 멈추고 있는 경우 뿐이다. 이 우주 공간에 반사체가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전파를 발신하면 반드시 에코가 있기 마련이다. 레이다가 죽어있지 않은 한 반드시 스코우프에 무엇인가가 나타난다. 레이다의 오퍼레이타가 인위적으로 스코우프에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게 할 방법은 없다. 레이다가 작동한다는 전제를 파괴하지 않는 한. 마찬가지로 우리는 마음을 한시도 쉴 수 없다. 스코우프의 반점은 나로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반사체들이 있음으로 해서 생기기 때문이다. 오퍼레이타가 아무리 스코우프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해도 그 화면에 나타나는 반점들에서 어떤 패턴이나 규칙이나 정형성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자기에 속한 문제가 아니라 대상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대상들의 특성과 움직임을 규정하는 것이 아닌 한, 스코우프에서 나타나는 반점들의 특성을 볼 수는 없다. 설사 내가 송출하는 전파의 특성과 주파수와 모드를 변화시킨다 해도, 그 모드하에서 반사되는 대상물의 움직임은 역시 내 소관 밖이어서 어떤 패턴을 보일지 알 수 없다. 마음을 들여다보고 본성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은 레이다의 스코우프를 들여보고 그것에서 수학적이고 규칙적인 어떤 법칙과 패턴을 알아내려는 것과 같다. 구름과 날아가는 새떼들이 오고가는데 무슨 규칙이 있고 패턴이 있을 것인가. 그것들의 흔적을 스코우프에서 백년 천년 디다본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데 도움이 될 뿐, 그것에 본성이라 할만한 것은 없다. 유일하게 본성이라 할만한 것은 레이다가 꺼져있을 때의 텅빈 화면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레이다가 아닐 때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의 본성은 본성이 없는 것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마음은 관계가 일으키는 일체의 반응이며 관계가 없으면 반응도 없다. 즉 타가 있어야만 아가 있는 것이다. 이 아에는 본성이 없다. 자아가 없다.


선불교의 거짓된 교리에 영향을 받은 사람은 이렇게 반문할 수가 있다. 그러나 레이다에는 스코우프를 들여다보는 누군가가 있지 않느냐, 주파수를 조절하기도 하고, 모드의 세팅을 바꾸기도 하고, 레이다의 나타나는 반점들의 특성과 형상을 보고, 이게 비행기군, 이건 구름이군, 이건 새떼들이군 하고 판단하는 어떤 주체가 있는 것 아니냐, 이게 바로 우리가 말하는 참된 나, 즉 자아 아니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레이다의 스코우프 화면 자체는 마음이지만 이 마음을 조절하고 들여다 보는 오퍼레이터가 바로 주인 아니냐 이 소리다. 과연 이런 주인은 존재하는 것일까? 누군가가 스코우프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판단하고, 추측하고, 결정하고, 조절하고 있는 것일까? 이 오퍼레이터가 누구인지 이 놈을 한번 찾아보자.
"이 엉터리 같은 기계의 주인이 누구야? 너 일로 좀 나와 봐!"


 구름은 석가세존보다 여러가지 면에서 훨씬 유리하다. 이게 구름의 타고난 복이다.
첫째로 석존은 범어라고도 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라는 고대어로 말을 하셨고 구름은 이빨까는 데는 세계최고의 철학적 언어인 조선말을 21세기 최신 버전으로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문자인 훈민정음, 다른 말로 한글을 쓰는 데다가 덧붙여 한자도 상당히 알고 쓸 줄 안다. 뿐이냐 세계 공통어라 하는 영어도 산님보다는 못하지만 콩글리쉬로 애북 한다. 뿐이냐 섬나라 게다말도 컨닝으로 쪼매 한다.
이런 언어라는 도구의 차이에서 보면 석존이 삽질을 하셨다면 구름은 포크레인을 몰고 있다.(삽질이라고 쓰고 보니 좀 불경스럽게 보이네. 이건 요즘 말하는 삽질이 아니라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삽질임)
두번째는 부처님의 사후 2천5백년이 지나는 동안 그래도 인류의 인식이 아주 조금씩 그 수평선을 뒤로 물려왔다는 점이다. 석존 당시의 사람보다는 제법 넓어진 세상을 구름은 보고 있다. 궁극적인 단계는 아닐지라도 궁극적인 단계가 무엇일지 그 커튼의 뒤를 짐작해볼 수 있는 단계까지는 우리의 지식이 축적되어 온 것이다. 석존이 29살에 출가하실 때까지 읽으신 책의 수보다 구름이 같은 나이에 읽을 수 있었던 책의 권 수가 따따따블은 됐을 것이다. 이 지식과 정보 및 자료의 양으로 따지면 석존은 구루마고 구름은 8톤 도라꾸다.
세번째는 구름이 석존보다 뒤에 태어났기 땜시, 석존의 모범답안을 손에 들고 좌르르 보고있다는 점이다. 석존이 우둥생 모범 수험생이라면, 구름은 핸폰 부정에, 컨닝구 페이파에, 아예 책펴놓고 시험치는 셈이다. 정답지 없이 정답 맨들어내는 범생하고 범생의 답안지 보고 베껴쓰는 날나리하고 누가 유리하겠노? 당근 날나리 구름이 백번 유리하다.
이래 본다면 현대인들은 누구나 해탈을 해야 한다. 할 수 있어야 정상이고, 못하면 빙신이다. 맞줴? 이래도 대학에 떨어지면 나가 죽어야지 살아서 머하겠노? 그러마 구름은 부처가? 그건 아이다. 아직 멀었제. 그러나 정각해탈은 했다. 그노무 공은 봤다. 의심할 나위 없이 제법무아를 체득했다고 감히 말한다. 그런데 이게 그리 대단한 게 아니란 사실이다. 선불교하는 넘들이 워낙에 정각해탈이 뭐 토끼머리 뿔나는 일처럼 뻥을 쳐서 그렇지, 정각해탈은 누구나 공부하고 제대로 생각하면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이레만에 정각을 얻고 해탈을 하셨다. 문제는 그걸로 끝이 아니고 정각을 갖고 뭘하느냐가 남았다. 이제 부처가 되야지. 부처가 되는데는 문자 아닌 것이 좀 있어야 된다. 다시 수양이고 자기의 습과의 싸움이다. 그러나 그것도 대가리 띠매고 악을 쓸 이유가 없다. 정각을 얻은 자는 여유라는 것을 함께 얻는다. 알기 때문에 조급할 일도 없고 서두를 일도 없는 것이다. 그게 마음의 평화다. 안 것에는 마음이 즐거워하면서 따른다. 채찍질을 할 필요가 없다. 화두를 들고 대글빡을 벽에 찧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부처님이 헛지랄 하지 말고 공부부터 하라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넘들은 공부는 안하고 헛지랄을 먼저 한다. 문자부터 엄정하고도 학씰하게 세워야 되는 것을 문자를 세우지도 못한 넘이 문자를 타넘는 묘기대행진부터 먼저 하려 든다. 망나니같은 넘들.
구르미 글 읽고 공이 이해가 되면 당신도 해탈은 한 것이다. 해탈까지는 별거 없다 아는게 다니까. 대단한 것인양 뻥치는 넘들 말 듣고 쫄일 이유 조금도 없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깨우쳐 알면 해탈이니라.

이제 하던 마음 여행을 계속하자.


 우리의 마음이 세계를 보고, 느끼고, 인식하는 것은 레이더의 스코우프와 거의 같다. 레이더 화면에는 수많은 종류의 심볼과 마크와 도형과 숫자와 문자들이 피탐 대상체에 대한 정보로써 명멸하지만 그것은 전부 스코우프에 그려지는 현상이지, 대상체의 실체들이 아니다. 레이더 관제사는 스코우프를 들여다보고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지, 직접 관제실 밖을 나가 레이더 화면에 심볼로써 나타나는 비행기들과 산과 해안선과 구름과 새떼들의 실물을 보지 않는다. 그는 관제실 밖을 나갈 수 없다. 오감이라는 우리의 감각기관은 레이더 장치의 송수신 장비들과 같다. 그리고 레이더 장비와 같이 많은 종류의 필터를 갖고 있다. 그것으로 대상을 거르고 선별해서 필요한 정보만을 화면에 내보내기도 한다. 그 화면이 바로 마음이다. 그래서 마음이 감지하고 파악하는 것은 결코 이 세계의 실상이나 실체가 아니다. 우리는 현상 밖에는 볼 수 없다. 그 현상은 레이더의 성능과 수준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르게 보인다. 인간은 인간의 감각기관과 마음이라는 제법 고성능의 레이더로 사물을 보고, 개는 개의 레이더로 사물을 본다. 나비와 꿀벌은 또 자기 나름대로의 레이더 장치를 가진 관제사들이다. 박쥐와 토끼도 마찬가지고, 뜰에 서있는 소나무 역시 그러하고, 창가에 피어있는 국화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각자의 레이더 장비로 외부 세계를 인식한다. 그래서 각자의 세계는 전부 다 다르다. 모두가 보고있는 것이 실체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현상만을 보기 때문에 그 현상은 보는 자마다 전부 다 다른 것이다. 누구의 레이더 스코우프가 그려내는 것이 이 세계의 진짜 모습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레이더의 숫자만큼 많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40억의 인간은 40억개의 세계를 보며 살고 있다. 결코 하나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각자는 각자가 보는 세계를 진짜 세계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을 뿐이지, 누구도 진짜 세계를 알지 못한다.
레이더의 스코우프가 아무런 피탐체를 찾지 못하면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주변의 사물도 레이더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레이더 스코우프는 활성화되어 작동중인 레이더와 전파가 반사되는 주변의 사물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있을 수 없는 상호동시성 존재들이며 상대의존적 현상이다. 그래서 이 세계를 실체가 없는 현상의 세계라 하고 우리가 견고하다고 믿고있는 모든 실체들은 사실은 가실상이며, 공이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저 스코우프 위에서 춤추는 무늬들이고 도형들일 뿐, 실체는 없다. 레이더의 모니터에 하나의 빛나는 반점일 뿐, 실제로 날아오는 비행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 비행기를 직접 눈으로 목격한 관제사는 단 한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모니터에 나타나는 붉은 색 사각형은 '적기다'라는 오랜 습관이 된 약속 때문에 우리는 붉은 색 사각형을 보고 비행기라고 인식할 뿐이다. 그러나 비행기의 실체는 레이더 관제실에서 결코 볼 수 없다. 우리의 마음에는 그 어떤 실체도 없으며 본성도 있을 수 없다.


 나는 내 주위에 있는 많은 존재들을 보고 있다. 내가 방안에 있을 때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경대와 장롱과 컴퓨터와 티비와 벽과 창문, 바닥, 천정 등등이다. 이런 모든 것들은 내가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존재할 수 있다. 보는 내가 없으면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그러나 똑같은 이치로 그것들이 없다면 나 역시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 눈앞에 보이는 그것들을 하나 하나 없애 나가 보자. 장롱을 없애고, 경대를 없애고, 컴퓨터를 없애고. 벽과 바닥과 천정을 없애고... 이렇게 해서 내 주위의 모든 사물을 다 지워버리면, 그 순간 나도 없어짐을 알게 된다. 내가 한송이 국화를 바라볼 때 국화는 나로 인해서 존재하게 된다. 내 눈에 그것이 보이고, 내가 그것을 만지면 촉감으로 국화가 전해져 온다. 그러나 국화가 없으면 나도 없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문하나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꽉 막힌 레이더 관제실 안에서 스코우프 화면만 들여다보면서 이 세계의 존재를 믿어왔다. 그 모니터에 반점이 하나 나타났다는 것은 어딘가에 구름이 있으니까 내 눈에 반점이 보인다고 믿어온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어딘가 구름이 진짜로 있는지는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우리는 바깥 세상으로 나갈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최근에 와서 이 관제실의 벽에 구멍을 뚫고 밖을 내다보려고 애쓴 사람들이 있었다. 진짜 세상이 있는지를 보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이들의 이름이 과학자이다. 그들이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마음이라는 관제실 밖을 나가본 결과 그들은 그 곳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최종 결론은 아니고, 아직도 뭔가가 있을 거라고 두리번거리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는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겨우 하는 말이 '관찰자가 있어야 관찰되는 대상이 존재할 수 있다'는 소리다. 동시에 '관찰되는 대상이 없으면 관찰자도 있을 수 없다'라는 소리들뿐이다. 그들로서는 그것 자체가 놀라운 발견이겠지만 우리는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라는 것을 느낀다. 바로 2천5백년도 전에 부처님이 하셨던 말씀을 그들은 겨우 지금에사 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천님이 말씀하시는 기억의 세계, 자신의 내부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말씀을 드리자.

 

 

마음에 관한 글은 아직도 한참을 쓰야만 한다. 왜 이렇게 장황하고 다소 지루할 만큼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 또 반복,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비유들의 지겨운 나열들을 계속하느냐 하면,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일점의 의혹이나 미심쩍음이 남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소나기 내린 다음의 활짝 갠 하늘처럼, 그리고 그 하늘에 아름답고 영롱하게 솟아오른 무지개처럼 제법무아는 확연하고도 분명하게 깨쳐져야 하는 때문이다.
대충 생각하고, 어슬퍼게 겐또를 치거나, 아니면 기독교가 그러한 것처럼 '부처님 말씀이니 맞겠거니 생각하자', '제법은 무아이고 세상은 공이다라고 믿어주고 말자'고 결심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해결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 믿음이나, 신념, 또는 어렴풋한 생각 따위에는 우리 마음은 콧방귀도 끼지 않는다. 눈하나 깜딱하지 않는다. 마음이 통채로 항복해 오고,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따라오는 경우는 오직 한가지 아는것, 그것도 확실하고 의심할 나위없이 명료하게 아는 것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49년간 설법을 하신 것이다. 마음이 무엇인지 알면 나를 알 수 있고, 나를 알면 이 우주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마음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한 사색이야말로 부처님께서 평생 하신 명상과 사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나는 본다. 결코 한두가지 비유나 압축된 서너페이지의 설명으로 충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슬프게 추측하거나, 서툴게 겐또를 치게 되면 하늘천님이나 지산님처럼 말을 하게 된다. 전체를 다 보지 못하고 부분만을 가지고 결론을 내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다소 이야기가 길더라도, 혹은 비슷한 얘기의 반복인 것 같더라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참을성과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읽어가시기를 부탁드린다.


 내가 '파동의 세계-기'라든가 '기란 무엇인가?'와 같은 글을 연재하면서 벗님들에게 벽운공을 해보라고 권하는 이유는 기공이 병을 고치고 몸을 건강하게 하기 때문이라거나 천지의 합일을 통해 참나를 깨치는 길이어서가 아니다. 기공을 통해서 그런 경지에 다다른다는 것에 대해 나는 부정적이다. 그리고 기공의 질병 치료 효과에 대해서도 나는 아주 보조적이고 부차적인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다. 기공을 통애 내가 얻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기공을 함으로써 마음과 생각과 감각이라는 것에 대해 상당히 중요한 단서를 얻었으며, 생명체와 생명체, 생명체와 비생명체, 비생명체와 비생명체간의, 즉, 세상의 만물들 사이의 교류와 소통을 배웠다. 내가 오랜 동안 기공을 수련한 결과 발견한 기공의 가치는 커뮤니케이션이지 치유력이나 종교적 완성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한쪽 팔을 잃으면 나머지 한쪽 팔의 기능이 더 발달하고, 눈이 먼 사람은 촉감이 놀랄만큼 예민해지며, 눈과 손을 다 잃은 사람은 청각과 후각이 믿지 못할 정도로 살아난다. 손과 눈과, 귀와 코를 다 잃은 사람은 온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모두 신경이 되고 감촉의 전달자가 될 것이다. 이 마저도 잃어버리면 끝이냐?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기공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하나의 감각은 남는다는 사실이다. 제6감, 그것이 기감이다. 눈, 코, 귀, 입과, 피부 및 오감으로부터의 신호를 처리할 뇌가 없는 단계의 생물은 이 기라는 것으로 세계를 인식할 것이고, 외부세계와 구별되는 자신이라는 객체를 인식할 것이다.
오감을 닫아버리고 기감으로만 어떤 상대를 감지하고 인식하는 것은 가능하다. 오히려 오감보다 더 뛰어난 면도 있다. 왜냐 하면 기감으로는 눈이 보지 못하는 먼 거리에 있는 상대도 알 수 있고, 소리가 들리지 않는 위치에 있는 대상도 파악이 된다. 심지어는 이미 죽은 사람의 기운도 감지할 수가 있다. 이때 중요한 사실은 기감으로 상대를 파악하는 것에는 반드시 사전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먼저 내가 알고있는 상대가 아닌 경우 기감으로 오는 신호는 무의미한 신호가 된다는 점이다. 어떤 신호를 감지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인지 기감만으로는 알 수 없다. 이미 어떤 대상의 신호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만이 기감으로 우리는 그것을 구분해낼 수 있다. 만약에 이 세상 모든 사물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이 기감만이 발달한 어떤 물건이 있다고 하면 그 물건이 주변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뿌지직하는 알수 없는 신호가 난무하는 레이더 스코우프와 같다. 적기는 붉은색 사각형, 아군기는 녹색 사각형, 미확인 물체는 노랑색 삼각형 등으로 식별되어 나타나는 레이더 스코우프는 일종의 지식체이다. 반사체의 신호를 분석해서 그 신호가 어떤 범주에 속하는 것인지를 판별하는 일종의 지식이 심어진 프로그램이 작동하고 있는 기계인 것이다. 이와 같은 판별능력이 없는 초기 단계의 원시적인 레이더는 단지 어떤 반사체가 어느 방향에 있다는 것만 알려주었다. 만약에 반사체가 다수일 때는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도 없는 신호들이 정신없이 명멸할 뿐이었다. 하등동물로 갈 수록 감각기관에서 전해져 오는 신호의 처리 결과나 기감은 이런 것과 비슷해진다. 레이더 장비의 수준의 차이인 것이다. 그 속에 내장된 프로그램의 인공지능의 레벨의 차이이다. 지식이 없던 어린 아이때 우린 눈에 비친 외부의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얼굴이 무언가 자기에게 다정함을 주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모성의 주인공임을 아는 것은 거듭되는 수유와 애정의 반복된 체험이 만든 지식이지 갓 태어난 아이는 눈에 비치는 어머니 얼굴이 뭔지 모른다. 그러나 눈이 있고 빛이 있고 빛을 반사하는 물체가 있는 이상 스코우프에 현상으로서 나타나는 데는 차이가 없다.
이와 같이 사전지식에 의해서 판독하고 선별하는 능력의 차이가 있을 뿐, 고등 생명체나 하등생명체나 또는 무생물체 간에 원초적인 교류와 반응의 본질에는 차이가 없다. 모든 존재는 자동적으로 전파를 발신하는 레이더와 같으며, 이 물건은 주변의 반사체에 의해서 자기존재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존재에 의해서 스스로가 변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보다 큰 조직체로의 편입이다. 이것을 결합이라고 한다. 결합은 미립자들간에도, 원자들간에도, 분자들간에도 일어난다. 결합된 것은 결합된 상태로 새로운 자기를 만든다. 이것은 이대로 역시 하나의 레이더로서 주변과 관계한다.
이런 관계와 반응은 무조건적이고, 자동적일 뿐, 그것을 제어하고 주관하는 주체는 찾을 수 없다. 그런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고등생명체, 지적인 존재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도올은 그의 명저 '노자와 21세기'에서 시골 다방의 레지 아가씨가 날라 온 커피 한잔이나 에쿠우스나 체어맨 같은 고급 승용차의 본네트 위에 앉은 먼지를 보고도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역시 대각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그런데 나는 어느 날 조카가 가져온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인 '팰콘 4.0'에서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다. 그 게임은 내가 몇 번이나 내 영혼을 뒤흔드는 크나큰 충격을 받은 깨달음의 체험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게임 메니아인 조카가 나한테 그 게임을 들고 온 것은 이해가 잘 안 되는 현대 전투기의 메카니즘과 특히 레이더에 관련된 몇가지 궁금증 때문이었다. 게임의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조카한테 설명해주던 동안에 서툰 초보이지만 게임을 직접 해보게도 되었다. 현대의 공군과 전투기에 대해 준전문가는 되는 구르미지만 조이스틱이라고는 처음 잡아본 PC게임의 왕초보이다 보니 잘 될 턱이 없었다. 그러나 그건 바둑 9단이 장기 처음 두어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너판만 두고 나면 바둑 9단은 장기를 국수처럼 둔다. 나도 역시 조이스틱 잡고 몇 번만 해보면 '팰콘 4.0' 정도는 금방 마스터한다. 왜냐 하면 그 게임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지식적 바탕이 견고하기 때문에 중딩이, 고딩이들보다야 훨 빠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게 아니다. 처음 몇 번 조이스틱이라는 것을 쥐고 팰콘 4.0을 해볼 때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랫동안 비행을 못 했다. 금방 격추되고 말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적기가 � 하고 지나가면서 기관포를 드르륵 갈기거나, 미사일을 슈욱 하고 쏘면 나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락온!, 락온!' 하는 미사일 위협 경보가 들려도 대처가 서툴러서 회피기동을 하거나 채프를 쏘아보기도 전에 내가 탄 비행기는 공중에서 비산하고 나는 탈출도 못한 채 사망 선고를 받았다.
"에이, 이모 벌써 죽었나? 나와 바라, 내가 함 보여주께."
이 구르미 이모는 벌써 죽었다. 컴퓨터 게임 속에서 왕초보 파일럿 구르미, 코드네임 '크라우츠'는 장렬하게 전사했다. 조카가 "에이. 이모 벌써 죽었네." 하는 소리를 했을 때, 나는 갑자기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래, 나는 죽었다.' 먼 훗날, 언젠가는 이 조카가 관속에 든 구르미의 시체를 앞에 두고 "이모, 진짜 죽었네."라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이모가 죽은 것이나, 팰콘 4,0을 하다가 적기가 쏜 미사일을 맞고 죽은 것이 다르지 않은, 똑같은 이모의 죽음이라는 것을 조카가 알고 죽기를 이 이모는 바라지만 PC게임에 몰두하는 이 조카는 근기나 아이큐로 봐서 별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팰콘 4.0에서는 적기한테 격추를 당하거나 죽어도 별로 심각할 것이 없다. 게임을 리로드시키면 언제나 다시 비행기를 몰고 씩씩하게 출격할 수 있다. 게임만 리로드시키면 된다. 열 번이건 백번이건 나는 되살아난다. 그래서 조카는 "에이, 이모 벌써 죽었나."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언젠가 이 조카가 보게될 이모의 진짜 죽음이라는 것도 이 팰콘 4.0 속에서의 죽음이나 결코 다르지 않다. 재부팅만 하면 구르미는 다시 살아나니까.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이라 말하는 PC게임에 몰두하는 조카를 언니는 걱정하지만, 그러나 우리네 인생은 누구나 할 것 없이 PC게임에 몰두하는 가상현실 속의 홍두깨들이다. PC게임은 말하자면 장자가 노래한 '나비의 꿈'이다. '꿈속의 꿈'이다. PC게임을 보면 우리 인생의 본질이 보인다. 구름카페에 글을 올리는 구르미와 팰콘 4.0 속에서 F-16을 몰고 공중전을 하고 있는 파일럿 '크라우츠'가 얼마나 다른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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