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5  부처란...

 

부처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 구름타운에도 부처가 되려는 원을 세운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엄청나게 많은 예비부처들이 이 시간에도 불철주야 용맹정진하고 있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과연 부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이 부처일까요? 부처의 정의가 명확하고 부처의 개념이 확실해야 과연 보통 사람이 수행을 하고 공부를 해서 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중생은 아무리 노력해도 오르지 못할 나무인지를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처라는 말처럼 정체가 불분명하고 실체가 모호한 말은 달리 없어 보일 정도입니다.

구름타운에서 부처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 보살들은 과연 부처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출발을 하셨는지 걱정이 앞섭니다.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비로소 부처가 됐다고 인정할 수 있는지 목적하는 선을 분명히 그어놓으셨느냐 이 말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아닌지 판단하실 것인지 저는 그것이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합니다.

자기가 부처가 됐는지 아직 멀었는지, 얼마나 가까이 갔는지, 얼마나 멀리서 헤매고 있는지 무엇으로 재려고 하십니까?

이런 각자의 기준에 대해 한번 올려봐 주시면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부처. 부처란 무엇인가.

만약에 정각하고 해탈을 해서 성불을 하게 되면 ‘나는 부처다’라는 선언을 하게 됩니다. 해야 합니다. 석가세존께서 그러하셨듯이. 그런데 석가세존 이후에 ‘나는 부처다’라고 선언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깨달았다 하고 오도송을 부른 사람들은 많지만 누구도 감히 ‘나는 부처다’라는 소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기껏, 보살이나 조사, 선사에 만족하고 한 많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저는 ‘나는 부처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물론 자칭 부처는 많습니다. 예수가 자기 동생이고, 부처가 지하고 동기동창이라고 뻥을 친 맛탱이들은 수없이 많이 있는데, 진실로 자타가 공인하는 부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부처를 칭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말에 뒷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저는 봅니다. 부처 흉내는 아무나 내지 못합니다. 선지자, 예언자 흉내는 낼 수 있어도 부처 흉내는 쉽지 않습니다. 과연 부처는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번 구름타운 회원들의 생각을 듣고 싶네요. 어떤 사람이라야 부처로 인정을 해 주겠습니까?


구름~~

부처가 어떤 사람이며 부처의 경지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설명을 불경에서 찾아보면 한 세 가지 정도로 압축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 부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부처는 ‘전지자(全知者)’입니다. 부처가 깨우쳐 알게 된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지식을 ‘일체종지’라 합니다. 그러니까 일체종지를 증득한 사람이 부처입니다. 그렇다면 일체종지가 도대체 어떤 차원의 지(知)를 말하는 것일까요?

석가세존이 일체종지를 증득하는 과정은 <인과경(因果經)>을 비롯한 몇몇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인과경>은 세존이 일체종지를 얻으신 그 날을 2월 7일의 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그날 밤 초경에 석가세존은 고요한 선정에 들어계셨는데 그때는 모든 마군이 항복하여 떠난 뒤였으며 투명한 거울처럼 밝은 세존의 마음에 우주의 만법이 비추어 보였다고 합니다. 이때 세존은 천안통으로 천상과 인간세상을 두루 보았고, 중생들이 육도를 윤회하여 이곳에서 났다가 죽어 저 곳으로 가는 것을 훤히 보게 되었습니다. 각자가 지은 업과 공덕에 따라 천상과 지옥에 나는 것을 똑똑히 보셨지요.

2경에는 숙명통이 생겨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방삼세를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뭇중생들이 억겁의 과거세에 저지른 모든 일들을 다 아시게 됐습니다. 과거에 무슨 일을 저질러 오늘 이리 사는지를 다 보시게 됐습니다.

3경이 되자 타심통이 생겨나 세상 모든 중생들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생각들을 알 수 있게 됐다고 합니다. 중생들의 마음속에 피어나는 모든 착한 마음과 악한 마음과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들을 다 꿰뚫어 보시게 된 것이지요.

4경에 이르러 천이통이 생겨 만리 밖의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고, 신족통이 생겨 앉은 그대로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세상의 모든 곳을 갈 수 있게 됐습니다. 물위를 걸을 수 있었고 허공을 날 수 있었고, 어떤 돌산도 평지처럼 내달렸습니다.

5경이 되매 누진통을 얻어 억겁 세월 쌓인 습기를 전부 닦아내어 모든 번뇌가 한점 얼룩도 남지 않게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마침내 대자유를 성취한 열반에 이르신 것이지요.

이 위대한 밤에 석가세존은 육신통(六神通)과 십력(十力)과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과 사무소외(四無所畏)를 모두 이루시고 다시 12연기를 순관하고 역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동이 터오는 새벽에 세존은 동쪽하늘에 밝게 빛나는 샛별을 보시게 됐습니다. 세존의 눈과 샛별의 맑은 빛이 마주치는 그 순간에 엄청난 지혜의 광명이 폭발하였고 더 이상의 성취가 없는 최고의 정각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을 일체종지라 합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하는 것이며,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 순간 이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아시게 됐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정각을 얻은 부처이니라’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신 모든 것을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가르쳐주겠노라 약속하셨습니다. 그 새벽 이후에 부처님은 중생들의 어떤 질문이나 의문에도 막힘이 없었고, 당신께서 알지 못하여 답변하지 못하신 것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완전한 지를 증득하신 분입니다. 부처는 전지자입니다.

중생의 모든 질문에 전부 대답해 줄 수 있다면 부처입니다. 부처의 세 가지 정의 중 첫 번 째는 선지식이나 한소식이 아니라 ‘아는가, 모르는가’입니다. 선문답을 얼마나 잘 하는가가 아니라 무지한 중생을 계도할 수 있는가입니다. 무지한즉 중생이며, 전지한즉 부처입니다.

당신은 일체종지를 증득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그리하여 불쌍하고 가여운 중생들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일깨워 무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구름~~
두 번 째 부처의 정의는 ‘완전한 자유인’입니다. 부처는 완전한 자유를 얻은 사람입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겠습니까? ‘완전한 자유’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마음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부처는 즐거운 마음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부처는 슬픈 마음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부처는 성난 마음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부처는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부처는 미운 마음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부처의 마음에는 사랑도 미움도, 기쁨도 성냄도, 느긋함도 초조함도, 여유로움도 불안도, 투쟁심도 두려움도 자신도 공포도 없습니다. 일체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 마음에 속박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유롭다고 합니다.

중생이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자기의 마음에 붙들려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마음에 속박되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기뻐하고 슬퍼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안도하고 두려워하며 삽니다. 일분일초도 그 마음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며 마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아무리 즐거우려고 해도 마음이 슬퍼하면 자신은 슬픔에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거역해서 기뻐할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안도하고 싶어도 마음에 공포가 스며들면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안도할 자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맘대로 행복할 자유도 없고, 즐거울 자유도 없습니다. 마음의 허락없이는 아무 것도 못 합니다. 마음은 변덕스럽고 예측이 불가하며,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 무자비한 주인입니다. 주인을 모시는 하인에게 자유가 있을 리 없지요.

우리가 마음에 붙들려 있고 마음의 지배를 받는 이유는 무엇엔가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미움도 분노도 전부 집착에서 생깁니다. 자기가 눈꼽만큼도 애정이 없고 관심이 없는 대상은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진실로 모든 것을 다 버린 수행자가 한사람 있다고 가정해 봅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사발 하나에 젓가락 한 벌 뿐입니다. 그나마 버리고 나면 수행자는 손가락으로 맨땅에 버려진 음식을 집어먹는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자가 마지막 남은 사발과 젓가락에 터럭만큼의 애착이라도 갖고 있다면 이 애착이 수행자를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누군가가 사발과 젓가락을 훔쳐가면 수행자는 아까운 마음이 들고, 화가 나고, 슬퍼집니다. 수십년을 수행하고 공부를 하고 정진을 했는데도 사발 하나 젓가락 한 벌에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맙니다. 완전하게 자유롭다는 것은 그 무엇에도 애착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절대자유는 절대고독을 전제로 합니다. 완전하게 자유롭기 위해서는 완전하게 고독해야 합니다. 고독이라는 것이 사람들 사이의 외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체이건 비생명체이건 살아있는 것이든, 죽어있는 것이든 이 세상 모든 것과의 완전한 절연을 의미합니다. 뜰 앞에 핀 한송이 꽃에도 애정을 가지면 안 됩니다. 언젠가 바람에 그 꽃이 지면 슬퍼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한테는 가려울 때 등을 긁을 나무조각 하나도 갖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끼면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무엇이든 티끌 하나라도 애착을 갖는 물건이 있으면 그것이 자기를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무심. 그것은 절대고독입니다. 온 우주에 오직 자기가 있을 뿐, 사랑할 아무 것도 없고, 가질 아무 것도 없고, 쳐다볼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부처는 절대고독을 택한 사람입니다. 철저하게 고독하므로 철저하게 자유롭지요.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고 외칩니다. 독존에는 그 무엇도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부처가 중생과 관계를 맺는 이유는 오직 하나 자비심 때문입니다. 대자대비는 사랑이 아닙니다. 눈꼽만큼의 애정도 그 속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곽씨쌍부가 제자를 사랑한 증거가 아닙니다. 부처님이 가섭을 사랑했겠습니까? 부처님은 제자들한테 터럭만큼의 애정도 없습니다. 두고간다 하여 무슨 마음에 걸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자대비는 제자들을 위해 기꺼이 두 발을 관밖으로 내밀어 줍니다.

당신은 이런 절대고독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철저하고 완전한 고독이 주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겠습니까? 완전한 고독을 각오하지 못하면 자유를 얻을 수 없고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아직 이와같이 완전하게 고독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철저하게 버린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아까운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 버렸다고 말합니다. 양손 가득히 움켜쥐고서 ‘날 봐. 아무 것도 없지?’하고 말합니다.

부처는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고 모든 것을 버린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버린 것을 다른 말로 대자대비라 합니다. 대자대비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의 마음입니다.

       
구름~~
대자대비는 모든 것을 알아야만이 피어나는 연꽃입니다. 모든 것을 안다 해서 그것만으로 피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대자대비는 피어나지 않습니다. 버리지 못하고 쥐고 있는 무엇을 지키려고 하는 마음이 대자대비의 광명을 가리고 비켜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버리고 형제를 버리고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집과 고향을 버린 출가자는 대자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이유는 주지 자리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고, 때에 절은 장삼을 버리지 못하고 바리떼기 속의 목탁을 버리지 못하고 젓가락 숟가락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형제와 속세의 영화를 다 버렸다고 하는 출가자가 사발과 젓가락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우습지요. 다 쓰러져가는 암자의 주지 자리에 목숨을 건다는 사실이 참 불가사의하게 보이지요. 그런데 사실은 많은 수행자들이 버리고 있고 전부 다를 버리는데 성공하기도 합니다.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내 목숨, 내 생명도 곰곰 생각해보면 아낄 이유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한 목숨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하고 기개 가득한 사자후를 뱉어보기도 합니다. 이까짓 허망하고 덧없는 육신이야 옷을 벗어던지듯이 언제라도 벗고 갈 수 있겠느니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부처가 뭐 별거냐? 지금 이 마음이면 나도 부처가 아니겄냐 하고 자부심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다 버린 사람이 만 명은 족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궁벽진 해동반도에 부처가 만 명이 있다는 소립니다. 그런데 어느 산골, 어느 암자에서도 부처님 나셨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성불했다는 사람은 볼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견성을 하고 정각을 하고 모든 것을 버렸으면 부처라야 하는데, 왜 부처가 됐다는 소리를 하지 못하는 걸까요? 선문답도 그럴듯하게 하고, 오도송도 멋지게 지어부르면서, 황금색 장삼가사를 호화롭게 걸치고서, 주장자 엄숙하게 짚고 돌아다니면서 왜 부처라고 말을 못하는 것일까요?

다 알았다고 해서, 전부 버렸다고 해서 그걸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걸로 되는 일이면 부처되기가 이리도 어렵지는 않겠지요. 부처가 이리 보기 힘들 이유가 없겠지요.

부처가 되는 데는 한 가지 조건이 더 필요합니다.

   
구름~~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버리는 것은 쉽습니다.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조차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자살하는 사람이 한해에 천명이 넘는다나 그렇답니다. 굳이 자살이 아니라도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죽는 사람도 있고,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죽기도 합니다. 까짓거 독한 마음 먹으면 버리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을 부처라고 하면 구르미는 예전에 성불했습니다. 수백 번은 넘게 부처가 돼 봤습니다. 눈감고 삼매에 들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다 덧없다는 생각이 들고, 모든 것을 다 놓아버렸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경지는 벽운공 초급과정만 해도 누구나 갈 수 있습니다. 내 목숨까지도 미련이 없고, 이 순간 바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에 뭔가를 크게 깨친 것 같고 자신이 부처가 된 게 아닐까 하는 환희심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는 경지는 별거 아닙니다. 그런 한 소식에 뭔가 이루었다고 착각하는 맹꽁거사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부처일까요? 아나꽁꽁이지요.

수십년 낙으로 삼았던 담배를 끊는 것이 그리 어려울까요? 한잔 술의 유혹을 이기는 것이 그리도 힘이 들까요? 만만의 콩떡입니다. 그게 왜 어렵겠습니까? 문득 한 생각이 들기만 하면 집에 사두었던 담배를 볼 채로 쓰레기통에 처박을 수 있습니다. 애지중지 꼬불쳐 둔 양주병들을 사정없이 욕실 바닥에 깨빡을 쳐 내동댕이칠 수 있습니다. 인생을 걸다시피 했던 화투짝이며 카드도 모질게 불지를 수 있고, 그것으로 안 되면 손구락을 잘라버리기도 합니다. 사람 마음이 얼마나 모질고 독한데 그까짓 것들 못 버리겠습니까? 한 목숨 버리는 것도 우습지요. 전부 다 버렸으니 부처 아니냐고요? 천만의 말씀이고 만만의 콩떡입니다.

부처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압니다. 담배를 끊었는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압니다. 술을 끊었는지 아닌지는 두고보면 압니다. 도박을 끊었는지 아닌지도 두고 보면 압니다. 바로 내일이면 갖다버린 담배가 아직 있는지 쓰레기 수거장을 뒤질지 모릅니다. 깨버린 양주가 아까워서 창자가 꼬여 몸을 비틀지 모릅니다. 손구락이 없어서 발가락으로 패를 돌리고 있을지 누가 압니까? 두고 봐야죠.

부처 되는 거 장난입니다. 눈감고 앉아 며칠만 생각해도 부처될 수 있습니다. 나도 순간 부처는 수백번도 되어 본 사람입니다. 하루 부처, 한달 부처, 일년 부처는 우리나라만 해도 산마다 암자마다 천지삐까립니다. 문제는 언제까지 가는가입니다. 부처마음이 며칠을 가나, 몇 달을 가나, 몇 년을 가나 그게 문제지요.

오도송을 부르면 뭐합니까? 몇 달도 못가서 술먹고 고기먹고 여자 찾아 헤메는데. 선문답을 하면 뭐합니까? 누가 주지 자리 뺏으려고 들면 살인도 할 참인데...

부처마음이 깃들던 그 순간은 진실입니다. 그 순간 틀림없는 부처입니다. 자기는 깨달은 사람이고, 모든 것을 버린 사람입니다. 더없이 청정한 맑은 마음이 수면에 비친 보름달 같습니다. 아뇩다라삼막삼보리! 장엄한 니르바나!

그런데 내일도 그럴지는 알 수 없습니다. 1년 후에도 그럴지 누구도 장담을 못합니다. 죽을 때도 그런 마음으로 죽는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버린 것이 누굽니까? 당신입니까? 정말 당신이 다 버린 거 맞습니까?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이 버렸습니다. 그 순간의 부처님 마음이 된 당신의 마음이 모든 것으로부터 애착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모든 욕심을 다 버리고, 모든 쾌락을 다 버리고, 모든 욕망을 다 버렸습니다. 마음은 청정한 환희심에 가득해서 드디어 피안에 당도한 듯 천지사방이 적정했더랬지요.

그러나 그 마음이 내일이 되면 갖다버린 것들을 찾아서 천지사방을 헤매고 다닐지 모릅니다. 왜 버렸나, 왜 버렸나, 이 아까운 것들을 왜 버렸나.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지.

마음이 바뀌면 버린 모든 것들이 다시 아까워집니다. 마음은 언제 바뀔지 모릅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다 버렸다 해서 버린 것이 아니고, 마음을 비웠다고 해서 부처가 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부처에 대해 착각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순간적인 부처를 부처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순간적으로는 부처가 됩니다. 그것을 부처가 됐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도송을 부르고 선문답을 하고 자빠집니다.

내 마음이 버린 것을 내가 버렸다고 착각하는 데에 수행자들의 비극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한번 뒤집어지면 십년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이 되는데 말입니다. 마음은 본시 무상한 것이어서 마음이 이룬 모든 것은 무상할 수밖에 없는데 수행자들은 마음을 닦아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어느 순간 마음을 보고 부처를 봤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부처를 발견했다고 환희에 몸을 떱니다. 그것을 자재불성이라 하고, 자기 마음속의 부처를 보는 것을 견성이라 합니다. 중생의 마음 속에 본시 부처가 있으니 누구나 자기의 본성을 보면 부처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기 마음 속에서 악마를 보면 중생은 본시 악마겠습니까? 한 중생이 마음 속에 악마가 보이면 악마가 되고 부처가 보이면 부처가 되겠습니까?

눈을 감고 앉아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부처가 보입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부처 되는 거 참 쉽습니다. 하지만 지가 지 마음속에서 디다본 그 부처가 진짜 부처겠습니까? 그 부처는 자기 마음이 그려낸 환영이지 부처가 아닙니다. 언제 마구니로 돌변할 지 모릅니다. 마음의 부처가 모든 것을 버렸다고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 부처는 언제 마음이 바뀌어서 쓰레기통을 뒤질지 모릅니다.

 

부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부처와 중생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불경에 근거해서 부처와 중생의 차이점을 찾아보면 크게 세 가집니다.

무지에 사로잡혀 어리석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중생이고, 일체종지를 증득한 사람이 부첩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집착하여 발버둥치는 것이 중생이고,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린 대자유인이 부첩니다.

마지막 한 가지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중생은 무상한 존재인 반면 부처는 항상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부처의 항상성에 대해서는 불경의 여러 곳에 나옵니다. 중생의 세계가 제법이 무아이고, 제행이 무상하며, 일체가 고인 이유는 한 가지 때문입니다. 삼라만상이 모두 끝없이 변화하며 일순간도 고정된 모습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상(無常)하다’고 합니다. 모든 존재가 쉴 새 없이 변하는 것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독존이 아니라 상존합니다. 서로 관계를 맺고 서로 작용을 합니다. 모든 존재는 관계 속에서 자기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모든 관계를 다 끊어 버리면 존재는 더 이상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순간 소멸합니다. 다른 것과 어떤 관계도 없는 독존하는 무엇은 무상한 세계의 일원이 아닙니다.

시간을 무한히 쪼개서 극한으로 미분하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프랑크시간이 됩니다. 수조분의 1초라는 짧은 시간의 세계로 가면 선과 후가 모호해집니다. 시간의 앞과 뒤가 중첩되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쪼개면 시간이라 말할 수 없게 되지요. 이런 극한의 찰나에도 모든 존재는 바뀝니다. 수조분의 1초 전과 수조분의 1초가 흐른 다음 순간에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존재는 없습니다. 수조분의 1초라는 극히 짧은 찰나에도 존재는 변합니다. 전자의 위치가 달라져 있고, 공간상의 좌표도 바뀝니다. 수조분의 1초 동안 전혀 변하지 않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무상한 존재가 아니라 항상한 존재입니다. 수조분의 1초 동안 변하지 않으면 그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수억만 년의 시간은 수조분의 1초가 누적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어떤 존재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말은 시간이 조금도 흐르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중생은 무상한 존재여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끝없이 변합니다. 매초 매순간 달라집니다. 하지만 항상하는 존재는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순간부터 시간은 얼어붙습니다. 미립자의 진동이 멈추면 시간도 정지합니다. 무상한 세계의 시간이 수백억년이 흘러도 변화 없는 존재의 시간은 수조분의 1초도 흐르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무상한 세계의 시간이 수조분의 1초가 흐르는 동안 항상한 존재의 시간은 영원을 달리고 있습니다.

중생과 부처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무상과 항상입니다. 중생은 생명이고 부처는 귀신이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중생은 유(有)고 부처는 무(無)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중생이 부처가 된다는 의미는 귀신이 되는 것도 아니고 무에서 유가 되는 것도 아니고, 색이 공이 되는 것도 아니고, 공이 색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무상한 존재가 항상한 존재로 바뀌는 것입니다. 항상성이 곧 부처의 특질입니다. 부처는 변하지 않습니다.

일체종지를 증득했다는 것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일체종지를 증득하고 나면 더 이상 어떤 것도 알 것이 없습니다. 부처가 되고 나면 부처의 앎은 더 이상 늘지도 줄지도 않습니다. 일체종지를 증득한 후에 부처가 뭔가를 새로 알게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일체종지를 증득한 것이 아니라는 소립니다. 일체종지를 증득했는데 어떻게 추가로 알게 될 것이 있겠습니까? 일체종지를 증득하고 나면 터럭 하나만큼의 새로운 지식이나 앎이나 경험이 더해지지 않습니다. 일체종지는 일체 변하지 않습니다. 뺄 수도 더할 수도 없는 것이 일체종집니다. 일체종지는 항상하는 지혜입니다. 반면에 중생의 지혜는 끝없이 변하는 무상한 앎이지요, 매일 새로운 것이 더해지고 매일 오류가 수정되고, 매일 기억에서 지워집니다. 부처가 된 후에는 수십 년을 더 산다고 해도 부처 이후의 삶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유의미한 경험이나 기억이 더해질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백 년을 더 산다 해도 조금도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뀌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처가 된 것이 아니었다는 고백이나 같습니다.

일체종지는 늘지도 줄지도 않기 때문에 일체종지를 증득한 순간 부처는 무상한 존재에서 항상한 존재로 바뀝니다. 더 이상 시간의 흐름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중생은 기억이 바뀝니다. 1초전과 1초 후의 기억은 달라집니다. 1초의 시간만큼 새로운 기억이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느끼지 못해도 의식에는 분명히 1초의 시간이 더해집니다. 1초전에는 없었던 무엇이 우리 의식에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체종지를 증득한 부처의 의식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증감의 변화가 없습니다. 시방삼세를 이미 다 본 다음이기 때문에 시간이 흘렀다 해서 더해질 기억이 없습니다. 부처에게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생물학적인 살아있음은 별 가치가 없는 개념입니다. 더 이상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는 아직 살아서 이쪽 세계에서 숨을 쉰다고 해도 부처는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닙니다. 일체종지를 증득한 순간 그는 피안으로 건너간 사람입니다. 차안인 이쪽 세계는 무상한 세계이고 부처가 건너간 저쪽 세계인 피안은 항상의 세계입니다. 무상한 세계는 늘 변하고 생기고 무너지지만 항상의 세계는 시간 밖의 세계이기 때문에 성주괴공하지 않습니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습니다.

부처의 개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항상성입니다. 항상하기 때문에 부처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항상하기 때문에 부처는 영원할 수 있습니다. 항상하기 때문에 부처에게는 고가 없습니다. 부처는 무상한 세계의 무상한 존재가 아닙니다.

부처의 마음을 금강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이 금강입니다. 금강이란 변하지 않는 존재를 말합니다. 금강이 될 생각입니까?


구름~~  

제법은 무아라고 합니다. 변하지 않고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이 세계의 어떤 존재도 아트만(진아)이 없다고 잘라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도 진아가 없는 무상한 존재라는 말일까요? 부처님의 말씀을 논리적으로 따라가면 하나의 결론에 귀결됩니다. 그것은 바로 ‘진아는 있다’라는 결론입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제법이 무아라면, 변하지 않고 고정된 존재는 그것 자체가 진아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만약 부처가 무상한 존재가 아니라 항상한 존재라면 부처는 곧 진아입니다.

항상하는 부처에게 진아가 없다면 무엇이 있어서 항상할 수 있겠습니까? 무아인 존재가 어떻게 항상하며, 어떻게 영원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가 항상하는 존재라면 부처는 진아인 것이며 따라서 무상한 제법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부처가 된다는 것은 무아에서 진아로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아의 세계를 무상하다고 하며, 진아의 세계를 항상하다고 합니다. 만약 부처가 된 다음에도 우리가 여전히 무상한 존재라면 부처가 되려고 할 이유가 없겠지요. 또 되어봐야 아무 것도 변할 게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윤회장 내에서 성주괴공하는 무상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이 세계를 무상한 세계로 보고 제법에는 진아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설하신 해탈이란 바로 이 무상한 세계에서 탈출하는 길입니다. 무상한 세계에서 벗어나면 어떤 세계로 가게 되겠습니까? 항상하는 세계만이 그 대답입니다. 무상한 존재에 진아가 없다면 항상하는 존재는 진아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진아를 찾는 것이며, 진아는 무상한 마음속에 있지 않습니다. 마음을 걷어내고 마음을 버려야 진아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버려봐야 그것은 믿을 게 못 됩니다. 마음이란 자체가 늘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버렸다는 것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마음의 한 상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은 항상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에서 부처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부처의 세계는 마음의 세계가 아니며 마음을 갈고 닦아서 갈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마음을 지워야 하고, 마음을 버려야 보이는 세계입니다. 버리거나 줏거나, 놓거나 쥐는 것은 전부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마음을 지우고 나면 버렸다 안 버렸다 하는 마음의 작용 자체가 없어집니다. 있다 없다라는 경계가 소멸됩니다. 마음이란 모든 존재의 변화입니다. 전자의 진동, 극미한 끈들의 파동이 전부 마음입니다. 마음을 지우면 모든 변화가 정지됩니다. 일체의 진동이 사라지고 어떤 파동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 버립니다. 그것이 항상입니다. 진아란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일체의 변화가 사라진 상태의 존재, 일체와의 모든 관계가 끊어진 절대고독의 세계, 진아는 불생하고 불멸합니다. 제법에는 진아가 없다는 말은 제법이 아닌 것에는 진아가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부처는 제법이 아닙니다. 제법 밖의 존재입니다. 제법이 접촉하거나 감지할 수 없는 피안의 존재입니다. 무상한 존재는 절대로 항상한 존재와 만날 수 없습니다. 두 개의 세계는 영원히 격리되어 있습니다.  둘 사이에는 영겁의 시간과 무한의 공간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부처가 된다는 것이 어떤 사건일까?’, ‘내가 만약 부처가 된다면 되기 전과 된 후의 나는 어떻게 다를까?’ 하는 풀지 않으면 죽지 못할 것 같은 궁금증을 갖고 있었습니다. 부처가 되면 나는 신이 되는 것일까? 전지전능해질까? 부처가 되면 나는 죽지 않게 될까? 부처가 되면 나는 죽어도 죽지 않고 천상에 어떤 영적인 존재가 되어 수많은 사바중생의 공양을 억겁의 세월 동안 받아먹게 되는 것일까? 내가 만약 부처가 되면 나는 중생들의 운명과 생사를 주관하게 될까? 미운 놈은 지옥에 보내고 이쁜 놈은 극락에 보내는 권한을 행사하게 되는 것일까? 부처가 되면 얼마나 행복해지는 것일까? 일체번뇌를 다 지우고 나면 나는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될까?

도대체 부처가 되면 뭐가 달라질까? 머리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변화를 떠올려봤지만 수긍할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최근에 와서 얻을 수 있게 된 하나의 답은...

‘더 이상 변하지 않게 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부처가 되기 전과 부처가 되고 난 다음의 나의 차이는 ‘변하느냐, 더 이상 변하지 않는냐’이며 그것 외에 중생일 때의 나와 부처가 된 나의 차이를 말해줄 것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 누구도 ‘나는 성불했다’ 혹은 ‘나는 부처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잇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안 것처럼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버린 척도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도저히 자신 없는 것이 바로 ‘변하지 않을 자신’입니다. 항상할 수 없기 때문에 부처가 됐다는 소리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체종지를 증득하는 것도, 일체의 집착을 버리는 것도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버린 다음이라야 더 이상 변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모르는 것이 단 하나라도 남아있다면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 자신은 변하게 됩니다. 한 가지를 알기 전과 알고 난 후의 자기는 달라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알게 된 후에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일로 해서 자기가 변할 일이 없게 됩니다. 단 하나라도 소유하고 집착하는 대상이 있게 되면 그것을 버리거나 혹은 다른 것을 갖게 됐을 때 자기는 변합니다. 갖고 있을 때와 버리고 난 다음의 자기는 분명히 다릅니다. 이것을 가졌을 때와 저것을 가졌을 때는 다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완전하고 철저하게 버린 다음에는 가진 것의 유무와 양에 따라 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궁극의 자유는 바로 변하지 않을 자유입니다. 자유가 없다는 것은 바로 원치 않는데도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을 수 있을 때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일체종지와 무소유는 바로 항상의 전제이기 때문에 부처가 되기 위해서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체종지와 무소유를 성취하지 못하면 변화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자신은 끊임없이 변해야 하고 변하는 자신은 무상한 존재이며 끝없이 나고 죽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부처의 정의를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궁극의 정의는 하나입니다. 바로 항상입니다. 나머지 정의는 이 하나를 위한 전제입니다.


구름~~  

2011-07-26 21:37

아이들을 키우려면 아이들과 눈높이를 해야하고, 동물을 키우려면 동물들을 안고 뒹구는 것도 필요합니다. 중생을 계도하려면 중생들과 어울려야 하고 교감을 해야 합니다. 만약 일절 변하지 않는 금강석이 사람들 사이 놓여 있다면 그 돌덩이가 사람들에게 뭘 줄 수 있겠습니까? 무상한 중생들 사이에 항상하는 부처가 있다면 그것은 물과 기름 같아서 결코 섞이지 못할 것입니다.
중생들  속에서 중생의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부처를 판단하면 안 됩니다. 불경에는 부처님께서 정각해탈 하신 다음에도 속사에 언짢아 하시는 모습도 그려져 있고, 속상해 하는 부처님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쓸쓸함이나, 처연함 혹은 연민과 동정도 보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부처도 별수 없네 중생들 하고 다를게 없자나'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장례식장에 갈 때는 검은 색 옷을 입고,  격식있는 연회에 초대 받았을 때는 정장을 하고 갑니다. 등산을 갈 때는 등산복을 입고 가고, 일하러 모일 때는 일할 수 있는 복장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하고 어울려야 할 때는 그들하고 같은 의상을 입는 것이 필요합니다. 겉에 걸치는 옷에 따라, 어떻게 입었느냐에 따라, 어떤 차를 타고 왔느냐에 따라, 지갑에 들어 있는 지폐의 두께에 따라 사람까지 달라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옷을 다르게 입을지언정, 돈이 있건 없건, 지위가 높을 때이건, 빈한한 때이건 그 속의 사람은 변치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처의 불변과 항상은 부처의 본질입니다. 부처의 변화는 피상입니다. 이것을 가려보지 못하면 부처와 땡초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나는 마음을 비웠어요’라거나 ‘나는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것 같습니다’라고 말할 때는 반드시 빠진 주어를 보충해서 들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비었네요(내 마음이 언제 다시 무엇으로 채워질지 모릅니다)’, ‘내 마음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것 같습니다(내 마음이 언제 다시 무엇에 매달릴지 모르지만요)’

 

구름~~

정각을 얻고 해탈을 한 다음에도 부처님은 계속 변했습니다. 한해, 두해 나이가 드시는 대로 그 모습은 점차 늙어갔습니다. 부처가 됐다 해서 성불한 그 모습 그대로 동안을 유지하고 팽조나 동방삭처럼 수백 년 수천 년을 동자로 사신 것은 아닙니다.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이 되신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젊었는데 늙어버렸다면 이것은 변한 것입니다. 살아있었는데 죽었다면 이것도 변화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늙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지도 않습니다. 성불하신 그때, 부처님은 이 세상의 어떤 노인보다 더 늙으셨고, 입멸하시던 그때 세상의 어떤 어린 아이보다 더 젊었습니다. 변한 것은 겉에 걸친 육신이라는 옷이지 속의 주인이 아닙니다. 부처는 더 이상 늙지도 어려지지도 않습니다. 삼십대의 부처님은 8백살 먹은 팽조보다 노인입니다. 둘이 만나면 팽조가 부처님께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팽조한테 배울 것은 없습니다. 여든의 부처님은 막 태어난 아이보다 더 어립니다. 산부인과 병원의 영아실에 가면 수백 명의 갓 태어난 아이들이 누워있지만 여든살의 부처님은 그 어느 아이보다 더 어립니다. 어떤 아이도 부처님보다 맑고, 순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막 태어난 어린아이와 대면을 하면 아이는 그 순간에 그만큼 늙습니다. 부처님을 바라보는 1분의 시간 동안 1분 더 늙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이가 다 자랄 때까지 20년을 보고 있어도 조금도 늙지 않습니다. 아이가 자라서 스무살의 청년이 되면 그때는 20년 늙은 사람과 20년 전과 똑같은 어떤 사람이 만나게 됩니다. 아이는 몸과 마음이 다 변했고, 부처님은 다만 모습만 조금 달라졌을 뿐입니다.

부처님도 돌아가신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2천5백 년 전의 어느 날에 부처님이 죽었다면 부처님은 다시 태어나셨을 겁니다. 태어났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어디에서도, 그 어느 때에도 부처님은 다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죽지 않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이것입니다. 무상한 존재는 반드시 죽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반드시 다시 납니다. 나고 죽고, 생하고 멸하는 것은 무상한 존재의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그러나 항상하는 부처님은 태어나지 않습니다. 무상한 존재의 일원이 아니라 피안으로 건너가신 분입니다. 해탈열반에 이른 부처는 생물학적인 살아있음과 죽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부처는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습니다. 생물학적인 죽음은 바로 생물학적인 탄생으로 연결되지만 부처의 입적은 그런 연결 고리가 끊어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2천5백 년 전의 모월 모일 모시에 부처님은 돌아가신 것으로 되어 있고, 그로부터 2천5백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 세월만큼 변했습니다. 2천5백년의 그 순간과 똑 같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 광대한 우주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변했고 지금도 변하고 있습니다. 1조분의 1초가 흘러도 우주는 전부 다른 우주로 바뀝니다. 매초 매 찰나지간에 우주는 다른 우주로 바뀝니다. 한번 담구었던 물에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우주는 두 번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우주는 그 순간만 존재합니다. 다음 순간의 우주는 전혀 다른 우주입니다.

오직 부처님만큼은 2천5백 년 전과 똑같습니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부처님이 바로 이 부처님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에게는 2천5백년이라는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았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우주가 앞으로 50억년의 나이를 더 먹어도 부처님은 여여합니다. 이 우주가 종말을 맞아도 부처님에게는 종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화내는 신, 미워하는 신, 사랑하는 신은 무상한 존재입니다. 변하는 모든 것은 무상하고 허망합니다.

홀로 변하지 않으면서 영원하리라는 포부를 가져봅니다. 천상천하에 유아독존! 

 

 

구름~~
마음은 내가 사는 집과 같습니다. 구석구석 디다보면 갖다버릴 것들이 지천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입지 않을 옷가지들과, 상해버린 음식들, 고장난 시계며, 라디오, 그것들을 읽을 주인이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동화책들, 아무도 갖고 놀아주지 않는 인형들, 온갖 쓰레기와 잡동사니들이 발견됩니다.

이것들 언제 한번 갖다버려야지 하면서도 차일피일 대청소는 미루어집니다. 이런 집과 같이 우리 마음도 들여다보면 볼수록 버려야 할 것들이 산더미 같습니다. 뭐가 소중하고 뭐가 쓰레긴지, 무엇을 간직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작심하고 대청소를 한번 하면 싸그리 갖다버릴 수 있습니다. 혹시는 버린 후에 다시 아쉬워하게 될 물건이 있을 수도 있고, 멀쩡한 가재도구를 버릴 수도 있고, 고려시대 청자를 막사발인줄 알고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청소를 한번 하고나면 한동안은 개운합니다. 온 집이 번쩍번쩍 광이 나고 그리 맘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돼지움막에 살다가 호화맨션으로 이사 온 것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진즉에 대청소를 할걸...’하고 좀 더 일찍 청소를 안한 것이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걸로 집에 관한 문제가 다 해결이 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몇 달만 지나고 나면 집은 다시 청소하기 전과 같아집니다. 설거지 안한 그릇은 씽크대에 쌓이고, 버리지 않은 음식쓰레기 봉지는 주방 옆에 모입니다. 방문을 열어보면 마구 어질러져 있는 것이 난장판입니다. 버려야 할 물건들은 다시 쌓입니다.

마음공부를 한다는 것은, 마음을 수련한다는 것은 집을 청소하는 것과 같습니다. 청소를 할 때마다 집은 쾌적해지고, 방은 깨끗해지고, 사물은 정리정돈되어 가지런해 집니다. 수련한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해결된 것이 있겠습니까? 청소의 효과는 일시적이고 잠시 뿐입니다. 조금만 지나면 마음에는 다시 때가 끼고, 오물이 모여듭니다. 집을 언제나 항상 깨끗하게 유지할 방법이 없을까요? 없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늘 청소하는 것입니다. 24시간 청소체제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먼지 하나만 발견돼도 바로 진공청소기를 갖다댑니다. 헝겊 하나 떨어져 있어도 즉각 주워 제자리에 갖다놓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신 컵이라도 즉시 씻어 선반 위에 올립니다. 눈과 귀는 24시간 온 집안을 감지하는 고감도 센서로 작동합니다. 먼지 하나가 날리는 소리도 놓치지 않습니다. 이렇게 청소하고 관리하면 집은 언제나 깨끗할 수 있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음을 수련하는 수행자들 중에는 하루 종일 걸레와 진공청소기를 손에 들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한 점 얼룩이라도 묻으면 즉시 씻어내고 닦아내고 문질러 광이 나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런 마음을 쳐다보면서 흡족해 합니다. 한 경지 갔다고 생각합니다. ‘이 깨끗한 내 마음을 봐. 한 점 얼룩도 없자나’ 하고 자랑합니다. 일체의 번뇌가 사라졌다고 착각합니다.

처음에는 깨끗하게 살고 싶어서 집 청소를 했는데 나중에는 청소를 하기 위해 사는 집으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청소가 목적으로 바뀐 것인데 이런 사람들은 그걸 깨닫지 못합니다. 제 아무리 청소를 잘해서 깨끗하게 만들어도 청소를 그만 하는 순간부터 집은 다시 더러워진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열심히 청소합니다.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청소합니다. 오로지 깨끗하기 위해서, 정리정돈하는데 일생을 바칩니다. 좋은 집에서 잘 살은 사람이 아니라 죽도록 청소를 한 청소부로서 삶을 마감합니다. 마음수련하는 사람들의 생이 이와 같습니다. 닦다가 죽습니다. 언제라도 닦는 것을 중지하면 바로 더러워집니다.

집안을 뒤지면 군데군데, 구석구석 버릴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하나 버리는데도 꽤 시간과 비용이 듭니다. 그리고 한번 버린다 해서 버릴 것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백번을 버려도 다시 버릴 것은 나옵니다. 가장 완전한 해결책은 집을 통째로 버리는 것입니다. 집 대문에 못질을 콱 해 버리고 나와버리면 됩니다. 집에서 나오는 순간 집에 관련된 모든 문제는 사라집니다. 집을 버리지 않는 한 집에 따르는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출가는 집을 청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가꾸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버리고 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출가수행자들은 집에서 나온 것 같지만 나온 것이 아닙니다. 풀빵구리 제집 드나들듯 수시로 집에 다시 들어갑니다. 옷도 가지고 나오고, 밥도 먹고 나오고 잠도 자고 나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청소도 하게 됩니다. 미련이 남아서 대문에 못질을 못하고 언제라도 다시 들어갈 수 있게 열쇠만 채웁니다. 물론 열쇠꾸러미는 소중하게 허리에 차고 안도합니다.

마음은 아무리 갈고 닦아도 잠시만 한 눈 팔면 다시 때가 끼이는 관리하기 아주 어려운 집과 같습니다. 마음이라는 집에 사는 한 마음의 문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뒤져서 쓰레기를 찾아 그것만 버리는 짓은 일시적인 해결책이지 근본적이 해결이 아닙니다. 집에서 나와야 합니다. 눈꼽만큼의 미련도 두지 말고, 다시 돌아갈 가능성은 일체 배제하고 대못질을 해버려야 합니다. 자기가 떠난 후에 누가 그 집에서 황금의 산더미를 발견했다 해도 후회하는 마음이 들어서는 안 됩니다.

부처는 더 이상 마음을 닦지 않습니다. 씻고 닦고 가꿀 마음이라는 것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부처는 스물네시간 청소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물네시간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물론 집을 버리고 나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비를 피할 지붕도 없고, 추위를 막아줄 담장도 없으며, 서리를 맞으며 자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르게 보면 온 우주가 자기 집이 되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 어떤 저택보다 더 큰 저택이며 저절로 스물네시간 청소가 되는 완전자동 셀프크리닝 시설이 되어있는 최상의 저택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장에 비를 맞을 것과 아침서리를 걱정합니다. 온 우주를 집으로 삼은 대자유의 행복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집을 버림으로써 완전한 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부처님은 가르쳐주셨습니다. 암만 쓸고 닦고 관리를 잘해봐야 지금 사는 집은 돼지 움막이나 같습니다. 중생의 삶은 돼지 움막을 스물네시간 청소하면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보는 부처님의 마음을 측은지심이라 합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