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5  인간과 부처의 차이.

 

 

우리나라 선불교의 땡중들이 흔히 하는 흰소리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리라” 땡중들이 이런 소리를 선문답이라고 하는 이유는 부처가 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처는 죽일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소유’를 누더기처럼 기운 잿빛 승복 한 벌에 바리떼기 하나만 걸망에 지고 평생 걸식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실천하려는 중들이 많습니다. ‘무소유’를 ‘무재산’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소유’로 떼돈을 번 어느 스님은 죽고 보니 재산이라고 있지를 않았는데요, 살아생전에 ‘무소유’ 팔아서 번 돈은 전부 장학금으로 다 주고 남은 게 없답니다. 죽기 전의 치료비는 어느 재벌집 사모님이 책임을 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정말 ‘무소유’를 실천하신 스님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이 스님은 생전에 재산가였고 재산을 자기 맘대로 쓰고 죽은 사람입니다. 여행을 다녔건 장학금을 주었건 자기가 자기 맘대로 자기 재산을 쓴 것은 마찬가집니다. 죽기 전에 다 쓰고 죽었기 때문에 결국 ‘무재산’을 실현한 것은 맞지만 부처님의 ‘무소유’를 실천한 것과는 거리가 한참 멉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한테서는 아무 것도 뺏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흉악한 강도도 부처님한테서는 아무 것도 뺏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목숨조차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어떤 권력자나 폭군, 황제도 부처님의 목숨을 뺏지 못합니다. 하물며 땡중들이겠습니까? ‘무소유’란 자기의 육신과 생명조차 갖고 있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도 자기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목숨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부처입니다. 전지전능한 창조주 여호와도 이런 사람에게는 줄 상이 없고 내릴 벌이 없습니다. 가지고 있지 않은 목숨을 뺏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부처를 죽인다’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며 비논리적인 소리고 황당무계한 선문답입니다. 부처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내뱉는 흰소립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리고 남이 그 생명을 뺏을 수 있고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는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입니다. 생명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존재는 무엇인가를 갖고 있습니다. 귀신도 가진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귀신한테서도 무엇인가를 뺏을 수 있습니다. 귀신이 사는 터를 뺏을 수도 있고, 귀신이 먹는 것을 뺏을 수도 있습니다. 귀신이 가진 영험을 박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한테서는 아무 것도 뺏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살았거나 죽었거나 상관없이 다른 모든 존재와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과 부처는 똑같이 숨을 쉬고, 밥을 먹는다 해서 같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간과 부처의 차이점 다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차이점은 따로 있습니다.

 

 

구름~~

생명이란 무수히 많은 생명체의 집합체입니다. 사람은 60조개에 달하는 세포들의 집합입니다. 이 엄청난 수의 생명들이 하나로 뭉쳐-그것이 자기들이 사는데 제일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한 생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무수히 많은 놈들이 났다가 죽고 또 새로 납니다. 이 모든 생명체들은 전부 자신에 대한 집착이 있고, 생존하려는 강렬한 본능을 갖고 있으며 후손을 남기려는 뜨거운 욕망의 덩어립니다.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책의 제목도 있듯이 이 생명들은 이기심의 화신입니다. 자신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은 취하고 해로운 것은 배격합니다. 이기심과 욕망과 집착의 화신들이 살려고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수십 조 개에 달하는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뿜어내는 생존욕의 발산입니다. 이런 마음이 불러일으키는 것이 생각입니다.  

 

그래서 생각이란 육신의 함성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생각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고 탐욕적일 수밖에 없으며, 잔인하며 집요하고 무자비합니다. 사랑과 이타심조차도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뒤집어쓰는 가면입니다. 탐진치가 마음의 본래 진면목이며 생각은 그 불꽃이고 화염입니다. 생각의 뿌리는 집착입니다. 모든 생각은 내 몸의 생명들이 갖고 있는 집착에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은 본질적으로 사악합니다(만약 사악하고 순수하다는 것의 구분이 가능하면 말입니다). 우리는 24시간 사악한 생각을 하며 사악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일순간도 우리는 이런 사악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해탈이 지극히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아무리 고뇌와 번민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도, 그것의 원인이 집착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납득을 해도 내 몸의 모든 생명체들이 그것에 따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승들은 한순간 마음으로 깨달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직지인심 견성성불-그건 택도 없는 소립니다. 내 마음이 집착을 끊겠다고 결심을 하고 각오를 한다 해서 해탈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해탈을 하려면 내 몸의 60조개 세포들 하나하나가 전부 승복을 해야 합니다. 마음이 집착을 버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이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제 아무리 마음이 이리 가자 해도 몸이 저리 가면 안 되는 일입니다.

 

내 몸을 이룬 생명들 하나하나를 전부 설득하고 납득을 시키고 저항을 멈추게 하는 데는 엄청난 인내와 지혜와 시간이 필요합니다. 설득해야 할 대상이 세포 단위로 따져도 60조개가 넘습니다. 달리 비유하면 나는 60조명의 백성을 거느린 왕국의 왕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왕도 나보다 더 많은 신민을 거느린 자는 없습니다. 이 백성들이 왕의 말이라고 무조건 따르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민심을 통일하고 국론을 하나로 하려면 엄청난 설득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왕에 반대하고 반란을 일으키고 치받고 저항하고 데모하는 넘들이 숱하게 나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고 공부를 해서 용맹정진을 해도 60조의 백성들을 다스리기 쉽지 않습니다.

 

왕이 모든 것을 알고 백성을 이끌려고 해도 그건 왕이 혼자 아는 거지 백성들은 무지몽매하고 어리석습니다. 머리가 불법을 깨닫고 정각을 얻었다 해서 온 몸이 따라주는 것이 아닙니다. 몸 전체가 따라오지 않으면 깨달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을 부처님은 중생습을 지운다고 표현하셨지요. 깨닫는 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 습을 지우는데 몇 겁이 걸릴지 모릅니다.

해탈을 해서 부처가 됐다는 것은 깨달은 후에 중생의 습을 전부 지우고 온몸의 모든 생명이 깨달음에 승복하고 따라오는 것을 말합니다. 머리가 집착을 버린 것이 아니라, 마음이 대오각성을 한 것이 아니라 온 몸의 생명들이 바뀐 것을 말합니다. 그래야 해탈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백번도 다잡아먹을 수 있고, 이성은 천만번 이치를 깨달을 수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도로아미타불입니다. 온 몸이 진실로 항복하고 따라올 때 비로소 해탈했다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구름~~  

 

마음이라는 것은 본시 우리 육신의 생존의지와 이기적 열망이 빚어내는 것입니다. 때문에 마음의 주인은 우리의 의지나 생각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의지나 생각들 자체가 마음의 편린이며 그것의 부산물입니다. 마음의 주인은 결코 우리의 정신이 아니며 그것은 육신의 소유물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내 육신이 그때그때 올려 보내는 마음에 조종을 받는 허수아비일 따름입니다. 나의 주체로서 고상하고 우아한 마음을 가진 정신적 존재가 숨어있으리라는 생각은 마카 망상이며, 헛된 희망일 뿐입니다.

성인군자나 시정잡배의 마음이 본질에서 다르지 않고, 신선도사의 마음이 도적강도와 다를 게 없습니다. 결국 자기에 집착하는 욕망의 존재인 것은 똑같기 때문에 그 마음이란 것도 대동소이한 것입니다. 성인과 도적의 마음은 오십보백보의 차이 뿐입니다. 버전이 약간씩 다르다 뿐이지 결국 MS-DOS인 것은 똑 같습니다.

마음은 육신이란 생명체가 자기에 집착하여 뿜어내는 독소이기 때문에 짐승이나 인간이나 잘난 놈이나 못난 놈이나 수양이 된 놈이나 막된 놈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큰 놈이나 작은 놈이나 여문 놈이나 무른 놈이나 익은 놈이나 설은 놈이나 콩 밭의 콩이기는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만약 온 몸의 생명들이 깨달음을 쫓아 일시에 자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다면 그때에도 과연 생명체에 마음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똥밭에 똥냄새가 나는 것은 똥이 있기 때문인데, 똥을 깨끗하게 치워버린 후에도 똥냄새가 날 수 있겠느냐 이 말입니다. 내 몸의 60조 개 세포들이 전부 집착을 내리고, 살겠다는 생존의 열망을 버리고, 모든 이기와 탐욕을 다 던져버린 다음에도 나에게 마음이 있으며 생각이라는 것이 올라오겠느냐 이 말입니다.

모든 집착이 다 끊어지고 나면 마음도 사라집니다. 생각도 없어집니다. 불에 탈 장작이 하나도 없는데 불길이 솟고 연기가 날 수 없습니다. 어느 하나 집착하여 매이는 곳이 없으면 마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해탈하여 부처가 된 사람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냐 묻겠지요. 이에 대한 대답은 ‘예 그렇습니다’입니다. 부처는 마음이 없고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집착을 벗어 던질 때 마음도 따라 던져졌고, 아상이 깨어질 때 생각들도 같이 깨어져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란 백치하고 같은 말이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없어진 곳에 다른 것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대자대비’입니다. 대자대비는 ‘부처님의 마음’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대자대비를 흔히 사람들은 지극한 자애로움, 한없는 사랑, 그윽한 인애와 같은 것으로 여기지만 대자대비는 그런 것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노자가 이 세상의 근원인 상제의 이름을 ‘도’라고 붙였지만 그 이름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고 한 것처럼 대자대비는 부처의 마음에 붙인 이름일 뿐 그 이름에는 아무런 뜻도 의미도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과 부처의 대자대비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똥밭에서 나는 똥냄새요, 부처님의 대자대비는 똥을 말끔히 치워버린 곳에 피어난 연꽃의 향기입니다. 이 둘이 같을 수 없습니다. 똥과 연꽃이 다르듯이 인간과 부처는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 비슷하니까 둘을 똑같이 컴퓨터라고 말하지만 흑백 모니터에 MS-DOS가 깔린 베이직 머신과 칼라모니터에 윈도를 쓰는 첨단 컴퓨터는 같은 물건이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은 생각을 일으킵니다. 부처의 대자대비는 반야를 일으킵니다. 반야는 부처의 생각을 지칭하는 이름입니다. 인간은 마음을 가진 존재지만 부처는 대자대비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생각에 사로잡혀 살지만 부처는 반야의 빛에 싸여 있습니다. 이 둘은 전혀 다른, 너무나 차원이 다른 존재입니다.

우리가 해탈하려 하는 것은 진실로 해탈이 가치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가 되는 것은 성인군자가 되는 것이나 신선도사가 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더라도 그 길을 가야하고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선불교의 땡중들은 마음을 찾으려고 애쓰고 우리 주위에는 마음을 챙기겠다고 설치는 어설픈 도사쟁이들이 득시글거립니다. 그들은 불성이 마음에 있다고 착각합니다. 모든 집착을 버릴 때 마음이 같이 버려지는 것인 줄 모릅니다. 쓰레기통에 던져야 할 것을 귀중한 보물처럼 애지중지합니다. 쓰레기를 갈고 닦습니다. 윈도를 모르기 때문에 MS-DOS가 담긴 3.5인치 플로피디스켓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을 천년만년 갈고 닦아도 대자대비로 둔갑하지 않습니다. 생각을 수미산만큼 높이 쌓아도 반야의 빛은 나오지 않습니다. 마음이란 집착의 산물이며 집착을 버리면 동시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피어나는 대자대비는 마음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부처가 입 하나 눈 둘, 귀 둘을 가졌다 해서 인간인 것이 아닙니다. 부처는 인간과 다른 존재입니다.


구름~~

나의 온 육신이 모든 것에 대해 집착을 끊게 되면 아무 것도 갈구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일체 마음이라는 것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마음이란 바람이 일으키는 파도와 같아서 바람이 자면 파도도 가라앉습니다. 일체의 바람이 없다면 수면은 미동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몸의 어떤 세포도 아무런 갈구가 없는데 마음이 생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진실로 내가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면 마음이라는 것은 올라올게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 무슨 생각이 올라오겠습니까? 문득 한 조각의 마음이나 생각이 언뜻 비치고 지나가도 그것은 내가 무엇엔가 대상에 집착한 흔적입니다. 집착하지 않으면 대상이 사라지고, 반응하는 대상이 없으면 생각은 끊깁니다.

이 세상 모든 것에 집착을 여읜 부처는 사실 해야 할 생각이 없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모든 것에 대해 사랑도 애착도 집착도 미련도 연민도 두려움도 아쉬움도 없는데 도대체 뭘 생각할 게 있겠습니까? 그리고 생각해봐야 뭐가 나오겠습니까? 마음이나 생각이라는 것이 그 상황에 의미가 있기나 하겠습니까? 해탈을 하게 되면 그 순간 부처는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닙니다. 생과 사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생사를 해탈한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해탈 후에는 생물학적인 살아있음이 일체 의미를 상실합니다. 생사의 경계가 지워진 마당에 가치롭고 의미 있는 마음이나 생각이 있을 리 없지요.

사실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생각은 해탈하기 전에 다 했다고 봐야 합니다. 또 다 해야 해탈을 할 수 있습니다. 깨달았다고 해서 생각을 다 한 것은 아닙니다. 깨닫고 난 후에 사실 생각할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해탈을 하고 나면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게 됩니다. 차안의 모든 것이 생각의 대상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피안의 모든 것은 생각의 대상이 아니고 마음의 영역이 아닙니다. 석가세존은 인간이 마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모든 생각을 궁극의 궁극에까지 하신 분입니다.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모든 생각을 하나 남김없이 전부 다 한 자리, 즉 생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생각이 끊긴 자리에 도달하신 것입니다. 그 깊고 깊은 생각 도중에 모든 집착을 다 벗어던진 것입니다. 모든 집착을 삼매의 강에 다 흘려보냈습니다. 마음이 다하고 생각이 끊긴 자리에 가본 사람만이 그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대자대비는 마음과 다릅니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는데, 사랑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마음은 상대가 원수인가 아닌가 구별합니다. 여호와의 사랑은 자기를 믿고 따르고, 교회에 잘 나가고, 연봇돈 많이 내고, 기도와 찬송을 열심히 하고 거기다가 착하게 사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징벌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천수천안의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비명소리를 눈으로 보고 그 손을 내밀어 잡아줄 때에 상대를 가리지 않습니다. 크리스찬인가 불자인가, 착한 사람인가, 악인인가? 도와줄 가치가 있는 상대인가 아닌가 따지지 않습니다. 원수인가 은인인가 가까운 사람인가 먼 사람인가 구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부처는 부모 형제나 자식도 사랑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물며 원수를 사랑하겠습니까? 보통의 마음은 원수를 미워하고 지극한 경지의 마음은 원수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대자대비는 원수를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원수와 은인을 구분치 않습니다. 조금도 사랑하지 않고 조금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가 누구이던 도움이 필요하면 외면하지 않습니다.
 

 스님들은 길을 걸을 때 주장자를 짚습니다. 지팡이로 땅을 쿵쿵 찍으면서 길을 갑니다. 그 이유는 혹시라도 벌레 같은 미물들이 발에 밟힐까봐 피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물의 생명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배려는 마음이 아니고 대자대빕니다. 왜냐 하면 스님은 벌레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벌레가 사랑스럽거나 벌레에 애착이 있어서 살펴주는 것이 아닙니다. 벌레들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배려하고 다치지 않게 하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부처가 중생을 위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중생을 사랑하고 이뻐하고 애착해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자대비에는 그런 관념이 조금도 없습니다. 부처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중생이 부처님의 가피은덕을 입고 구제를 받습니다. 부처는 중생을 사랑한다는 생각도 없고 남을 돕는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하는 왼손조차 자기가 선행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선행을 한다는 의식 자체가 없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모든 말과 행동은 그 전부가 선행이며 지극한 보살행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살려주고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마음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고 결심을 해야 하고, 부단한 성찰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자대비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집착을 여윈 자리에, 마음이 떠나간 자리에 대자대비는 피어납니다.

 

인간의 마음과 부처의 대자대비는 차원이 다릅니다. 갈고 닦은 마음이 대자대비라고 생각하면 그건 큰 착각입니다. 마음이 지극한 경지까지 승화되고 고양되어 대자대비가 된다고 생각하면 해탈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수련을 하고 수양을 하고 마음을 챙기고 마음을 가다듬어도 그걸로는 부처가 되지 못합니다. 성인군자는 될 수 있고, 도사신선은 될지 모르지만 부처는 되지 못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갖고는 될 수 없는 것이 부처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전부 버린 다음에라야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해탈이란 바로 인간의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모든 집착이 있고 애욕이 있고, 탐욕이 있습니다. 아니 인간의 마음이란 그 자체가 탐진치입니다.

 

아무리 갈고 닦아도 마음은 마음입니다. 어떤 수련을 하고 수행을 해도 마음이란 것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갖고 사는 한 우리는 변함없는 인간일 뿐입니다. 인간이지만 조금 나은 인간이 되려고 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공부요, 수련입니다. 그러나 해탈은 다른 모든 공부나 수련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마음의 수준을 높이는 노력이 아니라 마음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육신의 오욕칠정을 다스리는 차원이 아니라 그것들을 몽땅 갖다버리는 작업입니다. 개선이 아닌 폐기입니다. 수리가 아니라 교체입니다. 부처는 완성된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는 인간의 완성형이 아니라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구름~~  

등반가 오은선씨가 칸센충가에 올랐느냐 못 올랐는데 거짓말을 하느냐를 가지고 시중에 논란이 있는 것을 봅니다. 이런 논란이 생기는 이유는 칸센충가가 어떤 산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상 부근에 바위가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어떤 바위가 있는지, 정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누구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런 논란이 생겨납니다.

칸센충가에 오른 사람은 여럿 있지만 칸센충가는 가 본 사람마다 다릅니다. 올라갔다 내려온 사람마다 하는 소리가 조금씩 다 다릅니다. 그래서 과연 칸센충가의 정상이 어떤 것인지 딱 부러지게 말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해탈과 부처에 대한 논란도 이와 같습니다. 해탈을 하고 부처가 된 사람들이 해탈과 부처를 설명해 주어야 하는데 누구도 말을 하지 않습니다. 고작 정상 가까이 갔던 것은 틀림없는데... 하고 주억거릴 뿐입니다. 깨닫기는 한 게 틀림없는데 하고 뭉기적거립니다. 정상에 올랐다고 하면서 정상에서 찍은 사진 한 장 내놓지 않는 등반가나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자기가 해탈을 했는지 부처가 됐는지 아직 멀었는지 그것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수행이라고 열심히들 하긴 합니다.

나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불자가 된 이래 부처님의 뒤를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네 님이 가셨던 그 길을 뒤밟아 가보고 싶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생에 부처가 되고 싶었습니다. 히말라야 14좌를 모두 발 아래 두겠다고 결심한 등반가나 같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14봉이 어디에 있는건지 얼마나 높은건지 어떻게 해야 오를 수 있는지 아무도 가르쳐주는 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수많은 사람이 나보다 앞서 그 산들을 밟았을텐데 아무도 그 산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부처가 되려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기가 막힌 것은 그 수많은 부처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 누구도 부처가 무엇인지 모르더라는 것입니다. 김영삼이 중학교 다닐 때 자기 공부방 벽에 “대통령 김영삼” 하고 써붙였다 하는데 아마도 중학생이던 김영삼은 대통령이 뭔지 몰랐을 겁니다. 알지도 못했지만 어떻던 그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직을 수행했는데 그가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보다 앞서 대통령을 했던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는 것입니다. 박정희가 하는 것도 봤고, 전두환, 노태우가 하는 것도 봤습니다. 대통령 별거 아니네, 저렇게 하면 되겠군 겐또라도 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처가 되고 싶었던 내 앞에는 아무도 부처가 되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까마득한 옛날하고 그 옛날 2천년도 더 전에 왔다 가신 석가세존 한분이 있을 뿐입니다.
 

 부처가 되려고 하면 우선 부처가 무엇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산을 어떻게 올라가며, 무엇인지도 모르는 부처를 어떻게 이루겠습니까? 부처가 되려면 부처를 알아야 합니다. 되고 나서 아는 것이 아니라 알고 나서 되는 것입니다. 정상에 올라봐야 어떤 산인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산인지 알아야 오를 수가 있습니다.

수많은 고승들이 있고 선사 조사들이 넘쳐 나지만 누구도 부처가 되어봤다는 사람이 없고, 해탈했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해탈이 무엇인지 부처가 무엇인지 말을 안 합니다. 참으로 답답해서 돌아가실 지경입니다. 칸센충가가 어떤 산인지는 갔다 온 사람이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갔다 온 사람이 없거나 갔다왔다 하면서도 말해주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습니다. 구글로 찍은 위성사진을 디비던, 지리학서를 보건, 히말라야 밑동네 사는 사람들을 잡고 물어보건 칸센충가에 대한 모든 것을 수집해서 정보를 정리하고 지식을 확립해야 합니다. 등반은 그 다음입니다. 막상 올라가보면 오르기 전에 조사했던 것과 상당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사를 소홀히 할 수 없고 사전의 공부가 헛된 것도 아닙니다. 그만큼 시행착오를 줄여주고 시간을 단축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구름이 ‘부처란 이런 것이다’라고 떠드는 것은 칸센충가를 올라보지 못한 등반가가 칸센충가의 정상을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도 크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정말 칸센충가에 올랐던 사람이 정상을 설명한다면 나는 침묵을 지킬 것입니다. 해탈하여 부처가 된 사람이 설법을 해주기만 한다면 구름이 떠들 이유는 없겠지요. 나는 아직 준비 중이고 채 꾸리지 못한 짐이 많지만 언젠가는 출발할 그 날을 위해 노력합니다. 지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빗물은 태양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빗방울은 태양을 모릅니다. 우리 인간은 하염없이 내리는 비와 같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내리는 빗물입니다. 비가 내리던 안 내리던 태양은 구름 너머 저 높은 곳에 언제나 떠 있습니다. 구질구질 내리던 비가 멈추고 구름이 걷히기만 하면 환한 태양이 온 땅을 비춥니다. 그러나 이때 비는 이미 내리지 않기 때문에 빗물은 태양을 볼 수 없습니다.  

내가 존재하는 한 나는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비가 그치면 태양이 보이지만 비는 태양을 볼 수 없듯이 내가 소멸되어야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결코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해탈을 해야 부처가 되는데 해탈을 하게 되면 이미 그 자리에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논리적 추론의 결과는 ‘인간은 결코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보여줍니다. 이 말을 좀 더 달리 해석하면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는 없어지고 내가 있던 자리에 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어떤 것이 생겨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가 꽉 찼던 허공에 찬란한 빛이 충만해진 것과 같습니다. 비가 그쳤기 때문에 햇빛이 난 것이지만 빗물이 햇빛으로 둔갑한 것이 아닙니다. 조금 전까지 내리고 있던 빗물과 지금 비치고 있는 햇빛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내(빗물)가 햇빛(부처)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나(빗물)는 소멸되고 그 자리에 원래 있던 햇빛이 다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내가 빗물이었는데 햇빛으로 신분상승을 이룬 것도 아니고 변화된 것도 아닙니다. 햇빛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사라진 곳에 나타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없어졌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지 내가 모습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나는 참으로 오래 동안 한 가지 의혹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부처라는 것에 대한 의심이고 의혹입니다. 설사 불법을 수행해서 부처가 된다 하더라도 결국 인간이긴 마찬가지 아니냐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해탈이 뭔지 모르지만 해탈을 했다 해도 결국 몇 십 년 못살고 죽어야 하는 인간인 것에는 변화가 없지 않느냐 이런 생각입니다. 해탈을 한다고 인간이 신이 되겠느냐 이 말이지요. 부처는 인간인가 인간이 아닌가? 부처는 신인가 신이 아닌가? 부처는 인간이기도 하고 신이기도 한가? 부처는 인간도 아니고 신도 아닌가? 내가 가진 모든 논리의 칼을 빼들어 닥치는 대로 휘둘렀습니다. 명제는 그리 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전제는 명료했고 조건은 단순했습니다. 논리적 결론을 얻는데 시간이 걸릴 일도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쉽게 나오지 않고 수 십 년이 흘렀습니다.

해탈의 전과 후에 무엇이 달라지는가? 해탈하기 전의 그와 해탈한 후의 그는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이런 질문들이 지난 시절 나를 붙잡은 화두였습니다.

겨우 결론의 끄트머리를 손에 쥐게 된 것은 벽운공에 힘입은 것이었습니다. 체험은 논리보다 강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아니 체험이야 말로 가장 명료한 논리였지요, 논리적 결론보다 결론에 대한 입증이 먼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삼매 속에서 무엇을 하셨는지 어슴프리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얽히고 얽힌 실타래의 끝을 겨우 찾았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이걸 풀어야 하는지 단 칼에 잘라버려야 하는지...


구름~~

 

영의 세계를 눈으로 보면 어떤 광경일까요? 그것은 밤하늘의 별들과 은하수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을 가득 채우고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이 바로 우리의 영입니다. 서울 올림픽 때 한강에 떠내려 보낸 연등의 물결이 기억나시는지요. 그 불빛 하나하나가 우리의 영입니다.
영혼의 세계는 물질계에서 보는 우주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상상이 안 될 뿐입니다. 영혼의 세계도 우주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세계로 나뉘어집니다. 수천억 개의 은하가 있는 것처럼 영혼의 세계에서 우리의 영들도 무리를 이룹니다.

은하 속에는 거대한 별의 집단들이 있고 태양계처럼 작은 가족도 있습니다. 인간이 지구라는 별 위에 모여 사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도 한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지구인의 영혼은 영계의 은하수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은하수에는 지구에 태어났다가 죽은 사람의 영만이 아니라 모든 지구 동식물의 영들도 다 함께 있습니다. 그들은 천체 주위에 떠도는 우주의 먼지나 돌덩이처럼 보이지만 이 은하수의 구성원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저쪽 멀리에도 여러 은하수가 보이는데, 그것은 지구가 아닌 다른 천체에서 살았던 생명들의 집단입니다. 지구의 생명은 지구 생명의 은하수를 이루고 다른 별의 생명들은 다른 영의 은하수를 이룹니다. 이런 은하수들이 영의 대우주에는 수없이 많이 존재합니다. 물질계의 우주와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각각의 은하수 내부에는 역시 수많은 별의 집단들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의 집단이 있고, 중국 사람의 집단이 있고, 유대인의 집단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각기 계를 이룹니다. 별들이 인력에 의해 서로를 끌어당겨 뭉쳐있듯이 영들도 인연과 업보에 따라 서로 묶여있습니다. 이런 별들 중에는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도 있고, 항성 주위를 도는 혹성도 있고 위성도 있습니다. 항성도 각기 크기와 빛의 밝기가 다릅니다. 뭉친 영의 집단은 크기와 규모도 각기 다릅니다. 우리들 각자가 영계에서 어느 은하수의 어느 성단의 어느 항성계에 속해있는가는 우선 태어난 별과 생명의 종류와 혈통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기준일 뿐 각자의 자리는 각자에게 선택권이 있습니다. 자기 자리는 자기가 찾아갑니다.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업력이 자기를 자신의 자리로 끌어당깁니다. 중력이 별들을 끌어당기듯이 업의 힘은 모든 영혼을 각자의 업에 따라 모이게 만듭니다.

물리력이 4가지 힘으로 나뉘듯이 업력도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이 신앙이고 종교입니다. 종교가 없는 경우 인간의 영은 같은 조상을 가진 것끼리 뭉칩니다. 만약에 어떤 민족이나 종족, 즉 같은 조상을 가진 후예라는 혈연의식이 있는 집단이 멸망해서 소멸되면 얼마 못가서 영의 우주에서는 한 성단의 폭발이 일어납니다. 그 종족의 영들이 뭉쳐있던 성단이 깨져서 그 속의 별들은 광대한 공간 속에 흩어져 버립니다. 개개의 구성 요소들은 다른 은하나 성단에 흡수됩니다. 물질계의 천체에서 한 종족이 사라지면 영의 세계에서도 사라집니다. 멸종되어 버린 생물들 역시 마찬가집니다.

모든 별의 집단이 그렇듯이 영의 은하수나 성단도 각기 밝기와 빛의 성격, 형태, 파장이 다릅니다. 성단의 빛은 성단을 이룬 모든 별들의 빛의 합입니다. 이 빛이 어떤 색과 파장을 띠고 있는가가 그 영의 집단의 수준과 행복과 안정을 말해줍니다. 때문이 영의 은하수와 성단이 내는 빛은 시간에 따라 늘 변화하고 바뀝니다.
 

 우주가 변화하듯이 영의 세계도 변화합니다. 영들이 모인 거대한 성단에는 많은 계가 있습니다. 계라는 것은 태양계와 같이 하나의 항성이 여러 혹성들을 거느린 것입니다. 항성의 크기와 밝기의 차이는 수만배 이상 나는 것도 있습니다. 영의 성단도 이와 같이 중심이 되는 항성에 따라 규모와 밝기가 다릅니다. 하나의 조상을 가진 혈연 집단은 조상 중 가장 뛰어나 인물의 영을 중심으로 모입니다. 그 주위를 약간 못한 조상들이 돌고 그 주위에 또 위성들이 돕니다. 대단히 위대한 인물이 있으면 그 집단은 아주 밝고 커 보입니다.

지구의 생명들이 모인 영계에서 유독 규모가 큰 성단이 여러 개 보이는데 하나는 예수의 빛을 중심으로 뭉친 크리스찬이란 성단입니다. 저기 보이는 또 하나의 성단은 공자를 중심으로 뭉친 유교라는 것이고, 여기 대단히 밝고 아름다운 빛을 내는 성단의 이름이 바로 불국토라는 이름의 성단입니다. 그 한가운데는 석가세존이라는, 우주에서 가장 크고 밝은 빛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주위에는 역대의 다른 부처, 조사들이 역시 밝은 빛을 내는 항성으로 모여있습니다. 그 항성들 주변에는 항하수의 모래처럼 많은 중생들이 각자의 희미한 빛을 내면서 운집해 있습니다.

영의 집단은 업력의 작용으로 서로 다른 여러 성단에 동시에 종속된다는 것이 중력에 의해 뭉치는 물질계의 성단과 다른 점입니다. 그래서 상상으로 그려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교회를 다니면서 정당에 가입할 수도 있고 어떤 회사에 소속되기도 하고 다른 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하는 것처럼 영의 소속도 중첩되고 다원적입니다. 하나의 영은 기독교라는 은하수의 일원이면서 유대인이나 미국인, 혹은 한국인이라는 성단에 소속이 되고, 그 중에서도 개신교의 일원이 되기도 하고 구교에 속하기도 합니다.

한 성단의 빛은 그 성단에 속한 모든 별들이 내는 빛의 총합입니다. 영의 집단은 속해 있는 영의 성격에 따라 파장이 다르고 세기가 다릅니다. 속해있는 영의 평균적인 진화의 정도와 행복의 정도, 안정성 등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구의 인류가 모인 영의 성단은 2천 5백년 전 쯤에 갑자기 크게 밝아졌습니다. 이 성단에 어느 날 엄청나게 크고 밝은 항성이 여럿 합세하게 된 것입니다. 그 별의 이름이 부처와 예수와 공자와 소크라테스와 노자와 맹자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성단 내에 들어오면서 여러 별의 집단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다른 빛을 발합니다. 그것에 속한 영들의 평균적인 수준은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지구인 중에 한 사람이 해탈하여 부처가 되면 영계에 하나의 태양이 생깁니다. 천명의 부처가 나면 천개의 태양이 생기고, 만 명이 해탈하면 만개의 태양이 생깁니다. 석가세존 같은 분이 한분 태어나면 우주에서 가장 크고 밝은 항성이 하나 생겨납니다. 그 별의 주위에 모인 억만창생이 그 빛을 받습니다. 그 빛으로 해서 더욱 밝아지고 그 빛 아래서 불행과 고통이 소멸됩니다. 소속이 없이 떠돌던 수많은 암흑의 별들이 우주의 저편에서도 그 빛을 보고 모여듭니다. 그 빛의 이름이 대자대비입니다. 그 별의 이름을 광명이라 합니다. 그 색깔을 반야라 합니다. 영의 대우주에 그보다 밝은 빛은 없고 그보다 큰 별은 없습니다.

내 스스로가 빛을 내는 항성이 아닐진데 보다 크고 밝은 별 아래 모이는 것이 현명합니다. 영의 우주에는 빛이 차갑고 엄습하고 불안한 광채를 띤 것도 많습니다. 자기 혼자 얼음처럼 차가운 우주의 빈 공간을 떠다니는 것보다야 낫지 싶어서 그런 별에 의지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미래는 암울합니다. 부처님의 빛이 내가 아는 한 가장 자비롭고 온화하며 따뜻하고 행복합니다. 나는 그 빛을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입니다. 욕심이라면 부처님 옆의 조금 작은 빛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의 빛으로 많은 사람의 영혼에 온기를 전해주고 싶습니다.

나는 오래도록 해탈의 가치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부처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그래 해탈을 했다 치고, 부처가 된다 한들, 그게 무슨 가치가 있는 일이냐 하고... 그게 이 우주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고... 그저 태어났다가 죽어가는 수많은 중생들에게 어떤 영향이 있겠느냐 하고...

내가 지금 이만큼이라도 가치로운 삶을 사는 것이, 그 분들의 빛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분들의 빛이 있어 무지라는 암흑 속을 헤매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인 줄 몰랐습니다. 설사 부처에게 원력이 있고 공덕이 있어도 내가 죽은 다음에라야 덕볼 일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영의 우주는 죽은 것들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 빛은 생사에 관계없이 모든 영혼을 비춥니다.


구름~~

모든 인간은 조상이 있지만 모든 영이 조상령의 가피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조상을 부정하고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자기 조상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사람의 영은 조상을 같이 하는 영의 집단에 인력이 아니라 척력이 작용하게 됩니다. 한 조상의 종족이라는 집단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이런 사람의 제사에는 조상의 령이 임하지 않습니다. 모든 조상이 이런 사람을 외면합니다.

절에 다니는 불자들은 조상의 영을 위로하는 천도재도 지내고 제사를 모십니다. 불자의 영은 부처님의 가피와 조상의 은덕을 다 같이 받습니다.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비치는 나라에서 자기 조상이라는 작은 마을을 이루게 됩니다. 부처나라 조상시 성씨구 주민입니다. 만약 내 조상 중에 부처님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있다면 영의 세계에서 내 조상의 빛이 부처보다 더 크고 밝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조상나라 부처시 시민이 되겠지요.

부처님의 빛이 대자대비하고 그 원력이 끝없는 일대광명이지만 이 우주와 같이 영의 세계도 크기가 무한합니다. 광대무변한 규모입니다. 때문에 전체적인 영의 세계에서 볼 때 부처님의 빛이 미치는 공간은 극히 작습니다. 태양보다 만 배가 큰 별들이 수조개가 넘고 거대한 은하가 수천억 개 있지만 우주는 빛이 닿지 않는 암흑의 공간이 더 큽니다. 아무리 별이 많아도 우주의 광대한 공간은 어둡습니다.

석가세존의 빛 아래 모여있는 영의 집단은 우주에 흩어진 은하 중의 하나입니다. 이와 같은 크기의 은하는 우주에 수천억 개가 있습니다. 그 어느 부처도 온 우주를 다 밝게 비추지 못합니다. 그런 큰 별이 만약 나타난다면 우주는 하나로 합쳐질 것이고 그것은 바로 우주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종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별은 태어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세계의 실상을 똑똑히 보신 부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무수히 많은 부처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서방세계의 아미타여래를 말씀하시고 미래세에 나실 미륵불을 말씀하셨습니다. 삼세제불은 밤하늘의 별만큼 많습니다. 우리 은하에 있는 것보다 훨씬 큰 별이 있는 다른 은하가 있는 것처럼 석가세존보다 훨씬 위에 계신 부처가 태어난 별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 빛 아래 또 다른 수억만 창생의 영이 불국토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은하는 나하고는 인연이 없는 은하입니다. 오고 갈수 없는 다른 세계입니다. 나의 인연과 업이 나를 석가세존이 계신 이 은하에 묶어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한 분이 아니라 온 우주에 무수히 많습니다. 석가세존은 인연에 따라 지구라는 별에 나신 한 사람의 부처입니다. 어떤 부처도 온 우주를 비추지 못합니다. 세상의 크기는 너무나 넓고 광대합니다. 은하조차도 극히 작은 일부를 이룰 뿐입니다.

부처는 우주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주를 만들고 부수는 존재도 아닙니다. 모든 생명을 주관하는 절대자도 아닙니다. 수많은 우주의 별들 중에 가장 크고 아름다운 빛을 내는 항성의 하나입니다. 수없는 별들을 거느린 대은하의 중심입니다. 이런 은하는 우주 속에서 오늘 이 시간에도 새로 만들어지고 있고, 소멸되어 사라지고 있습니다. 한 부처가 나오면 하나의 은하가 새로 만들어집니다. 성인의 출현은 영의 세계에 하나의 성단을 만듭니다. 크고 밝은 별이 무수히 생겨난다면 우주가 아무리 넓다 해도 빛이 미치지 않는 암흑의 공간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 되면 고통받고 신음하는 영들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완성에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영의 진화이고 이 세계의 발전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해탈이고 성불입니다.

은하도 수명이 있어서 결국 언젠가는 소멸되어 사라지듯이 부처의 빛도 꺼지는 날이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끝은 아닐 것입니다. 우주가 사라진 곳에는 새로운 우주가 생겨날 것이고, 하나의 빛이 꺼지면 또 하나의 빛이 생길 것입니다.


구름~~

흔히 ‘부처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각을 하는 순간 부처가 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성철 같은 바보는 돈오돈수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돈오돈수한 성철이 부처였습니까? 부처 근처에도 못 가보고 죽었지요. 성철의 마음이 대자대비라고 하면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입니다. 그게 우리나라 선승들입니다.

왜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지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압니다. 담배가 해로우니까 피우면 안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끽연의 해악을 머리가 아는 것과 몸이 담배를 끊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매일 한 시간씩 운동을 하면 몸에 좋고 건강해진다는 것을 누가 모릅니까? 건강이 몸에 미치는 영향을 아는 데는 별다른 지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사도 쉽게 설명해줄 수 있습니다. 운동이 몸에 좋은 것을 깨달은 사람이 다 운동을 합니까? 머리가 아는 것과 몸이 하는 것은 다른 이야깁니다.

담배가 해로운 것을 안다는 것은 담배를 왜 끊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연의 전제가 됩니다. 일단 금연의 결심을 할 동기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금연을 해낸 것은 아닙니다. 담배의 해로움을 잘 알고 난 후에도 수십년 동안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폐암에 걸리고도 손가락에 담배를 끼우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경에 보면 부처님이 살생을 금하고 육식을 금하신 이유가 소상하게 나옵니다. 왜 고기를 적게 먹고 채식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승려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중의 태반이 고깃집을 들락거리고 곡차에 사족을 못 씁니다. 몰라서 그렇겠습니까? 아닙니다. 알면서 그럽니다. 머리가 백날 깨달아도 머리가 몸을 이기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지 몸이 술을 갈구하고 여자를 원하고 고기를 기다리니까 이길 수가 없는 겁니다.

정각이란, 깨달음이란 해탈의 한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었다는 것일 뿐 해탈도 아니고 부처도 아닙니다. 석가세존은 정각과 동시에 해탈을 하신 분이지만 그님의 경우는 특수한 예외라고 나는 봅니다. 그만큼 정각에 이르는 과정이 해탈을 동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선승들처럼 화두물고 앉았다가 어느 날 한 소식을 듣고 벌떡 일어나 오도송을 불러제끼고 스승을 찾아가 선문답으로 시험을 치는 그런 코메디가 아니었다는 소립니다. 부처님은 해탈의 문까지 넘어선 다음에 자리에서 일어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존은 사람들에게 자기는 부처이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석가세존이 보리수 아래서 죽 한 그릇을 먹고 난 그 순간부터 부처인 것이 틀림없었느냐 하면 그 시간 이후에 세존은 중생의 습을 씻어낸다고 애를 쓴 일이 없고 두 번 다시 인간의 마음을 드러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역대의 조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깨달았다 하고 오도송까지 그럴듯하게 읊고 나도 실제로 뭐 변한 게 없습니다. 깨달은 게 부처고 깨달은 순간 해탈을 했으면 뭔가 달라진 것이 있어야 하는데 조사 선승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후나 그놈이 그놈이고 그 인간이 여전히 그 인간입니다. 대자대비는 커녕 심술궂고 욕심 많은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수행을 해서 그 마음을 다잡아봐야 마음의 수양이라는 것이 결국 거기서 거기일 뿐이라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줍니다. 조선 불교의 근세 중흥조라는 경허를 보세요. 턱 아래 송곳을 받쳐놓고 끔찍하게 지독한 수행을 했고, 1년이 넘는 불와의 정진을 하는 모습을 자랑하지만 그래놓고 여자하고 사랑에 빠져 맞아죽을 뻔 했고, 피부병을 고친다는 핑계로 평생 곡차와 닭고기를 달고 살았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깨달음과 해탈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설법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보여준 것은 부처의 보시가 아니라 미치광이의 우행이었습니다. 잘못 해탈한 선승의 가장 좋은 모델입니다. 깨닫는 것도 제대로 못한 것입니다. 하물며 해탈이겠습니까.

다른 거짓말은 다할 수 있습니다. 정각을 했다는 거짓말도 할 수 있고, 깨달았다는 거짓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남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탈했다는 거짓말은 하지 못합니다. 해탈했다는 거짓말을 해놓고 뒷감당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제 아무리 뻔뻔스럽고 낯짝이 두꺼운 조사, 선승도 자기가 해탈했다는 소리는 하지 않습니다. 부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하고나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부처이기 때문에 금방 표가 납니다. 모든 집착을 다 버린 척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배우도 부처 흉내를 내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 마음을 누가 감히 흉내낼 수 있겠습니까? 고작 피부병을 가지고 술로 시름을 달래는 주제에.

깨달음을 가지고 말하면 구름도 골백번을 깨달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부처가 뭔지도 알겠습니다. 21세기의 문명 속에 살면서 첨단의 과학과 정밀한 학문의 도움을 받으면서 깨닫지 못한다면 오히려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깨달은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어디까지 가는가입니다.

그래서 나는 선문답이나 오도송을 쓰레기라고 치부합니다. 그런 것이 해탈에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담배를 피는 사람이 담배는 보약이라고 염불을 하면 니코친이 몸 속에서 산삼으로 둔갑할 거라고 믿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헛소리를 하면서 죽어라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선승들입니다. 바로 안 사람은 담배를 끊는 것으로서 알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것만이 깨달았다는 징표입니다. 담배를 피워대면서 내지르는 선문답들은 전부 헛소립니다.


구름~~

내가 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까요?

가장 먼저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의 가장 시급하고 절박한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삽니다.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것부터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그것을 아는 데도 상당한 지적 능력이 요구됩니다. 공부를 안 하고 배운 것이 없고 무식하면 자기 문제를 돌아보고 문제를 찾으려는 생각조차 없이 살게 됩니다. 우리가 배워야 하고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자기의 문제가 뭔지도 모른 채 그냥 살다가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짐승들이 그렇게 살다 죽습니다. 공부를 안 하면 인간이나 짐승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자기의 문제가 뭔지 알았으면 문제의 원인을 밝혀야 합니다. 어디서부터 이 문제가 시작되었으며 왜 문제가 생기게 되었는지 파악을 해야 합니다. 원인을 알아야 만이 해결책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결책을 찾게 되면 자기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나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궁리하게 되지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더라도 어떻게 할지를 모른다면 거기서 막히게 됩니다. 무엇을 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도 한참의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명상을 하고 삼매에 듭니다. 길을 찾기 위해섭니다. 길을 찾고 방법을 알아냈으면 그 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만이 남았습니다. 무엇을 알고 어떻게를 알아내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요, 성찰이요, 정각입니다. 왜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나면 이제 시작입니다. 알아낸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왜? 내가 괴롭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내가 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기 때문에.

무엇을? 나의 모든 괴로움과 번민을

어떻게? 고의 원인인 집착을 끊음으로서.

왜와 무엇과 어떻게가 정리되었습니다. 이 정리를 명료하게 얻게 되면 정각을 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깨달은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딱 저 세 줄입니다. 간단한 이치지만 저것을 깨달아 아는 데는 평생의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쉽습니다. 어려운 것은 여기서부터입니다. 고의 원인인 집착을 끊는다는 것이 목숨을 끊기보다 더 힘들고 어렵습니다. 집착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를 버린다는 것이나 마찬가진데 자기를 버리는 것에 자기가 동의를 하고 따라오겠습니까? 애당초 왜?라는 의문을 일으킨 것은 내 마음입니다. 왜 나는 괴로운가를 묻는 마음은 고통에 빠진 내 몸이 일으킨 것입니다. 이것을 어찌해야 하는가를 캐물어 결론을 이끌어낸 것도 내 마음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찾아낸 답이 바로 마음이 범인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의문을 일으켜 답을 구하다 보니 그 답으로 나온 것이 ‘마음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원인이니 마음을 없애면 해결이 된다는 답을 놓고 마음은 격심한 분열을 일으킵니다. 내가 찾은 답대로 실천을 해야 한다는 마음과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답을 구한 것인데 마음을 없애라니 이런 엉터리가 어딨냐고 항의하는 마음이 있게 됩니다. 그래도 어떤 경우에는 마음을 없애고 해결을 보자는 마음이 이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합니다. 목을 매거나 총을 쏘거나 독약을 마셔서 고통을 느끼는 마음(육신)을 파괴해 버리는 것입니다.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그런데 답을 찾는 성찰과 공부의 과정에 자살하는 것으로는 이 괴로운 마음을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정말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기다란 끈이나 권총, 또는 거북 바위나 한강으로 해결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음이 찾아낸 ‘어떻게’가 바로 ‘집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확실하고 완전한 자살입니다. 끈이나 권총 가지고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완벽하고 영구적이며 완전한 자살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게 행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거북바위나 한강에 가서는 그저 뛰기만 하면 되는데, 아무런 공부도 지식도 필요 없고, 별다른 기술이 없이도 그냥 눈 딱 감고 뛰기만 하면 되는데 ‘집착을 끊는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시간도 엄청 걸립니다. 자살보다 백만 배 더 지독한 결심이 필요합니다.

나를 없애고 해결을 보자는 마음이 마음을 살리자는 마음을 이기는 것은 순간적입니다. 자살은 충동입니다. 어떤 짧은 순간에는 전자의 마음이 후자의 마음을 이길 수 있지만 그 순간만 넘기면 다시 후자가 이깁니다. 집착을 버리는 해탈은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자살입니다. 마음이 따라올 리가 없습니다. 자살은 순간적인 결심으로 밀어붙일 수 있지만 점진적인 자살인 해탈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설득하고 납득시키는 데 필요한 방대한 근거와 논리와 당위가 필요합니다. 정각을 얻는 동안에 이 준비가 되어 있어야 깨달음 후에 해탈이 가능합니다. 엄청난 공부와 지식이 없으면 마음의 항변에 대항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내놓는 수천만 가지 반대논리에 다 답변해서 그것을 침묵시킬 논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은 따라옵니다. 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소멸을 받아들입니다.

화두를 물고 참선하는 선불교의 수행은 이런 근거와 논리를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깨닫고 나서 해탈을 하려고 할 때 마음과의 싸움에 필요한 실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해탈을 포기하고 단념합니다. 부처가 될 생각을 버리고 조사라는 이름에 만족합니다. 그들은 죽은 다음에 부처라 불리지 않습니다. 그저 조사이고 선사일 뿐입니다.


구름~~

우리나라에 불교대학이 있고 승가대학이 있고 불교학을 강의하는 대학도 있지만 아직까지 부처에 대한 논증을 논문으로 써서 학위를 받았다는 소리를 들은 적 없고, 어느 대학에도 부처학이란 강좌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해탈하는 법’이란 논문을 누가 썼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불교를 가르친다면 어떤 경우에도 뺄 수 없는 것이 바로 부처학이고 해탈론입니다. 해탈해서 부처가 되자는 것이 불교인데 해탈과 부처를 안 가르치면 뭘 가르치겠습니까? 그런데도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어느 승가대학에서도 어느 사찰에서도 해탈과 부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부처가 뭔지 어떻게 해야 부처가 될 수 있는지, 부처가 된다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무도 부처에 대해 말하지 않고 부처에 대해서 묻지도 못하게 합니다. 해탈해서 부처가 되자는 불교에서 해탈과 부처는 터부입니다. 금지된 용어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도 해탈을 하지 못했고 누구도 부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탈하는 법을 가르칠 수 없고 부처학을 개설하지 못합니다. 석가세존이 해탈을 하고 부처가 된지 2천5백년이 지났는데 아직 부처학이란 학문이 정립되지 못하고 있고 해탈론이 나오지 않습니다. 수많은 출가승들과 수행자들이 산마다 절마다 넘쳐나는데도 그렇습니다.

나는 해탈과 부처를 빼놓고 불교대학에서 승가대학에서 무엇을 가르치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뭐를 배우는지 신기합니다. 부처가 무엇인지 논증하는 것은 부처가 되어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부처를 연구하는 것은 부처가 되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모든 물리학의 법칙들은 실험실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논리와 방정식에 의해 정립되었습니다. 물리학자들이 이 세계를 밝히고 규명하는데 사용하는 것은 논리와 방정식의 두 가집니다. 이 두 가지로 검증된 가설은 훗날의 실험실에서 대부분 증명됩니다. 가설과 실험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부처도 논리로서 검증이 가능하고, 사유로서 연구해야 할 대상입니다. 화두 물고 눈감고 앉아서 참선을 한다고 부처가 뭔지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해탈을 하고 부처가 된 석가세존이 부처에 대해 설명하신 말씀들과 논리적 추론을 통해 부처가 무엇인지 해탈이 무엇인지 논증할 수 있고 또 해야 합니다. 수행을 해서 부처가 되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실험은 뒤로 미룰 수도 있고 우선 가설을 세우고 이론을 정립해야 합니다. 그래야 실험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부처가 되어보지도 못했으면서 부처에 대해서 감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석가세존이 설명하신 부처에 대한 내용과 논리적 추론을 통해서 도출할 수 있는 유일한 부처의 모습이 이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만약 내가 설명하는 것과 다른 부처론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 석가세존이 설명하신 것과 다르다는 것과, 논리적인 모순이 있음을 지적하여 그 부처론을 논박할 자신이 있습니다. 반대로 누구도 나의 부처론에 대해 이것이 부처님의 설명과 다르다는 것을 찾아내고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이기도 합니다. 제가 교외로 별전되었다고 달마가 주장하는 선의 종지를 헛소리라고 단정하는 것이 그래서입니다.  

 

부처님이 팔만대장경에 남기신 교에 배치되는 소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 외에 별도로 전해졌다는 교리를 믿으면 안 됩니다. 달마가 만든 선종은 자재불성을 믿습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불성이 있고 사람이 곧 부처라는 소립니다. 이런 주장이 부처님의 삼법인과 일치합니까? 제법이 무아인데 불성이 들어있을 자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가 있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의 설명을 바로 이해하면 인간이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인간은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해탈을 해서 부처가 되는 순간 이미 인간이 아닙니다. 부처가 있는 자리에 인간은 없고 인간이 있는 자리에 부처는 없습니다. 마음이 대자대비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소멸되어 없어진 것이 대자대비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에는 논리적 허점이나 모순이 없습니다. 진리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닌 달마의 헛소리는 당장에 반박을 불러옵니다. ‘개한테도 불성이 있느냐?’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달마와 그 제자들은 대답을 못합니다. 있다고도 못하고 없다고도 못합니다. 어느 쪽으로 대답해도 자기모순에 부딪히게 됩니다. ‘사람한테 불성이 있다’는 소리가 틀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석가세존의 말씀들과 논리적 추론을 통해 정립할 수 있는 부처상은 하나뿐입니다. 부처님의 설명에 배치되지 않고 논리적인 모순이 없는 부처론이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구름이 부처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천5백 년 동안 도덕경도 팽개쳐 져 있었고, 부처도 내버려졌습니다. 노자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부처도 똑바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구름이 부처라면 ‘부처는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하겠지만 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부처란 이런 것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 추론입니다. 논리적으로 얻어진 결론은 틀리지 않습니다.


구름~~ 

대자대비가 마음의 발전이고 부처가 인간의 완성이라면 마음은 불성의 인이고 부처는 인간의 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인이 되고 수련이 연이 되어 부처가 탄생한다는 논리가 됩니다. 이 얘기는 무엇이냐 하면 부처란 어떤 것이 인이 되고 연이 되어 나타나게 된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인의 결과물은 바로 다른 결과의 인이 됩니다. 이것이 인연법입니다. 때문에 어떤 원인에 의해 탄생한 부처라는 결과는 또 다른 결과의 원인이 됩니다. 부처는 인연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해탈을 하고 부처가 되어도 다음 생의 환생과 육도의 윤회를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애당초 인연의 족쇄를 풀고 윤회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얻는 유일한 길이 해탈이요 성불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일순간에 뻥이 되고 맙니다.

해탈과 성불의 정의와 전제가 보존되기 위해서는 부처라는 것은 어떤 것을 원인으로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결과는 전제를 조건으로 해서 성립되어야 합니다. 어떤 조건을 전제로 해서 논증해나가다가 도출된 결론을 가지고 전제를 바꾸면 안 됩니다. 정의와 전제를 소급해서 바꾸는 것은 논리학에서 허락되지 않습니다. 조건을 바꾸면 결론이 달라지는 것이 논리학의 법칙입니다. 애초에 출발할 때 이 명제에는 ‘해탈이란 인연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는 해탈에 대한 정의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해탈은 원인이 있는 사건의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비가 그친 후에 온 세상에 충만한 햇빛은 비가 그친 것이 원인이 된 결과가 아닙니다. 비가 내리던 안 내리던 태양이 온 세상을 비추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 빛이 우리 눈에 안 보인 이유는 비가 내렸기 때문이고 구름이 태양을 가렸기 때문이지만 비가 그친 것이 원인이 되어 태양이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태양은 비와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습니다. 해탈은 마음이 지극한 수련을 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 마음이 소멸되어 일체의 인과관계가 끊긴 자리에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해탈의 구현체인 부처는 일체의 인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의 마음속에 불성이 있고, 마음을 갈고 닦아 해탈을 이룬 것이라면 우리는 해탈로서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원했던 목적은 달성이 불가능합니다. 해탈은 어떤 것을 인으로 하고 연으로 해서 얻는 결과가 아니라 모든 인과 연을 소멸시켰을 때 드러나는 존재입니다. 어떤 인과 연도 그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관계가 있다면 해탈이 아닙니다. 해탈의 정의가 바로 인연으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입니다.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은 마음이라는 물건을 재료로 해서 주물떡거리는 짓이 아닙니다. 부처는 재료를 가지고 만들지 않습니다. 원료와 제품은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갖습니다. 원료가 제품으로 변한 것입니다. 부처는 부처를 만드는 원료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과 연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것의 결과도 아닙니다.

물질이 소멸될 때는 물질계에서 빛을 빨아들여 삼킵니다. 블랙혹은 물질이 소멸된 검고 어두운 구멍입니다. 블랙홀은 시공간을 초월해 있으며 그것의 내부에서는 인과관계가 파괴되어 더 이상 원인과 결과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생명이 소멸되면 정신계에 엄청난 빛을 토해냅니다. 블랙혹의 암흑이 인연법의 바깥에 있듯이 해탈의 빛도 인연법의 바깥에 있습니다.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블랙홀이 인연법의 세계인 물질계에 영향을 주듯이 인연법에서 벗어난 부처의 빛도 인연법의 세계에 사는 모든 영에 영향을 미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극미한 원자 하나에 엄청난 에너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라늄 원자핵 하나가 라듐과 크립톤으로 갈라질 때 2억 전자볼트라는 상상을 초월한 에너지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물질은 붕괴하면 엄청난 빛과 열을 냅니다. 아무리 작고 미미한 생명이라도 생명체 하나에는 물질이 가진 질량에 비견할 수 있는 업력이라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이 에너지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그것을 뚫고 나오지 못하는 빛이 있습니다. 생명이 궁극적으로 소멸되는 순간에 생명의 힘이 가리고 있던 빛이 드러납니다.

해탈한 부처는 육신이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어도 이미 소멸한 생명입니다. 생명이 살아있고 존재하려고 발악하는 엄청난 에너지가 사라진 대신에 밝게 빛나는 광채가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살려고 하는 욕망이 없고 존재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런 힘과 에너지는 소멸되어 없어졌고 그것이 가리고 있던 빛이 찬란하게 퍼져 나갑니다. 물질은 마지막에 빛을 삼키지만 생명은 마지막에 빛을 토해냅니다. 그 빛이 부처입니다.

본래 생명은 죽지 않는 것이고 생명의 불꽃은 그 어떤 힘으로도 끌 수 없습니다. 생명이란 그만큼 강하고 질기고 강력한 힘입니다. 원자핵과 전자와 중성자와 양성자를 묶어놓는 물질의 강력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힘입니다. 밟아도 밟아도 일어서는 잡초와 같이 생명은 아무리 죽이고 또 죽이고 골백번을 죽여도 다시 골백번 살아납니다. 절대로 못 죽입니다.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생명이 소멸되어 사라지는 유일한 경우는 해탈뿐입니다. 절대로 죽지 않는 생명이 해탈을 통해 소멸될 때, 생명이 갖고있던 집착의 힘만큼 빛이 생깁니다. 생명의 갈구와 욕망이 억눌러서 눌려져 있던 빛입니다. 그 지독한 생명의 이기적인 힘에 압도되어 보이지 않던 힘입니다. 바로 대자대비입니다.

 

구름~~ 

해탈하여 부처가 된 사람-이미 사람이라 말할 수 없지만-의 말은 구업을 짓지 않습니다. 부처가 하는 행위는 행업을 만들지 않습니다. 부처의 마음은 의업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부처는 백만 가지 선행을 해도 티끌만큼의 공덕도 생기지 않고 사람을 죽여도 악업이 쌓이지 않습니다. 부처가 사람을 죽였다면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죽인 것이라고 믿어도 됩니다. 그러나 왜 죽였던 부처의 살인은 죄가 아닙니다.

미워하는 마음도 사랑하는 마음도, 애착하는 마음도 거부하는 마음도 없기 때문에 부처의 대자대비는 어떤 작용도 소멸된 작용입니다. 억만창생의 영이 그 힘에 영향을 받아 밝아지지만 그 힘의 작용이 없어서 아무런 반작용을 낳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남을 도와주면 감사하는 마음을 기대하고 보은을 희망하지만 대자대비는 물에 빠졌다가 건져올린 사람이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려도 화내지 않습니다. 건져준 사람이 흉악한 도적이어서 자기를 죽이고 옷까지 벗겨가도 부처는 상대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원수를 지극히 사랑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애당초 물에서 건져줄 때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건져준 것이 아니었고, 감사나 보은을 바라는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는 눈앞에 물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건져줍니다. 대자대비에는 왜 건져주는지 이유가 없습니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는 것에는 이유가 없고 상대를 가리지 않습니다. 귀천을 문제삼지 않습니다. 사람과 짐승, 미물에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이 선행이라는 생각이 없고, 상대를 도와주는 일이라는 의식도 없습니다. 부처의 행은 행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가 된 다음에 열반에 들기까지 수십 년을 더 살아도 부처는 어떤 업도 짓지 않습니다. 해탈하는 순간에 모든 인과 연을 끊고 업장이 소멸되었다 치더라도 그 순간 죽는 것이 아닌데, 앞으로 수십 년을 더 인간의 몸으로 인간과 같이 말하면서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한테 부대끼면서 살아야 하는데 다시 업을 짓고 다시 인연을 맺으면 해탈은 마카 도로묵이고 부처는 꽝입니다.

그래서 부처를 금강석이라고 합니다. 다이아몬드는 아무리 오랜 세월을 흙속에 묻혀 있어도 녹이 슬지 않습니다. 부처는 두 번 다시 더럽혀지지 않고 어떤 기스도 나지 않는 금강체입니다.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까지 사라져야 부처가 되고, 해탈을 초월해야 해탈을 합니다. 해탈도 집착일진데 깡다구로 해탈이 되겠습니까?

육도의 윤회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삼계는 마음이 그려내는 환영입니다. 일체유심조. 그래서 선승들은 대자대비도 일체에 속하는 물건이라고 보고 마음으로 대자대비를 만들어내려 애씁니다. 부처도 마음이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체유심조의 일체 속에 부처와 대자대비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대자대비와 부처는 일체의 바깥에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만들어낸 일체를 모두 버려야 대자대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일체를 만들어내는 마음 그 자체를 버린 것이 부처입니다. 마음이 사라지면 육도가 사라지고 마음이 소멸되면 삼계가 무너집니다. 극락도 증발하고 지옥도 꺼집니다. 그 자리에 부처의 빛이 있습니다.

마음이 행하는 모든 것은 업이 되고, 마음이 만드는 모든 것은 인연을 따라 성주괴공합니다. 업장을 벗어난 피안에 열반장이 있습니다. 인연의 세계 바깥이 적정입니다. 열반적정은 마음이 만들지 못합니다. 마음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입니다. 마음이 만든 일체가 환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마음이 본래 없기 때문에 마음이 만든 일체도 공이라는 것을 가르친 것이 불교입니다. 마음을 버린다는 것은 바로 꿈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이 지독하고 긴 꿈에서...

 

 

구름~~ 

 

마음은 바다를 건너기 위한 뗏목입니다. 이 바다는 한 번 건너가면 두 번 다시 돌아올 일이 없는 1회성 항해이기 때문에 내구성을 갖고 여러 번 왕복할 수 있는 배는 필요 없습니다. 너무 호화스럽고 좋은 배는 아깝고 애착이 생겨서 항해가 끝난 후에 버리기 힘듭니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고 나면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뗏목이면 족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항해는 위험하고 바다는 험합니다. 뗏목을 용의주도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튼튼하게 엮어야 하고, 물과 식량, 나침반, 랜턴, 낚시도구, 취사용구 등등 세밀하게 챙겨서 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긴 항해에 읽을 수 있는 많은 책을 실어야겠지요. 준비가 철저하지 못하면 풍파를 만나 뗏목이 풀어질 수도 있고, 상어밥이 될지도 모릅니다. 가다가 포기하고 되돌아오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뗏목을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수도 없이 갔다가 되돌아와서 뗏목을 다시 만드는 일을 되풀이합니다. 뗏목 만드는 데만 평생이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만들고도 완성을 못해서 바다로 나가보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수십 번 수백 번 나갔다가 실패해서 뗏목을 수백 번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생에서 못하고 다음 생을 기약하고 톱과 망치를 품에 안고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갈고 닦은 마음은 잘 준비한 뗏목입니다. 이 마음이라는 뗏목이 있어야 피안으로 항해를 떠날 수 있습니다. 물론 항해가 끝나 피안의 기슭에 올라서면 뗏목은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항해에 필요했던 바람도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뗏목은 바람을 받아야 움직입니다. 바람의 풍향과 풍속은 음양과 오행입니다. 부처님은 기를 설명하지 않으셨고 불교는 음양오행을 다루지 않습니다. 그런데 생명은 음양오행이라는 기운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런 생명이 일으키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이란 음양오행이 불러일으키는 바람이나 같습니다. 이 바람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배를 나아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한 인간이 해탈을 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가장 중대한 운명적인 대사건에 음양오행은 밀접한 영향을 미칩니다. 마음이라는 뗏목을 움직이는 바람이 음양오행이라는 기운입니다.

피안으로 가는 항해가 삼매요, 선정입니다. 삼매와 선정에 들었을 때 마음에 이는 파도가 바로 오행입니다. 올바른 삼매(명상)를 할 줄 모르면서 해탈이라는 항해에 나서는 것은 항해술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 배를 모는 것과 같습니다.

벽운공은 올바른 명상법을 가르쳐 삼매 속에서 오행이라는 바람을 다스리는 법을 알게 합니다. 바람의 풍향과 세기에 따라 돛을 돌려 바람을 받는 요령을 알게 해 줍니다. 부처님 이후에 불교가 이런 항해술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수행자들이 바다에서 길을 잃고 뗏목이 난파되어 희생되었는지 모릅니다. 바람을 다루지 못하면 아무리 잘 만들고 철저하게 준비한 뗏목도 소용이 없고 가치가 없습니다. 배만 좋다고 항해가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항해에는 노련한 항해술이 필요한 것입니다. 벽운공은 필생의 항해에 필요한 항해술입니다. 음양오행이라는 바람에 대해서 무지한 상태로 바다로 나가면 안 됩니다.

그것이 제가 우리 가족들에게 음양오행을 배우게 하고 벽운공을 가르치고 파동화를 체험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구름~~

중생이 곧 부처고 부처가 곧 중생이라는 말은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인데 과연 그럴까요? 이 말이 맞다면 우리는 부처에 대한 정의를 새로 내려야 합니다. 중생이 곧 부처라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개나 고양이나 오리나 백조는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집니다. 인간은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오리가 천년을 자기는 백조라고 암시를 주고 최면을 걸어도 백조로 둔갑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부처는 인간이 모습을 바꾼 것도 아니고 인간이 변한 것도 아닙니다. 만약 오리가 오리로서의 모든 습을 다 버리면 그건 오리가 아닙니다. 오리이던 어떤 것은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오리라는 존재가 소멸되어 없어지게 되지 오리습을 버리고 백조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오리가 오리습을 다 버려 백조가 된다면 그때부터는 백조의 습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겠지요,

오리가 백조가 되려고 하는 것은 선망이고 열망입니다. 오리가 백조가 되려면 오리의 습을 버려서 되는 것이 아니라 백조의 습을 익혀야 합니다. 날개짓을 연습하고 먹이도 바꾸고, 모든 생활을 백조처럼 바꾸어야 합니다. 오리가 환골탈태하면 백조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부처가 되는 것은 선망이나 열망이 아닙니다. 부처가 되겠다고 수행을 해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수행을 하면 결코 부처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불법의 수행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는 각오입니다. 오리가 백조가 되고 싶어하는 마음은 부처가 되겠다는 발심이 아니라 왕이 되고 부자가 되고 신이 되겠다는 욕망입니다. 오리가 백조의 흉내를 내는 것은 인간이 왕후장상이 되려고 하는 노력과 같습니다. 왕후장상에는 씨가 없습니다. 누구라도 왕이 될 수 있고,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각을 하고 해탈을 하려고 하는 것은 그런 욕망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왕이 되고 부자가 되려면 권력과 재산에 욕심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가지고 말겠다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해탈은 모든 욕망의 불길을 다 끄고 모든 욕심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오리는 백조가 되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백조가 되고 나면 봉황이 되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봉황이 되면 붕이 되고 싶어지지요. 인간은 왕후장상 귀족갑부가 되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고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둘은 노력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본질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양자는 전혀 다릅니다. 사람이 노력을 한다고 해서 누구나 다 왕이 되고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수의 사람만 꿈을 이룹니다. 가지기 위한 노력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갖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노력과 운이 다 따라주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가지게 되더라도 그것이 결코 완전하지 않고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백조가 된 오리는 봉황이 되지 못해서 불행합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더 가질 수 없어서 불행합니다.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을까 불안하고, 가진 것이 없어지지 않을까, 다시 갖지 못했던 시절로 돌아가게 되지 않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죽어야 한다는 근원적인 공포에서 탈피할 수 없습니다. 갖기 위해, 그리고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가열찬 투쟁을 해야 하고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하고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남을 불행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에 다른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길입니다. 버리는 것은 가지려는 것보다 쉽습니다. 갖는 것은 아무나 안 되지만 버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갖기 위해서는 능력과 노력과 운이 필요하지만 버리는 데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갖는데는 끝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제는 더 가질 것이 없는 만족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버리는 데는 끝이 있습니다. 더 이상 버릴 것이 없는 상태가 분명히 있습니다. 완전한 성취는 불가능하지만 완전한 포기는 가능합니다. 갖기 위해서는 싸워야 하지만 버리기 위해서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갖기 위해서는 남을 희생시켜야 하지만 버리기 위해서 남에게 못할 짓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완전히 가진다면 행복할 수 있겠지만 완전한 성취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취로서 인간은 완벽한 행복을 맛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버리는 것은 쉽고도 가능하기 때문에 다 버림으로써 완전한 행복을 구가하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완전히 가져도 행복할 수 있고 완전히 버려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전자는 불가능하고 후자는 가능합니다. 왕이 되어 행복한 것은 불가능하지만 부처가 되어 행복해지는 것은 아주 쉽고 또 가능한 일입니다. 버리는 것이 뭐 어려울 일이 있겠습니까?

완전히 갖는 것과 완전히 버리는 두 가지 행복의 길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울 것 같이 생각되십니까? 사실 후자가 더 쉽습니다. 다만 후자를 택하려고 해도 부모형제, 가족, 자식 등 내 주위의 모든 인연들은 그 길을 좋아하지 않고 내가 많이 갖기를 원하고 그쪽의 노력을 더욱 열심히 해주기 바라기 때문에 차마 모진 마음을 먹지 못해서 그렇지 이 세상에 나 혼자라면 후자가 훨씬 쉽습니다. 저는 지금도 딸 둘만 아니면 다 버리고 싶고 아주 쉽게 버릴 자신이 있습니다. 저 두 딸만 독립시키고 나면 어느 날 훨훨 털고 자유의 몸이 될 날이 오리라 믿고 있기도 합니다. 하긴 그런 날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뗏목만 근사하게 만들어놓고 물에 띄워보지도 못하고 한 생을 끝낼 지도 모릅니다.

부처가 되는 것은 오리가 백조가 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백조가 멋지게 보여도 백조나 오리나 행복하고 불행한 것은 오십보 백보입니다. 부처가 되는 것은 완전한 해결입니다. 완전히 버리는 것입니다. 오리의 현실도 버리고 백조의 꿈도 버립니다. 오리인 나 자체를 버립니다. 지워버립니다. 일체를 다 버린 나는 오리가 아닙니다. 오리가 변한 백조가 아닙니다. 오리는 이미 없어졌고 이 세상 어디에도 오리는 흔적도 없습니다.

내가 나를 지우려면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다 잠재워야 합니다. 에너지의 근원은 욕망이고 집착입니다. 부처는 에너지 레벨이 제로입니다. 불법의 수행은 우리의 에너지를 고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거칠고 강한 에너지의 파도를 잠재우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술이나 기공수련과 본질을 달리 합니다.

벽운공은 그래서 다른 기공과는 전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열반과 적정이 에너지업으로 가능한 경지가 아닙니다. 삼매와 선정이 에너지가 넘치는 상태가 아닙니다. 

 

 

 

자식과 부모의 연이나 재산, 물욕 등을 버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명과 육신에 대한 집착을 끊는다는 것이 해탈의 본의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해탈을 했는가 하는 것은 죽을때 봐야 알 수 있습니다. 해탈했음을 보여주고 가신 스님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조계종의 초대 종정이셨던 한암 스님 같은 분을 꼽고 싶습니다.

 


 

구름~~

 1951년 3월 21일 상원사에서 입적하실 때의 모습입니다. 세수로는 76세, 법랍 54년이었습니다. 만공과 함께 경허의 애제자였던 한암스님은 한국 조계종의 초대 종정을 지냈습니다. 입적하시던 날 가사와 장삼을 곱게 입고 나와서 손가락을 꼽아보며 '오늘이 음력으로 2월 14일이 맞지?'하시고는 죽 한 그릇과 차 한잔을 드시고 앉아서 담소하시던 중 홀연 입적하셨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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