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5 존재와 정보에 대한 가설.
존재와 정보에 대한 가설(!)
[ 2002.08.09 ]
기가 질병을 치료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수많은 관찰과 체험의 기록들이 쌓여서 현상자체의 존재는 그리 의심하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치료의 원리가 규명되어야 할 때인데, 나는 기치료의 원리가 세워질려면 하나의 가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존재는 정보를 만든다. 그리고 역으로 정보 역시 존재를 만든다'는 가설이다.
약간 말을 바꾸면 존재의 변화는 정보의 변화를 수반한다. 역으로 정보의 변화는 존재의 변화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앞의 명제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역의 명제도 참인가 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기는 존재의 다섯 가지 정보의 총체물이라고 나는 표현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오감이다. 진흙을 반죽해서 둥근 공을 만들면 이 진흙덩어리의 정보 중에서 형상의 정보는 토기의 기로서 나타난다. 이 진흙이 만약에 황토라면 색깔의 기운도 토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공을 뭉개버리고 피라밋 형을 만들었다면 4개의 벽면은 삼각형으로서 화기이고 밑면은 정사각형으로서 금기일 것이다. 이 네 개의 화기와 1개의 금기가 시각적 정보로서 조합되어 우리 눈에 보일 때 피라밋이 되는 것이다. 이 피라밋을 한쪽 면만 돌려놓고 볼 때는 화기만 시각정보로 전달되어 삼각형으로 보인다. 밑면만을 쳐다볼 때는 금기만 전달되어 사각형으로 보이는 것이다.
자, 원래 공과 같이 둥글던 진흙덩이의 정보중에서 형태정보는 토기였는데 이것을 피라밋 형으로 만드니까 형태 정보가 화기와 금기가 섞인 것으로 바뀌었다. 우리가 눈으로 볼 때도 공이 피라밋으로 바뀐 차이가 뚜렷하듯이 기로써 이 존재를 인식할 때도 역시 차이를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까지 이해되시는 지 모르겠다. 이게 존재의 변화가 정보의 변화를 수반한다는 명제의 설명이다. 이건 아주 당연한 이야기로 보인다.
그렇다면 본론은 지금부터다. 이 세계에서 최초로 구르미가 세우는 하나의 가설이다. 앞으로 기의 본질은 이 가설에 의해서만 풀려나가게 될 것이다.
이 피라밋 모양으로 만든 진흙 덩어리를 손으로 형태를 바꾸지 않고, 진흙덩어리의 정보 중에서 형태정보의 기운만을 토기로 바꾸어 버리면 진흙의 모양이 피라밋 형태에서 둥근 공으로 저절로 바뀌겠느냐 하는 것이다. 즉 존재를 바꾸지 않고, 정보를 바꿈으로서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이다.
피라밋 모양의 진흙덩어리의 형태정보를 어떻게든 원형의 정보로 바꾸면 피라밋이 공으로 둔갑을 하겠느냐 이 소리다.
나는 그렇다고 확신하다. 정보를 바꿀 수만 있다면 존재가 바뀐다.
이 가설에 대한 구름의 논증을 계속해 보겠다.
구름~~
존재와 정보에 대한 가설 (2)
정보는 그 자체가 에너지인 것이 아니라 전달과 교환에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무엇이다. 따라서 기가 만물의 정보라면 기는 전하고 받는데 에너지가 필요하다.
우리가 색깔과 형태라는 정보를 얻어서 사물을 눈으로 보는데는 빛이라는 존재가 필수적이다. 어떤 물체가 있다고 하여도 빛이 없으면 시각 정보상으로는 그 물체는 없는 것과 같다.
우리가 소리로서 어떤 것의 존재를 감지하려면 소리라는 매질의 진동이 필수적이다. 소리도 에너지를 소모함으로서 일어나는 진동이다. 음파라는 에너지 파동이 없으면 청각정보로서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냄새라는 정보 역시 냄새 입자들의 운동과 산포가 필수적이다. 입자들의 운동이 없으면 후각정보에 의한 대상의 확인은 불가능이다.
촉감을 통해 대상을 감지하는데는 마찰력이 필수적이다. 마찰력과 충격력은 에너지의 소모를 수반하는 결과이다. 마찰이나 충돌이 없다면 우리는 촉감으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또 한가지 필수적인 에너지의 소모는 바로 우리의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오감의 기관은 그것이 작동하는데 생물학적인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이와 같이 본다면 '정보의 세계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보를 얻는데는 반드시 에너지의 소비가 따른다.
그렇다고 해서 정보가 에너지는 아니다. 에너지를 소비한 결과로 얻어지는 무엇이다.
이렇게 본다면 기공사가 환자에게 전해주는 기라는 것은 하나의 정보인데 그것을 전해주고 받기 위해서 기공사와 환자는 에너지를 그만큼 소비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기공사가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환자 역시 에너지의 소비가 따른다는 이야긴데 어떻게 기치료를 받은 환자는 기운을 얻은 것처럼 느끼는 것일까?
그 이유는 기라는 에너지, 즉 기운을 기공사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기공사로부터 전해받은 어떤 정보가 환자의 몸안에서 기운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즉, 기치료란 기운을 전해 받는 것이 아니라 인체의 기운을 생성시키고 발현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보충받은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는 점이다. 기공사로부터 정보를 전해받는데 소비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양의 에너지를 인체가 생산해낼 수 있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에너지는 원래의 환자가 가지고 있던 인체 에너지를 초과하지 않을 것이다. 물로 비유하면 고여있던 물을 사용 가능한 상태로 퍼올린 것이지 메마른 연못에 기적적으로 물을 채운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기공을 할 때 기운을 주고 받는 느낌은 실제로 에너지나 파워가 이동해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기라는 정보를 받음으로서 수용한 측의 인체가 잠재되어 있는 파워를 생성해내는 데서 느끼게 되는 육체적 감각이라고 본다.
그것이 마치 상대로부터 어떤 기운을 전해 받은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한발 한발 기를 만나기 위한 여행을 떠나 보자.
구름~~
존재와 정보에 대한 가설 (3)-구름-
생명이 없는 물체에 대한 고찰은 잠시 미루고 기를 감각적 체험으로 느낄 수 있는 우리의 인체를 가지고 가설에 대한 정리를 조금 더 해보자.
만약에 간염이나 간암, 간경화 등으로 간이 상했다면 이건 간의 기운이 상한 것이고 정보가 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단 시각적인 정보로도 상한 간은 색깔이 불그죽죽하고 건강한 간의 그것은 싱싱한 담홍색이다. 촉감적인 정보도 달라져 있다. 만져보면 건강한 간은 탄력이 있고 상한 간은 뭉클거린다. 냄새도 다르고 맛도 다르다. 다섯 가지 정보가 다 달라져 있는 것이다. 의학적인 분석이나 조직검사를 하기 전에 오감에 의해 인지할 수 있는 정보부터가 먼저 달라져 있는 것이다.
만약에 빛깔과 감촉과 형태와 맛과 냄새가 건강한 간의 그대로인데 종양이 생길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없다. 종양이나 암은 간이 나빠진 결과이지 종양이 생겨서 간이 나빠진 것이 아니다. 간의 기운(정보)이 바뀌어있는데 수술로서 암이나 종양 부분만 제거해 낸다고 해서 간이 건강해질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수술을 해도 간은 여전히 상한 상태 그대로이다.
간이 다시 건강해질려면 빛깔과, 촉감과 형태와 냄새와 맛이 전부 건강한 간의 그것과 같아져야 한다. 간의 정보 전체가 건강한 상태를 보여줘야 건강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운(정보)의 변화없는 존재의 변화는 없다는 것이다.
간의 기운은 오행상 목기에 들어가는데 위와 비장으로부터 토기를 공급받고 있다. 그래서 간은 매끈하고 탄력있는 질감을 가지고 있다. 만약에 경화증이 있어서 딱딱하게 굳어가는 간이 있다면 그것은 건강한 간의 기운에서 본래의 목기(매끈함)와 토기(탄력)가 줄어들고 금기(단단함)가 강화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간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면 다시 기운도 바뀐다. 그런데 순서를 바꾸어서 간의 기운을 정상적인 것으로 바꾼다면 간은 건강한 것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동의학이 성립하고, 기치료가 가능하다.
간에 건강한 간의 기운(정보)를 외부에서 충만하게 만들 수 있다면 건강한 기에 둘러싸인 간이란 존재는 건강한 상태로 되돌아 온다는 것이다.
어떤 존재와 정보 사이에는 일치성을 유지하려는 성질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존재와 그것의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모든 존재에는 존재와 정보의 불일치, 즉 정체성의 혼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 없는 물체일 경우는 그 차이가 항상 극미하게 있을 뿐이지만 생명체의 경우에는 불일치성이 훨씬 큰 것이다. 존재가 갖고 있는 정보인 기가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라는 것이다. 파동이 일정하지가 않으며 시시각각 변한다.
간의 경우에도 간의 기운은 하루에도 수천만, 수억만번 기운이 바뀐다. 매초, 매 시각 간의 기운은 유동하고 있다. 그래프로 나타낸다면 물체의 그래프는 동일한 파형을 꾸준하게 그려낼 뿐이지만 생명체의 파동은 춤추듯이 움직인다. 물론 개체에 따라서 고유한 패턴은 유지하겠지만 그 변화의 폭이 크다는 것이다.
때문에 정밀하게 측정하면 간의 기운은 정상(건강상태)과 비정상(상한 상태) 상태 사이를 번갈아 표시한다. 이때 정상적 기운이 유지되는 시간과 회수가 더욱 많은 것이 건강한 간이다. 이 요동치는 기운과 존재(간)사이에는 일치성을 상호 확인하는 어떤 매카니즘이 있지 않나 하고 짐작한다.
그래서 건강한 간은 건강하지 않은 기운이 발생할 때는 건강한 쪽으로 일치시키게 된다. 간이 상하게 되면 점차 간의 기운이 바뀌면서 상한 상태의 간과 기운을 일치시켜 가는 것이다. 이해가 되실랑가 모르겠다.
이때 건강한 기운을 간에 보내줄 수 있다면 간은 자기 존재와 기운 사이에 불일치성을 보게 될 것이고,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복원력이 발동될 것이다. 즉 상한 상태로 유지하려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건강한 기운을 충만시키면 존재는 그 기운과 자기를 일치시키려고 하게 된다. 그래서 간은 건강을 회복할 수 잇게 되는 것이다.
기치료가 가능하다는것은 정보(기)가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하고, 존재와 정보 사이에는 불일치성이 있어야 하며, 이 불일치성을 최소하하려고 하는 지향성이 있다라고 하는 세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불일치성을 최소하하여 존재와 정보가 항상 일치하도록 하려는 매키니즘에 의해서 존재가 바뀌면 정보가 바뀌고 정보가 바뀌면 존재가 바뀌게된다.
존재와 정보의 불일치성은 기라는 파동의 가변성과 유동성에서 나온다. 동일한 파형의 패턴은 유지되지만 시시각각의 움직임에서 불일치의 미세한 갭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불일치의 틈이 커지면서 존재는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 간다.
이런 가설이 전제되지 않으면 생명체의 생노병사와 생명체의 성장과 질병 등은 존재할 수 없다.
정보(기)가 불변이면 존재는 바뀌지 않는다. 존재의 변화는 정보의 변화이다.
이 현상은 공조라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다음에 계속
구름~~
존재와 정보에 대한 가설(4)-구름-
전파에 다른 파형과 파장을 혼입해서 다른 형태의 전파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이게 전자전이나 레이다 교란의 원리다. 일정한 전파를 늘 방사하는 레이다에 강력한 다른 전파를 발사하면 두 전파가 공조를 이루면서 퍄형이 달라진다. 레이다 스코우프는 뿌옇게 흐려진다. 그러나 방해전파를 끄면 다시 원래의 전파만이 남는다.
상한 간에 건강한 기운을 보내면 간의 기(정보)는 두 기가 공조를 한 결과로 변조된 기가 된다. 그러면 간은 이 기운을 자기의 기운으로 감지하고 자신을 그것에 맞추어서 변화시키게 된다. 그러나 그것에 맞추는 데 걸리는 시간은 외부에서 주사된 기의 세기와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기공사에 따라 치료효과가 다르게 나타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님 같은 경우에는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효과는 즉시 나타났던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말한다. 존재의 변화가 너무나 빨리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에도 외부의 기(기공사가 넣어주는 것과 같은)가 계속 주사되고 있어서 간의 기운이 일시적으로 이 기에 공조해서 건강한 기운으로 바뀐 순간에는 이 간은 일시적이지만 건강한 상태이다. 존재는 아직 상한 채로이지만 기운만이 건강한 것이다. 이때 환자는 간의 통증을 못 느끼게 된다. 그러나 기의 주사가 중지되면 간은 원래의 기운으로 돌아간다. 정보를 다시 존재와 일치시켜 버리는것이다. 그러나 기가 주사되고 있을 때 간이 약간이라도 변했다면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 전보다는 약간 호전된 상태의 기운으로 돌아간다.
그대로 놓아두면 다시 원래의 상함으로 진행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운의 주사로 일시적이나마 기운을 정상 상태로 유지하고 그것에 맞추기 위해 간의 변화가 생기는 일이 되풀이 되어 기의 주사가 없는 동안에 나빠지는 진행 속도를 앞지르게 되면 기치료의 결과로 이 환자의 간은 좋아질 수 있다.
기공사의 능력이 엄청난 경우에는 단 한번의 주사로 간이란 존재가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정보가 확연하게 바뀌면 존재도 그에 따라 자신을 바꾼다. 존재와 정보의 불일치는 오래 가지 않는다. 일치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당연히 외부에서 주사되는 기가 잘못된 것일 경우 이 환자는 더욱 나빠질 수도 있다. 이것을 사전에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기치료의 문제이다.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은 과학적으로는 영양분의 섭취이지만 기의 측면에서 보면 다 정보의 보충이다. 존재의 자기 정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에너지의 공급임과 동시에 정보 자체의 보충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한의학에서 말하는 탕재란 '정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에너지의 공급이라는 측면보다 기(정보)의 직접적인 보충에 목적을 둔 음식물이다'.
탕재로서 보충하는 기라는 것이 바로 오행의 기운이다. 목화토금수의 다섯가지 정보를 보충해주는 것이다. 이 정보의 보충을 통해 인체라는 존재가 활성화되는 것이다. 건강하다는 것은 인체의 정보가 그만큼 명확하고 뚜렷하다는 이야기이다. 병약은 인체의 자기정보의 약화이고 희미해짐이다.
침의 원리는 에너지의 공급도 아니고 정보의 보충도 아니고 정보의 집결이다. 강화다. 침을 놓는 경락은 인체 정보의 중계소이다. 그리고 침은 안테나이다. 위장에 해당하는 경락에 침을 꽂으면 온 몸에서 위장의 정보(기)는 그 안테나로 모인다. 바로 위장에 기운이 모이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된다. 자기의 정보가 약해지고 희미해진 위장에 온 몸에 분산된 위장의 기운을 안테나 주위로 모으는 것이 침이라고 나는 파악하고 있다. 동시에 침을 놓는 침술사의 기도 침을 손에 쥐고 놓는 순간 경락으로 들어간다. 침은 침술사의 공력에 크게 좌우된다. 아무나 그 자리에 같은 침을 꽂는다고 해서 치료효과가 동일하게 나오지 않는다. 양의학의 주사는 의사가 놓던, 간호사가 놓던, 본인이 직접 놓던 결과는 같다. 일견 이것이 양의학을 더 과학적으로 보이게도 한다. 그러나 한의원 가서 침 맞을 때 조수한테 맞는 것은 별로다. 용하다는 의사와 조수의 침은 천양지차가 있다. 침꽂는 경락만 공부한다고 용한 침술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공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침이라는 안테나에 수집되어 모이는 기는 환자 본인과 침술사의 기뿐만 아니라 인체 외부에 존재하는 우주의 기도 수집이 된다. 인체는 스스로의 기에 의해 외부와 차단되어 있다. 그 물질적 경계가 피부다. 그래서 외부의 기운이 피부층을 뚫고 직접 침투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피부 깊숙히 찔러진 침은 외부의 기운을 받아들여 경락에 전해준다.
존재와 정보에 대한 가설(5)-구름-
이경숙님께서 올리신 글. [ 2002.08.11 ]
우리가 오감으로 인지하는 모든 대상은 견고하고 변하지 않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나게 떨리고 있는 것들이다.
도저히 우리의 감각으로는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진동하고 있는 물질이 실체로서 우리에게 감지되는 것은 그것들이 결합함에 따라 서로가 서로의 진동을 힘으로써 억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엄청난 입자들이 결합하여 서로를 당기는 힘 때문에 떨림이 진정된 상태의 물질이다. 이것들이 결합에서 풀려나 낱낱의 입자들로 돌아가면 우리는 그것들을 추적도 할 수 없다. 초끈 이론에서 말하는 끈의 떨림은 초당 수십조 번에 달한다. 이런 떨림은 입자로서 우리에게 포착되지가 않아서 파동으로서 감지될 뿐이다. 물론 특수하고 정밀한 장치로서만 입자적인 흔적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다.
이런 물질의 떨림은 모든 물질마다 진동수와 박자가 다르다. 이 진동이 곧 존재이다. 그래서 존재는 바로 진동으로서 자기를 증거하며 이 진동이 바로 자신의 정보이다. 어떤 존재가 다른 것과 구별될 수 있는 정체성이 바로 그 존재 고유의 진동이다. 이것을 동양에서는 기라고 불렀다.
모든 존재는 엄청난 진동이기 때문에 고정되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1초에 수십조번 바뀌는 성질을 갖고 있다. 부채의 한쪽에 새를 그리고 다른 쪽에 초롱을 그린 후 이 부채를 돌리면 초롱 속에 앉아있는 새가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초롱과 새가 번갈아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는 바로 돌고 있는 부채가 만들어 내는 초롱 속에 앉은 새와 같은 것이다.
워낙 부채가 빠르게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부채가 돌고 있는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할 뿐이다.
존재의 변화는 영화의 필름과 같이 진행된다. 1초에 100번의 속도로 촬영된 필름을 주욱 늘어놓고 앞장과 바로 다음 장을 비교해보면 거의 같은 사진이다. 우리 눈에는 구분이 안될 정도이지만 이 두장의 영상은 아주 조금 다르다. 앞장과 다음 장은 100분의 1초라는 시간 차이가 있다. 이 시간 동안 피사체가 움직인 만큼 두 장은 다른 것이다. 이 미세한 차이가 있는 수백만장의 필름을 이어놓고 돌리면 화면에는 사람이 움직이고 자동차가 달린다.
기의 변화로서 존재가 바뀌는 원리를 영화로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1초에 100번 찍은 필름을 주욱 이어놓고 돌리는데 10장을 앞으로 감았다가 다시 9장만큼 뒤로 감는다. 다시 5장만큼 앞으로 감았다가 뒤로 4장만큼 되감는다. 그리고 다시 20장을 앞으로 돌리고 15장을 뒤로 돌린다. 즉 풀었다 되감기를 반복하는데 반드시 풀은 량보다 되감는 량을 조금 적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필름은 조금씩 풀리면서 화면에 뭔가의 변화를 보여줄 것이다. 이 필름의 영사기 속도를 아주 빠르게 하면 사람의 눈에는 여전히 화면속에서 사람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 스크린에는 명확한 영상이 아니라 아주 흔들리는 상들로 보인다. 고물 테레비 화면과 같이 선명하지 않은 상으로 보인다는 얘기다.
기의 변화로 존재가 변하는 과정이 이와 같다. 필름이 앞으로 풀렸다가 뒤로 되감기는 것의 반복을 진동으로 보면 된다. 그러나 진동을 할 때마다 미세하지만 조금씩 어떤 방향으로 파동이 변해가면 그것에 따라 존재가 바뀌어간다.
변화가 없는 존재란 어떤 것이냐? 필름을 열장 풀었다가 다시 열장 되돌려 감는 것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이때 스크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영사기가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사기는 부지런히 돌고 있다.
만약 이 영사기가 10장씩 풀었다가 되감는 것을 일만 번할 때마다 한번 9장을 되감도록 하면 이 영화는 천년이 지나야 끝이 날 것이다. 그러나 영상이 움직이면서 변화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존재의 변화는 기라는 파동이 이 영사기와 같이 움직이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사기의 속도와 회전 방식을 조절함으로써 존재의 변화에 직접 관여할 수가 있다. 관객이 아니라 영사실의 기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기의 직접적인 전달과 수용이다.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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