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8  화왕산

 

  관룡사→ 암봉→ 구룡산→ 관룡산→ 번지없는 주막→ 화왕산→ 화왕산성 서문→ 배바위→ 화왕산성 동문→ 허준 세트장→ 번지없는

주막→ 관룡산→ 용선대→ 관룡사→ 창녕 석빙고→ 만옥정 공원.

 

 

오름길에 바라보이는 병풍바위. 맨 왼쪽 밍긋한 육산 봉우리는 관룡산이다.

 

 

 

구룡산( 741m)

 

암릉구간중 조금 난해한곳이다. 이곳만 주의하면 그다지 어려운 구간은 없다.

 

 

관룡산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되돌아 보이는 지나온 구룡산과 암봉. 

 

관룡산 이정표.

보이는 앞으로 진행하면 용선대와 관룡사로 내려서게 되고 오른쪽으로 진행하면 번지없는 주막을 지나 허준 세트장으로 갈수 있다.

좌측으로는 구룡산 방향이다.

 

 

 

번지없는 주막.

이곳에서 허준 세트장까지는 이십여분. 화왕산 정상까지는 오십분정도 소요된다.

 

 

 

 

 

 

화왕산 정상.

 

 

배바위.

 

 

 

창녕조씨 득성 설화지(경상남도 기념물 제 246호)

  신라 진평왕(신라 제26대 재위 579~631)때 한림학자 이광옥의 딸 예향이 병을 고치기 위하여 창녕 정상의 못에서 목욕을 하였는데  그

후 태기가 있었다. 꿈에 "그아이는 용의 아들로 겨드랑이 밑에 조(曺)자가 있을것'이라 하기에 태어난 아이를 살펴보니 과연 그대로였다.

왕이 소문을 듣고 직접 불러 조사해보니 조(曺)자가 선명하므로 성을 조(曺)라 하고 이름을 계룡이라 하도록 하니 창녕 조씨의 시조이다.

 

창녕조씨 득성 지지.

득성비는 득성지라는것을 알리기 위해 1897년(광무1년) 당시 경상남도 관찰사 조시영(曺始永)이 세웠다.

 

 

화왕산성.

 

복원공사중인 화왕산성.

 

화왕산성(사적 제64호)

  화왕산 정상부의 험준한 암벽을 이용해 골짜기를 둘러싼 포곡식 산성이다. 현재 남아있는 산성의 둘레는 약 1.8km로 동쪽 성벽은 대부

분 돌로 쌓았으나 서쪽의 성벽은 흙과 돌을 섞어 쌓았다.성벽의 높이는 높은곳은 4m정도로 폭은 3~4m이다. 자연 암벽의 틈새는 성벽을

높게 쌓았다. 산성의 출입구로 보이는 서문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동문 자리의 좌우 석벽은 잘 남아있다. 

 

화왕산성 동문.

멀리 허준 세트장이 희미하다.

 

허준 세트장.

 

 

허준 세트장 전면의 만개한 진달래.

 

 

 

 

관룡산( 754m)

하산길에 다시 들르게 되는 관룡산.

 

하산길의 뒷걸음. 

미안해요. 넘 힘들게 해서...

 

지나왔던 오름길의 암릉.

 

용선대에서 바라보이는 화왕산.

 

용선대 석가여래 좌상(보물 제295호)

  관룡산 부근의 수십길 낭따러지 위에 홀로 앉아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불상이다. 전체 높이 2.98m. 불신 높이 1.81m. 대좌높이 1.17m

이다.

 

관룡사 대웅전(보물 제212호)

  창녕읍 옥천리 관룡산 자락에 위치한 이건물은 1965년 해체 복원때 1749년 중창할 당시 써놓은 상량문이 발견되어 초창은 1401년이며

임진왜란때 불탄것을 1617-1618년에 다시 중건 하였음이 밝혀졌다.

  정면3칸 측면3칸인 다포식 건물로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 지붕이다. 기둥위에는 춤이 큰 창방과 평방을 놓고 그위에 세부처리

가 고식인  포작을 올려 놓았다. 포작은 안팍 모두 2출목이며 바로 위의 살미첨차의 끝은 삼각형이다. 쇠서는 짧아서 건실한 멋을 느끼

게 한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단청은 금(錦)단청이다.

 

 

 

관룡사 약사전(보물 제146호)

  정면과 측면이 각 1칸의 맛배 기와집이다. 공포는 기둥위에만 있으며  그사이의 포벽에도 구조물이 생략되어 있다. 창방의 끝은 그대로

첨차로 만들고 있는데 이는 주심포계 건물에서 볼수있는 독특한 수법이다. 그러나 내부의 첨차는 다포계 건물에서 처럼 원호곡선을 이루

고 있다. 이처럼 두가지 계통의 첨차를 사용한 예는 1404년경의 송광사 국사전(국보 제56호)과 1473년 중건의 도갑사 해탈문(국보 제50

호)이 있어 이건물의 건립시기도 15세기 추정된다.  

 

관룡사 석조여래 좌상(보물 제519호)

  관룡사 약사전에 모셔진 고려시대의 불상이다. 높읕 대좌위에 특이한 항마 촉지인을 하고 앉았는데 광배는 없어졌다. 머리위의 둥근 육계에는 가르침을 상징하는 반달구슬의 제주가 표현되어 고려시대의 불상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관룡사 약사전 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

  관룡사 약사전 앞에 위치한 이 삼층석탑은 형태로 보아 통일신라 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특히 아래 받침의 네면에

는 코끼리의 두눈을 형상화한 안상을 각각 두개씩 조각 하였는데 이는 석탑의 장식적 기능을 강조했던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 표현 양식

이다. 

 

관룡사 원음각(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40호)

  이건물은 1634년(인조120에 처음 건립한 사원의 누각 건물이다. 건물의 상량문에 의하면 1763년(영조39)에 크게 중건했다고 하는데     1704년(숙종30) 대홍수때 훼손된것을 고쳐 세운것으로 짐작 된다. 이누각은 정면3칸 측면2칸 규모에 들보 5량으로조성된 이익공계 건물 이다. 바닥은 우물마루로 되어있고 대웅전 앞마당과 높이가 같아 출입하기가 용이하다. 그 용도는 불구(佛具)를 보관 하거나 설법장소로  쓰이고 있다. 에전에는 누각아래 중앙칸을 통해 대웅전 마당에 출입 하였으나 지금은 아래 기둥 사이를 벽으로 막아 스님들의 공부방으 로  쓰고 있다.

 

 

 

관룡사 주차장의 간이매점.

 

창녕 석빙고(보물 제310호)

  창녕 석빙고는 입구에 서있는 기록을 통해 조선 영조 18년(1742)당시 이곳의 현감이었던 신서에 의해중수 되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각 부분의 양식 또한 조선 후기 모습이 잘 담겨져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석빙고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겨울에 채집해

두었던 얼음을 봄.여름.가을까지 녹지않게 효과적으로 보관하는 지금의 냉장고 역할을 하는 인공적 구조물이다. 외견상 고분과 같은 형상

을띠는데 빙실이라는 공간이 주변의 지반과 비교하여 절반은 지하에 있고 나머지 절반은 지상에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고 바깥면은 보온

을 위하여 흙으로 두껍게 덥혀 있기 때문이다.

 

석빙고 내부.

  입구 안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밑비딕은 경사졌고 북쪽 구석에는 물이 빠지도록 배수구멍을 두었으며 바닥은 네모나고 평평하다.

  내무는 잘 다듬어진 돌을 쌓아 양옆에서 들어올린 4개의 무지개 모양 띠를 중간 중간에 두었다. 각 띠사이에는 긴돌을 가로로 걸쳐놓아 천장을 마무리 하였다. 또한 천장의 곳곳에는 요철을 가진 환기구를 두어 바깥공기가 드나드는것을 조절하여 냉기가 오래가게 만들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제33호)

이비는 삼국시대 신라 진흥왕(540~576 재위)이 세운 기념비이다. 흔히 순수비로 통칭되나 북한산.황초령.마운령에 있는 순수비처럼 순수

관경이란 말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 했으므로 따로 척경비라 일컫는다. 단양 적성의

진흥왕비와 비의 성격이나 형태가 거의 비슷하다. 비문 첫머리의 "신사년 2월 1일 입'은 진흥왕 22년(561)으로 추정되어 기존 6개의 순수

비보다 수년 앞서 건립했음을 알수 있다. 매끄러운 화강암의 자연 판석을 약간 다듬어 비문을 새겼으며 개석이 없고 인명과 관등의 표기

방식이 독특하며 고졸한 해서체 등을 지녀 신라 비석중 가장 오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전문 642자 가운데 400자 정도가 판독 되었다.

앞부분은 마멸이 심하고 뒷부분은 관련 인사가 나열되어 있다. 모두 27행인데 대개 한줄에 26자씩 적었고 끝줄은 3자이다.

1914년 화왕산 기슭에서 발견 되었고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돌의 크기는 높이 178cm.폭 175cm. 두께 약 30cm이다. 

 

창녕 현감 비석군.

 

창녕 객사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231호)

창녕현 관아의 부속 건물이었던 이곳 객사는 언제 세워졌는지 알수 없지만 적어도 300~400년전에 지어졌을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일제 시대인 1924년에 시장을 세운다는 구실로 객사를 창녕음 술정리로 �겼다가 1988년 이곳으로 이전하여 보수 하였다. 객사

의 전형적인 건물 배치는 종묘(宗廟)의 건물을 모델로 하였기 때문에 중앙에 주건물이 있고 좌우에 익사(翼舍)가 있는 구조이다. 주건물

로 쓰였을 이건물에는 벽체나 창호도 없이 기둥과 지붕 구조만 남아있고 또 좌우의 익사(翼舍)도 없어 원래의 형태를 알수가 없다. 더구

나 지붕도 일반적인 객사에 비해 매우 낮고 건물의 방위 조차 원형과 달라 권위잇던 객사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퇴천 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0호)

  이 삼층 석탑은 창녕읍 퇴천리의 힌 민가에 무너져 있던것을 1969년 10월에 해체 수리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그런데 이찹이 발견되

었던 곳 주위에 기와와 자기 조각등이 발견되고 있어 비교적 큰절이 있었을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그 내력이나 절의 이름을 알려주는 유

물이나 기록들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이탑은 탑의 형식이나 제작수법.그리고 각 부분간의 비례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부분적으로 파손 되었으나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우수한 탑으로 신라 석탑의 변천과정을 밝히는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있다.

 

창녕과 청도를 넘나드는 비티재의 간이 매점에 들러서... 

 

 

<인터넷 자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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