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2
남원 춘향제 행사를 둘러보다가
한나절을 지나서 광주에 도착.
광주 국립박물관을 둘러보고는 시립 민속박물관에서
목회일을 하는 동서와 처제를 만난다.
계획은 동오층석탑과 서오층 석탑을 찾아보는것이었는데
이곳 광주에 사는 처제도 잘 모른다.
소쇄원도 들러볼만하다던 동서는 바쁜일이 있다며 가버렸고
다녀오기까지 했다는 처제의 안내로 생각지도 않은 소쇄원을 향하는데
길을 잘 찾지 못하여 왔다리 갔다리 물어물어 도착을 하니 19시가 넘는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는 시간에
굳이 입장료까지 내고 더듬더듬 더듬걸음을 할필요가
있겠나 싶어 헛걸음 품만 팔고 만다.
처제에게 맛난것 사주고 싶어 아는곳 좋은곳 있으면 가자고 하니
언젠가 맛난 식사를 하였다는 곳이라며 안내를 하는데
어덴고 하니 담양 충효 주유소 건물 한켠의 할매 순두부 식당이다.
들어서면서 처제가 주모한테 건네는 말이
주인이 바뀌었나요? 다.
무엇인가 잘못되어지는 느낌이다.
그렇찮아도 들어서는 느낌이 탐탁치가
않았는데 잘못 온것 같다.
웬걸 음식이 나오는데
쉰순두부다.
음식이 쉬었다고 하니까
주모 대답 왈
다른사람이라고 암말 않고 먹고 갔다고 한다.
식사도 못하고 일어서면서
식비만 기만원 지불을 한다.
음식맛 하면 전라도라고 하는데
전라도는 무신 전라도...
기분 영 잡쳐버렸다.
빨리 광주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다.
저녁때의 일이다.
만인의총.
찬연히 빛나는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배달민족에도 허다한 시련이 있었으니 그중에도 왜군의 침략은 잊을수 없는 민족의 수
난이었다. 정유재란은 이민족에 가장 큰 치욕이었으며 어느곳 보다도 모질고 쓰라린 참화를 입은곳이 바로 이고장 남원이다. 잔인무
도한 왜구들은 현해탄을 건너 파죽지세로 현해탄을 건너 파죽지세로 경상도를 불사르고 물밀듯이 이곳 남원에 침공 하였으니 때는
선조대왕 30년(1597) 정유년 8월 6일 이었다. 여기에 호남의 요새지인 이 고장 남원을 수호하기 위하여 집결한 접반사 정기원.전라
병마사 이복남.방어사 오응정.조방장 김경로.교룡산성 별장 신호.남원부사 임현.판관 이덕회.구레현감 이원충등 지휘하에 관군 5천
병마가 이리떼와 같은 왜적과 치열한 접전을 벌리었으나 중과부적 세궁역진 하여 동 8월 16일 성의 일각이 무너지자 이를 본 성내
외의 애국 시민들은 돌맹이. 죽창. 괭이등을 무기로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가 ㅊ천추의 한을 품고 옥쇄 하였으니 그수는 만여명을
헤아렸다. 이 장렬한 순국대의는 하해보다 넓고 일월보다 밝아 길이 만세에 빛나 후세 민족수호의 귀감이 되다. 이에 후세 사람들이
그유해를 거두어 한무덤을 짓고 이를 만인의총이라 이름 하다.(만인의총 비문)
교룡산성.
교룡산 선국사 관음전.
선국사 대웅전(전라북도 유형문화제 제114호)
이건물은 교룡 산성 안에 자리한 선국사의 중심 법당으로 통일신라 신문왕때 처음 지어졌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순조 년 (1
803)에 다시 지은 것이다. 대웅전 안에는 지방 민속자료 제 5호로 지정된 큰북과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승병대장의 인장이 있어 이곳이
임진왜란(1592)때 승병의 주둔지 였음을 알려준다.
송이.
남원 만덕사지.
이곳은 고려 문종(1046~1083)때 처음 세운 만복사가 자리했던 터이다. 처음 지었을때 경내에는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모신 이층
법당과 오층 목탑이 있엇다고 전한다. 근래에 발굴 조사에 의하면 조선세대에 만복사는 가운데 목탑을 세우고 동.서.북쪽에 법당을 세
운 일탑 삼금당식 배치였다. 이 사찰은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실린 만복사지포기의 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조선 중기까지 번창하던
만복 사는 정유재란(1597)때 불타 없어졌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석탑과 돌유물 몇개가 절터를 지키고 있어 일면이나마 웅장했던 옛사
찰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불상 좌대(보물 제31호)
석불입상(보물 제43호)
고려 초기에 만복사를 지으면서 함께 만든 것으로 바위에 부처가 서있는 작품을 조각한것이다. 부처 바깥쪽에는 몸에서 발하는 빛을
묘사한 광배를 조각했는데 위쪽 일부가 없어졌다. 받침으로는 팔각형의 납작한 돌을 놓고 그위에 연꽃으로 장식한 둥근돌을 얹었다. 머
리의 윤곽은 뚜렸하고 고수머리는 간략하게 표현 하였다. 얼굴은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에 미소를 머금어 마치 살아있는듯 하고 어깨로
부터 부드럽게 흘러내린 옷자락과 원만한 굴곡릉 이루는 몸매가 어우러져 자연스럽고도 우아한 느낌을 자아낸다.
오층석탑(보물 제 30호)
이 석탑은 고려시대 초기에 세운것으로 높은 받침부 위에 5층의 몸체와 지붕을 얹었다. 윗부분은 떨어져 나가고 현재 남아있는 탑의
높이는 5.75m이다. 1968년 탑을 수리하던중 1층 몸체에서 사리함을 발견 하였다. 층마다 몸체와 지붕을 각각 별개의 돌로 만들었는데
첫번째 층이 유달리 높다.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단순한 구조이지만 2층부터 지붕과 몸체 사이에 넓은 돌판을 끼워 넣은 점
이 특이하다.
당간지주(보물 제32호)
당은 절에서 행사를 치를때 문앞에 내걸던 일종의 깃발로 거기에는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그림을 그렸다. 당간지주는 이러한 깃발과
깃대를 받치기 위해 세운 버팀 기둥이다. 기둥에는 위.아래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받쳐주는 빗장을 끼웠다. 이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에
만든것으로 커다란 돌을 아무런 꾸밈없이 거칠게 다듬어 육중하면서도 소박한 멋을 풍긴다.
불두.
민속 두부마을.
남원에서의 점심식사.
시조.
행사장에서 바라보이는 교룡산.
광한루(보물 제281호)
이 건물은 조선 세종 때 명정승 황희가 처음 세워 인조 4년(1626)에 다시 지은것으로 원래 이름은 광통루였다. 후에 정인지가 그 수
려한 경치에 감탄해 전설상의 달나라 궁궐(광헌 청허부)와 닮았다고 하여 광한루라 고쳐 불렀다. 건물 북쪽 중앙에 층계가 붙어 있는
데 이것은 점점 기우는 건물을 지탱하기 위하여 고종때 만든것이다. 건물앞에 연못을 만들고 그위를 가로질러 오작교라는 반월형 교
각의 다리를 놓았다.
오작교.
광주 장운동 오층석탑.
이석탑은 1982년 광주광역시 북구 장운동의 옛절터에서 논개간중 발견 되었다. 발견당시 상륜부등 다수의 석탑부재가 유실 되었고
기단부의 지대석과 기단면석.갑석.1층 탑신석.2.3층 옥개석등 13점만 수습 되었다. 석탑의 복원은 남아있는 석탑 부재에 대한 정밀실
측을 통해 본래의 형태를 추정하여 1984년에 이곳에 복원하였다.
중흥산성 쌍사자석등(국보 제103호)
이 석등은 큼직한 연꽃이 둘러진 아래받침돌 위로 가운데기둥 대신 쌍사자를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두 마리의 사자는 뒷발로 버티
고서서 가슴을 맞대어 위를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사실적이면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어 주목된다. 8각의 화사석에는 4개의 창이
뚫려 있고,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장식이 번잡하지 않아 간결하면서도 사실적인 수법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그다지 크지 않으면서도 뛰어난 조각기법
과 아름다운 조형미를 보여주는 걸작이라 하겠다. 원래는 중흥산성내에 있었으나, 일본인이 무단으로 반출하려 하여 경복궁으로 옮겨
놓았다가 지금은 국립광주박물관 실내에 전시하고 있다.
가지방울(국보 제143호)
월출산 용암사지 삼층석탑에 안치되었던 불상.
나주 신촌리고분 출토 금동관(국보 제295호)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 무덤에서 발견된 높이 25.5㎝의 금동관이다. 나주 신촌리 9호 무덤은 1917∼1918년에 일본에 의해 발굴 조
사되었다. 이 금동관은 삼국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외관과 내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관은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 3개를 머리에 두른
띠 부분인 대륜에 꽂아 세웠으며, 내관은 반원형의 동판 2장을 맞붙여 만들었다. 기본 형태는 신라 금관과 같으나 머리 띠에 꽂은 장
식이 신라 관의 ‘山’자 모양이 아닌 복잡한 풀꽃 모양을 하고 있어, 양식상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내관인 모자는 전북 익산 입점리(사적 제347호)와 일본에서도 비슷한 것이 출토된 바 있어 백제와 일본과의 문화 교류관계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동관의 주인은 당시 이곳을 지배하던 세력의 최고 지도자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다만 이 금동관이 현
지의 토착 세력에 의해 제작된 것인지 백제로부터 하사받은 것인지에 대하여는 미상이다.
나주 신촌리 금동관은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할 뿐만 아니라, 외관과 내관으로 구성된 백제 관 형태를 제대로 갖춘 유일한 예로 중
요한 유물이다.
과거 답안지.
개선사지석등(보물 제111호)
오랫동안 파묻혀 있었는데, 최근에 바닥을 파고 흩어진 부분을 정리하여 시멘트로 바닥을 짠 다음 다시 세웠다. 높이 3.5m로, 아래받
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 모양이 새겨졌고, 사잇기둥은 장고모양이며,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모양을 새겼다.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
(火舍石)은 8각이며 창이 8면에 뚫렸다. 지붕돌은 아랫면에 낮고 널찍한 괴임이 있고, 8각의 끝부분에는 꽃모양을 둥글게 조각하였다.
석등의 창 사이 공간에는 통일신라 진성여왕 5년(891)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시대 석등 가운데 글씨를 새긴 유일한
예로, 비슷한 시대의 다른 작품의 연대와 특징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표준이 되는 작품이다.
환벽당(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호)
조선 명조때 사촌 김윤제(1501~1572)가 세운 정자이다.나주목사등을 지낸 김윤제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후학들을 가르치며 여생
을 보낸곳으로 정철이 벼슬길에 나아가기까지 머무르며 공부하였다고 한다. 정자안에는 송시열이 쓴 환벽당 글씨와 임억령.조자이의 시
가 걸려 있다.
<인터넷 자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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