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3 광주-나주-영암 월출산-해남.

 

엊저녁 광주 시내로 들어 오면서

다른 식당을 들르려고 해도 맘이 내키지 않는다.

 

처제 맛난것 사주고 싶었지만

종당에는 함께 저녁 식사도 못하고 헤어진다.

 

광주에 들른 목적은... 

동생이 보고싶다는 식구의 소원을 들어주는것이었고

또하나는 무등산을 올라 입석대와 서석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아침에 무등산 증심사를 향하는데

이사람 저사람에게 길을 묻다가 보니

엉뚱하게도

무등산장쪽 주차장이 나타난다.

 

너무 많이 물어본것이 화근이 된것 같다.

증심사 이야기는 건성으로 듣고 무등산 길만

알려준 이도 있었을테고 제대로 알려준 이도 있었을테고...

 

시내에서 방향을 갈지자로 왔다 갔다를

몇번인가는 했었을것 같다.

 

주차료를 지불하는데  정상부는 출입이 통제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주차요원의 말이 쪼매 찜찜하다.

 

몇걸음 옮기다 만나지는 무등산 관리 초소 관리원에게

출입여부를 물어보니 입석대.서석대 일대가 생태 복원관련 하여

전면 통제 된다고 한다.

 

것 참 !!!

안되는넘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만...

 

되돌아 나와

월출산 자락의 천년고찰 무위사로 향한다.

 

 

 

 

 

 

 

나주향교(전라남도 유형 문화재 제128호)

 

나주향교 명륜당.

 

나주 향교 대성전(보물 제 394호) 

  대성전은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교육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보다 위쪽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나주향교는 공자의

아버지를 모시는 계성사가 있어 명륜당과 대성전의 자리가 바뀌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곳도 공사중이라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나주 동문외 석당간(보물 제 49호)

  대개는 두 지주만 남아 있는데, 이것은 당간이 함께 남아 있어 중요한 유물이다. 당간은 5개 돌을 서로 맞물리게 하여 세웠는데, 아래

는 굵고 올라갈수록 차츰 가늘어져 안정감 있다. 이러한 당간에 철띠를 두른 후 지주의 안쪽에 마련된 받침돌 윗면에 구멍을 파서 이를

고정시켜 놓았다. 당간 위에는 8각의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와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달아 놓았다고 한다.

현재 해체 보수중이라 아쉽게도 제모습을 접할수가 없다.


 

 무인 카메라를 지나치면서  무의식적으로 메타기에 눈이 가는데 주행속도가 73km/h 이다. 그런데 아스팔트 바닥 글씨가 60으로 되어

있는것이 영 거슬린다.  

 

 

 

 

 

 

월남사지 모전석탑.

 

 

월남사지 진각국사비(보물 제313호)

 

 

 

무위사.

  신라 617년(진평왕 39)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했다고 전한다. 875년(헌강왕 1) 도선국사가 중건하여 갈옥사(葛屋

寺)로 이름을 바꾼 뒤에 많은 승려가 주석했다고 하며 946년(정종 1) 선각국사(先覺國師)가 3차 중수하여 모옥사(茅玉寺)라 했고, 15

55년명종 10) 태감선사(太甘禪師)가 어명으로 중창하여 현재의 이름인 무위사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

(先覺大師遍光塔碑)의 명문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최근까지 경내에 있던 목조건물은 극락전(국보 제13호)·명부전과 요사채뿐이었으나 1974년에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해탈문(解脫

門)분향각(焚香閣)·천불전·미륵전 등을 새로 지었다. 이밖에 경내에는 946년에 세워진 선각대사편광탑비(보물 제507호)와 종형의 옥

신을 가진 사리탑, 석탑형식을 한 부도가 있고 미륵전 안에 고려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이 있다. 그리고 1955년 보수공사

때 무위사가 1476년에 크게 중창된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도 일치하며, 극락전 안에 있는 목조아미타삼

존불상및 29점의 불화는 조선 초기 작품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현재 삼존불상과 후불벽화만 남기고 모두 벽화보존각에 보존되어 있다.
 

 

 

 

극락보전(국보 제13호)

 

 

목조아미타 삼존불좌상(보물 제1312호)과 뒷면의 아미타삼존불도(보물 제1313호)

  후불벽화(後佛壁畵)로 그려진 아미타삼존도. 흙벽에 채색. 210 × 270 cm. 1476년 작. 후불벽화로 그리기 위하여 따로 세워진 벽면에

그려졌다. 
  구도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앞의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배치하고 뒤쪽으로 6명의 나한(羅漢)을 배치하여 원근감을 표현

하였으나 상하로 구분하는 2단구조의 고려 불화나 16세기의 조선 불화와도 다른 것이다.

  아미타불의 뒤에 표시된 광배(光背)의 모양은 키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15세기부터 사용되었다. 착의법(着衣法)은 고려 후기의 단아

양식(端雅樣式)을 계승한 것이며, 가슴 아래까지 올라온 군의(裙衣)의 상단을 주름잡아 고정시킨 매듭끈을 대좌(臺座) 좌우로 길게 드

리운 것은 조선 초기의 특징이다. 내용상에서도 변화가 있다. 곧 고려시대의 삼존형식에 자주 등장하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대신

지장보살이 배치된 것은 고려 후기의 신앙대상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아산현감을 지낸 강노지(姜老至) 등 수

십명의 시주로 혜련(海連) 대선사 등이 그렸다 한다.
 

삼층석탑(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76호)

 

선각대사편광탑비(보물 제507호)

 

 

아미타내영도보물 제1315호)

  무위사 보존각에 보존되어 있는 벽화. 1476년 제작. 흙벽에 채색. 아미타불이 죽은 자를 극락으로 인도하는 모습을 도상화(圖像化)

한 것으로 원래는 극락전 서측 벽면에 있었던 것을 1976년 극락전을 수리할 때 벽채로 떼어내어 보존각에 보존하였다.

  내영도는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사자의례(死者儀禮)와 깊이 관련된 것이며, 한국에 전하는 것은 독립적으로 구성된 것은 찾아보기 

힘들고 감로탱화(甘露幀畵)라는 불화에서 내영의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감로탱화의 구도는 극락과 지옥을 대비시켜, 상단에는 극락

을, 하단에는 지옥을 묘사한다. 그리고 내영의 모습도 아미타불 단독으로 맞이하는 것, 관세음보살 및 대세지보살과 함께 맞이해 가는

것, 아미타불이 25보살과 함께 와서 맞이해 가는 것, 아미타불과 성중(聖衆)이 맞이해 가는 것 등이 있다. 이 내영도는 아미타불이 8보

살 및 8비구(比丘)와 함께 와서 맞이하는 극락내영도이다.

  본존인 아미타불은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듯 오른손은 앞으로 내밀어 뻗고 왼손은 들어 엄지와 장지를 맞대고 있다. 둥근 육계(肉)

에 중앙의 계주(珠)만 표현한 머리모양, 사각형의 얼굴에 눈꼬리가 길게 올라간 긴 눈, 구불구불한 옷자락의 표현은 고려 말 불화(佛畵)

의 특징이며, 군의(裙衣)를 묶은 매듭끈을 법의 자락 앞으로 대칭시켜 늘어뜨린 것은 조선 초의 특징이다.

  관음보살상은 보관(寶冠)에 화불(化佛)과 보병(寶甁)을 강조하였으며, 대세지보살은 정병(淨甁)과 경함(經函)을 들었고, 무릎 부근

을 구슬로 장식하였다. 그 밖의 보살들도 제각기 특징있는 물건을 들고 있으며, 지장보살의 경우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두건을 쓰고 있

는 점 등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벽화의 지장보살과 비슷하게 묘사되었다.

  이러한 점은 이들 일련의 작품이 동일 작가에 의하여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 보살들 위로 상체만 묘사된 8비구들은 다양

한 표정과 자세를 취하여 전체 화면이 활기를 띤다.

  화면 전체적으로 풍기는 밝고 엷은 적색과 녹색은 고려 불화의 양식을 보여주며, 나한(羅漢)의 등장과 세부묘사에서는 조선 초기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미륵전의 석불입상.

 

 

 

 

 

 

 

 

 

진도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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