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언

 

금년(2005년)은 태평양 전쟁이 끝난 지 60년, 러일 전쟁이 끝난 지 꼭 100년이 되며, 동북아시아에 피바람을 몰고 온 대전란의 시발점이 된 청일 전쟁이 끝난 지는 꼭 110년이 되는 해이다. 따지고 보면 황해 바다의 풍도 앞바다에서 울려 퍼진 포성을 시작으로 벌어진 청일전쟁으로부터 동북아시아는 꼭 50년 동안 전쟁의 포연에 덮여있었던 셈이다. 이 기간 동안 동북아시아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50년 전쟁에 휩싸여 있었다. 한국전쟁은 그 전장이 한반도에 국한된 국지전이라는 성격으로 해서 논외로 치더라도 근대에 들어서서 동북아시아에서 전쟁은 장장 5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이 기간 중 세계의 다른 나라들도 세력의 각축에 여념이 없었음으로 보어전쟁, 크림전쟁, 1, 2차 세계대전 등 참혹한 전쟁을 겪었지마는 이 전쟁들은 사이사이에 분명하고 확실한 평화의 시간들을 가진 반면에 동북아시아는 그런 평화의 간격이 없는 끝없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전쟁만이 아니라, 혁명과 반혁명의 투쟁이 있었고, 정부군과 반란군의 싸움이 있었고, 군대와 군벌이 패권을 다투었고, 공산세력과 반공세력의 충돌이 있었다. 식민지배세력과 독립항쟁세력 사이의 전투가 있었고, 정규전과 유격전이 병행되었다. 탱크와 비행기가 동원된 현대전과 죽창과 낫을 든 전근대적인 농민전쟁의 형태가 함께 어우러졌다. 인류 역사상 동력으로 움직이는 철갑함들 간의 근대적인 해전이 최초로 벌어진 곳이 이 곳이었으며, 항공기를 이용한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이 처음으로 시도된 것도 이 곳에서였으며, 탱크와 장갑차를 중심으로 한 기계화전이 실험된 것도 이 곳이었다.

  동북아시아는 실로 20세기의 세계 운명을 결정짓는 전쟁의 중심지였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모습과 대체적인 삶의 윤곽은 동북아시아에서 있었던 운명적인 50년 전란의 결과에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투쟁사는 1,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의 그늘에 가려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고, 인류의 역사와 운명에 끼친 영향에 비해서는 놀랄 만큼 잘 알려져 있지도 않다. 중일전쟁은 청일전쟁의 필연적인 귀결이었고, 일본이 미국에 대하여 벌인 태평양전쟁은 사실 중일전쟁의 부수적인 전역이나 마찬가지이다. 일본이 대미개전을 결심한 이유는 중국과의 끝없는 전쟁을 종결짓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태평양전쟁의 승부는 미국과의 바다 싸움보다는 중국대륙에서 결판이 났다고 보는 것이 옳다. 물론 그 결정적인 전역의 시작은 바로 동북아시아였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는 세계의 균형점이며, 균열의 진앙지이다.

  도오고오의 일본함대가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대마도 앞바다에서 격멸한지 100년이 되는 해에, 일본은 다시 동해에서는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여 한국과 마찰하고, 지나해에서는 센가쿠열도의 영유권을 가지고 중국을 자극하고 있다. 그때의 영일동맹이 그랬던 것처럼 더욱 강화되는 미일 동맹은 일본을 부추기고 있으며, 그때의 조선처럼 한국은 해양세력과 배후의 대륙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미국과의 동맹은 금이 가고 있으며,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우호는 아직 안개 속이다. 북한은 적인지 형제인지 오락가락하여 경계와 연민 사이를 왕복하고 있을 따름이다. 일본은 교과서의 기술 내용을 우회적인 수단으로 삼아 과거의 역사를 미화하고 전쟁의 책임을 면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가 불을 당겼고 군국주의의 망령과 함께 사그러진 동북아의 참혹했던 전쟁사를 제대로 되살려 후대에 전하려는 노력은 별반 보이지 않는다.

  이 동북아 전쟁사를 통하여 우리의 후손들에게 50년 전쟁의 기록을 남기려고 펜을 든다. 아울러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의 4대 강국과 나의 조국인 대한민국이 이 지난날의 경험에서 가장 올바른 교훈을 얻어 두 번 다시 어리석은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란다.


                              2005년 봄, 마산에서 벽운 이경숙

 

 

제1장 청일 전쟁

■개전의 배경-1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대한 주도권 다툼 끝에 1894년에 벌이게 된 청일 전쟁은 육지에서는 아산에서부터 첫 전투가 시작되어 평양과 압록강, 만주에 이르기까지 조선 반도를 종으로 횡단하면서 여러 차례의 전투가 이어졌고, 바다에서는 세계 최초의 근대적 해전이라고 말해지는 압록강 해전(The battle of Aru river, 일본 측에서는 황해 해전이라고 부른다)에서 시작되어 위해위 봉쇄전을 거쳐 청국 북양 함대 수사 정여창의 자살과 청국 함대의 항복으로 끝을 맺게 되는 해전이 벌어졌다.
  청일전쟁은 이후 아시아와 세계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대국 중국의 몰락과 신흥 강국 일본의 부상을 가져온 일대 격변이었다.
  청일 전쟁이 발발할 무렵,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일본만이 근대적인 정체와 법률, 사회 조직, 과학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일찍이 개화의 길을 걸었던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각국이 어떤 형편이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근대화를 했어야 하고 유감스럽지만 서구의 문명을 따라가야만 했던가하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일본은 가장 먼저 알아 차렸으나 중국과 조선을 비롯한 대부분의 아시아 나라들은 그렇지를 못하였다.
  우리는 중국을 대국이라고 말한다. 그 나라의 넓이와, 그 인구의 많음과, 그 역사의 유구함과, 문화의 깊이를 생각할 때에 중국은 분명히 대국이다. 그러나 근대화되지 않은 중세적 대국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왕조와 군대만 대국이고 고등한 문화국일 뿐 대다수 백성의 삶은 짐승의 것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근대화란 대다수 백성의 삶의 질이 국가의 위상과 국력에 비례하여 같이 향상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이야말로 근대화의 진정한 의미였다(훗날 손문의 삼민주의의 지향점이 이것이다). 일본은 개국 이전에는 중국이나 조선과 다를 바 없이 그 인민의 삶은 곤고하고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에 비로소 일본인들은 누구나 교육을 받았고, 누구나 과학적인 의료의 혜택을 받게 되었으며, 그 생활의 위생적, 문화적 수준이 확실하게 향상되는 체험을 먼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국 중국은 어떠했는가? 청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 해인 1893년에 베이징에 공사로 부임한 일본의 고무라 주타로가 베이징 생활을 한 후에 글로써 남긴 것이 있다. 이 당시 메이지의 일본인들은 매사에 객관적이고 합리적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기 때문에 이런 기록에 어떤 국민적 우월감이 개입되거나 정치적 목적 때문에 과장되거나 조작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고무라가 남긴 글들은 대단히 정확하고 객관적인 당시의 사정을 전해주는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고무라가 쓴 대국 중국의 수도인 북경의 모습과 그 곳에서 사는 북경시민들의 생활상을 한번 보자. 고무라는 임기 중의 북경에 대해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북경의 인구는 2백만이라고 얘기들을 하지만 그건 과장된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80만을 넘지 않는다. 호수는 10만 정도 모두가 단층집이다. 도로는 동경의 우에노 오나리미치 정도 되는 것이 두세 군데 있을 뿐이고 그나마 행상들이 길을 차지하여 대단히 좁고 궁핍하다. 도로에는 마차 길과 인도가 있는데 보수를 하지 않아서 울퉁불퉁하여 보행조차 어려울 정도이다. 노점의 주인은 가게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므로 노점상이 바로 집이나 마찬가지이고 도로는 이런 행상으로 점령되어 있다. 화장실이 별도로 없어서 모든 사람들이 도로 위에다 대소변을 본다. 분뇨 냄새가 온 도시에 코를 찔러도 숙달이 된 시민들은 태연하다. 그리고 남자나 여자나 길 위에서 용변을 보는 행위에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않는다. 하수 시설이 없는 시내는 곳곳에 소변이 흘러들어 강을 이루고 웅덩이처럼 패인 곳은 오줌 호수가 되어 있어서 자칫하면 오줌 속에 빠지고 만다. 대변이 넘쳐나지 않는 이유는 대변은 서로 가져가려고 경쟁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시내 곳곳에서 똥을 가지고 사람과 개가 다툰다. 누군가가 대변을 보면 개들이 다가와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바지춤을 올리는 순간 잽싸게 먹어 버린다. 그것 외에 북경에 있는 개가 먹을 음식은 없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동작이 느린 개는 다 먹기 전에 사람에게 쫓겨나고 만다. 대변에 욕심을 내는 것은 개뿐이 아니다. 사람들도 도쿄의 넝마주이들이 지고 다니는 것과 같은 망태기를 울러 매고 다니면서 대변을 주워 담아서 시외로 가져가 비료로 판다. 이런 상태에서 여름에 장마비가 오면 시내 전체가 분뇨의 강이 된다. 비가 그치면 바람이 부는데 천지가 어두워 질 정도이다.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하얀 벌레들이 사람을 괴롭히는데 물리면 낫고 나도 멍 같은 흉터가 남을 정도로 지독하다. 물은 수질이 나빠서 도저히 그냥은 마실 수가 없다....이하 생략."

  대국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의 모습이 이러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어떠했겠는지. 그리고 동학이 궐기했던 삼남의 지방에서 인간이 어떤 생활을 했겠는지 상상해 보라. 전쟁이 차라리 희망일 때가 있었다.


↑의화단 사건 직후에 열강의 조정단이 북경에 도착한 모습이다. 동양의 대제국 중국의 수도였지만 19세기말의 북경은 악취와 빈곤에 찌들고 무지와 야만이 넘치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청일전쟁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론이 여러 가지이다. 왜 일본은 조선 땅에서 청국과 싸웠으며, 왜 청국은 마찬가지로 조선 땅에서 일본과 싸웠느냐 하는 청일 양국의 전쟁의 동기부터가 정설이 없다. 동기에 비해서 계기는 뚜렷한 편이었다. 그것은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난이었다. 청일 전쟁의 발발 이유에 대해 교과서적으로 풀이하자면 이렇다.

  「동학란을 자체적인 힘으로 진압하지 못한 조선이 종주국인 청국에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청국군이 조선에 상륙하자 텐진 조약을 근거로 일본도 군대를 조선에 상륙시켰으며 한 장소에 진주한 두 나라 군대가 자연히 충돌하게 되어 벌어진 전쟁이다.」

  청국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것은 종주국으로서의 책임을 다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청국은 조선의 종주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대규모 전쟁을 감수할 정도의 여유가 없었고,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길 자신도 없었다. 그런데도 패전의 각오를 하면서도 전쟁을 해야 했을 만큼 조선에 대한 종주권의 행사가 그토록 중요한 문제였느냐 하는 의문이 남는다. 청국은 왜 조선을 위해 일본과 전쟁을 했을까?
  일본의 전쟁 명분은 이것 보다 조금 더 아리송하다. '한국을 중국의 종주국 처지에서 벗어나게 하여 명실상부한 독립국가를 만든다'는 것이 일본의 전쟁 이유이다. 한국인들이 눈물겹도록 고마워해야 할 도움의 손길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일본이 이토록 고마운 도움을 우리에게 주려고 했던 이유를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종주권을 가진 중국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했으므로, 우선 중국의 종주권을 박탈하여 외관상 자주적인 독립국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라고 보고 있다. 그러니까 일본이 내건 청일전쟁의 명분은 조선을 침략해서 집어삼키기 위한 음흉한 술책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일본 측 기록과 사정을 살펴보면 그렇게 뚜렷한 목적의식이 잘 잡히지 않는다. 일본 정부의 속내가 명확하지가 않은 것이다.
  적어도 메이지 정부는 호전적인 정부는 아니었고, 메이지 시대의 일본인들은 정복욕에 불타는 제국주의자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청일 전쟁 직전의 조선 파병도 확실한 침공이나 지배의도가 있다고 단정하기에는 뭔가가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다. 경과를 일별해 보자.


 

■개전의 배경-2
  1860년경부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창시한 동학이 크게 교세를 떨치자 정부는 이를 사교(邪敎)로 규정하여 탄압을 가하고 1863년에는 교주인 최제우를 처형하기까지 했지만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포교로 교세는 더욱 확장되고 있었다. 동학교도들은 처형당하여 죽은 교주 수운의 복권을 요구하는 교조신원운동(敎組伸寃運動)을 1892년에 전개하게 되는데, 삼례 집회에서는 수천 명의 교도가 모여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이듬해 보은에서는 2만 명이 운집하여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정치적 구호를 외치기에 이르자 심상치 않음을 느낀 정부는 진무사(鎭撫使)를 파견하여 동학도들을 달래려고 하였으나 파견된 정부의 관리들은 동학도들에게 신뢰를 주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약속은 번번히 공수표로 끝나고 동학도의 요구는 어느 것 하나도 실천되는 것이 없었다. 이를 겪으면서 동학교도들의 불만이 차오르고 있는 중에 고부 군수 조병갑이 수세미(水稅米) 7백석을 농민들로부터 가혹하게 징수하여 착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농민들은 전주감영에 탄원을 하였으나 전라감사는 오히려 탄원을 하러 간 농민 대표를 투옥해 버렸다. 고종 31년인 1894년 2월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침내 동학 접주(接主) 전봉준(全琫準)이 1천여 명의 농민들과 함께 읍내의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조병갑이 전횡하여 보관하던 세곡 창고를 털어 농민들에게 분배하였다. 정부는 장흥부사 이용태(李容泰)를 안무사(安撫使)로 파견하였는데, 그는 오히려 동학교도의 책임을 물어 교도들을 체포 처형했다. 전봉준과 농민군은 드디어 본격적으로 봉기하여 백산에 집결하였으며 전국에 창의문을 보내어 민중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진무사 이용태가 고부군수 조병갑의 죄를 묻기는커녕 동학교도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므로 이에 분노한 동학교도들이 백산에 집결하여 궐기하였다.


↑전봉준(全琫準, 18541895) :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 이름은 명숙(明叔)이었으며 동학 봉기 후 녹두장군(綠豆將軍)이란 별명을 얻었다.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어 30여 세에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접주(古阜接主)가 되었다.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의 폭정과 불법적인 징세 착복에 항거하여 1894년 1월 동학교도가 주축이 된 1,000여 명의 농민을 이끌고 관아(官衙)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강탈당했던 세곡(稅穀)을 농민에게 배분하여 동학 농민 항쟁의 불을 당겼다. 고부에 인접한 태인(泰仁), 무장(茂長), 금구(金溝), 정읍(井邑), 부안(扶安) 등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봉기, 8,000여 명이 고부 백산(白山)에 모여 제폭구민(除暴救民)·진멸권귀(盡滅權貴)·축멸왜이(逐滅倭夷)의 기치를 내걸고 본격적으로 창의하여 황토현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함락하여 삼남 일대를 휩쓸었다. 정부의 순무에 응하여 1차 화의를 하고 해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학난을 빌미로 청군과 일본군이 국내에 진주하여 왕실을 겁박하고 전횡을 일삼는 것을 보고 남도 접주로서 다시 궐기하여 남도의 12만 병력과 북도 접주 손병희 휘하의 10만이 연합하여 교주 최시형의 지휘 아래 구국 항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근대식 무기로 무장하고 신식 훈련을 받은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여 공주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10월의 금구 싸움을 끝으로 세력을 모두 잃고 말았다. 순창(淳昌)으로 피신하여 동지인 손화중(孫化仲), 김덕명(金德明), 최경선(崔慶善) 등과 후사를 도모하던 중에 관군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에 1895년 3월에 사형 당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체포당시의 그는 다리를 상하여 걸을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이 감영의 군대를 지휘하여 토벌에 나섰으나 평소에 훈련이라고는 받지 못한 관군은 황토현 싸움에서 크게 지고 만다. 전봉준의 농민군은 내친 김에 전주성으로 쳐들어가게 되었다. 정부는 홍계훈(洪啓薰)을 초토사(招討使)로 삼아 대병력을 주어 진압에 나서게 했지만 전봉준의 농민군은 교묘한 후퇴전술로 관군을 괴롭히다가 5월 24일, 장성에서 마침내 관군을 깨뜨렸다. 패퇴한 관군이 버리고 간 전주성은 6월 1일 동학군에게 무혈로 접수되었다. 그때까지 방관하던 충청, 경상 양도의 동학교도들도 전봉준이 전주성에 입성하는 것을 보고 뒤늦게 궐기하여 합세하였고 3남이 동학교도의 수중에 떨어졌다. 다급해진 정부는 서울에 있던 청국의 대표 원세개에게 청군의 파견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동학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진무사와 관군병사의 모습. 당시 조선에 와 있던 프랑스 특파원이 그린 그림이다.

  조선 정부의 원병 지원 요청을 접수한 원세개는 일본의 반응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1885년 4월 18일, 청국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체결된 '청일천진조약(淸日天津條約)'에 의해서 청이 조선에 출병하면 일본도 자동으로 출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텐진 조약은 갑신정변을 일으킨 조선의 개화파가 원세개의 청국군에 의해 진압되어 일본의 공사관이 불타고 다께조에 일본 공사와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들이 일본으로 피신한 후에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위하여 청일 사이에 천진에서 열렸던 회담에서 조인된 것이다. 그 내용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청국은 조선주둔군을 철수하고 일본은 주조선공사관 호위병을 철수한다. 조인일로부터 4개월 이내에 전원을 철수한다.
  ② 양국은 조선국왕에게 병사를 교련하여 스스로 치안을 담당하도록 권고한다. 또한 조선국왕으로 하여금 다른 외국의 무관 1명 또는 수명을 고용하여 교련을 위임하도록 하고, 이후 청일 양국은 교관을 파견하여 조선에서 교련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③ 만일 장래 조선에 변란 또는 중대사건이 발생하여 청일 양국 또는 一國이 파병을 필요로 할 때에는 반드시 문서로 사전통지하고, 사건이 평정되면 즉시 철수한다.

  조약의 ③항에 의해서 청국은 출병 사실을 일본에 통고하여야 했고, 일본은 이에 의해서 역시 출병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조선주재 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는 동학난 발발 이후에 조선 정부가 이 난을 자체적으로 진압할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었고, 청국에 대한 원병 요청은 기정사실로서 예측하고 있었다. 스기무라 대리공사의 보고를 받은 일본 정부는 조선 정부가 실제로 총국에 원병을 요청하기 이틀 전인 6월 2일에 각의를 열어 청국의 파병을 기정사실로 단정하고서의 일본군의 파병을 이미 의결해 놓고 있었다. 내각이 파병을 심의하여 의결하기도 전에 그것보다 하루 먼저 일본 육군은 벌써 군대 수송을 위한 선박의 수배에 들어가 있었다.


↑무쓰 무네미츠(陸奧宗光, 18441897). 메이지 시대의 정치인이며 외교관으로 청일전쟁 당시에 외무대신을 지냈으며, 시모노세끼조약 때 전권을 행사했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운동이 일어난 1894년(고종 31)부터 청일강화조약을 비준하기까지의 외교 문제를 일본 중심으로 논한 <건건록(蹇蹇錄)>이란 책을 저술했다. 1896년에 (고종 33)에 일본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에서 간행된 이 책은 전편 21장으로 동학농민 혁명운동 때 일본의 조선 파병과 청일전쟁, 그 사이 유럽과 미국과의 교섭, 조선 내정 개혁의 문제 등을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근대 극동외교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런 군부의 움직임은 수상인 이토 히로부미나 육군상인 오야마 이와오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었다. 내각에서는 외상인 무쓰 무네미쓰, 육군에서는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가 앞서 나갔다. 1887년 1월부터 1년 반에 걸쳐서 독일에서 근무하면서 독일의 참모조직과 전술사상 및 군의 운영법을 배우고 돌아온 일본 육군의 준재였고, 당시의 군의 실세였다. 가와카미는 독일식 선제공격주의자였고, 러시아와의 일전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의 완공을 서두르고 있었고, 그 목적은 바로 만주와 조선이었다. 가와카미는 청국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싸우면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속에는 매시간 동쪽을 향해 뻗어오는 시베리아 철도가 늘 맴돌고 있었다. "그 철도가 완성되는 날..." 하고 가와카미는 입술을 깨물곤 했다. "만주와 조선은 러시아의 것이 된다." 이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만주와 조선이 러시아의 것이 되는 날, 일본의 존립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따라 나왔다. 극동 전체가 러시아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때문에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기 전에 일본은 러시아와의 일전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문제는 조선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조선이 러시아에 속하는 것은 막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을 일본의 영향 아래 두어야 했다. 그 점에서 외상 무쓰와 참모차장 가와카미는 의기투합했다. 두 사람의 눈에 조선의 동학난은 절호의 기회인 것으로 보였다. 문제는 수상인 이토 히로부미와 육군대신 오야마였다. 일본의 최고지도자들의 성향은 온건했고 호전적이지 않았다. 어떻게 이 두 사람을 설득하여 조선에 파병하느냐가 관건이었다. 내각에서 파병 결의만 얻어내면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의 사진. 왼쪽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 찍은 젊은 시절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일가족 전체의 사진이다. 첫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토 히로부미다. 이토 히로부미의 본명은 �스케(俊輔)이며 조슈(長州)의 농가에서 태어나 어려서 하급무사인 이토가에 양자로 들어가서 성장했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존왕양이운동(尊王攘夷運動)을 하다가 1863년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함께 영국에서 유학하였다. 귀국하여 막부(幕府) 타도운동을 했고, 메이지정부가 들어서자 정계에 입문, 1881년 정변으로 오쿠마 시게노부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메이지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고, 제국헌법을 제정하였으며, 1885년 내각제를 창설하고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었고, 1888년 귀족원 의장을 지냈다. 1890년에 양원제(兩院制) 의회를 확립시켰다. 1905년 러·일 전쟁 후 한국정부와 고종을 위협, 을사조약을 성립시켰고 초대 한국통감(韓國統監)으로서 합방의 기초 공작을 수행했다. 1908년 추밀원의장이 되어 만주시찰과 러·일협상 체결 교섭을 위한 여행 도중 하얼빈역(哈爾賓驛)에 내리다가 안중근(安重根)의 저격을 받아 죽었다.

  훗날 태평양전쟁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가게 되는 헌법상의 함정이 이때부터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본의 제국헌법은 군의 통수권을 내각에 두지 않았다. 즉 일본군의 최고통수권자는 천황이며. 군대의 지휘와 작전에 대한 최고 통수권은 천황에게 있었다. 즉 내각의 수상은 군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파병이나, 개전, 선전포고 등의 의결은 내각이 하게 되어 있었지만 일단 파병이나 개전이 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 군의 작전은 내각의 통제와 관할권을 벗어나 버렸다. 그렇다 해서 천황이 군의 작전에 대해 일일이 회의를 주재하고 간섭을 하는 것도 아니어서 일단 개전만 되고 나면 전쟁의 수행은 참모총장의 주관 하에 진행되었다. 일본 군부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어도 안에서 붙잡아 줄 세력이 없었다. 청일전쟁을 효시로 만주사변, 중일전쟁, 훗날의 미일개전에 이르기까지 이런 헌법의 맹점을 이용한 군부의 확전 책동은 일본을 늘 위태롭게 만들었다. 그 최초의 선례를 참모차장 가와카미가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훗날 태평양전쟁의 패전이라는 참극을 부르게 된다.
  가와카미가 판단할 때, 조선에서 청군을 제압하려면 최소한 7천에서 8천명의 병력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토 수상이 그 정도의 대병력 파병을 승낙해 줄 리가 만무했다. 무쓰와 가와카미는 이토와 오야마를 속이기로 결정했다. 조선에 파병하는 병력을 명수가 아니라 부대 단위로 보고를 했다. 즉 '1개 여단의 병력만 보낸다'는 것이었다. 일본군 1개 여단의 병력은 2,000명이었다. 그러나 전시에는 필요에 따라 1개 여단 병력이 7천명도 되고, 8천명도 될 수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1개 여단 파병안'에 싸인을 하면서 가능한 한 조선에서 청군과 충돌하는 일이 없도록 당부했다.
  일본의 참모본부가 조선 파견 여단의 여단장과 작전 참모로 인선하여 결재를 올린 것은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소장과 후쿠시마 야스마사 중령, 그리고 우에하라 유사쿠 소령이었다. 하나같이 전의에 불타는 호전적인 인물들이었다. 참모본부의 의도가 염려스러워진 육군 대신 오야마는 이들에게 청국군과 전투 행위를 벌이지 않도록 엄중하게 당부했다. 그러나 참모차장 가와카미는 출발 전에 이들을 불러 오야마와는 전혀 반대되는 지시를 은밀하게 내렸다. 육군대신은 내각의 일원으로 수상에게 종속된 관료이고, 장교단은 참모본부 소속으로 바로 천황에게 직속되어 있었다. 현지로 부임하는 지휘관들이 누구의 지시를 따르겠는 지는 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외상인 무쓰가 청국과의 전쟁을 도발하려고 했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당시의 이토 내각은 야당과 국민 여론의 비판적 분위기에서 정권의 유지가 한계상황에 다다르고 있어서 뭔가 극적인 타개책이 필요했다. 무쓰는 국내의 불만을 잠재우고 반대파들을 누르기 위해서는 전쟁의 승리보다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청군은 만만한 상대였고, 조선은 알맞은 무대였다.
  임오군란 이후 대청전쟁을 가정한 군비증강을 위한 증세(增稅)는 국민들의 고통을 야기시켜, 국회의 총선거는 항상 야당의 우세를 가져왔고, 군비의 축소 요구가 강하게 나오고 있었다. 야당은 대청 강경 여론에 맞추어서 외교적으로는 강경노선을 주장하다가도, 실제로 강경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증세(增稅)에는 강력히 반대하는 이중적인 자세를 보여 이토 정권을 괴롭혔던 것이다. 사실 이토 정권은 사회, 경제적 혼란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대청 전쟁 준비에 전력을 기울여 온 것이 사실이었다. 1890년, 92년의 대연습, 93년의 출사준비품(出師準備品) 취급 위원회의 설립, 전시대본영조례(戰時大本營條例)의 제정 등이 그런 노력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점증하는 일본 국내의 사회불안은 1894년 5월 31일에 중의원에 '내각탄핵상주안'이 상정되어 그것이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이즈음 내각의 붕괴와 사퇴는 거의 피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구름~~

 

■청일 양국의 조선 출병-1
  일본은 청국이 출병에 대한 통고를 해오기도 전인 6월 5일에 이미 3백 명의 해병과 1개 대대의 선발대를 태운 수송선을 조선으로 향발시켰다. 청국이 조선 출병을 결심한 것은 6월 4일이었고, 청국군의 선발대 8백 명이 천진항을 출발한 것이 6월 6일이었으며, 출병 통보가 일본 측에 정식으로 접수된 것은 6월 7일이었다. 청국의 출병통보가 일본에 도착하고 있을 때는 이미 청일 양군의 선발대는 바다 위에 있었다.
  6월 6일 천진을 출발한 청의 선발대 2,100명이 아산만에 도착한 것은 6월 8일이었고, 6월 5일 시모노세키를 출항한 일본의 수송선이 인천에 도착한 것은 하루 뒤인 6월 9일이었다. 그러나 양군의 움직임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일본의 육전대와 선발 대대가 인천항에 하선할 때 그 속에는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신임 조선 공사가 있었다. 청일 전쟁을 기어코 발발하도록 획책할 책임을 띠고 무쓰 외상이 선발하여 보낸 자였다. 오오토리 신임 공사가 무쓰로부터 하명 받은 책무는 한 가지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청국과의 전쟁을 유도할 것', 즉 오오토리는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 조선 땅에 발을 디딘 인물이었다.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18321911) : 메이지유신 전, 도꾸가와 막부의 마지막 대신 중 한사람이었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했던 근왕파의 근거지인 사쓰마와 조슈번에 대항하여 도꾸가와 막부의 근거지인 관동일대를 전전하다가 마지막에는 하코다테의 고료카쿠에 웅거하며 싸운 인물이다. 친막부파 인물 중에 유신 정부에서 활약한 드문 케이스 중의 하나이다. 그의 이력이 말해 주듯이 별로 지혜롭지 못하면서도 고집이 세고 만용이 있었으며, 뻔뻔스럽게 뻗대는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조선 공사로 부임해서 기어코 전쟁에 불을 지를 인물로서는 가장 적합했기 때문에 조선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발발하여 일본군을 파병하게 되었을 때 외상인 무쓰가 조선 공사로 임명하여 보내게 된다. 조선 공사로 부임한 오오토리는 노인정 회담을 통해 청과 조선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 뻔한 조선의 내정개혁을 요구하여 청일전쟁의 빌미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청일 양군이 인천과 아산만에 도착하고 있을 무렵에 초여름비가 구질구질하게 내리고 있었다. 청군은 비 때문에 전원을 한꺼번에 하선시키지 않고 조금씩 나누어서 아산으로 내려 보내는 바람에 모두 양륙하는데 나흘이 걸렸다. 그러나 오오토리는 도착 당일 전원 하선시킨 후 휴식도 없이 빗길을 뚫고 서울로 강행군하였다.
  한편, 청국에 지원군을 요청한 조선 정부는 당시 조선에서 유일한 정예부대였던 강화수병(江華守兵)과 평양의 감영군을 급파하여 장성에서 동학 농민군에게 패배하고 전주를 내어준 초토사 홍계훈을 응원하게 하고, 엄세영(嚴世永)을 3남초무사(三南招撫使)로 임명하여 내려 보냈다. 병력이 증강된 관군은 힘을 얻어 전주성을 포위하였고, 3남초무사 엄세영은 호유문을 발표하여 부정부패관리의 숙청과 채권의 포기, 횡포한 토호의 엄벌 등을 약속하며 농민군을 달래었다. 이때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의 지도부를 설득한 가장 커다란 명분은 '동학란이 계속되면 청국과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게 되고 그렇게 되면 조선 땅이 청일간의 전쟁터가 되고 만다'는 정부 측의 논리였다. 외국 군대를 불러들일 수는 없다는 점에는 더 이상 버틸 명분이 없었던 동학은 마침내 6월 11일, 폐정(弊政) 12개조를 초무사에게 보내고 전주성을 관군에게 명도하고 철수하였다. 이것이 전주화약(全州和約)이었다. 전주에서 철수한 농민군의 대부분은 해산하여 귀가하였고, 전봉준은 수백 명의 교도들과 함께 순창과 남원 일대에서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동학난은 일단 외연으로는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오오토리가 비를 억수같이 맞아가며 병사들에게 우중 행군을 강요하여 인천항 도착 다음날인 6월 10일에 기어코 서울에 입성한 이유는, 그 길로 바로 동학난 진압 의뢰를 조선 정부로부터 받아서 동학을 진압한다는 대의명분 하에 조선에 장기주둔을 꾀할 속셈이었다. 그러나 한성 입성 다음날 날아온 소식은 '전주 화약'으로 동학 농민군은 자진 해산하였고 동학난은 해결되었다는 것이었다.
  조선 외상 최병준은 오오토리 공사에게 민란이 평정되었음을 알리고, 일본군의 무단 입경에 항의하였다. 각국의 외교단 역시 오오토리에게 일본의 성급한 출병을 항의해 왔다. 오오토리는 서울의 상황을 검토하여 본국에 "경성은 평온하고, 민란의 상황은 변화 없음." 하고 전보를 쳤으며 전보의 말미에 잔여 여단 병력의 추가 파병은 보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동학란의 조기 수습은 무쓰와 가와카미를 비롯한 일본 내의 강경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오오토리는 청국의 대표인 원세개와 공동 철병을 위한 교섭에 착수했다. 그러나 무쓰로부터 날아온 회답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오오시마 여단의 나머지 병력에 대한 상륙을 중지할 수 없다"는 답신이었다. 조선 국내의 사정 변화에 관계없이 일본의 파병은 원래대로 추진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정부와 각국 외교단의 철병 요구에는 반대할 명분이 없는 것이어서, 원세개와 오오토리 사이의 철병 교섭은 계속 진행되었고, 6월 15일에 일본은 조선 주재 병력의 3/4를 철병하여 250명만 남기고, 청군은 4/5를 철병하여, 400명만 남기며, 민란이 완전히 종식되면 전원 철병한다는 내용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일본에는 이러한 철병에 승복하지 않고, 기회를 이용하여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청나라와 전쟁으로 승부를 가려야한다는 주전파들이 많았다. 국민적인 여론도 대청전쟁에 불사가 우세하였다. 일본의 여러 신문들은 일제히 조선 파병이 이대로 끝나는 일어서는 안 된다고 떠들어댔다. 15일에 자유신문(自由新聞)은 사설에서 "일본은 이미 칼을 뺐다"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일본의 국민 감정과 여론이 대청개전(對淸開戰)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신 이후에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진행시켜 오면서 축적된 일본의 힘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일본인들은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힘을 남을 향해 한번 써 먹어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그 첫 번째 타겟이 청나라였다. 그리고 청국을 상대한 일전에서 일본인들은 추상적이고 긴가민가했던 스스로의 힘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일본인들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고, 파멸로 이끄는 악마의 유혹이었다. 설사 일본 정부의 수반인 이토와 대부분의 각료들이 이성적이고 온건한 합리주의자들이었다 해도 이러한 시대적인 대세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의 지지를 존립의 기반으로 삼는 정치인인 이상 국민의 열화 같은 여론을 거스르는 정책을 공공연히 표방하기는 어려웠다. 무쓰나 가와카미가 월권하여 전횡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나라 전체의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개전의 실마리를 찾아야 했던 무쓰는 6월 16일에 주일 청국 공사 왕봉조(王鳳藻)에게 청일 양국이 공동으로 협력하여 농민 반란을 진압하고 조선의 내정도 함께 개혁하자는 뜬금없는 공문을 보내었다. 일본의 제의는 당연히 거부될 것이 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고집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조선의 내정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일본과 협력한다는 것은 종주권의 양보 내지는 축소를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청국의 전권대신(全權大臣) 이홍장은 왕봉조의 보고를 받은 후, 일본의 제의를 거부하도록 지령을 보냈다. 청국의 답신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조선의 변란이 이미 진압된 이상, 청일 양국이 공동 진압하자는 건의는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다.
  둘째, 조선의 선후(善後) 문제는 조선 정부 자체로 처리해야 할 것으로 청국 정부에서도 간섭을 하지 않는 이상 일찍 조선의 자주를 인정해 준 일본 정부는 더욱 간섭할 권한이 없는 것이다.
  셋째, 천진조약에서 이미 변란이 진압되면 즉시 철병해야 한다고 규정한 이상 철병 문제를 더 논의할 필요도 없다.

  당연히 예상했던 대로의 거부 회신이 접수되자 일본은 6월 21일 어전회의를 열고 대청 개전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홍장(李鴻章, 18231901) : 자는 소전(少鵡)이고 호는 의수(儀戒)이다. 안휘성(安徽省)의 합비(合肥)에서 출생하였다. 24세가 되던 해인 1847년에 진사가 되었고,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1853년, 고향에서 단련(團練)을 조직하여 태평군(太平軍)과 싸웠다. 증국번(曾國藩)에게 막료로 발탁되어 상군(湘軍)에서 활동하여 그의 신임을 받았다. 1861년, 증국번의 명령으로 안휘에서 상군과 같은 성격의 의용군인 회군(淮軍) 약 6,000명을 조직하였고, 62년 4월에 회군을 거느리고 영국 선박을 이용하여 안경(安慶)에서 상해(上海)로 들어갔다. 곧 강소순무(江蘇巡撫)가 되어 태평천국군으로부터 상해를 방어하였다. 후에 영국군·프랑스군과 상승군(常勝軍), 그리고 청나라 정규군과 공동으로 강소지역(江蘇地域)의 태평군 진압에 큰 활약을 보였다.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이 평정된 후에 대리양강총독(代理兩江總督)이 되었고, 이어서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6만의 회군을 이끌고 염군(捻軍)을 진압했으며, 그 공으로 67년 후광총독(湖廣總督), 70년 직례총독겸 북양통상사무대신(直隸總督兼北洋通商事務大臣)에 취임했다. 이때부터 25년간 그 자리를 지키면서 외교·군사·경제를 담당했다. 자신이 창설한 회군이라는 무력을 업고 노련한 외교 수완으로 영국과 러시아 등의 지지를 받으면서 군사공업을 비롯한 각종 근대공업의 건설을 추진하고, 정부를 자파(自派)관료, 즉 양무파(洋務派)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가 관여하여 설립된 것으로는 강남제조총국(江南製造總局), 금릉기기국(金陵機器局) 등 무기 제조공장과 수선초상국(輸船招商局 ; 기선회사), 카이핑탄광(開平炭鑛), 모허금광(漠河金鑛), 톈진전보국(天津電報局), 진유철도(津楡鐵道), 상하이기기직포국(上海機器織布局) 등이 있다. 이 기관들은 관영, 또는 민간자본을 모집하여 관에서 감독하고 민간기업가가 경영하는 경영방식을 채택했다. 그는 외국기업에서 이윤을 빼앗고, 또 외국기업을 발판으로 하여 민간기업을 육성하려고 꾀하였지만 내외적으로 조건에 제약을 받아 충분히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또 관세 수입으로 무기와 군함을 구입하고 북양수사학당(北洋水師學堂, 해군사관학교)을 설립하여 회군을 강화하면서 북양해군(北洋海軍)을 창설했다. 1882년 조선에 원세개(袁世凱)를 파견하여 일본의 진출을 견제하게 하고, 묄렌도르프, 데니 등 외국인 고문을 보내는 등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이 관여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 때에 자신의 정치적 자산이던 회군과 북양함대가 소멸된 후 시모노세키조약(馬關條約) 조인 후에는 정계에서 한때 실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외교적 능력을 인정받아 1896년 러시아에 파견되어 러시아·청나라 비밀조약을 맺었으며,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 의화단사건 후 각 열강과 맺은 조약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저서에 《이문충공전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

 

 

■청일 양국의 조선 출병-2
  일본은 7월 3일, 청국이 조선의 내정 개혁에 협력하지 않으면 일본이 단독으로 이에 착수할 것이라고 조선에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그 회답 기일을 7월 8일 정오까지라고 못 박았다. 어쨌건 일본의 군대가 조선의 서울을 점령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직까지는 세계열강에 비해 위치가 턱없이 낮았던 일본이었으니만큼 조선의 수도에서 함부로 무력을 사용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러나 조선 정부의 눈앞에 디밀어진 총칼의 주인은 일본이었다. 조선에 상륙한 청국 군대는 100킬로미터나 남쪽에 있는 성환에 주둔한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똑같은 시기에 조선에 군대를 상륙시켰으면서도 청국의 대표인 원세개는 기세등등한 일본 공사 오오토리에 비하면 끈 떨어진 갓이요, 낙동강 오리알 같은 신세였다. 그의 관저 창밖으로 매일 같이 일본군 대열이 발맞추어 지나가곤 했다. 일본군이 행군하는 군화소리가 울려오면 원세개는 한숨을 지었다. "성환에 있는 청군을 불러올리면..." 하고 생각해 보지만 그건 전쟁을 각오하지 않고는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리고 원세개는 자신이 없었다. 서울에 진주한 일본군은 장비와 훈련, 그리고 사기면에서 확실히 청군보다 우월하였다. 매일같이 날아오는 원세개의 전보를 받고 이홍장도 수심에 잠겨 있었다. 전보에서 원세개는 "내정(內政)은 본래 조선에서는 자주였으므로 그 개혁에 대해서 조선이 일본과 의논하는 것에 대하여 청국이 강력하게 간섭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제 조선에서의 청국의 종주권 행사는 끝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건의였다. 그러나 이홍장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적들의 비판과 공격에 늘 시달리고 있는 상태였다. 조선마저 손을 써보지도 않고 잃게 된다면 청국에서의 이홍장의 위신은 땅에 떨어질 것이고, 정적들은 보란 듯이 떠들어댈 것이었다. 이홍장은 러시아가 개입해 줄 것을 기대하고 이면에서 협의를 해 왔으나 러시아는 결국 불개입 쪽으로 결정을 내는 듯하였다. 이홍장은 원세계의 전보를 읽다가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원세개(袁世凱, 18591916) : 자는 위정(慰庭)이고 호는 용암(容庵)이며, 하남성(河南省)의 항성(項城)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 두 번이나 향시(鄕試)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이홍장(李鴻章)의 막료인 오장경(吳長慶)의 휘하로 들어가 무인의 길을 걷게 된다. 1882년 8월,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국은 조선 황후의 구원 요청에 응하여 오장경을 조선으로 파견하였는데, 이때 원세개는 오장경의 막료로 조선에 건너가 한성(漢城)에 주둔하면서 조선 방어임무를 맡았다. 1894년 7월, 청일전쟁이 나기 전날 밤에 원세개는 변장을 하고 한성을 탈출하여 천진(天津)으로 돌아갔다. 1895년 12월, 원세개는 영록(榮祿), 이홍조(李鴻藻) 등의 추천으로 천진소참(天津小站)에 주둔하고 있던 정무군(定武軍)의 지휘관에 임명되었는데, 그는 부임하자 정무군의 이름을 「신건육군(新建陸軍)」으로 바꾸고 많은 심복들을 끌어들이거나 양성하여 전군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서세창(徐世昌), 단기서(段祺瑞), 풍국장(馮國章), 왕사진(王士珍), 조곤(曹?), 장훈(張勛) 등 천진소참에서 원세개 부하들이었던 이들이 대부분 청말 민국초의 군내 실력자들이 되었으므로 원세개는 자연스럽게 중국 군대의 대부가 되었다. 원세개가 천진소참에서 행한 훈련은 청말 신식군대 발전의 전환점이었고 동시에 원세개의 정치적 토대가 되었다. 1899년 6월, 공부우시랑(工部右侍郞), 산동순무(山東巡撫) 서리가 되었을 때 의화단의 봉기가 일어나자 신군(新軍)을 지휘하여 의화단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이 일로써 그는 단번에 국내외의 주목을 받는 실력자로 부상하여 1901년에, 직례총독겸북양대신((直隷總督兼北洋大臣)에 임명되었다. 1902년 보정(保定)에서 북양상비군(약칭 북양군)을 편성하였고, 1905년에 그것을 북양육진(北洋六鎭)으로 재편하였다. 육진의 주요 장성들은 거의 대부분 천진소참 시절의 심복들이었다. 이 북양군의 무력을 기반으로 하여 원세개는 청말 중국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하게 된다. 그래서 원세개를 북양군벌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는 경찰 제도의 도입, 발전소 건설과 철도 부설, 신식 학교의 설립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치적을 쌓기도 하였다. 그러나 만주족 황제의 측근들과 권력 투쟁이 격화되어 한때 실각하여 낙향하게 되었다. 1911년, 무창 봉기가 일어나자 청조의 소환에 의해 흠차대신으로 복직하여 호북 지역의 군권을 손에 넣은 후, 자기 부하들이 여전히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북양군을 다시 장악하고 북경으로 진군하여 내각을 조직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손문의 혁명세력과 타협하여 선통제(宣統帝) 부의(溥儀)를 퇴위시키고 손문이 세운 중화민국의 제2대 총통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취임 후부터 손문의 혁명 세력을 탄압하고 왕정복고를 꾀하여 1916년 1월 1일에 '중화제국 대황제(中華帝國大皇帝)'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는 각계각층의 비난과 성토 속에 황제 취임을 취소하였으나 모든 부하들과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한 끝에 화병을 얻어 고독하고 비통하게 생을 마쳤다.

  7월 10일, 조선 정부는 내무독판 신정희(申正熙), 협판 김가진(金嘉鎭), 조인승(曺寅承) 등을 대표로 하여 일본이 요구하는 회담에 응하게 했다. 군대로서 서울을 점거한 상태에서 강요하는 억지 회담이었다. 장소는 일본군이 병영을 세우고 주둔하고 있는 남산의 노인정이었다. 오오토리 공사와 조선 정부의 대표간에 이루어진 1차 노인정 회담에서 일본은 「내정개혁방안강목(內政改革方案綱目」이라는 5조 27개항으로 된 권고안을 제시하였다. 그 중에서 7개의 항목에 대해서는 3일 내에 의결하고 10일 내에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억지에 가까운 조건을 붙였다. 그 7개항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1. 조선은 정부를 의정부로 복구하고, 육조판서의 권한을 확립하며, 세도 집정의 폐를 바로 잡을 것.
  2. 궁중과 부중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 궁정이 정부를 간섭하는 일을 폐할 것.
  3. 외교의 책임을 명확히 하여 전임대신을 임명할 것.
  4.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5. 매관을 엄금할 것.
  6. 관리의 수뢰를 엄금할 것.
  7. 서울 및 중요 항구 사이에 철로를 건설하고, 전국 주요 도시에 전신을 가설할 것. 본 항은 10일 이내에 기공을 결의할 것.

  일본의 요구는 그 내용만으로 볼 때는 도저히 군대를 앞세운 외국의 공갈이 아니라 충신열사의 우국충정에서 우러나온 피눈물 나는 상소문에 가까운 것이었다. 세계 외교 역사상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요구한 내용 중에 이때의 노인정 회담보다 더 우정과 호외와 연민과 동정과 형제애에 가득 찬 권고는 달리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적어도 문맥상으로는 그러했다는 말이다. 21세기에 접어들어서 미국이 한국의 진보정권들에게 하고 있는 권유 정도가 아닌가 싶다.


↑조선에 상륙한 청국군의 행진을 조선인들이 구경하고 있는 그림이다. 청군은 군기가 해이하여 통과하는 곳마다 민폐가 심하였다.

  어느 한 항목도 버릴 것이 없고, 어느 한 가지 조항도 조선으로서는 급박한 개혁의 과제가 아닌 것이 없었고, 사실 노인정 회담에서 일본이 제시한 7개조항의 단호한 실행만이 조선이 살아나는 유일한 길이었다. 제갈공명이나 비스마르크가 당시에 조선의 정치를 맡았더라도 저 이상 다른 개혁안을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조선의 대표들도 일본이 제시하는 개혁의 내용과 방향에는 공감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에 대하여 성의를 보여주어야 했으므로 7월 13일에 의정부에 교정청(校正廳)을 두고 내정 개혁을 위한 인사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7월 16일에 일본에 공식적인 문서로서 화답하기를, "일본이 우선 그 군대를 철수하고 또 내정 개혁에 관한 기한부의 조회를 철회하면 조선 정부는 반드시 앞장서서 개혁의 실효를 올리고 일본 정부의 호의에 보답하겠노라"고 하였다. 죽, 일본의 내정 개혁안은 다 옳고 지당하나 남의 나라에 군대를 끌고 와서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니 일단 군대를 철수시키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오오토리는 「내정개혁방안강목(內政改革方案綱目」에 대한 조선 정부의 회답을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이미 이것을 조선 측에 제시한 노인정 회담 당일 오오토리는 조선 정부에 대한 무력 행동에 대한 방침을 요청하는 전문을 본국에 보내고 있었다. 오오토리는 그 전문에서 '갑안'과 '을안'이라는 두 가지 방책 중 한 가지를 결정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갑안'은 병력을 동원하여 왕궁을 점령하고 조선 왕실과 조정의 대신들을 겁박하여 단숨에 결판을 내겠다는 것이었다. '을안'은 청국의 종구권을 파기하고 청국과 동일한 권리 및 전신선 가설권을 요구하고 그것이 관철될 때까지 왕궁의 각문을 점령하여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양 안 모두가 군대로 조선 왕실을 협박하여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것에서는 차이가 없었으나 열강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일본으로서는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는 문제였다. 일본은 열강들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분주하고 기민하게 움직였다.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해 열강 중 어느 한 나라라도 제동을 걸고 나오면 일본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국제관계에서 일본의 위상은 초라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구름~~

 

■청일 양국의 조선 출병-3
  사실 일본과 청국 사이에 전운이 감돌자 열강들은 제각기 반응을 나타내었다.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의 외교사절들은 이구동성으로 청일 양군의 공동 철병을 요구하였다. 주일 러시아 공사 히트로보는 일본 외무성을 방문하여 "청군이 철수하면 일본군도 철수하겠는가?"고 물어왔다. 이어서 6월 30일에는 "청군과 동시에 철병하는 것을 고의로 방해한다면 일본은 중대한 책임을 질 것이다"하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러시아의 극동 전력이 아직 무력 개입을 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고 보고 7월 2일, 러시아의 권고를 거부하였다. 러시아는 일본의 회답에 만족한다며 슬그머니 물러서 버렸다. 러시아의 기어즈(Giers) 외상은 7월 9일, 자국의 주청 공사인 카시니(Cassini)에게 "일본의 철병을 강요하는 대신 청일 양국의 협의를 권고하라"고 훈령하는 한편, 12일에는 "러시아로서는 한국의 공동개혁안에 참여할 생각도 없다"고 통고하여 청일간의 전쟁에는 주의 깊은 국외중립(Guarded Neutrality)을 견지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만주를 탐내고 있던 러시아로서는 청일 전쟁은 오히려 러시아가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을 가능성이 컸다. 청국과 영국은 일본을 억제하는데 러시아를 이용하려 했으나 러시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러시아보다도 당시 일본이 더욱 신경을 쓰고 있던 상대는 영국이었다. 당시 일본은 개국시 영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는 것이 전국민적 염원이었다. 오랫동안 협의해 온 「영일통상항해조약」의 개정이 눈앞에 와 있었다. 만약에 영국이 전쟁을 반대하는데도 일본이 감행한다면 조약 개정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무쓰는 조선에서 무력 행동을 하기 전에 조약의 개정을 마쳐야만 했다. 마지막까지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하였던 모자와 사탕의 관세 문제에서 과감하게 양보를 하고 서둘러 7월 16일에「영일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해 버렸다. 바로 이 날이 내정개혁에 대한 조선 정부의 공식적인 회답이 온 날이었다.
  영국은 당시 청일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을 가진 나라였다. 극동에 배치된 영국의 함대는 이즈음에 2척의 최신 순양함, 즉 센츄리온(Centurion)호와 언다운티드(Undaunted)호를 이 지역으로 파견, 극동함대를 22척으로 강화하여 신흥 일본의 해군력 전부와 대등한 정도의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불란서와 동맹한 러시아의 남하를 극동에서 저지해 줄 동맹국이 필요했고 일본은 청국에 실망한 영국에게 새로운 파트너로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었다. 영국이 대러시아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과 동맹을 하게 될 경우를 예상하면 일본과 감정을 상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청일 전쟁으로 실질적으로 영국의 이익이 특별히 손상 받을만한 일도 없었다. 그리고 영국의 국내 여론도 해군력이 자국 무역 보호를 위한 엄격한 방어적 역할에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형성되어 있어 개입에 불리하였다. 그러나 청국은 일본보다 다섯 배 이상의 규모인 중요한 교역국이었다. 특히 상해는 영국의 이권이 밀집된 지역이었다. 청일간의 전쟁이 이 지역에까지 마이너한 영향을 미칠 우려는 다분히 있었다. 그래서 영국은 러시아를 앞세워 일본에 엄포를 놓는 한편, 미국 등 열강들과 협력하여 공동으로 개입함으로서 청일 양군의 동시 철병을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영국 극동함대의 주력함 HMS 센츄리온(Centurion)

  그러나 일본은 러시아의 「불개입 의사」를 확인하여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있었고, 미국에 대해서도 개입하지 않는다는 언질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미국을 앞세워 조정을 하려던 영국의 시도는 러시아를 배제하는 것이어서 미국이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일본과 무력 분쟁의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조선에서의 이익이 없었다. 조선 정부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자, 6월 1일 주한 미국 공사 씨일(Sill)이 군함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6월 22일 주미 조선 공사 이승수(李承壽)의 개입 요청에 대해 군함 볼티모어(Baltimore)호를 파한한 것이 전부였다. 7월 7일 미국의 국무장관 그레샴은 주미 일본 공사에게 "어떤 경우에도 거중조정(居中調停) 이외의 다른 방법을 통해서는 사태해결에 개입할 의사가 없다"고 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의 무력 개입은 없다'는 것을 확신케 해 주었다. 이로서 영일 조약의 개정과 함께 청일 개전에 대한 외교적 장애물은 모두 제거된 셈이었다. 일본은 주변 열강들의 의중과 청일전쟁에 대한 각국의 이해관계를 면밀하게 검토한 후 어느 나라도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조선 내정의 공동 개혁 제의에 대한 청국의 거부를 이유로 일본이 북경 주재 공사인 고무라(小村)를 시켜 2차 절교서를 청국 측에 전달한 것은 7월 14일의 일이었다. 일본의 절교서를 받은 청국의 조야는 분노로 들끓었지만 이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은 이홍장 한사람뿐이었다. 북경의 총리아문은 천진에 있던 이홍장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이홍장은 대일전을 피할 수 없다고 전제하고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한 방책을 북경에 보고했다. 이홍장의 대일전 구상은 북양군과 동북군 산하의 1만2천 병력을 평양으로 집결하고, 아산에 있는 청군 2천명도 평양에서 합류하게 하여 일본군과 결전한다는 것이었다. 장소가 평양이라면 청군에게는 병참선이 가까운 이점이 있었고, 일본군의 보급로는 상당히 길어지는 지점이었다.


↑청일간의 전쟁이 임박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술렁거리는 남대문 앞의 외국인 거리.

  개전 준비에 본격적으로 착수함과 동시에 청국은 마지막으로 7월 19일에 영국에게 중재를 부탁했다. 북경의 영국 공사관의 전보를 받은 동경 주재 영국 대리 공사 랄프 피제트는 바로 일본 외무성을 방문하여 무쓰 외상에게 청국은 아직도 담판을 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전하고 양국간의 대화를 주선했다. 그러나 일본은 더 이상 청국과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재에 나선 영국의 체면이라는 것이 있었으므로 무쓰는 청국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해서 자연히 영국의 중재가 수포로 돌아가도록 모양을 갖추기로 했다. 그리고 회답에 단 5일간의 말미를 주기로 했다. 조선에 대해서 7월 22일, 청국에 대해서는 7월 24일까지를 회답 기한으로 못 박은 일본의 조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서울 부산간의 군용 전선(電線) 가설권을 일본정부에 위임할 것.
  2. 조선은 앞서 체결한 제물포 조약에 따라 일본 군대를 위한 병영을 건설할 것.
  3. 아산에 있는 청국군은 정당한 명분 없이 파견된 것이므로 즉시 철퇴할 것.
  4. 청조수륙무역장정(淸朝水陸貿易章程) 등 조선의 독립에 저촉되는 청과 조선간의 모든 조약을 폐기할 것.

  중재에 나선 영국의 체면을 살려준다는 뜻으로 일본이 내민 위의 조건들은 사실상 청국과 조선에 대한 최후통첩이었다. 이 조건이 제시되던 19일 밤에 원세개는 부하였던 당소의를 후임으로 조선에 남겨두고, 자신은 지팡이를 집고 허리가 굽은 노인으로 변장하여 한성을 탈출하였다. "자신(원세개)은 한성에서 일본군에게 한 달 동안이나 포위되어 있는 상태이며, 중국인을 원수처럼 보는 극심한 증오 속에 2,3명의 사용인에 의지하여 어떻게든 일을 해왔지만 지금은 그들마저도 모두 도망가고 아무도 없다..."라고 시작되는 애절한 편지를 받은 이홍장이 그날 중으로 귀국하라는 전보를 보내온 것이었다. 원세개는 인천으로 가서 청국 군함 평원호(平遠號)를 타고 천진으로 돌아갔다.


↑원세개가 타고 조선을 탈출한 청국 군함 평원(平遠)호가 인천항에 닻을 내리고 있는 모습이다.

  22일에 피제트는 다시 일본 외무성을 방문하여 영국 외무장관의 전문을 무쓰에게 건넸다. 일본이 조선과 청국에 제시한 조건들이 무리하고 억지에 가까운 것임을 지적하고 만약 일본이 개전을 하면 그 결과에 대해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져야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무쓰는 내심 뜨끔하였으나 이제 와서 영국이 실력행사를 할 가능성은 없다고 보고 묵살하였다.
  오오토리 공사는 다음날인 23일 새벽에 일본군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에워싸고 왕궁을 경비하던 조선군을 무장해제 시켰다. 7월 10일에 이미 본국에 지침을 요청했던 2개안 중에서 '을안'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궁중으로 난입한 오오토리와 일본군은 고종과 황후를 연금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친일 내각을 조직했다. 1차 김홍집 내각이었다. 오시마 여단장은 이때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 조선군을 무장 해제하면서 얻은 전리품이 포 20문, 소총 3,000정과 잡무기 다수라고 보고하였다. 영국은 무쓰의 예상대로 일본의 무력 도발에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았고, 다만 상해 지역의 영국 이익을 침해하지 않겠다는 일본 정부의 보증만을 요청해 왔다. 당연히 일본은 상해에는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였다.
  일본의 총칼 아래서 탄생한 김홍집 내각은 일본의 요구대로 7월 25일, 중국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단절하고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선포하였다. 동시에 조선은 지금까지 중국과 맺었던 모든 조약의 폐기를 선언하고 일본에 대하여 조선에서 청군을 축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제 일본은 조선 정부의 요청에 의하여 조선에 들어와 있는 청군을 공격한다는 명분을 갖게 된 것이었다. 이때 조선국왕이 일본에 건넸다는 공문은 조선의 문서철에는 남아있지 않다. 대원군은 민씨일파에 대한 복수심으로 일본군에 옹위되어 궁궐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일본의 꼭두각시가 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입궐 다음날인 24일에 고종으로부터 전권을 위임한다는 칙서를 받자마자 신속하게 해치운 일은 민씨 일족에 대한 숙청이었다. 민영준(閔泳駿), 민형식(閔炯植), 민응식(閔應植), 민치헌(閔致憲) 등이 삭탈관직되어 멀리 유배되었고 민비파에 밉보여 억눌려 지냈던 개화파와 친일파들이 대거 등용되었고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 등에게도 귀국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을 넘겨주는 데는 그렇게 기민하지가 못했다. 일본은 조선 내에서의 군사행동과 청군에 대한 공격이 어디까지나 조선정부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는 명분이 필요했다. 다음으로는 현실적으로 절박한 군대의 보급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탄약을 제외한 군량과 여타의 보급품은 조선 내에서 조달할 생각이었고, 보급품을 수송할 별도의 병참대를 거느리고 있지 않았다. 군수품의 수송은 조선에서 징발한 우마와 조선인 노무자를 동원하여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지방관청과 수령들은 조정의 공문을 보여주지 않으면 협조를 해주지 않았다. 조선의 관리들은 의외로 깐깐하고 고집이 세었다. 겨우 조선국왕의 도장이 찍힌 요청공문을 손에 넣었다는 긴급전보가 동경에 도착한 것이 7월 28일이었다. 공문을 받았다는 7월 25일에 한성의 일본군은 벌써 남하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수송에 필요한 인마의 징발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에 골탕을 먹고 있었다. 출발명령에 부응할 수 없었던 일본군의 한 대대장이 자결하는 사태까지 빚어진 끝에 일본군은 겨우 끌어 모은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일본은 예의 국서를 조선에서 얻어내는 것을 기정사실로 간주하고 25일 이전부터 사실상 이미 남하를 시작하고 있었으며 사후에 공문을 받은 일본 측이 날짜를 조작했다는 것이 사학계의 정설이기도 하다. 아무튼 일본은 대원군으로부터 이 공문을 받아내는데 애를 태웠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25일을 행동개시일로 지침을 받은 일본 해군의 선발대가 항구를 떠난 것이 바로 23일이므로 한성의 육군도 경복궁을 점거하고 대원군을 입궐시킨 직후부터 남하준비를 서둘렀으리라고 짐작된다.


↑김홍집(金弘集, 18421896) : 조선말의 문신으로 개화당의 거두이다. 어릴 적 이름은 굉집(宏集)이었으며, 자는 경능(敬能), 호는 도원(道園)이었다. 1867년(고종 4년)에, 경과정시(慶科庭式)로 문과에 급제하여 흥양현감(興陽縣監)을 거쳐 1980년에 예조참의가 되었고, 이때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수신사로 외국의 물정을 보고 돌아온 그는 개화정책을 적극 추진하지만 유학자들의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으로 한때 실각하기도 했다. 82년(고종 19년)에 임오군란의 뒷처리와 같은 복잡한 국제 문제에 부딪힌 조정은 그를 다시 기용하여 미국과 영국, 그리고 독일 등과 수호조약을 체결하는 부사(副使)를 맡겼고, 제물포조약을 체결할 때는 부관(副官)이었다. 외교 수완을 인정받아 경기도관찰사로 승진되었다. 그 후 예조판서와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다가 갑신정변 후에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그 후 사임하여 한직에 머물러 있다가 1894년 청일전쟁의 발발로 탄생한 친일내각의 수반이 되어 갑오경장과 단벌령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이후 3차 김홍집 내각은 민심의 질시를 받았고,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운동과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러파(親露派) 내각이 들어서면서 수많은 친일파 정치인들이 죽임을 당할 때 자신도 광화문에서 친러파들의 손에 붙잡혀 피살당하였다. 훗날 순종 때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유고집으로《김총리유고(金總理遺稿)》가 있다. 시호는 충헌(忠獻).


 

■풍도(豊島)앞바다 해전
  일본군이 조선의 왕궁을 포위하고 국왕과 왕후를 겁박하던 날인 23일 오전 11시에 일본 해군의 선발대로서 요시노(吉野), 아키츠시마(秋津洲), 나니와(浪速)의 3척으로 이루어진 제1유격대가 사세보항을 나서서 군산으로 향했다.
  한편, 대일전 구상을 북경에 보고한 이홍장은 7월 16일 2,000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조선에 건너가 아산에 주둔하고 있던 제독(오늘날의 사단장에 해당) 엽지초(葉志超)에게 전문을 띄워 해로(海路)로 철수하여 평양에 있는 우군과 합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서울에 집결한 일본군은 8,000명이 넘는 병력이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각개격파 당할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엽지초는 해로철수를 거부하는 답신을 보내왔다. 이미 황해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이대로 성환에 주둔하여 부산과 경성 사이의 일본군 연락로를 차단하고 있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이야기였다. 현지 사령관의 의견은 무시할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불과 2,000명의 부대를 적지 한복판에 남겨 둔다는 것도 무책임한 일이었다. 이홍장은 아산에 증원군을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수송선은 영국의 이화양행(怡和洋行, 쟈딘 메디슨 상회)으로부터 빌린 애인호(愛仁號)와 비경호(飛鯨號)의 2척이었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예로부터 해상을 통한 보급과 수송이 승패의 관건이었다. 이점은 이홍장이나 이토나 분명하게 깨닫고 있는 사실이었다. 증원군 제1진 1천3백 명이 천진의 대고(大沽)항을 떠나던 7월 21일, 원세개를 실은 평원호가 천진항에 들어서고 있었다.
  일본 함대의 제1유격대가 황해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7월 24일 오전이었다. 요시노를 선두로 3척의 순양함이 일렬 종진을 지어 북상했다. 군산을 지나 아산만 입구에 이르자 작은 섬을 배경으로 하여 두 줄기 군함의 연기가 보였다. 섬은 아산만 입구의 풍도라는 작은 섬이었고, 두 척의 군함은 청국의 제원(濟遠)과 광을(廣乙)이었다. 바로 전날 아산에 증원군 1천3백 명을 양륙시킨 비경호와 애인호를 호위하기 위하여 파견된 군함이었다. 증원군은 무사히 상륙을 마쳤고, 2척의 군함은 아산만 입구를 초계하고 있던 중이었다.
  제원과 광을에서도 오후 5시 못 미쳐 일본의 순양함대를 보았다. 당시에 인천과 아산 주변에는 세계 각국의 군함들이 왕래하고 있었고, 일본과 청국의 군함들도 수시로 마주치고는 하였기 때문에 청국 군함은 별다른 경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청국과 일본은 전쟁 상태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제원과 광을의 함장들은 일본 함대와의 교전에 대한 지침을 하달 받지도 못하였다. 비경과 애인호의 호위 임무는 평화시에도 늘 해군에 부과되던 통상적인 임무 중 하나였다. 23일에 있었던 일본군의 조선 왕궁 점령 소식은 바다 위에 떠있는 2척의 군함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아산만의 통과를 거부하기라도 하듯이 버티고 선 청국의 군함들 때문인지 일본의 순양함 3척이 정지하고 닻을 내렸다. 일본의 군함들이 정지한 것은 그날 밤을 넘기기 위해서였다. 사세보를 출항할 때 그들은 25일을 기하여 청국 함대와 조우하면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아직은 24일이었으므로 그들은 조용히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려는 것이었다. 곧 여름 해가 졌고 어둠이 다섯 척의 군함을 검은 심연의 커튼으로 가려버렸다.

  청일 전쟁의 막이 오르는 운명의 아침이 밝았다. 7월 25일이었다. 바다 위에 낀 새벽안개가 서서히 걷히자 청국과 일본 함대는 서로를 확인하였다. 어제 밤에 닻을 내린 그 자리 그대로였다. 그런데 일본 순양함들의 연돌에서 시커먼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기 시작하였다. 기관이 최대 출력 상태의 운전에 들어갔다는 증좌였다. 청국의 제원과 광을도 일본 함대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보일러를 가열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함대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청국 함을 향하여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아침 6시 반이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러나 청국함은 설마 일본 함대가 공격해 오리라고는 예상을 못하고 있었다. 오전 7시, 거리가 3천m 정도 되었을 때, 요시노가 발사한 초탄이 아침 공기를 가르면서 바다를 가로질렀다. 청일 전쟁의 첫 포탄이었다. 첫발은 제원의 마스트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뒤에 멀리 큰 물기둥을 만들며 바다에 떨어졌다.
  함교에 서있던 제원호의 관대(管帶 : 함장)인 방백겸(方伯謙)은 갑자기 귓전을 스치고 지나가는 포탄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제원과 광을의 2척은 일본의 신형 순양함 3척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방백겸은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밖에 나지를 않았다. 한편으로는 일단 응사도 해야 했다. 방백겸은 부관들에게 조함과 전투 준비. 사격에 필요한 명령들을 내리라고 호들갑을 떨었으나 부관들이 전성관에 대고 지른 고함 소리는 함의 승무원들에게는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이 웅웅거리는 소음일 뿐이었다. 청국 함대는 독일 무관을 초빙해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조함과 전투에 필요한 명령어들과 해군 용어들이 중국말로 번역이 되어있지를 않아서 독일어 그대로 사용을 했다. 그러나 제원의 경우 관대인 방백겸을 비롯해서 간부 사관 대부분이 독일어 명령어를 숙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수병들은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평시의 수송선 호위 임무라던가, 항해 정도는 겨우 해낼 수 있었지만 예기치 못한 전투에 돌입하다 보니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사관들이 뛰어다니며 고함을 질러댔지만 수병들에게는 먹히지가 않았다. 요시노는 점점 다가왔고, 지근탄이 여기 저기 떨어지더니 드디어 제원의 몸통에 쿵 하고 울리는 충격이 왔다, 명중탄을 맞은 것이었다. 함교에 서있던 대부(大副; 사무장) 심수창(沈壽昌)이 돌아보니 옆에 서있던 관대가 보이지 않았다. 방백겸은 선창으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함교에 서있다가는 죽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그는 심하게 흔들리는 배의 요동과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몇 번이나 계단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선창으로 내려갔다. 심수창이 이부(二副; 차장)를 선창으로 내려 보내 명령을 간청하자 방백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내저으며 "백기를 올려라. 백기를 올려!" 하고 소리쳤다. 항복할 심산이었다. 군함이 항복할 때는 우선 사격을 멈추고, 마스트에 백기를 올리고, 기관을 끄고 정지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러나 제원은 마스트 높이 백기가 펄럭이고 있었지만 관대가 항복할 생각인지 싸울 생각인지 함 전체에 알려지지가 않았다. 제원은 항복한다는 국제적인 표식인 백기를 높이 내걸고 기관은 최대 출력으로 가동하면서 대포까지 쏘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방백겸은 그저 백기를 올리라고만 명령했을 뿐, 선창에 숨어 더 이상 관대의 역할을 하려들지 않았다. 함교에는 대부 심수창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함교에 날아든 요시노의 포탄이 심수창을 쓰러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제원은 명령을 내리는 사람도 없이 상처 입은 짐승이 본능적으로 자기 소굴을 바라보고 달리듯이 무작정 발해만을 향해 도주할 뿐이었다. 기관실의 탄부들은 죽을힘을 다해 석탄을 화로에 쓸어 넣었고, 포에 달라붙은 포수들은 중구난방이었지만 포를 계속 쏘아댔다. 도오고오가 남긴 일기에 의하면 이때 도주하던 제원의 마스트에는 백기가 걸린 아래에 일본군함기까지 올라와있었다고 한다. 기록이 정확하고 솔직한 도오고오이고 보면 이것도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백기를 올렸는데도 계속 포탄이 날아오자 방백겸은 일본군함기까지 게양하도록 명령을 했을 것이다. 훗날 장개석은 중국 역사의 여러 전쟁들 중에서 갑오전쟁(청일전쟁)이야말로 가장 수치스러운 전쟁이었다고 말했는데, 그 말에 공감하게 만드는 여러 장면들 중 첫 장면이 이것이었다.


↑일본 해군의 방호순양함 요시노.


↑청국의 궁면광갑쾌선 제원. 풍도앞바다 해전과 곧이어 벌어진 황해해전에서 두 번이나 비겁하게 도망을 치는 추태를 연출했다.

  광을은 제원보다 더 소형이고 무장도 빈약한 포함이었다. 원래는 목탄을 때는 보일러로 움직이는 배였고 선체 중앙에는 돛대까지 있었다. 그리고 본디 북양함대 소속도 아니었다. 광을(廣乙)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광동(廣東) 함대 소속이었다. 광갑, 광을, 광병, 광정 등은 모두 광동함대 소속의 군함인데 북양함대에 연수차 파견된 것들이다. 일본 순양함들이 공격을 해오자 광을의 함교에서는 제원의 마스트를 바라보며 지휘나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터무니없게도 제원의 마스트에 올라간 것은 백기였다. 광을은 제원이 항복하려는 것으로 판단했다. 당연히 광을을 지휘해 주어야 할 방백겸으로부터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제원을 따라 넓은 바다로 도망쳐 나간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일본 순양함들의 손아귀를 벗어날 가망성은 없었다. 광을은 제원과 갈라졌다. 육지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서해안은 간만의 차이가 심하여 대부분 넓은 개펄이 펼쳐져 있고 수심이 완만하고 깊지가 않았다. 광을은 태안반도의 개펄에 올라앉고 말았다. 일본은 요시노와 나니와 2척이 제원을 쫓고, 맨 후미의 아키쓰시마가 광을을 잡으러 왔다. 그러나 육지에 너무 가까이 가다가는 아키쓰시마도 개펄에 올라앉을 수가 있었다. 뻘밭을 타고 앉아 움직이지 않는 광을을 향해 아키쓰시마가 포격을 계속했다. 드디어 광을의 탄약고가 대 폭발을 일으킨 것이 오전 7시 40분 경이었다. 물론 이때는 광을의 간부사관과 수병들 대부분이 배에서 개펄로 뛰어내려 허리까지 차는 바닷물을 휘저으며 육지로 도망친 다음이었다. 아키쓰시마는 광을의 폭발을 지켜본 후 함수를 돌려 제원을 잡으러 간 요시노와 나니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전함 요시노의 제1유격대 사령관 쓰보이 고조 소장은 언제부터인가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유는 물론 눈앞에서 도망치고 있는 제원 때문이었다. 아직도 제원의 마스트에는 항복하겠다는 백기가 펄럭거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제원은 전속력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게다가 후미 갑판에서는 몇 명의 용감한 수병들이 쫓아가는 요시노를 향해 계속 포를 쏘아댔다.
  요시노는 일본 함대에서 가장 속력이 빨라서 22.5노트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영국의 엘직 조선소에서 건조되어 1년 전인 1893년 10월 5일 영국에서 출발하여 금년 3월 6일에 구레 군항에 도착했으니까 일본 해군이 인수한지 몇 개월도 안 되는 최신형 함이었다. 후에는 2등 순양함으로 분류되었지만 청일전쟁 때만 해도 순양함이나 해방함 같은 함종 명칭은 나오지 않았을 때였다. 그냥 중형함이라고 불렀다. 배수량은 4,160톤에 무장으로는 15센티 속사포를 4문, 12센티 속사포 8문을 장비하고 있었다. 반면에 도주하고 있는 청국의 제원은 2천 톤이 조금 넘는 체구에 18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었고, 포는 독일의 크룹사제 27센티 포를 앞뒤에 각 1문씩, 15센티 포와 12센티 포를 각 1문씩 갖고 있었다. 주포의 구경은 제원이 요시노보다 컸지만 요시노의 15센티 포는 당시에 막 출현한 최신식 속사포였다. 제원의 27센티 포를 한발 쏘는 동안 8발을 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주하고 있는 제원은 용케도 잘 맞지 않았다. 3천에서 4천 톤 급의 군함은 바다에서 보면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이 정도 크기의 군함이 20노트 가까운 속도로 달리면 피칭이 대단히 심해서 함수가 바다 속에 처박혔다가 다시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파도가 심한 날에는 앞머리를 숙이면 뒤의 스크류가 물 밖으로 나오기도 한다. 제원은 포야 맞던 말던 상관없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무조건 최고 속력으로 내달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잡으러 가는 요시노 입장에서는 포를 쏘아서 맞추어야 했는데. 이게 달리고 있는 중에는 쉽지가 않았던 것이다. 속력을 더 내자니 포의 조준이 어렵고 속력을 늦추자니 놓칠 판이었다. 제원은 몇 발의 명중탄을 맞고도 아직 살아있다고 자랑을 하는 듯이 꽁무니에서 간간히 27센티 포탄이 날아왔다. 물론 터무니없이 빗나가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제원의 후미 갑판에서 포를 쏘는 연기가 확 일어나면 요시노의 함교에서는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구름~~

 

■고승호 사건
  수백 미터에서 2-3천 미터 사이에서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면서 경주를 하고 있는 두 척의 군함에서 4-5킬로 뒤처져 나니와가 따르고 있었다. 나니와의 함교 위에는 도오고오 헤이하치로 대좌가 망원경으로 앞에서 달리는 두 군함을 보고 있었다. 도오고오가 보기에 아무래도 요시노가 제원을 잡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당시의 포격술로는 전속 항진 중 명중탄을 기대하기가 사실상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쫓아가다가는 북양함대의 본대와 마주치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슬슬 추격을 중지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생각하는 차에 같이 함교에 서있던 부사령이 도오고오에게 10시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도오고오의 망원경에 멀리 수평선에 피어오르는 두 줄기 연기가 가느다랗게 보였다. "북양함대?" 도오고오는 연기가 보이는 방향을 향해 변침을 명령하고 나니와를 몰고 다가갔다. 후미에 처져있던 아키쓰시마도 나니와의 신호를 보고 뒤를 따라왔다. 마스트에 영국의 국기 유니온 잭이 휘날리고 있었다. 영국의 상선이었다. 그러나 그 옆을 따르고 있는 또 한 척의 배는 분명히 청국의 군함이었다. 도오고오는 물론 일본 해군의 사관들은 북양함대의 모든 함형을 머리 속에 외우고 있었다. 영국 상선 옆의 배는 목제 포함 조강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청국의 군함기와 황룡기가 펄럭이고 있는 것이 망원경에 잡혔다. 도오고오는 점멸 신호로 정선할 것을 명령했다. 영국 상선은 정면에서 다가오는 일본 순양함의 정선 신호를 받고 배를 멈추었으나 청국 군함은 뱃머리를 틀었다. 도오고오는 뒤따르던 아키쓰시마에게 뱃머리를 돌려 달아나는 조강을 추격하라고 지시하고 보우트를 내렸다. 도오고오는 국제 해사법에 정통했다. 영국 국적의 상선이라 하더라도 청국 군함의 호위를 받고 있다면 청국의 군대나 보급물자를 수송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만약에 그렇다면 일본 함대는 영국 상선이 운반 중인 물품들을 압류하거나 필요한 경우 선박을 나포할 수도 있었다.

  비경호와 애인호에 이어 아산에 보낼 증원 병력의 제2진 1천1백 명의 병력과 대포 14문을 싣고 조선으로 오고 있던 고승호는 이렇게 해서 제원을 추격하던 일본 순양함들에게 덜미가 잡혀버렸다. 단정을 타고 고승호에 올라온 요시노의 임검사관은 배에 청국 장병들이 가득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눈앞에 나타난 일본의 순양함과 배에 오른 일본 사관들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호위하던 조강은 도망치고 있었고 그 뒤를 아키쓰시마가 쫓아가고 있는 것도 고승호에서 볼 수가 있었다. 일본의 임검사관은 고승호의 선장에게 퇴함할 것을 요구했다. 영국인 선장 이하 선원들은 배를 버리고 보우트에 옮겨 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이 배에서 내리고 나면 청국 장병들은 어찌 되는가? 배 채로 일본으로 끌고 가던가 아니면 격침시킬 것이 뻔했다. 청국군 장교들은 영국인 선원들이 배에서 내리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영국인들이 배에 타고 있는 한 일본 군함이 함부로 발포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에 청국 병사들이 사는 길은 영국인들과 배에 함께 있는 것뿐이었다. 도오고오는 몇 번씩 단정으로 왕복한 임검사관의 보고로 영국인 선장은 퇴함 의사를 밝혔으나 청국병들이 내리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도오고오는 현재 고승호가 영국인 선장이 선장의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고 청국병들에게 강제로 점거 당해 있는 상태라고 결론을 내렸다. 도오고오는 3시간여를 기다린 후 12시에 위험을 경고하는 붉은 색 깃발을 마스트에 게양했다. 그리고 12시 40분, 포와 어뢰의 발사를 명령했다. 수발의 포탄이 날아가 고승호에 작열하자 갑판 위에서 바다로 뛰어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니와에서 보였다. 나니와에서 발사된 어뢰가 고승호에 명중하자 이미 불이 붙어 연기를 내뿜고 있던 고승호는 급격히 기울어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나니와에서 내린 보우트들이 돌아다니면서 바다에 떠있는 사람들을 구조하였는데 전부가 영국인 선원들만이었다. 청국 병사는 단 한 명도 구조하지 않았다. 1천1백 명의 청국병들 중 다음날 프랑스 군함 한척이 부근을 지나갈 때까지 살아 있다가 구조된 수자는 불과 200명뿐이었다. 9백 명의 병사들과 14문의 대포는 황해 바다에 수장되고 말았다. 이 고승호에 10조원에 달하는 금화 수만 개가 군자금으로 실려있다고 하는 소문이 보물선 탐사가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지만 진위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일본 순양함 나니와의 포격과 뇌격을 받아 침몰하고 있는 청국 수송선 고승호

  한편 고승호를 버려두고 되돌아 도망쳤던 포함 조강도 뒤쫓아 온 아키쓰시마에게 포획 당해 일본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청일전쟁의 서전이라 할 수 있는 풍도 앞바다 해전은 이렇게 일본 해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러일전쟁, 중일전쟁,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진주만 기습까지 거듭 되풀이되는 일본의 선제 기습의 효시였다. 일본 해군은 언제나 선전 포고보다 앞서는 기습 공격으로 전단을 여는 것을 특기로 삼았다. 풍도 앞바다 해전에서 그래도 유일하게 운이 좋았던 것은 제원호 뿐이었다. 천신만고 구사일생으로 요시노의 추격을 떨치고 여순항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제원은 뒤이어 벌어진 황해해전에서도 제일 먼저 도망쳤다가 방백겸은 결국 사형에 처해진다.


↑영국 상선 고승호를 호위하고 아산만으로 오던 중 일본 순양함대를 만나 아키쓰시마에게 포획된 청국의 포함 조강호. 목선인데다가 돛대를 두 개나 달고 있다. 일본의 사세보에 끌려온 직후에 찍은 사진이다.


구름~~

 

■서전(緖戰)의 명암(明暗)
  일본이 청국에 대하여 정식으로 선전을 포고한 것은 풍도앞바다에서 이미 포탄을 주고받은 지 엿새나 지난 8월 1일이 되어서였다. 선전포고보다 먼저 천진의 북양대신겸 직례총독 이홍장에게 전해진 것이 �도앞바다의 해전과 고승호 침몰의 비보였다. 이홍장이 북경의 총리아문에게 서전의 패배를 전보로 보고한 것이 7월 27일이었고. 일본의 동경에 승리의 소식이 전해진 것은 하루 늦은 28일이었다. 이 날은 음력으로 6월 26일로서 청국 황제 광서제(光緖帝)의 탄생일이었다. 1천명의 병사들이 총 한발 쏘아보지 못하고 바다의 원귀로 희생된 고승호의 참극은 쉬쉬되는 가운데 북경은 광서제의 탄생을 측하하는 연회가 성대하게 베풀어지고 있었으며, 정부의 고관들은 영수궁(寧壽宮)에서 상연된 연극을 관람하고 있었다. 이홍장은 홀로 고뇌에 빠져들었고, 증원군을 기다리던 아산의 청국군은 침통과 비탄에 잠겨들었다. 고승호가 운반하던 14문의 대포야말로 조선에서의 싸움에 없어서는 안 될 무기였다. 아산에 주둔 중인 청국군이 보유한 대포는 고작 여덟문 뿐이었다. 고승호의 침몰은 조선에 와있던 청국군에게 이 8문의 대포만을 가지고 일본군에 대적해야 한다는 절망적인 현실에 직면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고승호보다 이틀 전에 먼저 출발한 애인호와 비경호로 수송된 1천3백명의 증원 병력은 고승호로 오기로 한 병력과는 한 부대의 병사들이었다. 불과 이틀 전에 대고항에서 "나중에 보세.", "조선에서 만나세." 하고 손을 흔들어 작별했던 동료들이 학수고대하던 무기와 탄약과 함께 그대로 수장되고 말았다는 소식은 조선주둔 청국 장병들을 싸우기도 전에 절망감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고승호의 증원병력이 사라져버린 지금 조선에 있는 청국군의 병력은 모두 3천5백 명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에 풍도앞바다 해전의 소식이 전해진 일본 열도는 축제분위기로 들끓었다. 일본의 신문들은 하나같이 청국 군함의 선제 포격을 받고 일본 측이 응전한 것으로 보도했다. 신문에 따라서는 일본 순양함들의 공격을 받고 중국으로 도망쳐 간 배가 제원이 아니라 북양함대의 주력함인 정원(定遠)이라고 보도되기도 해서 일본 국민들을 더 열광하게 만들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3년 전인 1891년 7월에 청국의 북양함대가 친선차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일본 국민들은 북양함대의 제독 정여창이 이끌고 온 청국함대의 위용을 부러운 심정으로 바라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청국이 북양함대를 나가사키, 고오베, 요코하마 등 일본의 주요 항구를 순방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무력시위였고 해군력의 과시였다.


↑일본 방문 때 나가사끼만에 정박 중인 전함 정원. 북양함대의 기함으로써 청일전쟁 개전수년 전에 방일한 이래, 일본해군 최대의 가상적함이었다.


↑이 그림에서 정원과 진원을 상,측면도로 보면 전형적인 중앙시터들식장갑함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청국이 일본에 대해서 이런 시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이라는 두 척의 전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국은 이 두 척을 독일의 폴칸 조선소에서 사들였는데, 30센티미터 두께의 철갑을 두르고 있어서 일본이 보유한 어떤 군함의 포로도 관통이 불가능한 불침전함이었다. 만재배수량은 7천3백35톤이며, 305mm(12인치) 주포가 2문 장비된 회전포탑을 좌우에 2기를 갖고 있었다. 이 포탑도 역시 선체와 같은 30센티미터 두께의 장갑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선회식 포탑이란 당시로는 첨단의 무기체계로서 일본 해군은 포탑을 가진 배가 단 한척도 없었다. 2기의 포탑 외에 150mm 부포가 2문, 75mm 포 4문이 더 있었으며 속도는 14.5노트였다.
  정여창이 이끄는 북양수사는 이런 군함을 두 척이나 앞세우고 일본을 방문했던 것이다. 이 배를 본 일본국민들은 기가 죽었으며, 만약에 일본이 청국과 전쟁을 벌이면 과연 이길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육지에서의 싸움은 청국군에게 지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는 국민이 대다수였지만 정원과 진원이 있는 청국함대와의 바다싸움에는 그런 자신감이나 낙관론을 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 정원이 일본 함대에 쫓겨 도주했다고 하니 기뻐 날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만약에 이것이 오보가 아니라 사실이어서 그날의 서해 바다에 정원이나 진원이 나타났다고 하면 초전의 승패는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필이면 안 그래도 정예해군과는 거리가 먼 청국해군 중에서도 가장 비겁하고 졸렬한 함장이라 할 수 있는 방백겸이 관대로 있던 제원호가 일본함대의 첫상대였다.
  승전에 환호작약하는 시중의 분위기와는 달리 전문을 받은 무쓰 외상은 고승호 격침 소식에 떨고 있었다. 청일 개전을 앞두고 무쓰가 노심초사 살얼음을 밟듯이 조심에 조심을 해온 것이 바로 서구 열강의 비위를 건드려 개입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도오고오 이 멍청한 자식이..." 무쓰는 도오고오 대좌가 눈앞에 있다면 때려눕히고 싶은 심정이었다. 최초의 전문 내용만으로는 고승호 격침의 경위를 소상하게 알 수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영국 국기를 단 영국국적의 선박을 일본 군함이 포와 어뢰를 발사해서 격침시켰다는 사실이었다. 무쓰는 이 사건으로 해서 영국의 개입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직감에 사로잡혔다. 더 이상의 파병은 중단하고 자숙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무쓰는 이토오 수상에게 현상태에서의 관망을 건의하는 보고서를 올렸다. 그러나 이토오 히로부미는 오히려 냉정하게 침착을 유지했다. 무쓰의 건의를 일축해버린 이토오는 흔들림 없이 예정된 후속조치들을 실행해 나갔다. 무쓰가 고승호 격침 소식에 그렇게 놀라 허둥거린 것도 당시 일본의 입지를 생각해보면 그리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일본은 청일전쟁 개전 시점까지도 구미의 열강들과 대등한 위치에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개국시에 체결한 열강들과의 조약들은 하나같이 불평등하고 일방적인 내용들이었다. 각국은 일본 내에서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고, 통상과 조세에 있어서도 일방적인 권익을 누렸다. 심지어는 다른 열강들과 이런 불평등조약을 맺고 각종 이권을 수탈당하고 있던 청국조차도 일본에서는 다른 열강과 마찬가지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일본 내에서 외국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재판권은 주재국에 있었다. 이런 불평등조약의 개정은 일본국민의 열망이고 염원이었다. 당시 이토오 내각이 궁지에 몰려있던 이유도 조약개정의 국민적 열망에 부응하지 못하고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 데 큰 이유가 있었다. 가까스로 10만이 넘는 근대적 군대와 50척이 넘는 신식 함대를 보유하게 되었다고는 해도 제국주의의 정점에 올라있던 구미의 열강과 비교해 보면 아직까지도 어른과 어린아이의 격차가 있었다.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이 5대강국의 어느 한나라라도 작심을 하고 간섭을 하려들면 일본은 굴복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때문에 청일전쟁은 무슨 수를 쓰서라도 이들 열강들의 간섭이 배제된 채 오로지 청국과 일본의 1:1 싸움이 되어야 했다. 청국의 실권자 이홍장은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개입을 이끌어내서 전쟁을 막으려고 모든 노력을 다했고, 일본 외상 무쓰는 반대로 조선 문제에 관한 열강의 무관심과 불개입을 얻으려고 노심초사를 해왔던 것이다. 러시아는 조선과 만주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지만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한 영국의 단호한 저지에 막혀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거문도 사건이 대표적인 러시아의 좌절이었다. 러시아는 실력으로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영국은 말을 갈아타고 있는 중이었다. 극동에서의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줄 방파제로서 청국을 염두에 두었으나 청국은 오히려 일본을 억제할 힘으로서 러시아를 이용하려 들었다. 그리고 러시아에 대적할만한 실력을 기대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영국은 점차 극동에서의 동맹자로서 일본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영일조약개정은 일본에 주는 영국의 선물이었다. 그런 차제에 고승호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무쓰로서는 십년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판이었다. 해양제국 영국의 힘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극동함대가 일본 해군 전체와 맞먹을 정도였다.
  무쓰의 우려대로 도오고오에 의한 고승호 격침 사건은 영국의 조야를 들끓게 했다. 영국이 기존의 불개입 정책의 고수 여부를 재검토할 정도로 심각한 외교적 문제로 비화했다. 영국의 외무성과 해군성은 고승호 사건에 대한 대처에서 주장하는 방법이 서로 달랐다. 외무성은 엄정중립(strict neutrality)을 유지하면서 법적 해결을 중시하였고, 해군성은 군사적 대응을 모색했다. 전쟁 지역에 제3국 선박이 통과하는 문제와 전시금제품(戰時禁制品, contraband of war)의 수송 문제는 그들의 국익과 연관되어 있는 문제였다. 일본의 행위를 인정하면 영국의 무역이나 선박에 의한 수송사업이 제한되는 선례가 될 수 있었고, 그 반대라면 영국이 해상 봉쇄를 실시할 때 3국 선박이 전쟁 지역의 통행권과 전시금제품 수송을 주장할 수가 있었다.
  영국의 극동함대 사령관인 프리멘틀(Fremantle) 제독은 "자국 상선의 항행을 방해할 경우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본에 강경하게 경고하였다. 이런 영국의 엄포는 이후 영국 국적 선박에 대한 일본 해군의 대응을 무척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고승호 사건에 대해 열린 국제 해사법 회의에서도 도오고오의 조치들은 국제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법적 결론이 나왔다. 구조된 후에 일본 해군에 의해서 융숭하게 대접받은 고승호의 선원들이 도오고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한데다가, 영국의 유명한 국제법학자인 흘란드가 "도오고오는 국제법상의 합법적인 절차를 다 거친 후에 고승호를 격침했다."고 주장한 것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리고 영국 해군 내부에서도 개입반대론이 있었다. 해군 참모부의 생각은 영국 극동함대의 실력이 일본 해군에 맞설 정도의 수준이 못 된다는 점 때문에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신중론으로 기울어 있었다. 영국의 극동함대에는 일본 해군을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두 척의 강력한 군함이 있었다. 센츄리온과 언다운티드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 군함이 배치되어있는 곳은 넓은 바다가 아니라 영국의 내륙운송로였던 양자강과 오송강이었다. 거함이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협소한 강상에서 작지만 속도가 빠른 쾌속순양함에 의한 포위공격을 받을 경우 일방적으로 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제1해군위원이었던 프레드릭 리챠드(Fredrick Richard)가 앞장서서 정부에 자제를 권유했다. 한편으로는 일본에 대해 간섭을 하자면 우선 극동함대의 증강이 선결되어야 하고 다른 열강들의 지지와 협력을 얻어 공동보조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단독개입이 먹혀들지 않으면 국제무대에서 체면과 위신이 손상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영국의 개입제안에 대한 열강들의 반응 역시 미적지근했으므로 영국정부는 리챠드의 제안을 받아들여 지중해와 인도의 예비함대에서 순양함 5척을 빼내 극동함대를 증강하였으나, 강경대응방침은 철회하고 종전대로의 불개입정책으로 돌아섰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郎, 18471934) : 일본 해군대장. 사쓰마번(薩摩潘;지금의 鹿兒島) 출생. 16세 때 나마무기사건(生麥事件)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영국과의 전투에 아버지·형과 함께 참가했다. 1866년 번해군소(藩海軍所)에 입소하였으며, 70년 신정부 군함의 승무견습사관, 71년 해군유학생으로 영국에 유학하고 78년에 귀국하여 91년에 나니와(浪束)호의 함장이 되었다. 해상근무를 계속하다가 청일전쟁 때에는 풍도 앞바다 해전에서 영국 상선 고승호를 격침시킨 사건으로 세계 해군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 뒤 황해해전과 위해위 봉쇄전에도 참가하였고, 청일전쟁 후에는 해군대학교장·상비함대사령장관 등을 지냈다. 1903년 연합함대사령장관이 되고, 이듬해 대장으로 승진하였다. 러·일전쟁에서는 연합함대사령장관으로 1905년 대한해협에서 벌어진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전멸시켜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19051909년 군령부장(軍令部長), 13년에 원수가 되었다. 위에서 왼쪽 사진은 나니와의 함장이던 대좌 시절의 모습이고, 오른쪽 그림은 러시아의 발틱 함대와 싸우던 때, 기함인 미카사호의 함교에서 일본 연합함대를 지휘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일본 정부는 나니와가 회항해 있던 사세보에 법제국장인 말송겸징(末松謙澄)을 보내어 도오고오를 조사하게 했으나 말송 국장은 조사결과 일본 측에는 잘못이 없으며 국제법상으로도 배상의 책임이 없다는 보고서를 동경에 보내왔다. 해사법에 밝았던 도오고오가 준비해 놓은 논리는 이런 것이었다.
  우선 고승호 격침 시점은 청일 양국이 해상에서 교전을 벌인 후이므로 나니와는 당연한 교전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했다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고승호가 영국 국적의 선박이고, 영국기를 게양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청국군에게 점거되어 선장이 직무수행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즉 고승호는 청국군에게 나포된 상태였다는 관점이었다. 거기다가 고승호의 소유자인 쟈딘 메디슨사는 만약 개전이 되는 경우 이 배를 청국에게 양도한다는 계약을 청국과 맺고 있었다는 점도 도오고오는 지적했다. 훗날 러일전쟁 때 일본 연합함대의 사령관으로서 대마도 앞바다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멸하고 일본의 국민적 영웅이 된 인물답게 용의주도하고 면밀하게 사건의 수습을 해 나갔다. 그러나 바다에 빠진 1천명의 청국병사들을 단 한사람도 구조하지 않은 냉혹하고도 비인간적인 면모는 도오고오의 한계이기도 했고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하기까지 일본군이 보여준 생태적 약점이기도 했다.
  어쨌든 국제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고금을 막론하고 힘의 논리였다. 황해에 수장된 천명의 청국 병사들만 억울한 원귀가 되고 말았다.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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