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2 명활산성.
경주 보문동의 명활산성을 오른다. 한번은 둘러보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명활산성.
계획대로라면 욕지도에 있어야 할시간들인데...
그넘의 바퀴벌레 소동으로 하루 일찍 귀가한때문이다.
산성 초입을 별어려움없이 찾았는데 그초입의 산성은 복원이 되어져있고 조금 오르기 시작을 하면서
부터는성의 형태라기보다는 돌무더기가 예전의 성이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길게 이어져있다.
어디서 저렇게도 많은돌들을 주어다 날랐을까? 성의 윤곽이 제법 뚜렸한곳도 있고 근근이 이어지다가
끊어져 버리는곳도 있다.
성을 따라 돌면서 왜 여느 다른성들과는 달리 이성은 산능선의7~8부능선상에 쌓았을까?
숙제만 하나 만들고 만다.
천군동의 도예 전시장을 들러 한식부페로 늦은점심식사를 하고 조양동의 효소.성덕왕릉을 찾아본다음
경주 소금강의 탈해왕릉.표암.굴불사지 사면석불까지 욕심을 부린다.
- 천군동.보문동
명활산성.
경주 보문호 남쪽에 위치하는 명활산을 둘러싼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토성(5km) 석성(4.5km) 이 함께 있다.
신라 실성왕 4년(405년)에 왜병이 성을 공격해 왔으나 격퇴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산성은 그이전에 쌓은
것으로 여겨지며 자비왕 18년(475)에는 명활산성을 궁성으로 사용하였다가 소지왕 1년(479년)부터 월성으로
다시 옮겼다. 선덕여왕때에는 비담등이 이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을 중심으로 관군에게 평
정되었다.
석성.
산성옆에 이런형태로 쌓여진 돌무더기는 희양산성에서도 볼수있는데 아마도 지휘소같은곳이 아니었을
까? 생각되어진다.
돌의 양이 상당하다.
산성따라걷다가 내려다보이는 보문호.
토성.
명활산성에서...
천군리 삼층석탑 (동탑)
천군리 삼층석탑 (서탑. 보물 제168호 )
이탑은 통일신라 시대의 삼층석탑으로 동서로 마주 보고 있다. 절이름은 알수 없고 이중(二重) 기단위에 세워
진 일반형에 속하는 두탑은 양식이나 규모가 같다. 높이 7.7m인 서탑은 탑꼬대기의 머리장식이 일부 남아 있고
꼭대기 머리장식이 없어진 동탑은 6.7m이다. 기단에는 면마다 네개의 기둥새김이 있고 몸통과 지붕돌은 각각
한돌로 되어있다.
천군리 절터에는 배꽃이 만발했다.
도예전시장.
수정.
- 효소왕.성덕왕릉
신라 효소 왕릉.
이능은 신라 32대 효소왕(재위 692~702.김이공)이 모셔진 곳이다.능의 밑둘레 57m지름 15.5m. 높이 4.3m로 둥
글게 흙을 쌓은 원형봉토분으로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사용하여 보호석인 둘레돌을 돌렸으나 지금은 몇개만 드
러나 있다.
왕은 시장을 개설하여 견제력을 확충하고 당나라.일본과 문물을 교류하는등 국력을 키우는데 힘썼다.
신라 성덕 왕릉.
신라 33대 성덕왕(재위 702~737.김흥광)을 모신곳으로 토함산의 서쪽에 있는 형제봉의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의 뒤를 이어 36년동안 통치 하면
서 안으로는 정치를 안정 시키고 밖으로는 당과 교류를 활발히 하였으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태평성대를 이
루었다.
무덤 둘레가 46m. 지름이 14.5m. 높이가 5m이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 시켯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십이지신상 입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심
하게 파손되어 있다.
성덕왕릉 귀부.
신라 성덕왕의 능비를 세웠던 받침돌이다. 거북 머리는 깨어져 없지만 발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형상이다.
등에는 육각 귀갑무늬가 새겨져 있고 가운데에 비신(碑身)을 꽂았던 네모난 홈이 있다. 비신과 마릿돌은 없어
졌지만 경덕왕때에 만든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져 있다.
- 한국 영상광고 박물관
- 경주 소금강.
서쪽을 향하고 있는 아미타불과 협시불로 관음보살,대세지보살상
약사 여래 좌상.
남쪽의 삼존입상.
굴불사지.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았을때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려 왔다고 한다. 땅을 파보니 바
위가 나와서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라 불렀다고 한다.
나들이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