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3 장기-구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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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일부가 복원되어진 장기읍성(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은 고장의 진산(鎭山)인 동악산(東岳山)에서 동쪽으로 뻗은 등성
이에 있다. 복원이라고 해놓은 모양이 너무 안타깝다. 복원이라기 보다 리모델링이다.
복원의 손길이 아직 미치지 못한 본래모습의 장기읍성.
있는그대로의 현상태로 관리나 제대로 해주면 얼마나 고마울까? 뜯어고치지 말고...
장기향교.
장기향교는 태종 5년(1405)에 현의 남쪽 2리에 창건되었으며, 임진병화로 소실되어 선조 33년(1600)에 중건하고, 정조 9년(1785) 지방의
교학을 부흥하기 위해 현감 황익진(黃翼振 1784∼1785)때 마현행단(馬峴杏壇 구석곡: 현 장기초등학교 동편)에 이건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문경(徐文慶)·서극인(徐克仁)·이눌(李訥)·이대임(李大任) 등이 향교에 봉안해 오던 위패를 용암석굴(龍岩石窟)
에 권안(權安)시키고 의병을 일으켰기 때문에 건물은 소실되었으나 위패만은 무사할 수 있었고. 향교를 이건할 때 덕계 임재화(德溪 林再
華)가 대대로 살던 자기집터를 희사하여 향교재건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그 후 1931년에 군수 김영수(金永銖)가 향사(鄕士)들과 함께 읍성(邑城)내에 있던 구객관(舊客館)을 수리하여 명륜당(明倫堂)을 만들고
대성전(大成殿)을 새로 건립하여 위패를 옮겨 안치하였다.
장기향교는 소평위며, 인근 55문중이 매년 춘추 2회(2월, 8월 상정일)향제를 지내다가, 최근부터는 8월 상정일에만 지내고 있다.
현재 향교에는 대성전·명륜당·신삼문·동재·장경각·대문 등의 건물이 보존되고 있다.
장기 척화비.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辛未立"(서양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하는 것이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임을 우리들의 만년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1862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침략해 오는데,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며, 그들과 교역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글을 반포, 쇄국의 의지를 천명하였다. 그 뒤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서울 종로, 부산,함
양, 동래, 부산진 등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이 비도 이 때 세운 것이다.
원래의 위치는 장기읍성 내였으나, 일제 때 분실되었다가 그 후 1951년 4월초 지행지서 입구에서 찾아 현재의 (장기면사무소)위치에 세
웠다.
근민당.
장기현 官衙 東軒 建物로서 장기 邑城에서 1922년 移築하여 장기면사무소로 이용하였으며 그후 1960년 현 위치로 移築하였으며 현재 장
기면사무소 별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문이 잠겨있어 담넘어로 둘러보게 되는 안산서원.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부사 홍문관 교리를 지낸 악선(樂善) 김숙(金淑)과 通德郞을 지낸 珠玉 金漢昌을 享祀하는 곳이다.
문이 굳게 닫혀있어 제대로 둘러볼수 없었던 서산서원.
조선 영조 36년(1760)에 창건하였다가 대원군의 서원 철폐때 훼철되었던 것을 1907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서 수은(樹隱) 김중한(金仲漢)
과 그 11대손 서계(西溪) 김응장(金應章)을 배향(配享)한 서원(書院)이다.
忠婢丹良의 碑.
제유정란때 황보 인의 손자도 함께 화를 입었는데 노비가 손자를 물동 이에 넣어 피신하여 대보면 집신골에 피난을 내려와 거주하다 현 성동으로 이주하여 핏줄을 이어가게 하였던 忠婢丹良의 碑가 뒷 마당에 있다.
구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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