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의심할만한 世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우리에게 의심의 여지없이 견고하고 확실한 실체로서 인식되고 있다. 물리법칙이라고 말하는
세계의 규칙들은 변덕을 부림으로서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불가측성으로 우리에게 혼란을 주지도 않는다. 안정되고 변하지 않으면서 확고한 법칙에 따라
유지되며 우리가 오감으로서 언제나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존재'를 의심한다면 세인의 비웃음을 살만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이 세계는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은 일반인의 예상과는 달리 오랜 역사 동안 우리 앞에 놓여져 있었다. 그것은 때로는 철학적인 명제이기도 했고, 때로는
종교적인 질문이기도 했고 오늘날에는 과학적인 의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 세계의 실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선행되는 물음이 바로 '세계는
존재하는 것인가?'이다. 만약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의 실체를 밝히고 규명하는 일은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한다'는 대답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하여 놀라게 만든 사람들이 드물지
않게 있었다. 그것도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 불리는 성인들의 가르침 속에서 그런 대답이 발견될 때에 우리는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불타가 말하는 '색(色)과 공(空)', 노자의 유(有)와 무(無), 환인의 시(始)와 종(終)의 개념은 이 세계를 실재하는
것으로서 믿어 마지않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에 두려운 세계관임이 분명하다.
비범한 직관과 통찰에 의한 이런
세계관들은 뉴튼적 물리의 세계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었고, 서구의 과학은 한때 이러한 동양적 직관을 비웃을 수 있는 행복한 시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이 세계는 과학적으로 견고하고 확실한 대상이었고 철학적 종교적으로는 실존하는 창조주가 만든 실체였으며 그 법칙은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고 변함이 없는 것이었다.
드물지 않게 발견되는 법칙들을 벗어난 현상이나 인간의 능력은 속임수 또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여 과학의 영역 밖으로 유배시키고 잊어버리거나 전능한 초월자가 개입한 기적으로서 경배하거나의 두 가지 방법으로 해결하면
되었다.
하지만 지난 세기에 극도의 진보를 보인 양자역학의 업적에 의해서 우리는 '이 세계가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는 무엇'이라는
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강요받기에 이르렀다.
세계의 실체에 접근하면 할 수록 그것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애매하며 혼란스러운
것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속임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과학자들의 뇌리를 사로잡게 되었고, '세계는
자존(自存)하는 것이 아니라 의존(依存)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직면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물질적 세계는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없고, 반드시 세계를 인식하는 의식(意識)에 의존하여야 만이 존재할 수 있는 상대적이고 의존적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많이 쌓여가는 증거에
의해 굳어져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한 증거들 중의 첫 번째는 바로 물질의 입자가 보여주는
성격이다. <마음의 여행>에서 나는 물질의 입자가 갖는 정보의
동시성을 가지고 영혼의 존재를 규명해 나가는 실마리를 찾았다. 이것은 '벨의 실험'에서 증명된 입자의 성격 중 하나이다. 그러나 지금은 추적의
대상자가 '영혼'이 아니라 '기'라는 것이다.
'영혼'과 마찬가지로 '기'도 존재에 대한 과학적인 입증이 어렵고 계측의 수단이
없다는 점에서는 교묘한 용의자이다. 그래서 '기'라는 용의자를 추적하는 단서가 필요한 것은 '영혼'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그 단서를 포착할 수 있을 것인가? 분리된 입자 사이의 정보의 동시성과 함께 또 한가지 입자의 중요한 본질이 그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물질 입자의 이중성이다.
원자를 구성하는 입자들, 즉 원자 이하의 존재들인 아원자의 세계에 접근하게 되면서 과학들이
빠지게 된 딜레마는 이 물질의 기본 요소들이 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보면 있는데 보지 않으면 사라지는
마술과 같은 세계를 보게 된 것이다. 마술사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검은 모자가 관객이 눈을 뜨면 그 자리에 있고 눈만 감으면 사라지는 것이라면
관객에게는 모자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고 느껴질 것이다. 반대로 눈만 감으면 나타났다가 눈을 뜨면 그 순간 사라지는 마법의 모자라면 이번에는
관객들은 모자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과학자들이 보기에 물질의 입자는 이러한 마법의 모자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물질이라는 요술 모자의 존재는 관객이 눈을 감고 있느냐 떴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의존적인 존재이다.
이 세계의 기본 물질이 그렇다면 그것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는 결국 우리가 눈을 뜨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세계이다. 눈만 감으면 그 순간
사라지는 마법의 모자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계를 사라지게 하는 것은 대단히 쉽다. 눈만 감으면 세계는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확인을 하려고 눈을 뜨면 그 순간 세계는 요술처럼 우리의 눈 앞에 있기 때문이다.
자 과연 어떻게 눈을 감은 채 세계가 사라지고 없음을 확인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기'라는 용의자는 그럴 수 있는 수사관만이 체포할 수
있다.
존재하는 세계임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오묘한 성질이 과학자의 눈에
포착되는 것은 어디서일까? 그것은 바로 앞에서 말했던 입자의
이중성이다.
예를 들어 전자의 검출 장치와 추적설비를 통해서 전자의 행방을 찾아 나서면 검출기의 형광막 위에 하나의 작은 점으로서
그것이 부딪힌 위치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형광막에 충돌하기 이전에 그 전자가 달려온 길을 알 수가 없다. 행로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공간 내에 그것이 존재했는 지도 사실 오리무중이다. 전자가 움직인 경로를 점으로 찍어 연결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추정되는 이동
방향의 앞에 두개의 좁은 틈(슬릿)을 만들면 하나의 전자가 두 곳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면서 빠져나간 흔적을 남긴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전자가
하나의 입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파동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입자의 이중성이다. 특정 위치에 특정한 순간 존재하는 입자임과 동시에 시공간 속에
구름처럼 퍼져있는 파동으로서의 양면성을 동시에 보이는 것이 물질의 입자다.
이것이 바로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단서가 되는 실마리이다.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인 기본 입자들로 쌓아올려진 것이 이 세계라면 지구와 태양은 물론 광대한 우주조차도 입자임과
동시에 파동인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입자적인 세계만을 감지하고 있으며 파동적인 세계는 그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
'존재하는 세계'는 바로 '입자적인 측면의 세계'이며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바로 '파동적인 측면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입자적인
세계만 느끼고 있는 것일까? 물질의 이중성 중에서 입자적 성격이 더욱 강해서일까? 물질 입자의 실체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입자에 가깝다면
세계는 입자적인 세계에 가까울 것이고 파동에 더욱 가깝다면 이 세계는 파동적인 성격이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나머지 하나의 가능성은 어느 쪽에
가깝다고 말할 수 없으며 동시에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라는 것이다. 이 경우의 세계는 입자임과 동시에 파동이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도 입자임과
동시에 파동적인 존재이다. 내가 잊어버리고 있는 나. 그것이 바로 파동적인 나이며 그것이 '기(氣)'로서 형성된 나이다.
'기(氣)'를
파악해 들어가면 그 곳에서 잃어버린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곳에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벽운공(碧雲功)은 나와 동시에 존재하면서도 내가 모르고 있던 또 하나의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두 내가 서로
만났을 때 비로소 완전한 내가 됨을 체험하는 과정이다. 이 완전한 나야 말로 노자가 말하는 현빈과 부처가 말하는 피안으로 갈 수 있는 나이다.
현빈에 사는 죽지않는 신, 즉 신선이 될 수 있는 나이다.
입자적 성질과 파동적 성질이 물질을 시공간 내에 시현하는 데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전자가 뿌연 안개를 만들고 있는
공간의 중심에는 원자핵이 있다. 원자핵은 또 쿼크라 이름 붙인 여러 개의 초미립자들이 모인 것으로 보이는데 원자 이하의 존재들은 모두 전자와
같이 불확실한 존재들이다. 원자핵은 초당 2,200조 번(10의 22승 헤르츠)의 엄청난 속도로 진동하고 있어서 정지된 상태의 실체를 확인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핵이 전자와 결합해서 비로소 원자라는 확인 가능한 물질이 되면 진동수가 10의 15승 헤르츠로 떨어진다. 원자들이
몇 개 결합하여 만들어진 분자는 10의 9승 헤르츠로 진동수가 더 낮아지고 분자들이 뭉쳐서 이루어진 생물의 세포는 10의 3승 헤르츠로 낮아져서
인간의 감각이 반응할 수 있는 정도가 되고 세포들이 모여서 구성된 인체의 진동수는 6.8에서 7.5헤르츠 사이가 된다. 이처럼 물질의 질료들이
보다 많이, 보다 복잡하게, 보다 크게 결합될 수록 전체적인 진동수는 적어지고 점점 더 안정된 존재로 변해간다. 다시 말해서 떨림 현상이
낮아지면서 우리의 인식 체계가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견고한 대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 기관이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떨림이
진정되고 충분한 크기를 가진 것들을 물체라고 하고 세계는 그런 물체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결합에 의해 물질의 파동이 진정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음으로 세계는 인식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 '세계의 존재'는 파동이 진정되면서 나타나는
영상이다. 이 말은 세계의 모습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진동수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테레비젼의 화면이 떨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화면 속의
영상을 알아보기 어렵게 된다. 심하게 떨리면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더욱 심하게 떨리면 화면은 완전히 백색으로 바뀌 어 버린다. 세계도 이와
같아서 떨림이 진정된 테레비젼 수상기의 화면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테레비젼의 화면과 같이 이 세계는 언제라도 떨릴 수 있다. 사실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 화면도 실제로는 엄청난 진동 상태이다. 우리 몸의 안정된 진동수도 우리는 언제던지 변화시킬 수 있다. 진동수를 높이면 우리는 입자적인
존재로부터 점차로 파동적인 존재로 변한다. 극도의 상태까지 파동적인 존재로 변화되었을 때 - 즉 완전한 파동으로 변했을 때 - 우리는 파동적
세계로 혼입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파동적 세계 속에서의 나와 세계의 관계는 입자적 세계 속에서의 그것과는 대단히 다르다. 기수련시에 느끼게
되는 어떤 정신적 영적인 체험은 바로 파동체로서의 내가 파동체로서의 세계와 만난 순간에 겪게되는 현상이다. 입자적인 존재인 내가 파동적 존재로
넘어갈 때의 체험이 되는 것이다. 그 문지방을 넘어갈 때의 느낌은 실로 말로 표현하기 곤란한 무엇이다.
물질의 질료들이 결합할 수록 파동이 진정되는 이유는 두 가지 파장이 만나면
파동 간의 간섭 현상에 의해서 변조된 다른 파동으로 변하는 공조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두 개의 고주파로서 저주파를 만들어 내는 원리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진동수가 다른 파동이 만나면 진동수는 줄어들면서
진폭은 두 파동의 에너지가 합해지는 것만큼 커지게 된다. 원자 두 개가 결합해서 하나의 분자를 이루면 이 분자의 파동은 두 원자의 파동이
합쳐져서 변조된 파동이 된다. 이 때 파장은 길어지고 진폭은 커지게 된다. 즉 진동수는 낮아지고 진동 에너지는 커지는
것이다.
분자들이 결합하면 할 수록 개개 분자들의 파동이 합해지면서 변조를 일으키고 이 변조된 파동이 물체의 파동이 된다. 수소
원자 2개가 산소 원자 1개와 결합하면 이 3개의 입자들이 갖고 있던 고유한 파동들이 간섭현상을 일으킨 결과 하나의 변조된 파동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물분자의 파동이다. 물 분자의 파동은 바로 물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물질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파동을
재는 것으로서 그 물질이 무엇인지를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물의 고유 파동을 내는 어떤 물체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물이라고 판단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자 차원의 파동은 워낙 미약하고 그 떨림이 1초당 1억회를 넘는 것이어서 이런 파동을 감지해서 구별해낼 수 있는 기술이
아직 우리에게는 없다. 분자의 크기를 짐작해 보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가정을 해볼 수 있다. 한 컵의 바닷물을 떠서 전 세계의 바닷물에 골고루
섞은 다음에 다시 한 컵의 바닷물을 떴을 때 처음 떴을 때 컵에 들어있던 분자가 두번째 뜬 컵 속의 물에 들어있는 개수는 약 700개가 된다.
분자라는 것이 그토록 작은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물질의 파동이 얼마나 미약한 것이겠는지, 왜 우리가 그 파동을 감지하고 계측하기 어려운
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물의 분자가 수없이 결합해서 부피가 커지면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이란 것이 되는 것이다.
파동의 성격이 동일한 물이 많이 모이게 되면 그때의 파장은 변하지 않는 대신에 에너지가 높아져서 진폭만 커지게 된다. 한 그릇의 물이나 한
동이의 물이 내는 파동의 파형은 같지만 그 세기가 달라진다. 모인 질료의 양이 클 수록 물체의 파동은 강해진다.
입자적 성질과 파동적 성질이 물질을 시공간 내에 시현하는 데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전자가 뿌연 안개를 만들고 있는
공간의 중심에는 원자핵이 있다. 원자핵은 또 쿼크라 이름 붙인 여러 개의 초미립자들이 모인 것으로 보이는데 원자 이하의 존재들은 모두 전자와
같이 불확실한 존재들이다. 원자핵은 초당 2,200조 번(10의 22승 헤르츠)의 엄청난 속도로 진동하고 있어서 정지된 상태의 실체를 확인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핵이 전자와 결합해서 비로소 원자라는 확인 가능한 물질이 되면 진동수가 10의 15승 헤르츠로 떨어진다. 원자들이
몇 개 결합하여 만들어진 분자는 10의 9승 헤르츠로 진동수가 더 낮아지고 분자들이 뭉쳐서 이루어진 생물의 세포는 10의 3승 헤르츠로 낮아져서
인간의 감각이 반응할 수 있는 정도가 되고 세포들이 모여서 구성된 인체의 진동수는 6.8에서 7.5헤르츠 사이가 된다. 이처럼 물질의 질료들이
보다 많이, 보다 복잡하게, 보다 크게 결합될 수록 전체적인 진동수는 적어지고 점점 더 안정된 존재로 변해간다. 다시 말해서 떨림 현상이
낮아지면서 우리의 인식 체계가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견고한 대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 기관이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떨림이
진정되고 충분한 크기를 가진 것들을 물체라고 하고 세계는 그런 물체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결합에 의해 물질의 파동이 진정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음으로 세계는 인식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 '세계의 존재'는 파동이 진정되면서 나타나는
영상이다. 이 말은 세계의 모습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진동수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테레비젼의 화면이 떨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화면 속의
영상을 알아보기 어렵게 된다. 심하게 떨리면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더욱 심하게 떨리면 화면은 완전히 백색으로 바뀌 어 버린다. 세계도 이와
같아서 떨림이 진정된 테레비젼 수상기의 화면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테레비젼의 화면과 같이 이 세계는 언제라도 떨릴 수 있다. 사실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 화면도 실제로는 엄청난 진동 상태이다. 우리 몸의 안정된 진동수도 우리는 언제던지 변화시킬 수 있다. 진동수를 높이면 우리는 입자적인
존재로부터 점차로 파동적인 존재로 변한다. 극도의 상태까지 파동적인 존재로 변화되었을 때 - 즉 완전한 파동으로 변했을 때 - 우리는 파동적
세계로 혼입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파동적 세계 속에서의 나와 세계의 관계는 입자적 세계 속에서의 그것과는 대단히 다르다. 기수련시에 느끼게
되는 어떤 정신적 영적인 체험은 바로 파동체로서의 내가 파동체로서의 세계와 만난 순간에 겪게되는 현상이다. 입자적인 존재인 내가 파동적 존재로
넘어갈 때의 체험이 되는 것이다. 그 문지방을 넘어갈 때의 느낌은 실로 말로 표현하기 곤란한 무엇이다.
입자로서의 물체에서 질량은 바로 그것을 구성하는 질료의
총량이다. 반면에 파동으로서의 물체에서 파동의 세기는 그것을 구성하는 질료가
가진 파동력의 합이다. 이 질료의 양이 많으면 많을 수록 파동력의 세기가 증가하는 동시에 주파수(진동수)는 낮아진다. 그리고 '같은 물질'이라는
것은 이 파동의 형태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금과 옥과 구리는 파형이 각각 다르다. 그것을 기로서 표현하면 '금의 기와 옥의 기와
구리의 기는 다르다'고 말하게 된다. 같은 금이라도 1돈중의 금과 백돈중의 금은 진동태(파형)는 같지만 세기가 다르다. 생명체인 경우에도 사람과
개와 말은 파동의 형태가 각각 다르다.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의 파형은 인간의 것으로서 진동태의 유사성을 가지면서도 개인간의 편차가 있다.
사람의 음성이나 지문이 비슷하면서도 전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기는 모두 고유한 진동태를 갖는다. 이 말은 지문을 가지고 사람을 구별할
수 있듯이 사람의 기로서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천체도 마찬가지로 지구와 달과 태양과 화성은 고유한 파동의 형태가 있고 세기도 모두
다르다. 지구와 태양의 기운은 그 질량의 차이와 정확하게 비례하는 파동력(기운)의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태양계의 기운보다는 은하계의 기운이
훨씬 강하고 은하계의 기운에 비하면 우주 전체의 기운은 훨씬 강하다.
그러나 이런 기운이 생명체에 미치는 영향은 그 세기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전파가 물에 침투하는 원리를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다. 전파는 강한 전파라 해서 물속을 더 잘 더 깊이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전파가 물속으로 얼마나 깊이 전달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전파의 세기가 아니라 파장에 달려 있다. 파장이 길수록 즉
장파일 수록 물을 침투해 들어가는 깊이가 깊어진다. 그래서 수중에 있는 잠수함과의 통신에 사용하는 전파는 초장파이다. 단파나 초단파는 아무리
강한 전파라도 수면에서 흡수되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물질의 파동이 생명체에 미치는 힘은 그 세기만이 아니라 파형에 더 밀접한
영향을 받는다. 물과 전파의 관계처럼 사물의 파동인 기는 세기보다는 그 진동태가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체에 작용하는 힘이 달라진다. 물론 같은
진동태일 경우 세기가 강할 수록 더욱 작용력도 클 것이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어떤 물질을 규명하거나 판별하는 것은 물질을 이루고
있는 성분들의 배합과 결합 상태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 있다. 바로 그 물질의 파동을 감지해서 판별하는
방법이다. 이게 바로 기의 측정으로 사물을 구별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누구나 가능하다. 즉 불투명한 컵에 각기 다른 물건을 넣고 엎어놓은 후
전해져 오는 기의 차이로서 각 컵에 들어있는 물건이 무엇인지를 구별하는 것이다. 기를 잘 모르는 사람은 이런 광경을 보여주면 투시력과 같은
초능력자라고 여기게 될 것이고 실제로 초능력자로 행세하는 세계적인 몇 마술사들은 이런 방법으로 사기를 치고 있다. 기로서 판별하면서 투시력이라고
뻥을 친다는 이야기다. 구름도 이 정도는 일상적으로 한다. 내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두 딸이 내 등뒤에서 발소리도 안 나게 살금 살금 옮겨서
두 개의 방에 각자 들어간 후에 문을 닫는다. 그러면 내가 어느 방에 큰 애가 들어있고 어느 방에 작은 애가 있는지 맞추는 게임을 하면 구름은
거의 백프로의 정확성을 발휘한다. 큰 놈과 작은 놈의 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릴 때는 딸아이들이 저거 엄마가 초능력자인줄 알았다.
그런데 큰 애는 기공을 조금 배운 후에 자기도 학교에서 초능력으로 가끔 친구들을 놀래킨다. 친구들의 도시락 뚜껑들 여러개를 엎어놓고 큰 애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친구들이 그 중의 뚜껑 하나에만 과일 같은 것은 넣어놓고 어느 뚜껑 속에 과일이 들어있는 것인지 맞추는 것이다. 딸애는
다섯 개의 뚜껑일 경우 약 90프로 이상, 세개 중에서 고를 때는 거의 백프로의 확률을 보인다. 이것은 결코 초능력이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그것도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얼마전에 애들하고 같이 'Six sence'라는 영화를 봤다. 무척 생각을 하게 만든 영화였는데 한가지 갸우뚱했던 것이 있다면 제목과 내용이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육감이라는 것은 우리가 입자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파동적인 존재라는 것의 증거가 될만한 요소이다.
입자적인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는 생명체의 감각기관과 함께 탄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에서 전오식이라 말하는 다섯가지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이 있게 되면서 입자적인 세계가 드러났다는 이야기이다. 눈을 뜨면 나타나는 마법의 모자 이야기에서 눈이라는 것은 바로 생명체의
감각이다. 이 오감으로 느껴 알 수 있는 생명체가 있게 되면서 입자적인 세계는 하나의 실체로서 드러난 것이다. 이 우주 전체에 오감을 가진
생명체가 없다고 하면 이 우주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존재이다. 당연한 것이 우주를 인식할 감각의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명체가 있기 이전의 우주나 모든 생명체가 싸그리 사라진 후의 우주는 무엇이란 말인가? 수많은 별들이 우주 공간에 흩어져
있고 엄청난 숫자의 별들이 탄생하고 소멸한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주 자체의 존재는 생명체의 존재 유무와는
관계없다 말할 수 있지만 입자적인 세계는 생명의 존재(감각 주체의 존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입자적 세계는 파동이 아닌 감각으로서
인식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인식자가 없으면 더불어 사라지는 허상의 세계이다. 오감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육감과 파동적 세계이다. 인식자가 없는
우주에는 파동만이 남는다.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우주는 보고 듣고 만지는 감각의 소멸과 동시에 소멸된다. 그러나 인식자가 사라진 후의 우주는
스스로 인식하는 우주가 된다. 이것이 파동으로 유지되는 우주이다. 보는 시각이 사라지면 보이는 우주도 사라지고 듣는 청각이 사라지면 들리는
우주도 사라지고 만지는 촉각이 사라지면 만져지는 우주도 사라진다. 오감이 모두 소멸되면 입자적인 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거대한 파동의 바다가 있다. 이것이 바로 육감의 세계이다. 이것에 의존해서 우주의 존재는 서로를 인식하고
관계를 유지해 간다. 태양과 달은 파동에 의해서 서로를 안다. 태양계와 다른 행성계 은하수와 다른 은하수도 마찬가지로 파동으로서 서로를
안다.
감각으로 인식하는 입자적 세계와 파동으로 인식하는 파동적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파동적인 우주는 딱딱하고 견고하고
무르고 붉고 희고 멀리 있고 가까이 있고가 없다. 그런 것은 모두 감각이 만들어낸 것이다.감각자가 없으면 그런 세계는 요술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 때의 우주는 파동만이 넘실거리는 거대한 침묵의 공간이다. 태양과 달과 별들은 순식간에 그 형체를 잃어버리고 그것들이 발산하는 파동만이 그
바다 속의 한조각 파도가 되어 움직일 뿐이다.
이 파동은 감각 이전의 원초적인 것이다. 생명체는 이러한 파동적 존재로부터 감각에
의존해서 입자적 세계로 넘어온 존재이므로 파동의 인식체계가 퇴화되어 버렸거나 아니면 감각의 현란함과 견고한 마술의 커튼 뒤에 감추어져 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라도 감각을 지우면 그 자리에 남는 파동을 체험할 수 있다. 감각의 커튼을 벗겨내면 파동의 세계를 볼 수 있다. 그때는 우리
자신이 파동이며 이 세계 전체도 파동이다. 그래서 감각이 세워놓은 너와 나 사이의 벽이 허물어진다. 파동은 여와 아의 경계가 없다. 입자로서의
나와 입자로서의 세계는 경계면을 갖지만 파동으로서의 나와 파동으로서의 세계는 경계면이 없다. 모든 파동은 서로 뒤섞이는 것이어서 우주 전체의
파동과 나의 파동은 하나가 된다. 기의 수련이란 바로 오감의 세계에서 육감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고 입자의 세계에서 파동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고 입자적인 존재인 나를 파동적인 존재로 바꾸는 것이다. 나아가고 넘어가고 바꾼다는 말 자체도 어폐가 있다. 왜냐하면 본래 우리는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꾼다는 말은 적합치가 않다. 그냥 된다이다. 아니 되어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지금까지 물질의 기본
질료인 아원자들이 입자임과 동시에 파동이라는 것을 밝힌 양자역학의 발견을 근거로 그런 질료들을 재료로 해서 만들어진 이 세계 역시도 입자임과
동시에 파동인 이중성의 존재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 보았다.
나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입자는 두개의 좁은 틈을 동시에 빠져나가는데 왜
나는 두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인가? 왜 나는 그게 안되는 것일까? 입자로서의 나는 불가능하지만 내가 만약 파동이라면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두개의 문을 통해서 동시에 들어가고 나갈 수 있는 마법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게 가능한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것을 해냈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그리 할 수 있느냐이다. 이 글을 통해서 그게
가능한지 알아보자.
이 세계가 단단하고 견고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 감각이 그것을 단단하고 견고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나무잎이 푸른 것은 내 시각이 그것을 푸른 색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얼음이 차가운 것은 내 촉감이 차갑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풍이나
사고로 내 팔다리가 감각을 잃으면 얼음을 갇다대도 나는 차가운 줄을 모른다. 그렇다면 감각을 상실한 내 몸에 얼음이란 차가운 물체일까? 여러개의
겹눈으로 된 벌의 눈에 꽃밭은 우리가 보는 꽃밭과 같은 세계일까? 적외선 망원경으로 보는 광경과 비슷한 환상적인 영상이 벌의 눈에 비친
꽃밭이다. 우리가 그런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면 이 세계는 명확한 경계를 가진 세계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여러 색이 겹치고 선의 경계가
희미하면서 당분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그런 세계로 인식할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인 사람에게 이 세계는 오색찬란한 세계가 아니라 어둡고 캄캄한
암흑의 세계이다. 날때부터 귀머거리인 사람에게 이 세계는 침묵의 바다이다. 척추의 마비로 사지의 감각을 상실한 사람에게 이 세계는 단단하거나
무르거나 견고하거나 허약한 세계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우리의 감각이 만들어서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가공의 세계이다. 허상이다.
오감을 뿌리채 들어내고 나면 세계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물론 오감을 지워버린 나 자신부터가 오감의 주체였던 나와는 전혀 다른
내가 된다. 이 달라진 두개의 나와 세계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어느 쪽이 실체인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는 물질의
파동이 만들어내는 정보 가운데서 오감이라는 필터를 통해 걸러진 극히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조합해낸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이 세계는 오감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무한한 정보들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눈으로 본다는 것도 세계의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눈은
적외선과 자외선을 보지 못한다. 오직 빨주노초파남보의 주파수 대역의 빛만을 인식한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자외선과 적외선의 대역까지가 시각의
인식범위가 된다. 그런 생명체가 보는 세계는 우리가 보는 세계와는 판이하게 다를 것이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같은 오디오에서 나는 음악 소리도
젊은 사람과 노인네에게는 전혀 다르게 들린다. 요즘 신세대의 음악들을 노인이 들으면 전혀 이상한 잡음이 된다. 왜냐하면 그 음악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주파수대가 노인의 귀에는 안 들리기 때문에 아주 단속적인 박자만 구별되는 이상한 음악인 것이다. 젊은이와 노인은 청각이라는 면에서는
전혀 다른 두 세계에 살고 있다. 가청주파수대가 다른 동물들은 인간과는 전혀 다른 소리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입자적인 세계는
감각기관의 성격과 기능에 따라 전혀 판이한 여러 세계를 만들어내고 생명체는 각기 자기의 오감이 만들어서 보여주는 그 세계를 유일한 세계요 진실된
세계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마법의 모자로 돌아가 보자. 어떤 관객은 눈을 뜨고 있고 어떤 관객은 눈을 감고 있다면 마법의
모자는 눈을 감은 사람한테는 없고 뜨고 있는 사람에게는 있다. 이 세계도 마찬가지다. 어떤 감각을 가진 생명체에게는 존재하는 세계가 그 감각이
없는 생명체에게는 전혀 생소한 세계이다. 이 세계는 감각의 인식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세계이다. 이런 세계를 실상이라 말할 수는 없다.
감각기관은 신뢰하기 어렵고 그것의 정보를 재조립하는 과정도 의심스러운 것이어서 그것을 통해서 보는 세계의 모습은 그다지 확신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리고 감각과 의식은 우리를 자주 속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만든 허상에 속고 있는지 모른다. 어쨌든 이 세계는 충분히 의심하여야 할
이유가 있는 무엇이다.
제2장
時空間과 波動
물리학적 용어로 시공간이라 말해지는 세계는 오감에 의해서 의식에 감지되는 것이어서 시공간은 의식이라는 전제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고 의식은 시공간적 감각에 의존하지 않고는 시공간을 인식할 수 없다. 시공간과 의식은 마주 세워놓은 두 개의 거울과 같아서 하나를
치우면 나머지 하나에서도 사라지는 상이다.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의식이 창조해낸 습관의 결과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과학자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 우리는 꿈속에서 꿈이 그려내는 어떤 세계를 실재하는 세계로 받아들인다. 매우 선명한 꿈의 경우에는 우리가 손을 대는 사물의 촉감과
색깔을 포함하여 모든 세계는 실재하는 것과 똑 같다. 그러나 꿈에 본 세계는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다. 가상적인 감각이 만들어낸 세계이고 꿈에서
작동한 감각이 우리를 속인 결과로 나타난 허구의 세계다. 그 세계가 실재하던 않던 우리의 감각이 어떤 세계를 감지하는 순간 그 세계는 실재로서
우리 앞에 나타난다.
환청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귀에 들리는 소리는 실재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 중에 어떤 한사람만이 귀신을 본다면
귀신의 세계는 그 한사람에게만 실재하는 것이다. 귀신의 모습이 눈에 보이고 귀신의 말소리가 귀에 들리고 귀신의 손이 자기 발목을 움켜쥐거나 몸에
올라타서 목을 조르는 신체적 촉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있어서 귀신은 실재하는 것이다. 귀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지지 못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오감이 귀신을 재현해내는 순간 누구든 귀신의 실재를 믿게 된다. 그러나 보이고 들리고 만져졌다고 해서 귀신은
실재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 그것이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어떠한가? 우리의
감각은 너무나 견고하고 변함없이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넘겨 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 정보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으며 감각을 불신하지 않는다. 오늘
붉게 보였던 장미꽃이 내일은 희게 보이거나 어제는 뜨거웠던 불이 내일은 차갑게 느껴지거나 하면 우리는 감각이 전해주는 정보를 신뢰할 수 없게
되고 그 순간 이 세계도 혼란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감각은 변덕을 부리지 않고 거의 동일한 정보를 반복적으로 전해준다.
그래서 우리는 그 정보로서 인식한 세계를 믿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견고한 실체로서 인식하는 있는 세계는 감각이 쉴새없이 반복해서 전해준
정보에 의해 형성된 견고한 습관의 산물이다. 우리와 세계를 연결해 주는 감각을 배제시켰을 때 나와 세계는 어떻게 되는가? 그때에도 세계는
견고하고 확실한 무엇인가? 나는 태어나 실재하는 어떤 존재인가? 나나 세계는 감각이 만들어낸 환영인가?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는 것도 실제로는 감각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지난 것에 대한 기억과 지나지 않은 것에 대한 무기억의 차이가 빚어내는 습관이다. 즉 과거는 기억
속에 저장된 사건들이며 미래는 기억 속에 저장되지 않은 사건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과 관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전체가 하나이다. 만약에
우주가 다시 수축을 시작하여 공간이 줄어들기 시작하면 시간이라는 영화의 테입은 거꾸로 돌기 시작한다.
물상 교과서에 흔히 나오는
그림이 있다. 우주의 별들이 팽창하는 공간 속에서 어떻게 같은 거리를 서로 유지하는 지 보여주는 풍선의 그림이다. 고무 풍선에 점들을 찍어놓고
풍선을 불면 각 점들 간의 거리는 멀어지지만 점들 사이의 거리의 비는 변하지 않는다. 이 풍선 위에 개미가 한 마리 있다고 치자. 풍선을 불수록
개미가 한 점으로부터 다음 점으로 기어가야 하는 거리는 멀어질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풍선이 부푸는 것과 같은 비율로 개미의 덩치가 커진다면
풍선이 아무리 커져도 개미가 볼 때 다음 점까지의 거리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반면에 풍선이 부푸는 것보다 개미의 덩치가 커지는 비율이 더
크다면 오히려 개미는 두 점간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고 느낄 것이다. 개미의 덩치는 일정한데 풍선이 부푸는 세계에서 개미가 아무리 열심히
움직여도 다음 위치의 점은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걸어가면 갈수록 점은 더욱 멀어진다. 이것은 시공간의 확장이란 곧 시간이 늘어남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우주이다. 개미가 있는 위치로부터 모든 점들은 사방으로 멀어져 간다. 개미가 걸어간 만큼이 과거이고 점점 더 멀어지는 다음
점이 아직 가지 못한 미래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결코 알 수 없다. 멀어져 가는 점을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과거뿐이다. 반면에 개미의 덩치는 일정한데 풍선이 쭈그러든다면 개미는 움직이지 않는데도 다음 위치의 점이 자기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래서 주위의
수많은 점들이 자기를 향하여 다가와서 자기가 서있는 위치의 점에 합쳐지는 것을 볼 것이다. 이때의 개미는 과거를 모르는 채 계속되는 미래만을
보게된다. 개미와 풍선이 똑같은 비율로 부풀면 어떻게 되는가? 개미와 각 점 사이의 거리는 불변이다. 개미가 아무리 걸어도 풍선 위에서의 위치는
변함이 없다(풍선이 완전한 구형이고 모든 점이 균등하게 찍혀있다고 가정할 때). 어느 위치에 있더라도 개미는 아까 있었던 위치와 현재의 위치와
다음 순간에 자기가 있게될 위치의 차이점을 알 수 없다. 개미의 기억에는 더해지는 것도 없고 감해지는 것도 없다. 시공간은 생명체의 감각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감각이란 바로 팽창하는 공간과 확장되는 시간이 만들어 내는 마술의 영상이다.
우리는 우주라는 부풀어 오르는 풍선 위에 있는 개미이다. 그래서 우리 주위의 점들은 우리가 있는 위치로부터 사방으로 퍼지면서 멀어져간다. 이 멀어지는 각
점과의 상대 위치가 시공간 상에서 우리의 위치이다. 점들이 우리로부터 멀어져 가거나 가까이 다가오지 않으면, 즉 모든 점들이 고정불변이면 풍선
위의 개미는 자기의 현재 위치를 알 수 없다. 주위의 모든 풍경이 똑 같고 방향을 감지할 수 있는 특이한 경치가 아무 것도 없는 사막의 한복판에
있는 것과 같다. 완전한 구형의 풍선 위에서 상대 위치의 산정이 가능한 것은 모든 점들이 멀어지거나 가까이 움직이는 이동 상태일 때 만이다.
고정된 풍선 위에서는 어디에 있거나 똑같은 상태이다. 이와같이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물리적 세계는 고정 불변한 실체가 아니라 대폭발 이후에
생긴 시공간이 팽창을 하고 있는 상태가 만들어낸 것이다.
만약에 우주가 어떤 시점에서 후퇴하여 수축을 하게 된다면 그때의 세계는
어떠할 것인가? 그 때에도 세계는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감각이 인식하는 세계는 지금과 전혀 다른 것이 될 것이다. 영화 필름에 담겨있는
영상들은 변함이 없지만 거꾸로 돌리면 전혀 다른 영상이 재현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블랙홀 주위에서 공간이 수축되어 우그러질 때 그 속에 인간이
있다면 축소되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축소되는 우주에서 시간은 빨리 흐른다.
공간의 크기와 시간의 흐름은
태초이래 언제나 변하고 있는 팽창의 진행형이다. 그래서 시공간은 고정된 세계가 아니다. 다만 시공상 상의 어떤 위치에 있는 내가 오감에 의해서
그렇게 느끼는 세계일 뿐이다. 시간적인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공간적인 멀고 가까움도 내가 '그렇다고 받아들임으로서 그러한
세계'이다.
마치 망원경 속의 새와 같다. 망원경으로 먼 곳의 나무 위에 앉은 새를 본다면 조절하는 망원경의 배율에 따라 새는
작게도 보이고 크게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커지거나 작아지는 것은 나의 망막에 맺히는 상이지 그 새가 아니다.
우주가 이토록 넓게
여겨지는 것은 내가 볼 수 있는 거리가 너무나 좁기 때문이다. 만약에 내가 우주의 끝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우주는 대단히 좁아 보일
것이다. 내 손이 우주 저편의 별에 닿을 만큼 길다면 우주는 내 손바닥 안에 있는 공과 같을 것이다. 우주가 넓은 것이 아니고 내 오감의 반경이
너무나 작은 것이다. 나에게 내 손바닥은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내 손에 무언가가 대이면 나는 그것을 즉시 안다. 그러나 뇌졸증으로 반신 불수가
되어 손발에 감각이 없게 되었다고 할 때 내 손바닥이 나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라. 그런 나에게 손바닥은 우주의 반대편에 있는
것과 같다. 내 손을 뜨거운 불이 태워도 그 뜨거움이 나에게 전해지는데 억겁의 세월도 부족하다. 감각을 영원히 전해주지 않는 나의 손은 나에게서
너무나 멀리 있는 어떤 물체이다.
나의 감각이 우주의 끝에서 끝에 미칠 때에 나는 우주를 품속에 안을 수 있다. 부풀어오르는 풍선과
같은 비율로 덩치가 커진 개미처럼 나를 전 우주의 부피만큼 키울 수 있다. 내가 느끼는 감각의 범위를 우주의 전체만큼 확장할 수 있다. 은하수
저편, 저 까마득한 어두운 궁창의 공간 끝에서 별이 하나 생기고 사라질 때에 나는 그것을 느끼고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나는 우주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고 있는가? 바로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이다. 무디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그런 정보를 우리로부터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도 우리 몸에서는 수천만개의 세포가 죽거나 소멸되고 새로운 세포가 태어나서 그 자리를 메꾸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인데도 나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알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모르는 것은 나의
의식이지 내가 아니다. 나는 내 몸의 수조 개에 달하는 세포 하나하나에 일어나는 일을 모두 알고 있다. 다만 나의 의식이 그것을 모른다. 내
몸에 바이러스나 세균이 침입하면 나는 그것을 안다. 박테리아 한 마리가 들어와도 즉각 아는 것이 나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처를 한다. 그런데
왜 병이 난 다음에야 아느냐? 의식이 그것을 몰라서 그렇다. 우주의 저편에서 별이 하나 폭발해도 나는 그것을 안다.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 중에 내가 모르는 것은 없다. 다만 나의 의식이 그것을 모를 뿐이다. 동시에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이 우주는 알고 있다. 내가 병이 들면 그
순간 내가 병이 든 것을 온 우주가 안다. 내가 죽으면 부고장을 안 돌려도 우주 전체가 나의 죽음을 안다. 세포 하나가 소멸된 것을 내 몸이
즉각 아는 것처럼.
무엇으로 우리는 아는가? 바로 '기'로서 안다. 그것이 의식 이전의 나이고, 감각을 초월한 나이다. 바로
파동으로서의 나이다. 파동으로서 나는 우주와 하나이고 일체이다. 그리고 그것을 제6감이라고
한다.
시공간이라는 물리적 세계는 감각의 결과물이며 시공간의 크기는 감각의 범위와
상대적인 관계에 있다. 감각이 제한될수록 세계는 그만큼 제한되는 것이고
감각의 범위가 좁을수록 세계는 그만큼 커진다.
그렇다면 감각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시각은 빛이 우리 눈에 들어오는 거리 이내이며, 우리
눈이 인식할 수 있는 주파수 범위 안이다. 물론 빛을 시각이 포착한다 하더라도 그 대상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별빛이 눈에 보여도
우리는 그 별에 대해 무지하다.
청각은 마찬가지로 소리가 닿는 거리와 가청 주파수 이내로 인식 가능한 세계를 좁혀 놓는다. 기차가 오는
것을 귀로 들어 아는 거리는 고작 수백미터이지만 레일에 귀를 대고 들으면 서울역에서 용산역을 출발하는 기차를 알 수 있다. 후각은 불과 몇
미터의 인식 반경을 가질 뿐이다. 물론 개와 같은 짐승들은 수백 미터까지 감지가 가능하다. 촉각이나 미각은 말할 나위없이 이 세계를 좁게
만든다. 장님은 손으로 더듬기 전에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우리가 만약, 장님에 귀머거리라면 우리에게 있어서 인식 가능한 세계는 내 몸에
접촉되어 있는 부분 만이다. 우리에게 청각이 주어지면 소리가 들리면 만큼 인식은 확대될 것이고 시각이 생기면 보이는 만큼 인식 가능한 세계의
범위가 확대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감각의 인식 반경을 확대하면 우리는 세계를 더 넓고 더 크게 인식할 수 있고 그만큼 세계는 우리에게
다가오며 더욱 작아질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빛과 소리와 냄새라는 감각의 매개체와 그것을 감지하는 우리의 감각기관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서 우리는 그것을 원하는 만큼 확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훈련과 천부적인 재능에 따라서 어느 정도는 차이를 보이지만 그것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감각의 훈련에 의한 인식능력의 향상은 한계가 분명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해결방법을 찾게
되는 것이다. 오감을 떠나서 세계를 인식하는 또 다른 길은 없는가 하는 것이다. 현재로 봐서 오직 한 가지 길이 있어 보인다.
그것이 바로
육감이라는 것이다. 식스 센스!
이것은 바로 입자적인 감각의 인식이 아닌 파동에 의한 파동적 세계의 인식 체계이다. 그것을 우리는 일상의
생활에서 자주 겪고 체험하지만 그것에 대한 무지 때문에 흔히 무시하려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육감이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파동의 세계로
진입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입자적 존재의 한계를 벗어나 파동적 존재로서 우주와 하나로 합일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가능성이 그것에
있다.
그것은 나와 세계의 경계를 허물고 이승과 저승의 간격을 메우고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를 잇는 가교이다. 내가 부처를 만날 수 있고,
내가 예수를 대면할 수 있는 통로이다. 아니 내가 부처이고 나와 예수가 다른 사람이 아님을 자각할 수 있게 하는 초월 인식이요, 초자아의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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