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대 암각화는 바위에 새겨진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암면에 그림을 그리거나 새기는 문화는 세계적으로 구석기 시대 후기부터라고 한다. 예사 그림이 아니라는 것은 서북러시아 해안에 새긴 바위그림이나 몽골 알타이 지방의 암각화를 접해 본 사람일수록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찬사는 그칠줄 모른다.  더구나 반구대 암각화의 형상이나 선묘를 한번이라도 그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더더욱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황홀경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반구대 암각화의 조형미는 시대를 통털어서 가장 앞서 있다. 바위에 새겨 넣은 여유로운 공간의 배치나 여백의 아름다움을 살려낸 절대미와 오묘하게 선묘된 음양각의 처리는 찬사와 예찬을 능가하는 초월적인 힘과 여유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지닌 이땅에 사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더구나 이러한 세계적인 유산을 길이 보전하고 아껴주는 성숙된 상식과 여유가 아쉬운 실정이다.  일부 학자나 대학에서 연구를 한답시고 탁본을 뜨지 않나,  실측 연구를 한답시고 이리저리 핀을 박는가 하면, 모형을 뜬답시고 실리콘을 퍼붓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몹쓸짓에 심미적 분노를 느끼면서도 어디 하소연 할 때가 없는 실정이다.  제발 그대로 놔둡시다. 수천년 동안 온전하게 보전되어 내려 온 것인데 새삼스럽게 연구니 보호니 하는 핑계로 훼손을 심화시켜서야 되겠습니까 ?  옛 속담에 아는 놈이 도둑이라는 말이 있는데 / 제발 / 아는체 하는 분들 각성하시고 가만히 둡시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시고 지금의 문제가 설령 있다면 다음세대나 그 다음 세기로 문제를 넘겨 줄 수 있는 아량을 없는지요 ?

  잠깐의 제 넉두리에 화를 내시지는 않겠지요

1. 반구대 암각화의 규모와 양식  

   반구대 암각화는 너비 6.5m 높이 3m 가량의 중앙암면으로서 중심으로 좌우 15∼16m에 걸쳐 짐승이나 사람, 수렵이나 어로를 위한 물품 등 200여개 정도의 형상들이 음양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들은 바위를 쪼아 형상을 나타낸 뒤 그 위에 다시 그림을 새기는 겹새김과 오랜 세월 동안 비와 바람으로 말미암은 풍화와 침식 등으로 인하여 내용을 알기 어려워진 부분도 많다.  암각화가 새겨진 면은 중앙 암면을 포함하여 모두 9개에 이른다. 그림은 표현대상의 내부를 음각으로 모두 쪼아낸 "음각면쪼으기", 음각으로 쪼아내면서 부분적으로 형상을 양각으로 남긴 "음양각면쪼으기", 윤곽선만으로 쪼아낸 "음각선쪼으기",  윤곽선과 투시골격선을 함께 살린 "투시음각선쪼으기"에 의한 그림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2. 반구대 암각화의 위치와 역사

 1)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234-1 (국보 285호)  1996년 지정 

   반구대란 이름은 절벽이 있는 산등성의 암반모습이 마치 앉아있는 거북 같다하여 불리워진다. 반구대 암각화는 반구대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져 있다. 1971년 12월 25일 동국대 문명대 교수에 의해 발견되어 우리나라 선사시대 바위 그림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귀중한 유적이다. 울주구 언양면 대곡리 대곡천 중류(사연댐의 상류)의 암벽에 새겨져 있는데 평균 70m 높이에 하류로 이르는 계곡 오른쪽 절벽에 석재병풍을 이어 놓은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가장 많이 쪼아 새겨진 암벽부분은 석양무렵을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햇볕이 들지 않는 곳이다. 즉, 옛날에는 북쪽을 향하고 있으므로 풍화에 의한 침식이 진행되었으나 현재에는 몰속에 침수되어 있어 풍화나 인위적인 해악, 결빙과 같은 온도에 의한 균열이 방지되고 있다. 원래는 물에 잠기지 않았지만 현재는 사연댐 속에 잠겨 있어서 심한 갈수기를 제외 하곤 볼 수 없는 실정이다.(발견 당시 이미 댐이 있었다.)  반구대 암각화는 1971년에 발견해 낸 것으로  배, 고래, 거북, 사슴, 범, 족제비, 멧돼지, 사람 같은 형상들이 새겨져 있다.

 

 2)  "한국미술 오천년전"이라는 역사성을 내세우는 주된 문화 유산이 바로 반구대 암각화이다. 오천년이라는 연대 추정의 근거는 분분하다. 신석기에서부터 청동기, 초기철기시대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청동기나 초기 철기시대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것은 포경에서 작살같은 그림이나 암각화를 새기기 위해 청동이나 철기같은 도구가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기시대의 정교한 도구들은 모두 돌로 다듬어낸 것들로 미루어 볼 때 돌을 가장 손쉽게 쪼아 낼 수 있는 것은 청동이나 철보다는 숙련된 솜씨로 석기를 다등어 내듯 돌로 쪼아내는 것이 한결 수월하다는 주장을 해 본다. 

 

 

작살에 꽂힌 고래 / 고래

사람 / 방패를든 사람

사슴  / 사슴과 족제비

 

 

 

 

 

 

 

 

 

수직으로 있는 호랑이

인면상

멧돼지

 3. 반구대 암각화의 표현 기법

 1) 위의 예시된 암각화의 부분을 보면 이러한 형상들은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중첩된 표현 기법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기존의 선대 집단들이 남긴 형상에 담긴 상징적 의미 또는 세력, 권위를 부정하기 위한 또 다른 표현을 함으로써 자신들을 신성시하거나 권위를 내새우기 위한 목적으로 선대의 흔적에 덧쪼으기를 하였던 것 같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이미 그려진 그림이 자신의 시각에 맞지 않으면 가필하여 자신의 시각을 만족해 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러한 흔적이 극히 일부분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의 선대들의 역사성에 대한 존귀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2) 암각화에 새겨진 표현기법들은 대부분 음각기법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오랜세월을 거치는 동안 그들의 능숙하고 다양한 표현기법의 발전상을 엿볼 수 있다. 그 발전적인 표현 기법의 변천은 다음의 과정으로 나타난다.

  1. 음각선쪼으기 : 초기 표현에서 나타나는 표현기법으로 외곽의 윤곽선만으로 쪼아낸다.
  2. 음각선무늬쪼으기 : 윤곽선의 기교에서 무늬를 표현하는 기교로 발전한다.
  3. 투시음각선쪼으기 : 윤곽선에 따른 표현이 능숙해지면 형상의 내부를 표현해 내는 기법으로 발전한다. 마치 동물의 몸 속 내부를 꽤뚫어 보는 듯한 투시기법이나 골격을 과감하게 표현해 내게 되는 것이다.
  4. 음각면쪼으기 : 쪼아내기 기법이 능숙능란해지면 선쪼으리에서 면쪼으기로 넘어간다. 즉, 구석기시대의 사실적인 묘사에서 신석기 시대의 단순화된 형상으로 바뀌듯이 과감하게 단순화되어 전체면을 쪼아내는 형산으로 바뀌어 간다.
  5. 음양각면쪼으기 : 전체면을 음각으로 쪼아내다가 세부의 형상을 남기는 표현기법으로 발전한다. 고래의 몸에 작살을 남기거나 잉태한 고래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발전한다.

4. 반구대 암각화 이야기

1)  표현기법에서 음각면쪼으기 기법에는 고래그림이 많이 있는데 돌고래, 향유고래, 솔피, 큰고래, 혹등고래, 흰긴수여고래 등 6종이 있다. 이것은 그 옛날 이곳 가까이가 모두 바다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조선시대의 문헌에는 16세기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현재의 태화강 하구에서 10km위쪽에 해당하는 학성 근처까지 미쳤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에도 암각화에서 20km떨어진 울산만에는 고래가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동안 한반도 정착집단들이 농경과 기마민족의 특성을 지녔다는 설과 함께 배와 고래 작살 등의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로기술도 함께 하였음을알 수 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동물상 암각화의 대표이다.
 

2) 반구대 암각화 중에서 대부분의 동물그림이 한 곳에 모여 있다. 이렇게주되게 모인 부분을 주암면이라고 하는데, 주암면의 크기는 세로 3m에 가로 6.5m 쯤 되는데 일일이 쪼아서 형태를 만든 그림들이 밀집되어 있다. 한 암면에 밑에 깔려 있는 걸 제외하고도 백 2,3십종류의 동물들이 있다. 모두 합하면 3백 종류가 꽉 차 있는데 이것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기이한 것이다.

 


  3) 반구대 암각화는 표현 기법의 변화에 따라 수천년간 집단의 표현이 지속되어왔다. 사실적인 선쪼으기의 표현기법은 신석기 초기까지 그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의 내용에서 살펴보면 후대에 그려진 어로 수렵의 양면성 때문에 수렵어로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으로 보자면 아마도 이들은 어로나 수렵의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전문집단일 가능성이 크다. 또 배가 신석기 문화 단계에의 뗏목이나 통나무배가 아닌 승선 인원 20여명의 표경선이라는 점과, 포경에 사용된 작살과 작살을 쏘는 노의 그림이 금속문화를 강하게 시사하고 있는 점에서 금속문화 단계에 진입한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왼쪽의 음각선쪼으기 방식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표현의 초기 형태로 보이는 최소한의 음각선으로 사물을 표현하려 애썻던 흔적이 보인다. 보통 분명하고 명확한 형상에 이목을 집중시켜 역사를 인식하려는 경향이 많은데 이것은 잘못된 발상이다. 수천년을 내려온 표현방식을 하루 아침에 역사적 사실로 규명하겠다는 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좀더 면밀한 분석과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연구에 따른 주의나 주장도 좋으나 그에 따른 분명한 검증이나 논리의 타당성이 입증되어야 하겠다.

 

   따라서 초기 반구대 암각화는 시대와 역사를 뛰어넘는 기나긴 세월동안 반복된 표현으로 보아야 하며 그 역사는 최초의 표현기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후대에 새긴 형상에 초점을 맞추는 어리석은 누를 범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최초의 표현 즉, 신석기 초기의 선쪼으기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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