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언양 ‘반구대’
요도(蓼島), 그 섬은 거기에 없었다. 기록에는 분명 포은 정몽주가 경남 울주군 언양의 ‘요도’라는 곳에 유배되어 1년간 살았다고 나와 있다. 그래서 ‘포은대(圃隱臺)’가 있는 반구대(盤龜臺)보다 먼저 언양읍으로 달려간 것인데, 누구에게 물어봐도 ‘요도’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대체 그 섬은 어디로 달아나 버린 것일까. 요도의 부재는 잠시 나를 혼란 속에 빠뜨렸다.
그런데 현지 향토사학자 윤대헌씨를 통해 사실을 확인해 보니 요도는 섬이 아니고 육지였다. 감천과 남천의 두 물줄기가 언양을 감싸고 흐르다가 합류하는 곳에 자연적으로 삼각주가 형성되었는데, 그곳이 마치 섬처럼 보여 ‘요도’라고 불렸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여뀌 ‘요(蓼)’자를 썼던 것을 보면 아마 그곳이 물가라 여뀌가 많이 자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요도는 섬이라고는 할 수 없고, 엄연한 육지였다. 현재 그곳은 행정구역상 어음상리로 되어 있다. 흔히 ‘마흘부락’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정몽주가 유배 당시 기거했던 곳이 정확하게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적려유허지’ 표지판도 따로 만들어 놓지 않았기 때문에, 아쉬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요도 대신 언양에서 가까운 작괘천(酌掛川)부터 찾아가 보기로 했다. 간월산에서 발원하여 언양 쪽으로 흐르는 시냇물이 바로 작괘천이다. 이곳에는 정몽주가 유배생활을 할 당시 자주 찾아가 시름을 달래며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다는 작천정(酌川亭)이 있기 때문이다. ‘작괘천’이나 ‘작천정’이나 발음하기도 어렵고 도무지 낯설기만 한데, 그곳에 가서 보니 과연 그 이름에 걸맞은 풍경이 내 시선을 끌었다.
작천정 누각에서 작괘천을 내려다 보니 술잔을 걸어놓은 듯한 암반 위로 옥구슬 같은 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거센 물살에 의해 형성된 암반 위의 구멍들은 그대로 술잔의 모양새였고, 그곳으로 흘러넘치는 물은 맑은 술에 다름 아니었다. 휘영청 밝은 달밤에 한 선비가 작천정 누각에 올라 술을 마시며 그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다면, 그가 바로 신선이 아니고 무엇이랴 싶었다. 작천정 누각에 앉아 술을 마시지만, 그 신선은 마음속으로 저 아래 암반으로 된 술잔에 빠진 달을 흠향(歆饗)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작천’이란 술잔 속에 빠진 달을 마시는 정몽주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유배 생활의 신산스러움을 저 구슬 같은 맑은 물로 씻어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몽주는 고려 충숙왕 때(1337) 태어났다. 그의 운명은 이미 탄생할 때부터 예견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떨어뜨리는 꿈을 꾼 후 그를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렸을 적 그의 이름은 ‘몽란(夢蘭)’이었다. 난초는 고결한 절개를 의미하고, 화분을 떨어뜨린 것은 그가 비명(非命)으로 죽을 운명을 암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24세에 장원 급제한 정몽주는 일찍부터 그 명성이 알려졌으나, 공민왕이 시해된 직후인 39세 때 친원파의 ‘배명친원(拜命親元)’정책에 반대하다가 그들의 미움을 사 언양으로 유배된 것이다. 유배 당시 그는 울주의 명승지로 손꼽히는 반구대, 작괘천 등을 돌아보며 그곳 유생들과 함께 시를 읊으며 학문을 닦았다.
실제로 정몽주가 유배당한 곳은 요도지만, 현재 그의 유허비가 서 있고 그의 학문을 기리는 반구서원(盤龜書院)이 자리 잡고 있는 ‘반구대’가 적소(謫所)라고 봐야 할 것이다. 밤의 거처는 요도에 있었겠지만, 주로 낮 시간은 반구대에 와서 보냈을 것으로 보인다. 반구대는 경치가 좋기로 이름이 나서 옛날부터 시인 묵객이 즐겨 찾았던 곳이고, 풍류와 시문을 알았던 그로서는 유배의 시름을 달래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구대는 언양읍 대곡리 대곡천 하류에 자리 잡고 있다. 대곡천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갑자기 나타나는 아름다운 바위 절벽의 풍광이 범상치 않다. 그 왼쪽에 반구서원이 있고, 그 맞은 편에 포은대가 보인다. 반구서원은 흔히 반계서원(盤溪書院)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반계(磻溪) 유형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옛날 반구대와 인연을 맺었던 정몽주를 비롯하여 이언적, 정구 등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반구서원에서 맞은 편을 바라보면 마치 거북이 물가를 향해 넙죽 엎드려 있는 모습의 산이 보인다. 그 거북의 머리쯤에 해당되는 곳이 바로 포은대다. 정몽주의 호를 따서 후세 사람들이 지은 이름이다. 바로 그 거북의 머리 에 ‘포은대영모비(圃隱臺永慕碑)’가 모셔진 비각이 서 있다. 이 비각으로 접근하는 길은 배를 타고 가는 수밖에 없다. 물이 빠지면 걸어서도 갈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아래 댐에서 물을 가두어놓고 있는 상태라 어쩔 수 없이 배를 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배는 근처 식당에 부탁하면 보트나 노를 젓는 나룻배를 빌려준다. 배를 타고 포은대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아 무성한 시누대만 길을 막고 서 있다. 겨우 길을 찾아 올라가니 포은대영모비를 모신 비각이 보인다. 비각은 대곡천 하류의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서 있다.
포은대 바로 아래는 깎아지른 절벽인데, 다시 배를 타고 절벽 근처로 다가가니 온갖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이름들 사이에 학 그림이 새겨져 있다. 날개를 접고 등 쪽으로 부리를 향한 학의 모습이 아주 뚜렷하다. 바위에 새긴 그림 같지 않고 종이 위에 붓으로 그린 듯 깃털까지도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포은대에서 대곡천 하류 쪽으로 더 내려가면 ‘반구대 암각화’가 나온다. 그림이 그려진 바위벽은 전체 높이 약 70m에 너비 20m이며, 그림이 그려진 부분은 높이 2.5m에 너비 9m 정도이다. 그림 속에는 호랑이, 사슴, 멧돼지 같은 육상 동물도 보이지만, 대부분 고래 그림이 주류를 이룬다. 이 암각화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마땅히 보호가 되어야 하는데, 대곡천과 태화강이 만나는 지점에 사연댐을 쌓아 저수지로 만든 다음부터 물에 잠겨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저수지 물을 빼는 봄철 약 한 달가량(3월 중순에서 4월 중순)만 암각화 그림을 볼 수 있다.
물이 차서 암각화는 볼 수 없었고, 나는 다만 그 넘실대는 물만 바라보다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다시 반구대의 절경을 뒤로 한 채 포은대와 반구서원을 지나치면서 비운에 간 정몽주를 생각해 보았다. 해배되었을 때 개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반구대에 남았다면, 그는 어쩌면 학처럼 오래 살며 학문만 연구하다 고고하게 여생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개성으로 가서 역성혁명으로 조선왕조가 들어서는 것을 개탄하며 보았고, 결국 이방원의 세력에 의해 선죽교에서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그는 자신의 죽을 운명을 미리 알고 선죽교를 건너갈 때 말을 거꾸로 타고 갔다고 한다.
문득 포은대 밑으로 흐르는 대곡천 물빛을 보니 진한 녹색이었다. 댐을 막는 바람에 오염이 심해 녹조현상이 일어난 것인데, 그 순간 내 눈에는 그것이 이상하게도 정몽주가 흘렸을지도 모르는 녹색 핏물로 보이는 것이었다.
▲정몽주
고려 충숙왕 때(1337) 태어나 예조정랑 겸 성균관박사, 대사성, 봉익대부, 예의판서, 예문관 대제학 등에 제수되었다. 이러한 관직을 거치면서 그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열어 후진을 가르치는 한편, 유학을 크게 진흥시켜 성리학의 기초를 세웠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왕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고려왕조에 충절을 바친 그는, 그의 나이 60세(1392) 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호는 포은(圃隱)으로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문집으로 ‘포은집’이 있다.
▲여행안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언양 인터체인지로 빠져나가면 언양읍이 나온다. 언양은 암각화로 유명한 지역이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의 대곡천 하류에 ‘반구대 암각화’가, 그리고 대곡천 상류지역에는 천전리 암각화가 있다. 천전리 암각화가 있는 곳에는 공룡의 발자국도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천연의 요새처럼 바위 절벽으로 이루어진 풍경이 아름다워 옛날부터 화랑들이 무술을 익히는 등 심신수련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언양 근처의 가지산 자락에는 석남사가 안겨 있고, 바닷가로 나가면 간월사터와 망해사터, 대왕암과 처용암이 있어 들러볼 만하다.
〈엄광용·소설가 www.aromabook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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