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년전 해양문명 ‘고래숨결’ 고스란히
울산 12경―반구대
울산 12경―반구대
거북이 납작 엎드린 형상이라 ‘반구대’
암각화 원시인 생활·포경역사 한눈에
봉계 ‘한우불고기 축제’ 즐기는 기회도
암각화 원시인 생활·포경역사 한눈에
봉계 ‘한우불고기 축제’ 즐기는 기회도
◇ 반구대는 언양읍 대곡리의 시연호 끝머리에 층을 이룬 바위 모양이 마치 거북이 넙죽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먼 옛날 구석기 시대나 신석기를 살았던 조상들은 산에서 사냥을 하고 강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아주 단순한 도구만을 사용하며 살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이미 35년 전 울산에서는 한반도의 신석기인들이 발달된 해양문명을 가지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자료가 발견되었다. 이 유적이 바로 울산 12경의 하나인 반구대이다.
반구대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쉬엄쉬엄 조금만 걷다보면 다리가 나온다. 다시 15분 정도 걸으면 갈림길과 마주친다. 이 곳이 대곡리 암각화 1.2km, 천전리 암각화 1.2km 총 길이 2.4km의 원시산책로 중간지점인 천전삼거리이다. 먼저 오른쪽으로 ‘반구대 가는 길’을 따라 몇 분을 걸어가다 보면 갑자기 전혀 색다른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미리 반구대라는 것을 모르고 오더라도 돌연 선사시대에 온 느낌과 함께 마음이 포근해진다. 그 순간 지그시 눈을 감으면 계곡 주변에서 원시인들이 되살아나 창살로 물고기를 잡고 뼈바늘로 옷을 짜며 사냥한 고기를 다듬기 시작한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이런 우리의 상상력이 턱없이 부족함을 깨닫게 된다.
울산 언양읍 대곡리에 위치한 반구대는 끝부분에 층을 이룬 바위 모양이 마치 거북이 납작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반구산(265m)의 끝자락이 뻗어 내려온 곳에 테라스처럼 층층이 쌓인 점판암으로 형성된 기암절벽이 솟아있고, 돌 틈새 곳곳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와 그 아래를 굽이쳐 흐르는 대곡천의 맑은 물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진경산수화다. 평지를 따라 수만 년 동안 물이 흘러 깊은 골짜기를 만들었다. 이 물줄기는 숱한 범람과 침식을 거듭하여 결국 거북 형상을 만들어냈다. 아랫부분은 많이 깎여 머리의 형상이고 윗부분은 적게 깎여 등의 형상이 된 것이다.
또한 이 곳은 고려 충신 정몽주가 언양읍으로 유배되어 1년 간 살면서 유유자적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반구대의 수려한 풍경에 취해 이곳에서 자주 시를 짓고 술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는 왼쪽에 그의 학문을 기리는 반구서원이 자리 잡고 있고 그 머리부분에 귀양살이의 괴로움을 달래 주었다는 포은대와 ‘포은대영모비’가 모셔진 비각에서도 알 수 있다. 또 유배 당시 그는 울주군의 반구대와 작괘천을 돌아보며 그 곳 유생들과 함께 시를 읊으며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나무다리를 따라 잠시 내려와 시야를 암벽 한 곳에 좁히면 수천 년 전 선사인이 새긴 바위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국보 제 285호 반구대 암각화이다. 이 암각화에는 296점의 각종 그림이 새겨져 있다. 동물상이 193점, 인물상이 14점, 도구상이 11점, 기타 미상 78점이다. 특히 동물상 가운데 고래 종류가 58점으로 가장 많은데 이 고래들은 한반도 인근에 회유하던 긴수염·혹등·귀신고래였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도 고래의 종류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암각화이다.
특히 20명이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모습도 있는데 이는 이미 약 5,000~7,000년 전에 큰 배를 만들어 고래를 잡았다는 결정적 증거이다. 즉 세계 고대 문명에 필적할 만한 탁월한 문명이 태화강 상류에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를 태화강 문명이라고 일컫는다. 이런 가치 때문에 과거 도올 김용옥은 “천전리 암각화와 함께 반구대 암각화는 경주 문화재 전체에 필적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옛 울산만에서 10km 떨어진 곳에 그림을 새겨놓았는지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혹자는 먼 옛날 울산시가지는 바다였고 이 곳이 해안가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반구대암각화의 제작연대와 관련해서는 지난해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토기조각에서 이 곳의 사슴문양과 같은 문양이 발견되어 자연스레 암각화의 제작연대가 최소 5,000년 전이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반구대 암각화만 보고 되돌아 갈 수는 없는 법.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 ‘천전리 암각화 가는 길’을 따라 잠시 걷다보면 조금 전과는 색다른 구경을 할 수 있다. 바로 천전리 암각화(국보 제 147호)와 천전리 공룡발자국 화석이다.
천전리 암각화는 반구대 암각화와는 달리 추상적인 기호들로 이루어져 있다. 1973년 국보로 지정될 당시에는 사슴, 인물상 등 40여 개의 형상과 기하학 무늬 등이 있는 것으로 기재되었지만 2003년 계명대 연구팀에 의해 이 암각화는 대부분이 마름모꼴과 동심원의 추상적인 문양들이 체계적으로 연결된 거대한 원시그림 문자라는 주장이 대두되기도 하였고 지난해에는 일부 문양은 농경사회의 식물을 나타낸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반구대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쉬엄쉬엄 조금만 걷다보면 다리가 나온다. 다시 15분 정도 걸으면 갈림길과 마주친다. 이 곳이 대곡리 암각화 1.2km, 천전리 암각화 1.2km 총 길이 2.4km의 원시산책로 중간지점인 천전삼거리이다. 먼저 오른쪽으로 ‘반구대 가는 길’을 따라 몇 분을 걸어가다 보면 갑자기 전혀 색다른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미리 반구대라는 것을 모르고 오더라도 돌연 선사시대에 온 느낌과 함께 마음이 포근해진다. 그 순간 지그시 눈을 감으면 계곡 주변에서 원시인들이 되살아나 창살로 물고기를 잡고 뼈바늘로 옷을 짜며 사냥한 고기를 다듬기 시작한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이런 우리의 상상력이 턱없이 부족함을 깨닫게 된다.
울산 언양읍 대곡리에 위치한 반구대는 끝부분에 층을 이룬 바위 모양이 마치 거북이 납작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반구산(265m)의 끝자락이 뻗어 내려온 곳에 테라스처럼 층층이 쌓인 점판암으로 형성된 기암절벽이 솟아있고, 돌 틈새 곳곳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와 그 아래를 굽이쳐 흐르는 대곡천의 맑은 물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진경산수화다. 평지를 따라 수만 년 동안 물이 흘러 깊은 골짜기를 만들었다. 이 물줄기는 숱한 범람과 침식을 거듭하여 결국 거북 형상을 만들어냈다. 아랫부분은 많이 깎여 머리의 형상이고 윗부분은 적게 깎여 등의 형상이 된 것이다.
또한 이 곳은 고려 충신 정몽주가 언양읍으로 유배되어 1년 간 살면서 유유자적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반구대의 수려한 풍경에 취해 이곳에서 자주 시를 짓고 술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는 왼쪽에 그의 학문을 기리는 반구서원이 자리 잡고 있고 그 머리부분에 귀양살이의 괴로움을 달래 주었다는 포은대와 ‘포은대영모비’가 모셔진 비각에서도 알 수 있다. 또 유배 당시 그는 울주군의 반구대와 작괘천을 돌아보며 그 곳 유생들과 함께 시를 읊으며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나무다리를 따라 잠시 내려와 시야를 암벽 한 곳에 좁히면 수천 년 전 선사인이 새긴 바위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국보 제 285호 반구대 암각화이다. 이 암각화에는 296점의 각종 그림이 새겨져 있다. 동물상이 193점, 인물상이 14점, 도구상이 11점, 기타 미상 78점이다. 특히 동물상 가운데 고래 종류가 58점으로 가장 많은데 이 고래들은 한반도 인근에 회유하던 긴수염·혹등·귀신고래였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도 고래의 종류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암각화이다.
특히 20명이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모습도 있는데 이는 이미 약 5,000~7,000년 전에 큰 배를 만들어 고래를 잡았다는 결정적 증거이다. 즉 세계 고대 문명에 필적할 만한 탁월한 문명이 태화강 상류에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를 태화강 문명이라고 일컫는다. 이런 가치 때문에 과거 도올 김용옥은 “천전리 암각화와 함께 반구대 암각화는 경주 문화재 전체에 필적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옛 울산만에서 10km 떨어진 곳에 그림을 새겨놓았는지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혹자는 먼 옛날 울산시가지는 바다였고 이 곳이 해안가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반구대암각화의 제작연대와 관련해서는 지난해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토기조각에서 이 곳의 사슴문양과 같은 문양이 발견되어 자연스레 암각화의 제작연대가 최소 5,000년 전이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반구대 암각화만 보고 되돌아 갈 수는 없는 법.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 ‘천전리 암각화 가는 길’을 따라 잠시 걷다보면 조금 전과는 색다른 구경을 할 수 있다. 바로 천전리 암각화(국보 제 147호)와 천전리 공룡발자국 화석이다.
천전리 암각화는 반구대 암각화와는 달리 추상적인 기호들로 이루어져 있다. 1973년 국보로 지정될 당시에는 사슴, 인물상 등 40여 개의 형상과 기하학 무늬 등이 있는 것으로 기재되었지만 2003년 계명대 연구팀에 의해 이 암각화는 대부분이 마름모꼴과 동심원의 추상적인 문양들이 체계적으로 연결된 거대한 원시그림 문자라는 주장이 대두되기도 하였고 지난해에는 일부 문양은 농경사회의 식물을 나타낸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암각화의 아랫부분에는 네 개의 긴 발이 달린 용 그림이 있는데 이를 통해 고대 한국의 기원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는 재밌는 해석을 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특정인의 주장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직접 바위 앞에 서서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인 듯 하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신라 화랑들이 새겨놓은 서약문과 함께 골품제로 인해 근친 간에 결혼을 약속하고 사랑을 나누었던 신라 왕족들의 쓸쓸한 로맨스를 전해주는 명문도 새겨 있어 볼만 하다.
암각화를 구경하고 나서 오던 길로 1km 정도만 더 가면 1억 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다. 바로 대곡천이 흐르는 계곡 사이로 거대한 암벽이 눈에 띄는데 이 곳 바닥 곳곳에 움푹 파인 자국이 천전리 공룡발자국 화석(울산시 문화재자료 제6호)이다. 이 발자국 화석은 약 1억 년 전 백악기 전기에 살았던 중·대형 공룡의 흔적으로 당시 울산지역이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사바나 기후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 때 잠시 눈을 감고 천연덕스레 풀을 뜯고 있는 공룡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대형 초식 공룡인 울트라사우루스를 비롯해 총 200여 개의 발자국이 있으며 육식공룡의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암각화, 공룡 발자국 앞에서 상상력을 제한받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백과사전이나 정부에서 발간한 자료를 신봉하는 것은 더욱 불행한 일이다. 원시인들이 독특한 미적 감각으로 암각화를 남겼듯이 우리도 과거로 돌아가 마음껏 상상력의 나래를 펼쳐보자. 그래야만 진정 선사인과 대화하고 그들이 남긴 유물의 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반구대 암각화는 위와 좌우로 바위가 돌출되어 비와 바람으로부터 보호되어오다 1966년 사연댐 건설 후 약 40년 이상 물속에 잠기고 물밖에 드러나기를 반복하여 매우 마모되고 훼손되어 지금은 발견당시의 선명한 형태는 찾아볼 수 없다.
또 천전리 암각화 역시 각석의 균열이 심하고 윗부분 나무와 토사의 무게로 붕괴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그리고 관람객이 손으로 바위를 마구 만져 그 훼손정도가 심각한 상황이다. 결국 앞으로 몇 년이 더 지나면 그 형체를 분간할 수 없게 될 수도 있으니 지금이라도 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찾아가 직접 봐야할 때가 아닌가 한다.
암각화를 구경하고 나서 오던 길로 1km 정도만 더 가면 1억 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다. 바로 대곡천이 흐르는 계곡 사이로 거대한 암벽이 눈에 띄는데 이 곳 바닥 곳곳에 움푹 파인 자국이 천전리 공룡발자국 화석(울산시 문화재자료 제6호)이다. 이 발자국 화석은 약 1억 년 전 백악기 전기에 살았던 중·대형 공룡의 흔적으로 당시 울산지역이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사바나 기후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 때 잠시 눈을 감고 천연덕스레 풀을 뜯고 있는 공룡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대형 초식 공룡인 울트라사우루스를 비롯해 총 200여 개의 발자국이 있으며 육식공룡의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암각화, 공룡 발자국 앞에서 상상력을 제한받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백과사전이나 정부에서 발간한 자료를 신봉하는 것은 더욱 불행한 일이다. 원시인들이 독특한 미적 감각으로 암각화를 남겼듯이 우리도 과거로 돌아가 마음껏 상상력의 나래를 펼쳐보자. 그래야만 진정 선사인과 대화하고 그들이 남긴 유물의 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반구대 암각화는 위와 좌우로 바위가 돌출되어 비와 바람으로부터 보호되어오다 1966년 사연댐 건설 후 약 40년 이상 물속에 잠기고 물밖에 드러나기를 반복하여 매우 마모되고 훼손되어 지금은 발견당시의 선명한 형태는 찾아볼 수 없다.
또 천전리 암각화 역시 각석의 균열이 심하고 윗부분 나무와 토사의 무게로 붕괴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그리고 관람객이 손으로 바위를 마구 만져 그 훼손정도가 심각한 상황이다. 결국 앞으로 몇 년이 더 지나면 그 형체를 분간할 수 없게 될 수도 있으니 지금이라도 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찾아가 직접 봐야할 때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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