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대학교 행정대학원 최고지도자과정에서 강의했던 강의록을 올려 드립니다. 청중들이 너무 진지하고 열심히 들어주셔서 90분을 조금 오버했는데도 시간이 금방 가 버렸습니다. 다들 아주 좋은 강의였다고 말씀들을 해주셔서 끝나고 나서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강의 내용은 지금까지 제가 인터넷에서 해왔던 이야기들을 종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0분이 넘도록 강의한 내용이어서 텍스트의 양이 너무 많은 듯 한데 그냥 올립니다.
홈피의 벗님들이 성원해주셔서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녹음기로 녹음만 하고 동영상 같은 것은 남기지를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강의록으로 올립니다.
◈◈ 민족분열의 5대 이슈와 415 총선의 의미◈◈
안녕하십니까. 이경숙입니다.
대학원장님께서 저를 강사로 초청하면서 세세한 초청자의 의도는 밝히신 바가 없고, 다만 요약해서 415 총선이 며칠 남은 시점이니까 그것을 염두에 두고 도움이 될만한 내용이면 좋겠다는 정도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노자의 <도덕경>을 주해한 책을 낸 사람이니까 아무래도 노자의 사상에서 이 시대에 도움이 될만한 것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기대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노자의 말씀이나 무위자연의 도를 적용하여 말하기에는 작금의 한국정치의 현실이 너무도 복잡하고 험악한 대치국면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노자사상이나 <도덕경>과 같은 고전에 대한 이야기는 선거가 끝나고 세상이 조금 조용할 때 한번 말씀드릴 기회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또 있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제 총선이 정말 며칠 앞으로 다가왔는데요. 흔히 이번 대선을 우리나라의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이 격돌하는 전쟁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보수와 진보는 다른 나라에서 사용되는 것과 단어의 뜻이 상당히 다르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보수를 말 그대로의 보수라고 생각하고, 진보를 말 그대로의 진보라고 받아들이면 우리나라 정치는 설명이 불가능해집니다. 한나라당의 강령이나 이념의 어느 것이 보수적이고, 열린우리당의 강령이나 이념이 어째서 진보적인가를 설명할 수 있는 정치학자는 아마도 없을 거라고 저는 봅니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이념적, 정책적 차이가 무엇인지 설명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각 당의 국회의원들과 이번 선거에 입후보한 면면들을 보면 이런 점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즉 각 당의 공천 기준이 보수주의자냐 진보주의자이냐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외면적으로는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을 각기 표방하고는 있어도 각 당의 구성원들은 보수주의자들의 집합도 아니고 진보주의자들의 모임도 아닌 것이 한국의 정당입니다. 그러니까 습관적으로 보수와 진보라고 표현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보수와 진보라는 용어상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두 진영의 한판 승부가 이번 415총선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말고 우파와 좌파간의 전쟁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구분도 사실 맞지 않는 것이 한국의 정치판입니다.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당이 좌파정당이냐 하면 확실하게 그렇다고 단정할만한 강령이나 이념적 색깔이 잡히지가 않습니다. 성장보다는 분배, 기업보다는 근로자를 더 중시하는 것에서 좌파적인 냄새가 좀 난다는 것일 뿐 그 실체를 보면 또 좌파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좌파가 아니라 서민, 근로자 층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좌파적인 시늉을 하는 것이지, 그들 중에 좌파로서의 신념과 원칙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정치를 이미지 정치라고 합니다. 진보가 아닌데 진보적인 이미지를 연출하고, 좌파가 아니면서도 좌파 같은 이미지로 위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고건 국무총리를 비롯해서 현재 노무현 정부의 내각을 구성하고 있는 각료들의 면면을 봐도 이 정권이 정말 진보좌파 정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에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만 해도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날렸고, 특히 근로자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활동을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어떤 좌파적인 이념과 철학에 뒷받침된 것으로는 보이지가 않습니다. 우든 좌든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저는 어떤 이념적 원칙을 찾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필요에 따라 좌와 우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신기의 소유자로 저는 봅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젊은 시절의 경력에 이념적으로 의심스러운 부분이 좀 있고, 남북문제에 있어서 김정일 정권에 동정적이고 온정적이라는 것일 뿐 대통령 재직 중 시행한 정책으로서 평가할 때는 오히려 우파적인 정책이 더 많았습니다. 현재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고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좌파 정치인도 아니기 때문에 친북 인사는 그냥 친김일성, 친김정일 인사이지 좌파나 공산주의자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북한의 정치체제는 공산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야만적이고, 가장 조잡하고, 가장 한심하고 유치한 원시적인 국가조직이고 국가라기보다도 하나의 거대한 수용소에 가깝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이름을 붙일 대상이 못된다고 저는 봅니다. 제가 볼 때 김정일은 국가의 지도자가 아니라 거대한 강제수용소의 소장입니다. 이런 수용소 소장한테 친근한 감정을 갖고 온정적이라 해서 공산주의자라거나 좌파라고 말하는 것은 공산주의나 좌파에 대한 모욕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북한에서 탈출해 온 황장엽씨의 견해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사전적 의미의 보수나 진보도 존재하지 않고, 우파나 좌파도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415 총선에서 저토록 살벌한 적으로써 맞붙는 양 진영의 정치적 차이점이 무엇인지부터 한번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으로 인해서 두 진영이 갈라져있는 것인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편의상 한나라당과 그 당을 지지하는 국민들을 보수우파라고 이름하고, 열린우리당과 그 지지자들을 진보좌파라고 일단 이름 붙이고 설명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한나라당을 보수우파라고 이름한다 해서 정말 한나라당이 보수고 우파라는 것은 아니고, 그저 이름이 '보수우파'일 뿐입니다. 열린우리당을 '진보좌파'라고 불러도 역시 이름이 진보좌파일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악폐인 사색당쟁을 보더라도 당파가 갈린 이유라는 것이 있습니다. 남인과 북인이 갈리고 노론과 소론이 나뉜 연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한나라당으로 결집된 보수우파와 열린우리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좌파의 둘로 나뉘어서 극한적이고 타협이 불가능한 대결 양상을 보이는 데도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정치학자들의 좋은 분석과 논문들도 많고 서점에 가보면 책도 여러 종이 나와 있습니다마는 제 나름대로의 설명을 드릴까 합니다. 대단히 복합적이고 누적적인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이 만들어낸 총체적 결과라 하겠는데, 이 원인들이 모두 우리 민족을 단결시키고 화합시키는 순기능적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분열시키고 싸움을 붙이고, 서로 적대하고 증오하게 만드는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해왔다는 것입니다. 지금 양진영이 생사와 존폐를 걸고 맞붙는 415총선은 누적된 분열과 갈등의 이슈들이 총체적으로 분출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짚어보아야 한국정치의 비밀이 풀리고, 우리 민족의 과제가 무엇인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왜 한국의 정당들은 양당체제가 정착된 대부분의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건전한 라이벌로서의 상대가 아니라 예사롭지 않은 적대감과 증오로 서로를 타도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고 그야말로 니죽고 나죽자는 식의 싸움판을 벌이는지에 대한 이유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한국 정치는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라는 단순한 도식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민족을 둘로 갈라놓고 극한의 대립으로 몰고 가는 다섯 개의 이슈가 있습니다. 정당만이 아니라 국민 전체가 이 다섯 가지 이슈에서 각각 어느 쪽 입장에 서 있느냐로 편이 갈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슈들은 사실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정치의 대결상은 보수우파와 진보좌파의 싸움이라고 볼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나누어드린 유인물에 이 5대 이슈를 정리해 놓은 도표가 있는데요, 우리가 보수우파와 진보좌파라고 부르는 양대진영이 사실은 이 다섯가지 이슈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각기 고수하는가에 따라 대치하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다섯가지는 일제시대의 청산과 남북분단상황의 해결, 그리고 근대화 시기에 대한 평가와 지역감정 문제, 마지막으로 종교간의 갈등과 반목입니다.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는 다섯 가지 이슈의 첫 번째는 바로 친일문제입니다. 시간적으로는 가장 먼저가 되는 이슈인데, 이 친일문제가 민족 분열의 중요한 이슈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직후가 아니라 오히려 80년대 들어서부터입니다. 해방된 직후에는 오히려 친일문제가 그리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36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일제의 통치하에서 같이 살아온 입장에서 2천만 동포가 전부 동병상련의 심정이었고, 친일파라고 누구를 손가락질 하고 할 만큼 떳떳한 사람이 거의 없었던 때문이고, 또 직접 일제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일제의 통치가 얼마나 혹독했으며, 그 시대가 전세계적으로 얼마나 야만적이고 광폭했던 시대였는가를 몸소 체험으로 알았기 때문에 설사 친일파라 해도 어느 정도는 인간적으로 이해를 해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오죽했으면 그랬겠느냐, 나도 그 심정, 그 입장을 안다'는 동시대인으로서의 상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욕할 염치나 자격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도저히 그냥 용서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악독한 친일파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해방 직후에 반민특위가 처벌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이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반민특위가 애초의 목표를 다 이루지는 못했지만 악랄한 반민족 행위자들에 대한 단죄가 어느 정도는 되었다고 평가될 수 있습니다.
사실 그 이상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기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 친일파 척결과 일제시대의 청산이라는 것이 6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더욱 첨예하고 심각한 우리 민족 내부의 분열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일제시대를 겪은 사람들이 이제 다 죽고 얼마 남아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광복동이가 지금 환갑입니다. 일제시대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다 칠순 이상의 노인들입니다. 70대 이하는 일제시대를 모른다는 이야깁니다. 모르기 때문에 피상적으로 생각을 해서 '친일파는 역적'이라는 단순도식으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도 마찬가지지만 그 시대를 직접 겪지 않은 후대들은 친일을 용서할 수 있는 체험적 토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왜 해방이 된 그 날에 매일 같이 천황의 만수무강을 비는 기사를 실었던 조선일보 사옥이 민중들의 손에 불태워지지 않았으며, 왜 친일반민족신문인 조선, 동아의 경영자들이 일본으로 도망가지 않고 우리나라 땅에서 여전히 존경받는 지도급 인사로서 당연히 받아들여졌는지, 왜 귀국한 상해 임정의 요인들도 조선, 동아의 경영인들과 시국을 의논하고 나라를 함께 걱정했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일제시대의 조선인들은 조선, 동아가 지면에 천황 일가의 사진을 싣고, 성전 완수를 촉구하는 기사를 싣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그랬을망정 한글로 발행되는 조선인의 신문이 폐간되지 않고 나와준 것만 해도 감사하고 대견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조선인은 조선, 동아의 기자들을 전부 애국자로 생각했었고, 그건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시대를 살지도 않았고,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 지를 알지도 못하는 후대들이 당시 신문에 실렸던 단편적인 사진과 기사들에 흥분하고 선동된 나머지 세계 역사에 드물 정도의 민족적 자산인 두 신문사를 친일반민족지로 낙인을 찍고 독립기념관에 보존된 윤전기를 야만적으로 끄집어내는 만행을 저지르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일은 지난 세월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고, 어떤 세력에 의한 음모의 일환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한가지 이야기를 더 해 드릴까요? 우리나라 공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이 교내에서 데모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아무도 그런 일을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것이 91년 아니면 92년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데모의 이유는 고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의 동상건립에 반대하는 데모였습니다. 김정렬장군은 초대와 3대 공군참모총장이었고 해방 직후에 아무 것도 없던 무에서 그야말로 맨땅에서 조국의 공군을 건설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625때 그분의 지휘 아래 우리 빨간마후라들이 북한과 중공의 공군을 상대로 하늘에서 싸웠습니다. 창군 초기에 대한민국 국군의 초창기 멤버들은 육해공군을 막론하고 그 인적자원의 토대는 공통적으로 3군데였습니다. 바로 구일본군 출신, 아니면 만주군 출신, 그리고 마지막으로 광복군 출신이 그것입니다. 김정렬장군은 경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에 일본의 예과사관학교에 입학해서 그곳을 졸업하고, 1941년에 다시 일본 육군 항공사관학교에 들어가 전투기 파일럿이 된 사람입니다.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이 맥아더가 방어하는 필리핀을 공략할 때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해서 싸운 실전경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김정렬 장군이 처음에 공군을 만들 때도 그 인적 구성은 세군데 각기 다른 출신의 비행사들이 섞여있었습니다. 물론 수에서 가장 많았던 것은 역시 구일본군 출신의 파일럿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구일본군 출신 파일럿과 중국 국민당군 공군 출신인 파일럿들은 대륙의 하늘에서 서로 싸운 적이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 이들은 출신지를 불문하고 다 같은 한국의 군인으로서 일심협력하여 나라를 지켰지 누구도 너는 일본군 출신입네, 너는 광복군입네 편을 가르지도 않았고, 출신에 따른 파벌이 군내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구일본군 장교였던 참모총장의 지휘를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 불만이 있거나 불평을 말한 비행사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김정렬장군은 모든 공군인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는 지휘관이었습니다. 만약 당시에 일본군 출신이라서 배격하고, 천황한테 충성했다고 해서 내치고 그랬다면 공군이건 육군이건, 해군이건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인으로서 비행경험이 있고 조종간을 잡아본 인적자원을 총동원을 했는데도 공군은 경험 있는 비행사의 부족과 양성의 어려움에 늘 허덕거렸습니다. 이건 공군만의 문제가 아니라 육군과 해군도 마찬가지였고, 정부의 모든 부처가 공히 그랬고, 민간 기업과 학계, 언론계 역시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친일을 가지고 사람을 가리다가는 건국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방법은 있었습니다. 북한처럼 빨치산 출신, 홍군 출신들이 대거 입국해서 모든 요직을 장악하고 소련군과 같은 압도적인 대규모 군사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공포정치, 철권통치, 군사국가로 가는 길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 종착지는 모든 동구권의 국가들이 보여준 바 그대로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북한처럼 됩니다. 양자 택일을 해야 한다면 우리가 걸어온 길이 옳습니다. 설령 다소의 친일 경력이 있더라도 새 조국의 건설에 그들의 능력과 자질을 바치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그랬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를 조금도 모르는 90년대 초의 공군사관생도들이 이 나라의 공군을 만든 자기들의 아버지를 친일로 매도해서 교내에서 데모를 하는 패륜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제가 예로써 공군의 김정렬장군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예가 비단 공군에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625전쟁 때 공산침략군과 맞서 자유대한민국을 지켜낸 장군들과 장교의 대부분이 일제 때 일본군 장교출신이었습니다. 그 분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거고 이나마 잘살고, 자유로운 조국에서 숨쉬고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군대만 그랬던 것도 아닙니다. 정계, 재계, 학계, 종교계, 예술계 등 나라의 모든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장 뛰어나고 우수한 인재들이 그들 자신의 죄도 아니고, 그들 자신의 본의도 아니었던 일제시대의 경력 때문에 친일파로 낙인이 찍히고 매국노로 손가락질 받아 그 명예는 더렵혀지고 그 공적은 깎이어 나갔습니다. 더욱 억울한 일은 그들이 살았던 동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세상을 전혀 모르는 아들과 딸들에게 그런 치욕을 당했다는 점입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일제의 강점기간이 36년이었습니다. 한일합방이 되던 해 태어났던 사람이 서른 여섯 살에 해방을 맞은 것입니다. 암만 피식민지 백성이라 해도 한 인간이 40대가 될 때까지 배우지도 않고, 일도 안 하고, 취직도 하지 않고 그렇게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차별받고 멸시받는 식민지 백성이라는 오기와 울분이 각계에서 더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일본인들과 경쟁을 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모든 신생독립국가들의 중추는 식민지 시절에 지배국가에 중용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간디, 네루, 막사이사이, 수카르노, 장개석, 이광요 등 공히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나라도 과거의 경력을 가지고 건국의 주역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해방 직후에 그 시대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도 그런 것을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과거를 불문하고 모두가 합심단결해서 새 조국을 건설하는데 매진했던 것입니다. 반민특위가 하려고 했던 것은 그야말로 반인륜적이고, 빈민족적인 범죄자들의 처벌이었지 일제시대에 관직에 나가고, 장교가 되고, 신문기자를 하고, 법관을 하고 교수를 했다고 해서 단죄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시대의 주인공들이 무대의 뒤안길로 점차로 사라지게 되니까, 새삼스럽게도, 그 때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세대들의 입에서 '친일단죄론'이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새로운 친일청산의 타겟은 반민족 범죄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대한민국의 건국자들이었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같은 뛰어난 정치지도자들과 조선일보, 동아일보 같은 민족 신문, 그리고 학계와 언론계, 경제계, 예술계, 문화계의 주류인사들이 친일이라는 신종 매카시즘의 칼날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종교계의 원로이자 민족의 지도자 중 한사람인 김수환 추기경까지도 일본군 장교복을 입은 젊은 시절의 사진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면서 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한눈에도 대한민국의 합법적 정통성과, 도덕적 권위, 그리고 정치적 정체성에 흠집을 내고 상처를 입히자고 하는 목적이 드러나 보이는 친일청산론은 70년대부터 일부 학생들에게서 보이기 시작하다가 80년대에 들어와서 운동권이 당시의 권위적인 정권을 공격하는 주된 무기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김일성 집단과 좌경화된 학생조직들이 한국의 주류계층을 공격하여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아킬레스건으로 발견한 것이 이 친일문제입니다. 광복이 되고 일제가 이 땅에서 물러간 지 6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친일문제가 민족을 분열시키는 으뜸가는 이슈로 부각되어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물론 이들의 대중적인 선전과 선동이 교묘하고, 사안자체가 젊은 세대에 어필하기 쉽다 보니 이제는 순수한 애국적인 동기에서 '친일단죄론'에 합세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게 된 것입니다. 급기야는 누구보다도 국가의 정통성과 도덕성에 확신을 가져야 할 공군사관학교의 생도들까지 단지 일본육사를 나온 일본군 장교였다는 이유만으로 공군의 창설자를 존경할만한 선배로 삼기를 거부하고, 당대의 모든 사람이 민족의 정기를 지켜온 민족신문으로 인정하고 감사를 표했던 조선일보의 윤전기가 독립기념관에서 끌어내려지는 참담한 꼴을 목도하기기에 이른 것입니다. 여기에는 진실을 바로 말하고 사실을 엄격하게 전해야 하는 책임을 기성세대들이 소홀히 한 잘못이 크다고 저는 봅니다.
415 총선은 일제시대 때 배우고 익힌 지식과 기술로 해방 후에 건국에 참여하여 각계 각층에서 나라를 이끌었던 건국세력 및 그들의 뒤를 이어받은 근대화 주도 세력과, 이들에 의한 건국의 의미를 평가절하하고 근대화의 가치를 폄하하면서 이 주도세력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집단 사이의 전면적인 승부라고 저는 봅니다. 어느 쪽이 승리하고 어느 쪽이 나라의 주도권을 장악하느냐에 따라서 향후 우리나라의 국가적 정체성과 국가관의 성격이 달라질 것으로 저는 예측합니다. 단순히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의 충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는 두 번째 이슈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대북관입니다. 북한이라는 존재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역시 우리 국민은 반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이슈는 민족을 둘로 갈라놓은 실제적인 분단 상황과 함께 한국의 국민들도 갈라놓고 있습니다. 역시 친일 문제와 마찬가지로 80년대까지는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던 이슈입니다. 80년대까지는 '반공이 국시였고, 북한은 주적이었습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비밀리에, 혹은 개인적인 내면으로는 이와 다른 견해를 가졌을 지는 모르지만 한국 사람의 대북관은 한가지로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민족 분열의 원인이 아니라 대동단결의 기제였습니다. 그랬던 것이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실체와 공산치하가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겪었던 체험세대들의 수가 감소하면서, 반대시각이 국민들 속에 스며드는 틈새가 생겼습니다. 조그만 틈으로 새어든 물이 나중에는 댐을 붕괴시키듯이 온정적 대북관은 아차 하는 순간에 한국 사람의 절반을 물들이고 말았습니다. 이것 역시 625를 직접 겪지 못했던 젊은 세대들로부터 시작된 물결이었습니다. 체험세대들 중에 이런 대북관의 소유자는 극히 희소했습니다. 실제로는 많았는지도 모르지만 국가보안법의 존재와 무시무시한 정보기관의 감시, 그리고 투철한 시민의 고발정신 등에 억눌려서 표출을 못한 탓인지 그런 대북관의 체감기회는 드물었습니다. 가끔씩 발표되는 간첩단 일망타진 사건의 보도를 보거나, 운동권 학생들의 데모나 집회에서의 슬로건과 앙칼진 도그마에서 느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것이 어느 날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분열의 이슈로 불거져 나온 사건이 임수경의 방북 사건이라고 저는 봅니다. 공산주의의 체험세대가 감소하고 반공을 국시로 삼아 독재의 빌미로 악용하기도 했던 권위주의 정부 대신에 문민정부가 등장하면서 이제 두 개의 다른 대북관은 온 국민을 둘로 갈라놓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 쳐도 사실 온정적 대북관은 여전히 한국 사회의 소수의견이었습니다. 한번도 과반을 넘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온정적 대북관을 가진 정치세력이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정권을 잡을 수 없는 구조를 고정시키고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기 직전에 두 가지 대북관의 비율은 3대7을 넘지 못했다고 저는 봅니다. 적대적 대북관을 가진 국민이 70% 이하로 떨어진 적은 없었던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비토되었던 주된 이유는 그가 목포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온정적 대북관 때문이었다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때문에 김대중이란 정치인은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결코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지역구도에 기반한 자민련과의 정책연합과 특정지역의 비정상적인 지지라는 특수성이 온정적 대북관을 가진 집단이 집권세력이 되는 이변을 낳고 말았습니다. 물론 언론과 국회는 여전히 70%를 점유하는 적대적 대북관을 견지하는 세력이 다수였기 때문에 김대중 정권의 대북관은 심하게 억압되고 비틀려서 왜곡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국민을 속이면서까지 범죄적으로 조성한 자금을 김정일에게 건네준 대북송금이라는 전대미문의 불가사의한 사건이 생기게 된 이유입니다. 어쨌건 구조적으로 소수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온정적 대북관은 그것이 집권세력의 스탠스가 됨으로 해서 비약적인 확산의 계기를 맞았고, 국민의 정부 말엽에는 거의 4대6 정도로 격차를 좁혀왔습니다. 아직도 두 대북관의 비율로 봐서는 햇볕정책은 폐기되고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송금이라는 범죄행위에 책임을 지고, 그 추종 세력은 국민들에게 단죄되는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한번 이변이 일어납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이 그것입니다. 대북송금이라는 희대의 대국민 사기행각에 대한 단죄는 김대중 대통령 측근 몇 사람에 대한 사법처리가 아니라 온정적 대북관을 가진 집단이 권력을 상실하는 것으로 진행되었어야 함에도 선거의 결과는 이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노무현 정부의 탄생에는 정치학적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분석이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나는 지난 대선이야말로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더티한 선거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지난 대선의 정치사적 의미는 바로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5대 이슈가 본격적으로 양대 진영의 주된 명분과 무기가 된 최초의 대통령선거였다는 점입니다. 그 이전의 대통령 선거는 정책선거를 본질로 하고, 거기에 관건 선거, 금권 선거, 지역감정 선거가 가미되고, 상대 후보에 대한 음해나 인신공격이 보조적인 선거수단으로 동원되고는 했었습니다. 김대중 후보에 대한 '이유 있는 색깔 시비'나 김영삼 후보에 대한 '여성 편력 시비', '박정희 후보에 대한 '친일 및 좌익전력'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입니다.
그런데 작년 12월의 대선 양상은 그 이전의 선거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양상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이념과 정책의 대결이 아니라 5대 이슈로 분열된 양진영의 격돌이었고, 이 다섯 가지에 대한 양측의 입장에 대한 정당성과 도덕성의 대결이었습니다. 결과는 이 이슈들에 대한 명분을 선점하고 보다 공격적으로 선동한 쪽에 승리가 돌아갔습니다.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보수우파의 패배는 이 5대 이슈에 대한 자기 입장의 방어가 허약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측이 집요하게 물고늘어진 이슈는 바로 한나라당 진영의 친일전력과 근대화 세력의 도덕성, 그리고 보수우파세력의 적대적 대북관과 영남패권주의였습니다. 진보좌파 진영의 승리는 이 네 가지 이슈에 대한 악착같은 공격으로 얻어진 것이었고, 상대적으로 보수우파 진영은 이에 대한 이론적 반박과 도덕적 방어에 해이했기 때문에 어이없이 무너졌습니다.
이 5대 이슈 중에서 보수우파 진영에 약간 힘이 되었던 것은 개신교를 중심으로 온정적 대북세력에 대한 비토의 움직임이 있었던 정도였습니다.
적대적 대북관과 온정적 대북관 중에서 어느 것이 선이고 어느 것이 악이냐 하는 문제는 판단하기 쉽지 않고 햇볕정책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북정책 중의 하나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햇볕정책이 사망직전의 상태이던 북한정권을 소생시키는 캄풀주사나 산소호흡기가 되어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황장엽씨의 강연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는데요, 인터넷에서 쉽게 황장엽씨의 강연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으니까 한번씩 보시기 바랍니다. 황장엽씨는 97년에 자기가 북에서 탈출할 때, 앞으로 5년 내에 북한은 붕괴한다는 데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해에 북한 전역에서 50만 명이 굶어죽었다는 보고가 당으로 올라왔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압록강 두만강을 필사적으로 건너다가 죽은 시체가 떠내려가는 장면들, 풀을 뜯어먹고 시퍼런 물을 게워내면서 죽어가는 아이를 안은 여인의 모습들이 당시 티비 화면을 통해 우리에게도 그 참상이 전해졌었습니다.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그 2년 전에 김일성이 김영삼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한 것은 북한의 붕괴를 김일성의 힘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김영삼대통령의 방북초청이야말로 체제 경쟁에서 그들이 졌다는 패배의 인정이었습니다. 링 위에 흰수건을 던진 것이고, 항복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과의 회담을 준비하던 중에 김일성이 죽어 버렸습니다. 이 불의의 사건으로 우리 역사는 다시 한번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고 방황하게 됩니다. 체제경쟁의 승리자로서 그 승리를 어떻게 민족의 통일과 화합에 이용할 것인가를 놓고 고심해야 할 상황에서 김일성 장례식의 조문이라는 것을 놓고 극단적인 분열상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516 혁명 이후에 우리는 전쟁이 아닌 건설과 경제발전 그리고 남북 인민의 생활수준을 척도로 하는 체제경쟁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바 있고, 3공에서 5공으로 이어지는 30년 동안 우리는 이기기 위해서 거국적으로 전국민이 합심노력했습니다. 북한과의 체제경쟁이라는 사활이 걸린 명제가 우리가 마침내 경제대국으로 일어서는 원동력 중의 하나가 되었던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체제경쟁에서 이기려는 노력은 유감 없이 다했으면서도, 막상 이기는 그 날이 왔을 때, 체제경쟁에서의 승리를 어떻게 통일과 민족의 화합에 이용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에는 소홀했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의 영수회담 제안으로부터 황장엽씨의 망명, 그리고 이어진 탈북 사태로 승리가 확인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당황했고, 내부적으로 두 진영으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즉 북한에 대한 지원파와 봉쇄파로 나뉜 것입니다. 확인된 체제의 우월성과 국력의 우세함으로 북한을 지원해서 일단 살려내야 한다는 측과 그 힘을 가지고 북한을 압박해서 이 기회에 끝장을 봐야 한다는 두 가지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집권세력이 대북지원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을 끝장낼 수 있었던 하늘이 준 기회가 뒷걸음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남한에 온정적 대북관을 가진 정권이 들어서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한 것이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결정적인 오판이었습니다. 그가 망명한지 벌써 5년이 지났지만 북한은 붕괴되지 않았고 조금씩 회복되어 가는 듯이 보입니다. 그만큼 북한 주민들의 고난의 세월이 연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햇볕정책이 훗날 어떤 역사적인 평가를 받을 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러나 저는 역사의 평가가 아니라 통일된 후의 북한주민의 평가를 짐작한다면 그것은 분노와 원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햇볕 정책의 추진자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을 제거하고 평화를 정착하기 위해 북한 정권이라는 상대의 실체에 대한 인정이 필요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쟁의 위험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은 북한정권의 인정이나 대화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소멸과 실제적인 통일입니다. 평화는 구걸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돈으로 살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수십년 동안 통일에 필요한 힘을 갖기 위해서 그토록 노력을 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력이 이제 결실을 맺어서 전쟁위협의 근본적 원인이었던 한반도 북부를 불법으로 강점한 무장세력의 붕괴와 와해가 목전에 임박했는데, 이때 우리는 방향을 180도 전환을 해버린 것입니다. 2천5백만 동포가 그 정권의 존재 때문에 아사상태에 몰려있는데 그리고 그 정권이라는 것이 우리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체적인 내무모순과 구조적 결함 때문에 저절로 무너지게 되어 있었는데, 바로 이때에 그 정권을 지원하고 도와주어서 다시 살려낸 햇볕정책은 2천5백만의 동포에게 끔찍한 고통을 더 견디고, 짐승보다 못한 처참한 삶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도록 방치한 범죄적인 정책이라고 저는 봅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그리고 최악의 거대한 강제수용소에 2천5백만의 동포가 갇혀서 신음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수용소의 담장이 무너지려고 할 때 다시 세우고, 그 철조망이 삭아서 끊어지려고 할 때 새 철조망으로 보수하라고 수용소측에 자금을 대준 것입니다. 누가 먹는지도 모르면서 그 담장과 철조망 안으로 쌀을 실은 트럭을 들여보내고는 우리의 의무를 다했다고 자위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수용소 소장은 핵무기까지 가졌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이게 한반도에 정착시킨 평화이며, 이것이 전쟁의 위험을 제거한 것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북한 동포들은 길어도 5년만 더 견디면 그 지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몇십년을 더 견뎌야 할지 아무도 모르게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노무현정권은 이점에서 전정권보다는 애매해 보입니다. 민주당이 노무현대통령을 배신자라 부르는 직접적인 이유는 대북송금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그 일에 관련된 김대중대통령 측근들의 사법처리를 방관함으로서 햇볕정책을 포기했다고 하는 점입니다. 추미애 민주당 선대위장이 눈물겨운 3보1배를 하면서 지지층에 호소하는 것도 바로 '햇볕정책의 계승'입니다. 민주당은 적극적인 햇볕정책지지 세력이고, 열우당은 약간 소극적인 햇볕정책의 계승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래 한나라당은 혈통적으로 반공주의자인데 워낙 대북 온정주의가 극성이고 특히 젊은 세대들이 그쪽으로 경도되어 있어서 내놓고 큰소리로 떠들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상이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는 두 번째 이슈인 '대북관'에 대한 대략적인 고찰이었습니다. 역시 415총선은 이 대북관이 다른 두 진영의 첨예한 전쟁인 것입니다.
세 번째 이슈는 근대화시기에 대한 근대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상반된 평가입니다. 좀더 쉽게 말하면 근대화시기에 대한 평가는 바로 박정희라는 한 인간의 평가나 마찬가집니다. 박정희대통령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국민들과 비판적인 국민들로 나라가 나뉘어져 있습니다. 박대통령이 죽은 지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나라 전체를 분열시키는 주된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단군이래 최고의 지도자, 조국 근대화의 영웅, 한국인의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에서부터 유신철권통치의 악마, 희대의 독재자, 황군 장교 다카기 마사오 등 세계 역사에서 자국민의 평가가 이토록 극단적으로 갈린 사람을 달리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문제는 박정희대통령은 서거한지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과거가 아닌 현재라는 것입니다. 박정희향수는 한국 정치판의 판도를 흔들 정도의 위력이 있습니다. 박근혜씨가 한나라당의 대표가 된 다음에 전국에서 불고있는 박풍의 위세는 기세등등하던 열우당의 핵풍을 잠재우고 있습니다. 415 총선은 보수와 진보의 대결도 아니고, 우파와 좌파의 싸움도 아닙니다. 박정희 지지세력과 박정희 비판세력의 격돌입니다. 이것은 박정희시대가 어느 진영의 소유물이냐에 대한 각축전인 것입니다. 박정희시대는 조국을 근대화시킨 자랑스러운 영광의 시대였으며 바로 자신들이 그 영광의 주역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박정희 시대는 인권을 유린하고 동족간 대결을 고취한 사악한 군부독재의 기간이며, 친일 세력이 나라를 장악했던 부끄러운 시대이며 이 시대는 근대화에 매진한 건설의 시대가 아니라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시대였으며 자기들이야말로 민주화를 가져온 주역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간의 주도권 쟁탈전입니다. 이 양 진영의 사람들은 박정희시대를 회고할 때 떠오르는 상징적 이미지가 다릅니다. 한쪽의 사람들에게는 시골을 방문해서 걷어붙힌 와이셔츠 차림으로 같이 모내기를 하고 농부들과 막걸리잔을 기울이던 자상했던 대통령이 생각나는 반면에 한쪽의 사람들은 검은색 라이방을 끼고 지휘봉을 든 모습으로 한강다리 위에 서있던 군인을 떠올립니다. 죽은 아내의 관을 실은 영구차를 떠나 보내면서 돌아서서 눈물짓던 불행했던 사람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고, 궁정동의 안가에서 여자 연예인들을 불러놓고 만찬을 하던 권력자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던 도시와 보리고개가 없어지고 통일벼가 주식의 자급자족을 이룰 만큼 풍성한 쌀알을 쏟아내던 모습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있고 한편으로는 남영동 분실과 중정 지하실의 고문실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했던 우국총정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오냐, 침을 뱉으마' 하고 원한에 사무친 사람들이 이 나라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는 아직도 박정희당과 반박정희당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분열의 이슈입니다.
네 번째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고질적인 망국의 병, 지역감정의 문제입니다. 다섯 가지 분열의 이슈 중에서 이것이 가장 골수에 사무치고 그 원한이 깊어서 좀체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이슈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슈들은 가해측과 피해측이 분명한 사안들입니다. 즉 친일과 반일, 일본과 한국, 그리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북한과 남한, 근대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박정희 시대의 수혜자와 박정희 시대의 소외계층으로 어느 정도 분명한 실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역문제의 핵심이고, 그 출발점이자 종착지라고 말할 수 있는 호남차별론은 양측의 주체가 분명치 않습니다. 호남인이라는 피해자는 있는데 막상 호남인을 차별한 가해자측은 분명치 않습니다. 전에는 막연하게 전국적인 호남차별 현상을 말하다가 가해자를 분명하게 해두지 않으면 메아리 없는 공허한 절규밖에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호남인들이 근래에 와서는 가해자를 영남인이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설득력과 현실감을 더한 것이 영남패권론입니다. 즉 호남차별과 소외는 영남패권을 추구하는 영남인들의 계획적이고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노력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영남패권론의 실체를 인정할 영남인은 한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영남인인 저부터도 인정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영남인들이 계획적이고 의도적이며 조직적으로 호남인을 괄시하고 차별하고 배제시켰다는 증거를 호남인들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호남인들이 호남차별의식이 심화된 기간이라고 주장하는 3공 시절에 집권 세력 내부에서 정권적 차원의 정략이나 독재의 방편 또는 선거에서의 전술로서 호남차별이나 소외를 의논했거나, 지시를 했거나, 비밀문서로라도 그런 계획을 수립했던 적이 있다는 증언이나 물증은 민주화 세력에 정권이 넘어간지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단 한 건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겨우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박정희 시절의 선거에서 '문디가 문디 찍어야지 누구를 찍노?'하고 지역감정을 선동한 발언이나 김영삼대통령의 선거전에서 발생했던 '초원복국집 사건' 등입니다. 이런 것들을 패러디해서 '나미가즘'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에서 파생된 신조어입니다. 그 외에는 호남차별 정책이 수립되고 실행에 옮겨졌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가해의 실체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지금 호남차별의 범인으로서 '영남패권론'이 대두되고 있는데 지난 시절에 전라도 혐오증이라고 말해지는 고약한 집단 이지메현상은 영남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영남에서 제일 먼저 시작된 것도 아니었고, 영남이 제일 심한 지역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거의 전국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이것도 지금 호남에서는 영남에서 영남이 먼저 일으켜서, 아주 계획적이고 의도적으로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결과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 이런 계획을 영남사람 누가 수립을 하고 누가 실행을 했으며, 그런 단체나 조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망국적이고 범죄적인 계획에 누가 필요한 아이디어와 자금을 지원했는지 그것부터 밝혀야 합니다. 그러나 영남인에 의한 호남차별이나 호남왕따의 실체를 밝히려는 시도는 아무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호남차별의 기원과 발생원인, 그 확산의 과정을 진지하고 솔직하게 사실을 근거로 해서 연구하려고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강준만씨가 몇권의 저서에서 이에 대해 말하고는 있으나 철저하게 피해자 입장에서 쓰고 있는 '가해자 만들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민족 문제의 네 번째 이슈인 지역문제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지난 시절의 호남차별현상과 현재의 영남가해자만들기입니다. 호남차별이라는 분열적 현상이 이제 영남단죄라는 역현상적인 분열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호남차별문제인 이 지역문제는 북한의 존재, 그리고 영남과 호남의 지정학적 차이, 그리고 기질적 상이함과 맞물려 대단히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에 김대중이라는 결정적인 요인이 하나 더 작용함으로 더욱 심하게 꼬여버렸습니다. 저는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의 가장 커다란 불운이 김대중전대통령의 모호한 이념적 자세와 대북한 온정주의라고 봅니다. 이것이 김대중대통령에 대한 비토의 원인이었는데도 그것이 호남인에 대한 비토의 상징으로 오버랩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이 양자를 끝내 분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은 지역 하나를 대북한 온정주의의 원천으로 내어주어야 했고, 끝내는 나라의 절반이 친북으로 돌아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에 호남차별이라는 한과 설움의 바탕이 없었더라면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이 저토록 비정상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끝내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해도 그것이 호남인 전체의 한이 될 리가 만무하다고 봅니다. 당연히 김대중전대통령의 햇볕정책이 저토록 많은 지지자를 얻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김대중이란 정치인의 이념적 성향과 그의 출신지역이 호남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곳이 수십년 동안 차별의 설움을 받아온 지역이었다는 이 세가지야 말로 한국현대사를 왜곡시키고 한국정치의 정상적인 발전을 가로막아 온 가장 커다란 이유이고 한국인의 불운 중 으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김대중전대통령은 고박정희대통령과 똑같이 민족분열의 5대 이슈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입니다. 당연히 한사람을 더 보태어야 합니다. 바로 김일성입니다.
지금 415 총선은 이 네 번째 이슈인 지역문제에 있어서도 시각과 입장이 다른 두 진영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입니다. 영남유죄론과 영남무죄론의 대결입니다. 노무현대통령이 영남인 김해사람이긴 하지만 여당인 열우당의 인적 구성과 성향으로는 영남가해자론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호남차별이 있게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즉 전라도혐오증이라고 말해지는 이 악폐가 우리나라에 생겨나게 된 시점으로 거슬러올라가서 당시의 시대상을 보고 그 시대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살펴보면 거의 필연적으로 야기될 수밖에 없는 사회상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 나이 많으신 어른들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일제시대 때 타지역에서 전라도사람을 비하하거나 배척하는 분위기가 있었는지. 아마 그런 게 있었다고 기억하는 어르신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해방 후 언제쯤부터 그런 게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 같으냐 물어보면 대부분의 노인분들은 60년대부터라고 기억을 합니다. 그렇다면 60년대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60년대 이전에는 왜 그런 현상이 없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60년대 이전에 전라도혐오증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일제시대나 해방 직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타지방에 가서 사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중국이나, 만주, 하와이 등지로 떠나기는 했지만 한반도 내에서 옮겨다니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한국인의 대부분이 남대문을 한번도 못 보고 죽었습니다. 한국사람의 행동반경은 평생 고향 언저리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타지방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일도, 반감을 살 일도 거의 없었다는 이야깁니다. 그렇다면 60년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 답이 금세 나옵니다. 이동입니다. 수천년 동안 그 자리에 붙박혀 살아왔던 호남인들이 60년대 들어서서 대규모로 타지방으로 이동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도시화, 산업화에 따른 이농 현상이 그것인데요, 이 이농은 호남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제주도 막론하고 똑같이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호남만 문제가 되었을까요? 다른 지방은 이미 60년대 산업화가 진행되기 이전에 한번 섞여버린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625전쟁 때 영남지방에는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피난을 와서 서로 부대끼고 마찰하고 갈등하면서 섞였던 체험을 갖고 있습니다. 당시 영남에는 전라도를 뺀 전국의 7도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아는 기회를 가졌고,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피난민이라는 절박한 위치가 토박이들의 텃세를 허락지 않았습니다. 눌러살면 누구에게나 영남은 고향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영남으로 대규모의 피난을 하지 않았던 유일한 지방이 호남입니다. 625때 호남인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갈래야 갈데 없었던 거죠. 영남으로 피난을 가는 것보다는 그래도 곡창지대인 호남이 전쟁통에 생존하기가 유리했다는 점이 이유의 하나고 두 번째는 호남은 전쟁 기간 중에 북한측의 행정적 지배가 가장 허술했던 지역이라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북한은 전쟁 중에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축선에 전력의 대부분을 투입했고, 아군의 방어도 그 축선에 집중되었습니다. 호남은 양쪽이 다 거들떠보지 않았던 버려진 빈 공간이었습니다. 북괴군 6사단이 무인지경을 가듯이 호남을 가로질러 행군하다가 처음으로 아군하고 만난 곳이 경상도 진주였습니다. 즉 호남에서는 피아간의 전투다운 전투가 벌어지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전쟁에 의한 피해가 가장 적었던 지역이 호남이었습니다. 그래서 좁은 영남땅에서 전국 7도의 사람들이 북적거릴 때에 유독 호남사람만이 자기 고향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한국인이 유사이래 처음으로 대규모로 이동을 하고 삶의 터전을 바꾸는 체험을 하고 있을 때에 혼자 열외에 빠져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그래서 서로의 접촉기회가 없었고, 타지방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8도 사람이 전부 다 움직일 때 같이 움직이는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그런데 호남은 나머지 7도 사람들이 움직이고 섞일 때 혼자 외따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60년대의 산업화 시대가 도래하자 이번에는 다른 지방 사람들은 다 그대로 있는데 호남사람들만 대규모로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도시화 공업화로 인해 이농현상이 불가피하게 되자 전국 최고의 곡창지대이며 전통적인 농업지역인 호남에서 이농이 가장 활발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호남사람들은 전국의 모든 지역에서 낯선 이방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지방에도 이방인에게는 토착인들의 텃세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건 영남뿐만 아니라 서울, 경기, 충청 어디든 다 그래요. 외래인에 대한 배척이나 텃세가 제일 심한 건 아마도 제주도일거라고 저는 봅니다. 육지 사람이 제주도 가서 장사 못합니다. 배겨내지를 못해요.
전라도혐오증의 시작은 이런 외지인에 대한 현지인들의 텃세로서 시작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고 당연히 그 현상은 전국적으로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일자리를 찾아 농촌인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은 당연히 농촌에서 제일 가난하고 먹고 살길이 없게된 빈농층이 됩니다. 때문에 가난한 순서대로 고향땅을 떠나게 됩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먹고 살만 하면 객지 가서 고생 안 합니다. 부자집에서 자식들을 공장에 다니라고 객지 보내겠습니까? 그러니까 당시에 고향을 떠나 서울, 부산, 대구 등지의 공장이 있는 도시로 흘러 들어온 호남사람들은 호남인들 중에서 가장 못살고 못 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625때 영남에 피난 온 사람들은 각지에서 잘사는 사람, 지주, 공무원, 기업인들이었습니다. 전쟁 때 피난은 거꾸로 잘사는 순서대로 먼저 피난을 갔어요. 왜냐하면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은 뺏길 게 없었으니까 인민군이 두려울 이유가 별로 없었습니다. 이런 세상이나 저런 세상이나 그 사람들에게는 별 차이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피난 시절 영남에 모인 각지의 사람들은 각 지방별로 제일 많이 배운 사람, 제일 돈 많은 사람, 제일 잘 나가던 사람들이었어요.
요즘 못살고, 못 배웠다고 말하는 것과, 60년대 못 배우고 못산 것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국민학교도 못나온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그야말로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보따리 하나 들고 3등칸 열차에 몸을 싣고 무작정 상경해서 타향사람들한테 환영받고 대접받는다면 그건 기적이죠. 당연히 배척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6,70년대 서울이나 부산 등지의 대도시에서 깡패들, 식장 주방장들, 버스 안내양들, 목욕탕 때밀이는 대부분 호남사람들이었습니다. 전국의 하층민은 호남사람들로 채워졌어요. 이 사람들이 낯설고 물설은 객지에서 터를 잡고 생존을 하기 위해서는 처절한 몸부림을 쳐야 했습니다. 거짓말, 배신 같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하는 처절한 삶이었다는 얘깁니다. 이게 호남사람들의 잘못이나 죄가 아니고, 그런 외지인들을 멸시하고 구박한 다른 지역 사람들의 잘못도 아닙니다. 시대의 잘못이고 근대화 과정의 어떨 수 없는 아픔이고 음지이고 상처였습니다. 호남사람 잘못이다, 영남인이 가해자다 하는 따위는 전라도 혐오증의 원인과 기원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얘기들입니다. 우리는 지역문제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시각의 전환을 해야 합니다. 객지에서 설움받고 멸시받은 그 울분을 호남사람들이 어디서 풀었습니까? 바로 군대에서 풀었어요. 못 배우고, 가난한데서 오는 설움과 멸시가 군대에서만큼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참이 된 호남병사들이 그 설움과 한을 계급을 무기로 해서 쫄병들한테 마음껏 풀었습니다. 그게 바로 60년대 군대를 갔다온 세대들이 뼈에 사무쳐 떠올리는 '악명높은 호남 고참'이 생기게 된 배경입니다. 호남 고참에게 시달린 타지역 사병들이 고참이 되면 또 호남 쫄병에게 복수를 하는 겁니다. 이 악순환이 되풀이되면서 '악질 호남고참'에게 이를 가는 사람들이 전국에 대량으로 배출이 되었고 호남 출신이어서 타지역 사람들에게 무조건 밟히는 서러운 체험을 한 호남인들이 수도 없이 사회에 복귀하게 된 것입니다. 60년대 군대가 전라도 혐오증과 전라도 차별의 피해의식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장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엄연한 역사적 사실들과 시대적이고 운명적인 원인들을 생각지 않고 '영남이 가해자다', '영남을 단죄해야 한다'는 식의 한풀이를 하려고 합니다. 이게 우리 민족의 분열의 4번째 이슈인 지역문제의 본질입니다. 이 병을 어떻게 치유해야 하겠습니까? 지금 한국의 대선이나 총선이 이토록 격렬하고 치열하고 무자비한 투쟁의 장이 되는 데에는 이 4번째 이슈인 지역감정이라는 원한이 이면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선거는 총성이 울리지 않을 뿐이지 일종의 내전이나 마찬가집니다. 상대 진영은 정치의 파트너도 아니고, 국정의 협력자도 아닙니다. 단지 타도하고 박멸해야 할 적입니다. 타협의 여지도 없고 공존할 의사도 없습니다. 선거가 양진영간의 극한적인 대결로 치닫게 되는 이유가 바로 '수십년간 당했다'는 일방의 원한과 복수심, 그리고 '무슨 소리? 우리는 죄없다'는 일방의 완강한 방어심리가 서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민족의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호남의 논리에 동조하는 일부 학자들은 호남차별 정책이 박정희 시대에 실제로 존재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영남을 우대하고 호남을 차별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영남의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영구집권을 도모한 것이라는 게 그 주장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농촌의 부흥과 주식의 자급자족, 농업의 발전은 박정희대통령의 제일의 관심사였고, 호남은 한국 농업의 본산입니다. 그리고 농촌 소득의 증대는 박정희 시대를 거치는 동안 비약적으로 증대했습니다. 보리고개라는 말, 춘궁기라는 단어가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영구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역감정 문제를 논의할 때에 명심하여 할 것은 이 문제의 본질이 근대화 시기의 경제적인 낙후나 개발에서의 소외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는 그런 경제적 측면이 아니라 바로 전국적인 현상이었던 전라도혐오증, 호남기피증이 호남인들의 마음에 남긴 상처이고 원한입니다. 이것은 경제적 발전의 혜택으로 해결될 수가없는 것입니다. 타지에서 고향 사투리를 쓸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고향을 물어보면 곤혹스러웠던 사람들입니다. 본적지 때문에 취직을 못하고, 심지어는 자식의 혼사도 전라도라는 이유 때문에 깨어지는 것을 봐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굴욕의 상처와 원한이 지역문제의 본질이지 경제적 낙후나 후발은 부차적이고 주변적인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지역감정의 원인을 고찰할 때는 이 본질적 문제에 대한 것을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주변적이고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이슈입니다. 바로 종교간 갈등입니다. 현재까지는 그렇게 부각되지 않고 있는데 저는 이것을 우리 민족의 미래에 가장 커다란 재앙을 몰고 올 치명적인 질병이 잠복기에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JMS라던가, 영생교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국민은 종교적 열광이나 광신의 경향이 분명히 강한 국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세계 최고의 불교국가이기도 했고, 또 세계에서 가장 철저하게 그 계율이 지켜졌던 유교국가이기도 했고, 현재는 세계에서 최고의 성장을 보이고 있는 교회국가이기도 합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있는 나라가 한국이고, 세계에서 인구 대비 교회가 제일 많은 나라도 한국입니다.
기독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공, 단학 등 수련인지 종교인지가 애매한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만큼 갈등의 여지도 커지고 있는 중입니다. 단군상 건립 반대운동이나, 장승 훼손 사건 등은 어떤 징조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유교적 덕목과 현대생활의 가치관들이 서로 부딪혀 파열음을 내는 것이 마치 무서운 종교간 분쟁이 휘몰아치기 전의 태풍전의 고요함으로 느껴집니다.
지역감정을 정치판의 선거에 이용하려고 들었을 때,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고 극한적인 상황을 몰고 오는지를 우리는 보았는데요, 정치권이 종교를 같은 목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유혹을 자제하지 못하면 지역감정 이상의 격렬하고 망국적인 상황에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고 저는 봅니다. 이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더라도 막아야 하고, 이런 종교간 갈등이 정치세력간의 정쟁에 의해 불질러지고 확대되지 않도록 정치인들과 종교인 양쪽의 도덕적인 각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다섯 가지 분열의 이슈를 우리가 어떻게 봉합하고 어떻게 치유해서 진실로 우리 겨레가 하나되고 온 민족이 통일되는 화합의 새날을 맞을 것인가가 우리 앞에 놓여진 과제라고 저는 봅니다. 이 다섯 가지 분열의 싹을 자르는 일에 비하면 부정부패의 척결이나, 보수냐 진보냐 하는 논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민족의 사활과 미래의 운명은 이 다섯 가지 분열의 이슈가 어찌 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에서 이 다섯 가지 분열의 이슈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이 다섯 가지가 공히 남북의 분단상태와 직간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갈등의 원인들이 봉합되지 않고 치료되지 않고 자꾸 확대되고, 자꾸 더 틈이 벌어지고, 갈수록 골이 깊어지고, 더욱 좋지 않은 쪽으로 발전해 가는 이유는 김정일의 선동과 끈질기고 집요한 대남선전이 이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방된 지 60년이 지났고, 당시 사람들 중에 살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지금 친일문제가 분열의 이슈로 작용하는 이유도 그렇고, 우리가 순수하고 건강한 측면에서의 일제청산작업까지도 자연스럽게 시행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것을 악용하는 집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국 근대화의 주역들의 공과 과오가 실제 이상으로 한쪽은 폄하되고 반대편은 과장된 이유도 김정일 집단의 대남공작의 성과와 무관치가 않습니다. 지역감정 역시 마찬가지로 남북분단이 가져오는 이념갈등이 지역문제와 결합되었기 때문에 저토록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이 생전에 수차에 걸쳐서 당에 지시했다는 대남공작의 비밀교시에 따르면, 김일성은 종교계야말로 남한 내에서 가장 쉽게 이용할 수 있고 그들의 공작이 먹힐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종교계에도 김정일 집단의 마수가 곳곳에 뻗쳐있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언제 어느 때 이것이 마각을 드러내느냐 하는 시기상의 문제만 남아 있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민족분열의 5대 이슈는 그 실제적인 근원지가 남한 내부가 아니라 오히려 북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김정일 집단이 남쪽에 대한 분열 공작을 중단하고 동포형제로서의 자세로 되돌아서지 않는 한 남한 내부적인 노력만으로 치유를 기대하기는 난망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 5대 분열 이슈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해결은 결국 남북의 통일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평화적인 공존이 곧 상호 이타적인 민족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이상 분단상태나 북한 정권의 인정은 민족의 분열에 앞으로도 지속적인 촉매제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제반 사정을 고찰해 볼 때에 415총선을 위시해서 앞으로의 선거를 통해 한국인들이 선택해야 할 방향이 어느 쪽인가는 자명하다고 봅니다. 즉 모든 정치적 선택은 남북이 하나되어 통일이 되고, 북한의 동포들이 구출되고, 북한정권이 소멸이 되도록 우리의 힘과 역량을 결집할 수 있고 국론과 민심을 굳세게 모아나갈 수 있는 세력이 집권할 수 있도록 국민들이 현명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남북한의 통일이 그 끝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는 한민족의 완전한 통일을 위해 힘차게 전진해 가야 합니다. 민족의 통일이라는 것은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영토의 대부분이 우리의 정치, 경제적 영역에 포함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동이족이 살고있는 전 영역이 통합될 수 있을 때 우리 민족의 통일은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 민족은 한번도 통일이 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 통일이 되긴 했어도 그것은 극히 부분적인 미완의 통일이었습니다. 결코 신라는 삼국을 완전하게 통일하지 못했습니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이룬 성과는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이었지 결코 삼국의 통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구려와 백제에 속했던 대부분의 영토와 인민이 신라의 영역에 포함되지 못했고, 그들이 각각 고구려와 백제의 뒤를 잇는 새로운 왕조를 계승해서 이어갔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의 뒤를 이은 것은 발해였고, 백제의 뒤를 이은 나라가 왜입니다. 당시 백제는 그 수도인 사비가 한반도에 있었을 뿐 실제 영토는 중국의 요동과 산동, 그리고 일본열도에 걸쳐 넓게 산포되어 있던 제국이었습니다. 신라가 백제를 멸하고 병합한 백제 영토와 복속시킨 백제인은 제국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머지 백제가 한반도 내의 중심지를 수복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대를 보내온 것이 바로 왜의 백제 지원군이었고, 이 왜군과 나당연합군이 치열하게 싸운 전투가 백강의 전투였습니다. 1천 척의 군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온 것은 왜군이라기 보다는 백제군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백제군이 패배한 후에 백제의 연방국으로 백제의 일부였던 왜는 한반도에 등을 돌리고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됩니다. 그들의 후예가 지금의 일본입니다. 신라가 고구려 멸망 후에 차지한 고구려 영토와 유민들은 고구려의 극히 일부분뿐이었습니다. 말이 삼국통일이지 고구려인의 대부분은 원래 고구려 땅이었던 만주에서 발해라는 나라를 세워 자기들끼리 자기들의 길을 갔습니다. 고구려인들이 고구려 땅에 세운 발해라는 나라가 있는 이상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것은 대단히 억지에 가까운 이야깁니다. 우리 민족은 현재 한반도와 만주와 일본열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모두 동이족이고 우리와 같은 핏줄인 한민족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삼국통일, 민족일통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고,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눈앞의 과업입니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다음 행보가 너무나 뻔하게 예견이 되니까, 남북통일 이후의 한국이 겁나서 중국이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 바로 동북공정입니다. 중국인들은 이런 공정이 이것으로 세 번째입니다. 첫 번째가 황제공정, 두 번째가 촉한공정, 세 번째가 바로 동북공정인 것입니다. 황제공정은 동이족의 수장인 치우를 황제가 싸워서 이긴 후에 중국을 세웠다는 고대사의 왜곡과 날조입니다. 이 공정의 목적은 중국의 본래 주인이 동이계가 아니라 한족이라는 것을 못박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중국 땅에 세워진 첫왕조인 은나라의 주인은 은허 유적의 발굴 결과 인종학적으로 한족이나 묘족이 아니라 중국 동북방에 살았던 동이족으로 밝혀졌습니다. 황제의 시대에 황하유역에 살았던 종족은 우리민족의 조상들이었던 셈입니다.
두 번째가 촉한공정입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의 촉을 조조의 위나라를 제치고 정통왕조로 삼은 역사의 왜곡이지요. 이 촉한공정 역시 당송명으로 이어지는 한족 왕조들이 한족의 부흥을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꾸며낸 역사입니다. 이 촉한공정도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나관중 삼국지가 나온 것입니다.
아마도 내버려두면 동북공정도 성공해서 고구려가 중국의 일부로 둔갑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대로 두고본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하루 빨리 분열의 5대 이슈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민족의 힘과 역량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통일을 완성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세 가지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가 근대화 세력의 과오에 대한 용서입니다. 그들의 공은 그 과를 상쇄할 만 합니다. 용서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오늘날의 우리가 그들의 공에 의해 이만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영남을 호남이 용서해야 합니다. 영남에 죄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역문제의 꼬인 매듭이 풀립니다. 호남이 영남단죄를 부르짖는 한 지역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못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한국은 일본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본을 동족으로 형제로 끌어안아야 합니다. 한국과 일본이 일조동근으로 하나가 되는 날 비로소 동북아가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으며 한민족 전체의 생존이 반석에 앉게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각각 갈라진 채로는 한 때의 융성은 가하다 해도 장기적인 안녕과 번영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힘이 하나가 된 후에라야 만주의 우리 동포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중국과 전쟁을 해서 고구려 땅을 수복하는 것만이 고토 회복이 아닙니다. 한일협력은 만주를 포함한 거대한 경제권을 형성하는 초석이 됩니다. 한국과 일본의 기술과 자본, 그리고 만주의 자원과 풍부한 노동력이 결합하면 EU와 미주, 중화권에 맞먹는 경제블럭이 나옵니다. 정치적으로는 중국의 영토라 해도 경제적, 혈통적, 문화적으로 만주는 한일의 일부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민족 통일의 완성입니다.
415 총선은 우리 민족이 분열로 가느냐. 통일의 완성을 향해서 가느냐의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유권자들의 현명한 선택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지루한 강의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름타운 > 구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화의 비밀(펌) (0) | 2006.02.02 |
---|---|
걱정되는 황우석박사, 그리고 대한민국(펌) (0) | 2006.02.02 |
독서가 성공에 미치는 영향(창원시립도서관 강연 원고) (0) | 2006.02.02 |
개천록 (0) | 2006.01.21 |
우주론과 세계관 (0) | 2006.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