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론과 세계관


생과 사의 문제는 어쩌면 지극히 종교적인 주제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영혼의 세계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다. 실제로 이 세계가 어떤 법칙으로 운행되며, 어떤 원리로 이루어졌느냐에 대한 설명 없이는 접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창조주의 존재, 천국과 지옥, 귀신과 영혼의 존재, 사후 세계 등등, 이런 문제를 풀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찾고자 해왔지만 아직까지 뚜렷하게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과학이 더욱 발달한다 해도 천국과 지옥을 발견해 낼 가능성은 없어 보이고, 인격신의 존재는 갈수록 부정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 대신 종교는 아니지만 초월적인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UFO라든지, ESP(초감각적 지각 현상)나 초현상, 초능력, 심령 과학 같은 것들이,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는데 게으른 기존의 종교들을 대신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종교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과학적인 증거를 요구하고 있으므로 이미 발견되고 입증된 과학적인 결론들과 배치되는 교리를 고집하는 종교들은 그 전도(前途)에 상당한 불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제는 과학의 도전으로부터 안전한 종교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떠한가? 인연법과 윤회는 불교의 대표적인 교리 체계인데, 불교는 이런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로 과학적인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가? 나는 불교의 선(禪)의 종지(宗指)인「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불성(見性弗性)」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러한 불립문자의 선을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닫고 체험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세계 속에 머물 뿐, 그 깨달음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길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연꽃 한 송이를 내밀어서 그 뜻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경을 수백 번 읽어도 이해하기 힘들다. 나 역시 불경을 수없이 읽었지만 그 뜻을 명확 하게 깨닫지 못하는 게 너무나 많았다. 물론 뜻이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지만 과연 어떤 이유로 그리 되는지를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인연은 왜 생기는가? 전생과 윤회가 사실이라면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나는 도대체 어떤 관계에 있는가? 전생의 '그'가 죽고 지금의 '내'가 태어나기까지 나(또는 그)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했던 걸까? 그 동안에 나는 극락에 있었을까? 기억을 못할 뿐이지 끔찍한 지옥에서 벌을 받다가 온 것은 아닐까? 부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 걸까? 내가 불전에 엎드려 간절히 빌 때 부처님은 나의 원망(怨望)을 듣고 계실까? 만약 듣고 계시다면 나는 언제 그 대답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대답은 어떻게 나타날까? 여러 가지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생겨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애초에 논리나 말로는 설명될 수 없는 걸까?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인간이 우주의 경계까지 넘나드는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선문답만으로 만족해야 하나? 정말 이심전심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걸까?

부처님께 삼천배를 해도, 암자에서 몇 달 동안 화두면벽(話頭面壁)을 해도, 그리고 고통뿐이었던 단식(斷食)으로도 나는 그 의문부호들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 의문의 빗장을 조금씩 풀 수 있었던 것은 우주물리학과 양자론을 배우면서부터였다. 그공부는 내 마음의 의문들을 씻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남에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도 가져다주었다.

나는 마치 음계도 모르고 작곡의 이론도 배우지 못한 채 피아노 건반만 두들겨 온 셈이었다. 피아노 앞에 십 년을 앉아 침식을 잊고 건반을 두들긴다면 그것도 한 경지에 가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음악의 이론을 배우고 음계의 법칙을 배운다면 같은 시간에 훨씬 빨리 목적지에 갈 수 있고, 더 높은 차원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불교 해설서는 선사들의 어록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물리학과 양자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도 그래서였다. 염불을 하고 화두를 붙잡고 면벽수행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승려들도 물리학을 공부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명의 법칙을 설파한 부처님의 말씀은 생물학의 도움을 받아 더욱 풍부하게 해명될 것이고, 유식설(唯識設)을 아는 데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포함해 심리학 전반에 대한 이해가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다른 많은 비종교적 초월주의의 주장들이 겉으로는 입증주의(立證主義)를 표방하고 나름의 방법으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를 보여주려는 것은 사실이지만 엄격한 실험 환경을 견뎌낼 정도의 객관적 방법론을 가지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럼 불교는 과연 어떠한가? 전생과 윤회는 어떠한가?
좀더 넓어진 과학의 지평은 우리가 품어온 많은 의문들에 대해 어떤 면에서는 종교보다도 더욱 확실한 대답을 주고 있다. 우주물리학과 양자론을 통해서 과학자들은 이 세계를 설명하는 여러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들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불립문자의 세계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물론,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등 진전된 과학의 도움으로도 생과 사의 문제를 온전히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리적인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또 하나의 세계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상 한쪽 세계의 결론만으로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이 아직 '모든' 대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영혼과 사후세계에 대한 종교의 대답이 이미 밝혀진 과학적 사실들과 양립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둘 중 어느 하나는 틀렸다고 보아야 하는 것인가. 과학과 종교 사이의 이 풀기 어려운 대립은 서로에 대한 외면이나 회피를 통해 더 강화되어 왔다. 그러나 외면이나 회피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이 세계에 대한 과학의 해명에 충분히 귀기울이는 것. 그래서 과학을 종교적 의문을 푸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주물리학이 이 우주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 지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우주물리학이 설명하고 있는 두 가지 우주론과 물리학자는 아니지만 이 책의 주제와 비슷한 문제를 다룬 <우주심과 정신물리학>의 저자인 이차크 벤토프가 설명한 우주론을 살펴보기로 한다.



 

세 가지 우주론


1. 정상상태의 우주론


금세기에 들어와서 가장 그럴듯한 우주의 모형으로 제시되었던 것은, 1940년대 허먼 본디(Hermann Bondi)와 토마스 골드(Thomas Gold), 프레드 호일(Fred Hoyle)이 제안한 '정상상태 이론(steady-state theory)'이었다. 이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무한하게 존재하는 우주를 말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정상 상태의 우주는 시작된 시점이란 게 없으며, 무한한 과거로부터 무한한 미래까지 현재의 모습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물질의 창조는 어느 한순간에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늘 새로운 물질이 창조되어 끝없이 넓어져 가는 우주의 빈 공간을 채움으로서 이 우주는 언제나 지금과 같은 밀도와 성질로 존재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연속적 창조 이론'이나 '고정론' 또는 '완전 우주의 원칙'이라고 불리는 이 우주론이 논리적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팽창에 따른 물질의 평균 밀도가 감소하지 않도록 매초마다 1cm 3제곱의 공간에서 10의 -43승 그램(우주 전체로는 1초마다 약 5만 개의 별이 새로 생김)의 비율로 새로운 물질이 창조되어야 한다고 했다. 특히 프레드 호일은 음(陰)에너지란 개념을 도입하여 물질이 창조됨으로써 우주 내에서 감소하는 양(陽)에너지를 보상하는 이론을 창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이론은 1965년 우주 탄생의 초창기에 발생했던 에너지의 잔해인 배경열복사(background heat radiation)가 발견됨으로써, 가치가 사라진 고전적인 우주론의 한 모형으로만 남게 되었다.




2. 대폭발의 우주론


오늘날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는 우주의 모형이 바로 대폭발의 우주론이다. 우주가 하나의 특이점에서 시작된 대폭발의 결과로서 나타났다고 보는 견해이다. 대부분의 우주 관측 결과들이 약 150억 년에서 200억 년 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대폭발(Big Bang : 빅뱅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영국의 물리학자 프레드 호일(Fred Hoyle)이다. 빅뱅설에 찬동하지 않았던 그는 야유하는 뜻으로 '빅뱅'이란 우스꽝스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대폭발의 우주론은,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dwin Hubble)이 별빛의 적색편이(별빛의 적색편이를 발견한 사람은 베스토 슬라이퍼이다)가 그 천체와 지구 사이의 거리에 비례함을 알게되어 우주가 팽창하고 있음을 알아낸 후, 1965년에 미국의 벨 전화 회사(bell telephone Company)의 두 물리학자가 대폭발의 증거인 배경복사를 발견함으로써 오늘날 우주 물리학의 가장 광범위한 지지를 받게 된 이론이다. 다만 '우주 알(Cosmos egg)'이라고 부르는 특이점의 성격과 물리적 법칙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이 우주 알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는 중이다.
대폭발로 비롯된 '팽창하는 우주'는 정상 상태의 우주와는 달리 필연적인 종말이 예고되어 있는 '끝이 있는 우주'이며, 그 종말이 어떤 법칙에 의해 어떤 모습의 최후가 되는 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또한 대폭발 이전과 마찬가지로 대수축 또는 최종적인 열사망(熱死亡) 이후에 이 우주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몇 가지 대립되는 설이 있다. 우주의 최후 다음에 다시 새로운 시작(New Big-bang)이 있으리라는 '끝없이 순환되는 우주'가 가장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아직 과학에서는 태초의 이전과 최후의 이후는 가설의 단계이거나 불가지(不可知)의 세계로 남아있다. 만약 '끝없이 순환하는 우주'가 사실이라면, 매 시기에 존재하는 우주는 '시작과 끝이 있는 우주'이지만 전체적인 입장에서는 또다시 시작과 끝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시작과 끝이 있는 우주가 끝없이 탄생과 죽음을 되풀이하므로
).




3. 연속적 순환 우주론


이것은 물리학적으로 인정된 우주론은 아니다. 이차크 벤토프가 <우주심과 정신물리학>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저서에서 설명한 다소 독창적인 우주론이다.
이차크 벤토프는 빅뱅이 하나의 구심점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폭발이 아니라, 최초의 핵으로부터 제트 분사 방식으로 방향성을 갖는 폭발이었다고 설명한다. 이 분사되는 방향의 반대편에는 분사되어 팽창하는 모든 우주가 흡수되어 저장되는 핵의 반대편이 있어서 연속적으로 우주를 빨아들이며, 한편으로는 흡수한 우주를 지속적으로 분사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우주 전체는 마치 도너츠와 같은 원환체를 이루는데, 바로 여기서 분사되는 출구가 화이트홀이고 우주를 흡수하는 입구가 블랙홀인 것이다. 우주의 핵은 화이트홀과 블랙홀이 등을 맞대고 붙어 있는 모양이며 우주의 창조와 파괴는 동시적이며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개념이다. 즉 어떤 특정시기의 대폭발이 아니라 연속적인 분사 형식의 창조와 아울러 지속적인 흡수와 소멸이 이루어지는 무한 동력 기관과 같은 우주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화이트홀로부터 깔때기 모양으로 퍼져나가므로 당연히 최초의 분사 지점에서 멀어질수록 팽창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진다. 결국 블랙홀로 돌아가는 반환점 부근(깔때기의 가장 넓은 부분)에서는 폭발에 가까운 급격한 팽창을 가져온다. 그런데 우주의 밀도가 균일하며 우주의 각 부분의 팽창률이 고르다는 증거들이 계속 발견됨으로써 이 이론은 다소 상상적인 우주모형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차크 벤토프는 우주물리학자가 아니므로 그의 우주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히 철학적인 직관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우주론은 창조와 소멸의 동시성이라고 하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동양 철학의 우주관을 하나의 모형으로 도식화했다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주론과 세계관의 관계


이 우주가 시작과 끝이 없는 무한 존재인가, 아니면 시작과 끝을 가진 유한 존재인가 하는 것은 종교 문제의 근본적인 토대를 이룬다. 생명과 죽음, 영혼과 사후 세계의 실상은 우주론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즉 우주가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라면 신의 존재도 시작과 끝이 있을 것이고, 윤회라는 것도 시작과 종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우주가 무한히 존재한다면 창조주로서의 신은 의미를 상실한다. 창조라는 것은 어떤 시점에서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윤회도 무한히 반복되는 것일 뿐, 윤회의 끝을 말하는 해탈이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작과 끝이 없는 우주에서는 인연 역시도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히 영속되므로 시작이 없는 인연을 끝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작이 없는 것은 끝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해탈로써 인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것은 인연은 최초의 시작이 있었다는 논리 위에서만 성립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최초의 시작'이란 것은 인연법과 모순을 이룬다. 인연법이란 과학 용어인 인과율과 같은 의미인데, 모든 것은 선행된 어떤 이유의 결과로 일어난다는 법칙이다. '최초의 인연'이란 선행하는 어떤 이유도 다른 인연도 없이 생겼다는 얘기이므로 인연법 자체가 모순인 것으로 보인다. 우주가 무한히 영속하는 것이라면 인연 역시 무한히 영속하는 것이므로 해탈이란 불가능한 개념일 것이며, 만약 시작과 끝이 있는 우주라면 불교의 인연법은 출발부터 모순에 빠진다.
대비되는 또 하나의 종교인 기독교도 마찬가지의 패러독스를 지니고 있다. 우주가 무한영속의 것이면 창조주가 개입할 틈이 없어진다. 반면에 시작이 있는 우주라면 '시작 이전에 존재했던 신'이라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 이는 창조주가 무한영속의 존재라는 뜻인데, 이 무한영속의 존재인 신은 우주를 창조하는 특정 시점을 갖지 못할 것이다. 시공간의 존재이전에 창조를 결심하거나, 창조할 순간을 선택할 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계획을 했던 결심을 했던 간에 창조라는 것은 모두 시간적인 사건이며, 시공간 탄생 이전에 선행해서 존재한 신은 시간적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에 그 원인이 된다고는 하기 힘들다. 이러한 우주론에 따른 종교의 모순이 해결될 수 있는지, 아니면 모순된 가정에서 출발한 교리들이어서 부정되어야 할 것인지를 고찰해보는 게 이 책의 중요한 논지 가운데 하나이다.




우주에의 출입구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을 풀기 위해 선(禪)과 명상을 해왔고, 그러는 와중에 초월적인 현상을 체험하고 지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과 사유의 세계에서 다시 구성하고 언어로써 조립하는 데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통증을 느꼈다. 마치 뛰어넘을 수 없는 하나의 장벽이 영적 체험의 세계와 인식의 세계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장벽의 실체가 무엇인지 몰라서 나는 오랫동안 방황해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 장벽은 바로 내가 어릴 때부터 관념적으로 사용해 왔던 언어였다. 뜻이 명확치 않은 여러 단어들이 분명하게 정의되지 않은 채 계속 사용됨으로써 그 불분명한 단어들의 개념이 나의 사유를 방해해왔던 것이다.

예를 들어 영혼이란 말이 그랬다. 영혼이라는 말을 수없이 듣고 말하면서 살아온 까닭에 나는 영혼이란 단어를 잘 알고 있는 듯 했지만 실은 영혼에 대해 모호한 관념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물질이란 단어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물질이란 말을 자주 쓰지만 과연 물질이 무엇인지 그 정확한 의미에 대해선 제대로 모르고 있다.
생명이란 말도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이 생명인가? 생명의 의미는 생물학적인, 철학적인, 종교적인 차원에서 각각 달라진다. 그럼에도 어떤 때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를 구분하지 않은 채 매일 쓰고 있다. 언어의 뜻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사용해온 대가로 나는 이제 그 분명치 않은 언어의 울타리에 갇혀버린 것이다.

물질과 의식, 생명과 영혼, 삶과 죽음 같은 단어들을 명확하게 정리해놓지 않으면 내가 찾고자 하는 인생의 궁극적인 의문에 대한 답은 언어의 혼돈과 모순에 가로막혀 쉽게 찾아내기 힘들 게 분명해 보였다. 언어가 가져다주는 이러한 사유의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정리가 필요한 몇 가지 말을 깊이있게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인간은 왜 태어나며 왜 죽어야 하는지, 나는 언제부터 존재했으며 언제까지 존재할 것인지, 탄생이 나의 시작이며 죽음이 나의 끝인지, 죽음 이후에 내가 존재한다면 어디서 어떻게 살게 되는 것인지, 어려서부터 내가 믿어온 종교의 가르침들은 과연 그러한 의문들에 대해 올바른 답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다른 종교들의 가르침은 어떠한지를 알아보려고 한다. 따라서 이 책의 주제는 '탄생과 죽음, 그리고 생사의 이전과 이후에 대한 규명'이 될 것이다.

탄생과 죽음의 본질에 대한 접근은 생명과 영혼에 대한 파악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그리고 생명과 영혼의 본질을 확인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그것들의 시발점을 찾는 여행으로 이어진다. 생명의 시발점은 창조주의 마술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물질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생명체에 처음 영혼이 깃들이게 된 연유를 찾는 작업은 생명이 발현된 물질의 내부에 영혼의 씨앗이 될 무엇인가가 있었으리라는 가정을 배제하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로 여겨진다.

나는 생명과 영혼의 배양접시인 '물질'을 파악하는 것에서 생명과 영혼의 근원을 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여행의 시작을 물질에 두었다. 그리고 물질의 본질 속에서 생명과 영혼의 출발점이 아닐까 여겨지는 두 가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물질 그 자체를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였다.

이 여행의 시작부터 나를 혼돈의 언저리에서 맴돌게 했던 단어가 '물질'이었다. 나의 여행은 이 세계의 실상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을 극복하는 데서부터 첫 발짝을 내딛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잘못된 결정은 아니었다. 광대무변한 우주를 향해 나아가는 여행의 출입구는 미세한 물질의 기본 입자들이 어지럽게 들어차 있는 터널 속이었다.




 

물질의 본질


우리는 어려서부터 물질인 육신과 비물질인 영혼으로 나누는 이분법에 익숙해 있다. 그래서 물질이라고 하면 으레 영혼이나 의식과 같은 비물질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비생명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다 보니 영혼이나 의식이 없는 단순한 물질로부터 생명이 어떻게 탄생하며, 물질에서 태어난 생명체에 그 생명의 사후에 물질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영혼이 어떻게 심어질 수 있느냐 하는 심각한 모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의문은 기독교가 주장하는 창조주와 같은 절대적인 권능자의 개입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불교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
로 불가지(不可知) 또는 불요지(不要知)한 일로써 대답을 피해버린다.

과연 생명은 전혀 비생명적인 물질로부터 어떠한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나 필연성도 없이, 기적과 같은 우연으로 어느 날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인가? 그런 기적을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가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생명과의 연결고리를 전혀 갖지 않은 물질로부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생명이 나타날 수 있다고 믿는 것보다는, 아무리 그 내용이 황당하고 신화적이며 비과학적이라 할지라도 '신의 작업'이라고 믿는 편이 훨씬 이성적인 태도가 아닐까?

물질을 비생명적이라고 보는 것과 함께,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또 한 가지 인식의 오류가 있다. 이 세계는 물질이 먼저 나타난 후에(그것이 신의 창조의 결과이던 물리학자들이 주장하는 대폭발이던 간에) 생명과 영혼이 나중에 생겼다는 믿음이다.

생명은 '비생명적인 물질'에서 나왔고, 생명은 물질이 먼저 존재한 다음에 생겼다는, 두 가지 그릇된 믿음. 이 습관적인 믿음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생명과 죽음. 그리고 사후 세계에 대한 접근에서 모순의 벽을 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양자역학으로 대표되는 소립자 물리학의 발달은, 물질의 궁극적인 구조와 법칙을 거의 최종적인 단계까지 밝혀냈다. 이제 물질의 세계는 인간에게 더 이상 추측과 가정의 세계가 아니다. 그러나 물리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물질 세계에 대한 지식은 유감스럽게도 생명과 영혼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데는 별다른 도움을 주고 있지 못하고 있다. 오랜 세월 인간의 뇌리에 각인된 관념들은 수십 년 동안 쌓여온 과학의 업적만으로는 고쳐지기 힘든 모양이다.

물리학에서 관찰한 물질의 세계는 분명히 활동적이며, 살아있는 어떤 것들의 세계이다. 고정되고 움직이지 않으며 생명과는 전혀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죽어 있는 고요한 세계가 아니다. 전자와 미립자들의 운동은 신비로울 정도로 활기에 가득 차 있으며, 고도로 질서 잡힌 법칙에 따라 운동하고 있다. 그것의 궁극적인 실체는 영혼과 같이 존재가 의심스러운 허깨비와 같은 것이다. 이미 밝혀진 물질의 정체는 생명과 영혼의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시사해주는 바가 분명하다.

물질은 그 자체의 성질이 바로 생명의 본질이랄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생명의 본질이 무엇이냐가 우선 정의되어야 하는데,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생명의 특성은 '자기복제의 능력', '영양의 섭취와 신진대사', '자극에 대한 반응'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불교는 생명을 '오온(五溫)'
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기독교는 창조주가 물질과는 별도로 창조한 가장 특별한 어떤 존재라고 설명한다. 이런 설명들 말고도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는 아주 다양하다.

하지만 모든 생명 현상을 하나로 통합해서 설명한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을 바로 '정보(Information)의 능동적인 유지와 교환'이라고 말하고 싶다. 생명이란 '자기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상대방의 정보를 인식하며, 그 정보의 교환에 따라 활동하는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세계는 물질로 구성된 세계라기보다는 '정보에 의해서 구성된 세계'이다. 불교가 설명하는, 인연법에 의해 나타났으나 그 본질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이며 제행무상(諸行無常)인 세계가 바로 '정보에 의해 유지되는 세계'이다. 불교의 인연이란 바로 모든 생명들(확대해서는 모든 물질들) 사이의 정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의 궁극적인 기본 입자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려는 인간의 정열은 마침내 수백 억 분의 1밀리 크기에 불과한 원자핵의 내부 구조를 밝히는 데까지 이르렀다. 우리는 그러한 원자의 세계가 상식이 되어 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현대의 물리학이 물질에 관해 밝힌 결과에 따르면, 물질이란 바로 '정보(Information)와 힘(Energy)'이라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양자론에 따르면 원자 이하의 세계는 암흑과 혼돈으로 가득 차 있어서 예측할 수 없는(unpredictability) 불확정성(uncertainty)의 세계라고 한다. 원자 이하의 미립자들은 존재 자체를 규명하기 애매하여 과연 그것이 거기에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조차 의심스러운 허깨비임이 밝혀졌다. 물리학에서 볼 때 물질의 존재란 '특정 시점에서의 위치와 운동량(질량X속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립자는 과학자들에게도 자신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려주지 않는다. 이것이 유명한 하이젠베르그(Werner Heigenberg)의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물리학적인 정의에 따른다면 미립자들은 존재한다고도, 또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허깨비들이다. 또한 그것들은 앞서 있었던 위치가 다음에 있게 될 위치의 원인이 된다고 볼 수 없는 유령과 같은 움직임을 보임으로써 과학이 인과율을 부정하게끔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 존재도 의심스럽고, 그 운동의 법칙이 이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불변의 법칙으로 여겨져 온 인과율조차 따르지 않는 미립자들이 서로 모여 우리 눈앞에 있는 거대한 우주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미스터리는 무엇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를 모순과 혼돈으로 인도하는, 양자론이 밝히는 중요한 한가지를 주의 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즉, 물질의 기본 입자는 우리가 물질이라고 말할 때 연상하는,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으며, 무게를 가지고 실재하는'물체'로서는 증명과 확인이 곤란하긴 하지만, 그것의 실재(實在)를 확인할 수 있는 '정보와 힘'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미립자가 존재하는 위치와 속도에 대한 정보, 그리고 그 입자가 주위에 미치는 힘으로 우리는 그 입자의 존재를 파악한다는 점이다. 바꿔 말해 어떤 입자가 정보를 갖고 있지 않거나 에너지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바로 그 미립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된다.

물질의 궁극적인 기본 입자인 미립자들이 바로 정보와 힘이라는 사실은 물질에 대해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개념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정보와 힘은 무형이며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단지 힘은 느낄 수 있으며 정보는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물질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하나의 물체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 힘(Energy)이 질량으로 모습을 바꾸기 때문이며, 힘이 질량으로 나타날 수 있는 데는 물질의 정보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물질의 궁극적인 기본 입자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려는 인간의 정열은 마침내 수백 억 분의 1밀리 크기에 불과한 원자핵의 내부 구조를 밝히는 데까지 이르렀다. 우리는 그러한 원자의 세계가 상식이 되어 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현대의 물리학이 물질에 관해 밝힌 결과에 따르면, 물질이란 바로 '정보(Information)와 힘(Energy)'이라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양자론에 따르면 원자 이하의 세계는 암흑과 혼돈으로 가득 차 있어서 예측할 수 없는(unpredictability) 불확정성(uncertainty)의 세계라고 한다. 원자 이하의 미립자들은 존재 자체를 규명하기 애매하여 과연 그것이 거기에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조차 의심스러운 허깨비임이 밝혀졌다. 물리학에서 볼 때 물질의 존재란 '특정 시점에서의 위치와 운동량(질량X속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립자는 과학자들에게도 자신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려주지 않는다. 이것이 유명한 하이젠베르그(Werner Heigenberg)의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물리학적인 정의에 따른다면 미립자들은 존재한다고도, 또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허깨비들이다. 또한 그것들은 앞서 있었던 위치가 다음에 있게 될 위치의 원인이 된다고 볼 수 없는 유령과 같은 움직임을 보임으로써 과학이 인과율을 부정하게끔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 존재도 의심스럽고, 그 운동의 법칙이 이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불변의 법칙으로 여겨져 온 인과율조차 따르지 않는 미립자들이 서로 모여 우리 눈앞에 있는 거대한 우주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미스터리는 무엇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를 모순과 혼돈으로 인도하는, 양자론이 밝히는 중요한 한가지를 주의 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즉, 물질의 기본 입자는 우리가 물질이라고 말할 때 연상하는,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으며, 무게를 가지고 실재하는'물체'로서는 증명과 확인이 곤란하긴 하지만, 그것의 실재(實在)를 확인할 수 있는 '정보와 힘'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미립자가 존재하는 위치와 속도에 대한 정보, 그리고 그 입자가 주위에 미치는 힘으로 우리는 그 입자의 존재를 파악한다는 점이다. 바꿔 말해 어떤 입자가 정보를 갖고 있지 않거나 에너지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바로 그 미립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된다.

물질의 궁극적인 기본 입자인 미립자들이 바로 정보와 힘이라는 사실은 물질에 대해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개념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정보와 힘은 무형이며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단지 힘은 느낄 수 있으며 정보는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물질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하나의 물체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 힘(Energy)이 질량으로 모습을 바꾸기 때문이며, 힘이 질량으로 나타날 수 있는 데는 물질의 정보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정보는 모든 물질 입자들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규정한다. 양자가 양자일 수 있고 전자가 전자일 수 있는 것은 바로 물질이 가지고 있는 정보 때문이다. 미립자의 성질과 운동(진동)은 미립자의 자기 정보에 따른 것이다. 수천 억 분의 1밀리보다 더 작은 미립자들은 존재라고 할만한 것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도 자신에 대한 정보는 갖고 있다. 하나의 미립자가 단독으로 존재할 때의 성질로 볼 때 그것의 자기 정보는 매우 혼란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이 혼란한 상태의 정보는 미립자의 존재를 혼란스럽게 해서 미립자가 인과율에 따르지 않는 허깨비 운동을 하게 만든다. 원자핵의 주위를 도는 전자들의 운동은 교과서에 그려져 있는 그림처럼 궤도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자핵 주위의 광대한 허공을 구름처럼 감싸고 있다. 원자는 단단한 알맹이와 같은 게 아니라 대부분이 전자의 구름 층으로 되어 있다. 원자의 크기는 수백 만 분의 1밀리에 불과하며, 원자핵의 부피는 수백 억 분의 1밀리에 지나지 않는다. 즉, 원자핵은 원자 크기의 만 분의 1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만 분의 9,999는 물체가 아니라 전자들이 돌고 있는 허공인 셈이다.

전자는 이 허공 속에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처럼 일정한 궤도로 회전하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법칙 없이 그저 여기저기에 나타나고 있다. 전자와 같은 미립자들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횡행하는 유령처럼 그 광대한 공간 속의 어디에도 있을 수 있고 어디에도 있지 않은 그런 상태로 원자의 부피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전자가 돌면서 만들고 있는 공간은 텅 비었으면서도 백억 분의 1밀리 크기의 다른 입자 하나도 침입할 수 없는 철벽같이 단단한 공간이다.

텅 비어 있으면서도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 바로 물질의 기본입자들이다. 이러한 입자들이 뭉쳐서 이루어진 모든 물질과, 그것들의 결합체인 물체들과 우주는 모두 '꽉 차 있는 허공'이라는 모순 위에 세워진 것들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이나 무(無)는 바로 이러한 물리학적인 진공(眞空)과 아주 흡사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무한히 작은 미립자들의 세계에서 수백 만 분의 1밀리라는 공간은 광대한 크기의 공간이다.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앞서 말한 정보와 힘이다. 전자와 같은 미립자들이 허깨비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그 정보가 애매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원자핵과 그것의 둘레를 도는 전자는 광자라는 초미립자를 주고받음으로써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는데, 이 메신저(messenger)가 실어 보내는 정보는 서로가 가지고 있는 힘의 성격과 세기일 것이다. 이 정보를 통해 원자핵과 전자는 서로를 인식하게 되고, 그로써 결합상태를 유지한다.

그런데 광자는 물이 분사되듯이 연속적으로 오가는 게 아니라 권총을 쓸 때처럼 단속적으로 던져진다. 그 던지는 시간차는 수백 만 분의 1초에 불과하지만 그 정보의 전달자가 오가는 순간 순간, 원자핵과 전자는 서로의 정보를 분실하는 극히 짧은 순간들을 경험한다. 이 찰나마다에서 전자는 자신의 정보를 확인하지 못하고 허깨비가 되는 것이다. 다음 순간 돌아온 정보의 충격이 전자를 뒤흔들 때 전자는 다시 존재하게 되어 새로운 위치에 나타나게 되고, 그 정보가 사라지면 다음 번 메신저가 도착할 때까지 전자는 비존재의 세계 속으로 잠시 사라진다. 미립자의 세계를 살펴볼 때에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모든 정보는 상대가 있어야 만이 확인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다른 어떤 입자도 없이 홀로 있는 입자는 자기 정보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정체성을 상실하고 곧바로 비존재의 상태로 떨어지고 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서로를 확인하는 정보의 내용은 바로 입자가 갖고 있는 힘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물질은 힘과, 그것의 성격과 세기를 전달해서 서로 교환하고 그 내용을 인식해서 반응하는 정보의 두 가지를 본질로 해서 존재한다. 힘과 정보, 이 두 가지는 사실 우리가 물질이라고 파악하는 어떤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양자론이 밝혀낸 물질의 실상은 이 세계가 반드시 타(他)가 있어야 아(我)가 존재할 수 있는 상대성에 바탕한 세계이며, 무형의 것에 의해 이루어진 허상의 세계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세계는 일체가 무상(無常)한 공(空)이며, 오직 인연에 의해서만이 나투어진 것이라는 불교의 직관은 오늘날의 과학의 증거들과 놀라울 만치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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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화살의 비유 : 이 우주가 얼마만큼이나 크며, 언제 시작되었고, 왜 있게 되었으며, 이 세계에 종말이 있느냐 없느냐 등의 질문을 귀찮게 해대는 마라구마라라는 제자의 질문에 부처님이 답으로 들려주신 유명한 비유이다.
한사람이 독화살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다. 그 옆에서 친한 사람이 상처를 치료해줄 의사를 찾으려 하자 화살에 맞은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치료를 받기 전에 누가 활을 쏘았는지부터 알아야겠소. 나한테 활을 쏜 사람이 큰지 작은지, 상류 계급 사람인지 하류 계급 사람인지, 그리고 화살촉의 재료가 무엇인지 알고 나서 치료를 받겠소." 이런 식의 쓸데없는 질문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독이 전신에 퍼져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쓸데없는 이론에 매달리는 것보다 화살을 빨리 뽑아내고 상처를 치료하여 생명을 구하는 게 급하지 않겠느냐는 것에 비유해서, 우주적인 문제보다는 각 개인의 구원-고해로부터의 탈출-이 더욱 시급하다는 뜻이다.

오온
(五溫) : 부처님이 인간을 설명할 때 쓴 말로, 인간은 색(色), 수(受), 상(像), 행(行), 식(識)의 다섯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오온에 대해서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인 '마음의 귀향-반야' 편에서 상세히 설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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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의 기본 입자는 '힘과 정보'라는 무형의 본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무형의 힘과 정보가 어떤 상대를 만나 서로를 인식하게 된 상태를 물리학적으로 '입자들이 결합되었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결합되는 순간 입자들은 하나의 확인 가능한 물체로 시공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자신을 확인시켜주는 상대를 만나기 전의 입자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으므로 힘과 정보가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상대 입자를 만난 정보를 교환하면 두 입자는 서로 주고받은 정보의 관계에 의해 하나로 결합되어 전자는 전자대로, 양성자는 양성자대로, 중성자는 중성자대로 실체가 있는 존재로 모습이 나타난다.

만약 입자들 간의 관계(정보의 교환)를 단절시키면, 그 순간 물질의 실체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힘만 남게 된다. 에너지란 정보를 상실해버린 물질의 잔해들이다.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맺어지는 입자들 사이의 결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하다.
결합된 입자들을 분리하려면 광속에 가깝게 가속시킨 입자로 충돌을 일으켜야만 가능하다.

인간이 이 일을 인위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입자 가속기라는 매우 값비싼 장치가 있어야 하고 상당히 복잡하고 정교한 준비와 까다로운 절차가 뒤따른다. 실험의 결과로 분리된 입자들은 서로간의 관계를 상실함으로써 에너지라는 무형의 상태로 변화하고,하나의 물체로서 종말을 고한다. 물론 아와 반대되는 실험도 가능하긴 하다. 에너지를 물질로 복원시키는 실험이 그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아직 이 입자들 간의 상실해버린 관계를 복원시키는 기술이 없으므로 실험의 결과는 물질이 만들어진 흔적만 남긴채, 폭발과 함께 다시 에너지로 바뀌고 만다. 1초의 1백 만분의 1이라는 찰나 동안 물질이 있었던 흔적을 남김으로써 에너지가 다시 물질로 변화했음을 말해주지만 그것은 실로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한번 물질이 에너지로 바뀌면 물질의 두 가지 본질 중 하나인 힘은 에너지로서 시공간에 남는 것이 확실하지만 두 입자가 분리되기 전에 공유했던 서로의 정보는 다시는 되찾거나 복원시킬 수 없다. 이 애초의 정보는 어디로 간 것일까? 형체가 없는 것이긴 하나 힘이 시공간이 존재하는 무엇이라면 정보도 어딘가에는 그 흔적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지금까지 입자들의 본질과 그것들의 결합과 분리, 그리고 존재와 비존재에 대하여 길게 논해온 이유는, 입자들의 붕괴와 동시에 그 형체와 함께 사라져버리는 정보의 행방을 추적함으로써 생명의 시발점과 영혼의 소재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여기에 물질들 간의 정보의 성격을 알게 해주는 또 한가지 실험이 있다. 하나의 원자가 붕괴되면 두 개의 광자가 튀어나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게 된다. 이 두 개의 광자는 분
리된 입자이기는 하지만 관계라는 정보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두 광자 간의 거리가 몇 광년으로 벌어져 있어도 둘은 하나의 정보체(情報體)로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한쪽의 진로가 막혀서 정지하게 되면, 정확히 그와 동시에 몇 광년 떨어진 거리의 다른 쪽 광자도 멈추어 선다.

몇 광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하나의 광자에 어떻게 반대편 광자의 상항이 동시에 전달될 수 있느냐는 의문에 대해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62)는 이 두 개의 광자는 관측자에게 관측되는 순간까지는 하나의 종합제(綜合體)라고 설명했다.
이 실험(존 벨의 이론적 근거에 따른 실험이라서 '벨의 실험'이라 불린다)은 현대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양자역학이 근본적으로 옳다면 정보의 초광속 전달이 성립한다는 가정을 실제 실험화한 것이다. 물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옳다면 정보의 초광속 전달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최신의 실험 장치를 가지고 수차례에 걸쳐 수행된 실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은 양자역학이 정확하다면 정보의 초광속 전달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결과를 입증해 보였다. 일부 과학자들은 이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정보의 초광속 전달 가능성을 인정하기도 하며,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최소한 '초광속 영향'까지는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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